순간을 이어 붙여,
조각글 러브앤딥스페이스 심성훈
https://youtu.be/l2k7SjfT7mc?si=p1DpquZIVREkwz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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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외롭다. 나아갈 방향도 모른 채 제자리를 돈다. 시계를 보는 것도, 달력을 뜯어내는 것도 지치는 순간이 온다. 시작도 끝도 없이 순간에 멈추어 흘러가는 시간을 방관한다. 정해지지 않은 것을 기다리자면 세상은 죽어간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멈추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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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책방은 어느새 시내 빌딩이 되었다. 심성훈은 천장까지 닿은 책장 앞에 서서 ‘이달의 신간’이라 적힌 유명 작가의 회고록을 꺼내 들었다. 책 위에 양각으로 인쇄된 ‘죽기 전에 전하고 싶은 말’이라는 표제 위로 조명이 스쳤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현금으로 계산할게요.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버릇처럼 뱉은 두 문장으로 서점을 나왔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해가 기울어서 주홍색의 빛이 사선으로 들어왔다. 종이봉투에서 꺼낸 책을 팔락대며 넘겼다. 어린아이가 시작한 이야기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사소한 경험이 진리를 논한다. 삼백 페이지 남짓한 양으로 압축된 인생을 감사하다는 말로 끝맺는다. 표정 변화 없이 책을 읽던 성훈은 책을 덮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 사람이 죽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온갖 실수가 떠오르며 후회할 수도 있고, 남겨질 가족이나 친구를 생각하며 걱정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맺은 인연에 전할 말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결과는 같았다.
지인의 죽음 앞에서도 성훈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사람들이 그에게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또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나간다. 봄 다음에는 여름이, 그다음에는 가을이, 겨울이 온다. 따위의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이따금 땅 밑으로 가라앉은 사람의 주변을 서성대다 꽃 한 송이를 두고 왔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평생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무뎌진 탓도 있었다. 한 명 한 명 애도하다가는 반드시 부서질 것이기에, 그는 오랫동안 조금씩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영원히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너무 짧고, 영원은 너무 기니까.
해는 완전히 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자연스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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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78일 차, 버릇처럼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안녕. 방향을 잃은 인사가 선내를 부유했다. 광활한 우주의 작은 행성, 그 행성보다 작은 우주선 안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네가 기뻐하기를 바라며. 신노아에게 시집을 빌려왔어. 멋진 이야기가 있더라.… 이야기의 끝에서 새어 나온 문장이 마침표를 달지 못하고 흩어질 것 같아 급하게 갈무리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보고 싶어…’
‘내일 보자.’
녹음 버튼을 다시 눌러 오늘의 기록을 끝냈다. 숨이 없는 공간에서 외침은 분명히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부재를 되새기며 어느 날의 죽음을 곱씹었다. 감정은 타오르다가 재가 되고 또다시 타올랐다. 기억 위로 새하얀 재가, 그 위로 또 기억이 켜켜이 쌓였다. 그럼에도, 이제는 보이지 않더라도 가장 밑에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선실의 문을 열고 신노아가 들어왔다. 여직 깨어있는 심성훈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 아직 안 잤어? 오늘은 당번도 아니잖아. ”“…. 항해 일지를 기록했어. 곧 잘 거야. ”
잠깐의 정적 뒤로 ‘그렇구나.’ 하고 짧은 수긍이 붙었다. 심성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노아는 잠깐 확인차 온 것이니 문제없으면 괜찮다며 돌아갔다.
시선을 돌리자, 발밑으로 우주가 끝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알고 있는 별 하나. 북쪽 더 위로, 가장 밝은 별. 그를 기준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다. 중심을 잃어서는 안됐다.
다시금 안녕. 하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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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씨…성훈 씨, 일어나요.”
몽롱한 머리에 목소리가 울린다. 조명은 언제 켰는지 형광등의 빛이 시야에서 반짝였다.“…. 일어났어.”
“하나도 안 일어났잖아요. 저녁인데 낮잠을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에요?”
그리 말하며 너는 내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꿈일까? 꿈일지도 몰라. 아까 선실에서 잠들었잖아. 흐려진 꿈이 아른거렸다.
“언제 왔어…?” 이마 위로 느껴지는 온기를 손으로 잡았다. 진짜 같다. 따뜻하고. 다정하고.
“오늘 저녁, 같이 먹기로 약속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응…그랬지.”
응. 약속했지. 하고 중얼거렸다. 꼼지락대는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계속 자고… 무슨 좋은 꿈을 꿨길래. ”
“…. 너도 같이 꿀래? 소파는 좁지만…”
그리 말하며 너를 살짝 당겨 끌어안았다. 엉거주춤 안겨있던 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세를 고쳐 옆에 누웠다.
“책 읽다가 잠든 거예요?”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잠긴 목소리에 대답인지 잠꼬대인지 애매해졌지만, 어찌 되든 좋았다. 품에 안긴 네 머리 위에 볼을 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네 체향이다. 좋은 꿈이다. 꿈이 아니면 좋겠다.
선실에서 보던 우주가 한곳으로 모인다. 방향을 잃은 줄만 알았던 신호가 어딘가에 닿아 좌표를 보내고, 너를 기다리며 찰나가 되어버린 영원이 다시 이어진다. 이음새 사이로 네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나는 기쁘게 대답한다.
‘응, 여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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