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처음

앤서니히데

퇴고X

“히데 경!”

“그렇게 부르지 마, 앤시.”

멀리, 집으로 돌아오는 형을 보고 앤서니는 오늘 낮 들은 것이 궁금해 대뜸 평소와 다르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형이 보인 반응은 앤서니가 기대한 대로였다.

한편 내키지 않는 호칭이 동생 입에서 나온 걸 듣자마자 힐데브란트 “히데” (트리메인)은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지만, 최대한 장난스럽게 넘기려고 애썼다. 어린 동생에겐 좋은 면만 보이고 싶은 형의 억지다.

잽싸게 달려와 동생을 번쩍 안아 들고는 누가 또 그런 말을 알려줬냐고 간지럽히자, 앤서니는 형의 속도 모르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입을 찡그리네.”

“그렇게 티나?”

“응, 형은 거짓말을 너무 못 해.”

“이런, 좀 더 노력해야겠다.”

하지만 여기서 더 노력할 생각은 없다. 아직도 쓸데없는 환상에 사로잡힌 몇 어른들이 자신을 귀족이라고 믿어서 부르는 호칭을 좋아할 일은 평생 안 생길 거고, 거짓말을 잘하게 되는 일도 없을 거다. 거짓말을 못 하기에 진실을 걸러낼 수 있는 거고, 히데는 이것을 장점으로 내버려 두고 싶다.

“앤서니. 너는 어른들 닮으면 안 된다.”

“형도?”

“난 어른이 아니지만…, 그래. 나도 닮지 마.”

자신을 되돌아볼 때 좋은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히데는 그렇게 말했다. 닮고 싶으면…, 저기 옌 시드 그 늙은이나 닮아 차라리. 퍽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물론 그래서야 섬에서 살아남기 힘들겠지만, 자신이 뒤를 봐주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그리고 지금 히데는 앤서니에게 더 제대로 말해둬야 했다고 후회한다. 처음부터 못 박았어야 한다. 이 섬에서 탈출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고, 우리는 영영 섬 밖 사회에 끼어들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해뒀어야 한다. 오래된 유산에 관심 가지지 말고 앞으로 살아갈 생각이나 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옆에 붙잡아 두고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그랬으면…

“오랜만이네, 앤시.”

“…저 사람은 왜 왔어요?”

아니, 그랬어도 저 싸가지는 그대로였을 거 같긴 하다.

오랜만에 형 얼굴 보고는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트리메인 고모님이 형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소리 질렀기에 앤서니는 입을 다물지만, 눈은 여전히 히데를 노려보기 바쁘다. 하지만 워낙에 겁이 많은 놈이라 조금만 마주 노려보니 눈을 내리깐다.

“해리엇과 춤췄다며.”

“그딴 게 신경 쓰여서 왔어? 내가 형 여자랑 춤춰서 샘이라도 나?”

앤서니가 다시 고개를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에티가 네 배에 구멍을 뚫진 않았나 걱정되어 와봤지.”

히데는 피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이 배배 꼬인 동생은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가벼운 안부 묻듯 던진 말에 저따위 반응이라니. 그 순하던 놈이 어쩌다 이렇게 질투에 미친 애새끼가 된 건지, 아니 애초에 뭐가 아쉬워 질투하는지도 모르겠다.

막연히 짐작해 보자면, 역시나 그놈의 호칭이 문제다. 앤서니는 어느 순간부터 ‘앤서니 경’이라고 불리고 싶어 했다. 히데는 당연히 그딴 호칭을 왜 바라냐고 성질냈으니, 사촌의 갈등은 그때부터다. 힐데브란트 “히데”는 오라돈의 가계도에도 이름이 올라갔고, 언제든 그곳에서 비극이 터지면 돌아가 작위를 받아야 하니, 그것은 여전히 귀족이라 불릴 수 있고 존재라… 그는 여전히, 앞으로도 오래된 고물들에게서 ‘히데 경’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앤서니 트리메인은, 모든 트리메인은 이 섬에 가둬져 더는 오라돈과 아무런 연이 없는 명부에서 지워진 귀족이다. 섬의 문이 열려도 ‘앤서니 경’이라 불릴 일이 없는데도, 앤서니는 자신이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다고 믿고 그렇게 불리기를 바랐다. 대체 어디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지, 어느 부분을 놓친 건지 모르겠다. 섬을 떠나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챙겼어도 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장벽이 영원할 걸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최악의 최악을 꿈꾸는 어른들 틈에서 누가 멀쩡하게 자라겠는가. 히데는 그래서 처음부터 이 섬이 싫었다. 결과적으로 비틀어진 앤서니에게 뭐라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착잡한 마음은 그대로라 다시금 담배가 당겨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다 짜증 난다.

“앤시.”

“…왜.”

“난 너랑 싸울 생각 없어.”

앤서니가 겁먹은 게 보여서 한 소리인데, 별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더 긴장한 게 눈에 보여서 본래 말하려 했던 것까지 꺼내기 애매해졌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게 싫다.

히데는 가만히 제 앞에서 눈치 보는 앤서니를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꺼내 던져줬다.

“가져. 너 주려고 챙겨 온 거야.”

금 간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잊으리 섬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한 티가 나는 물건이다. 앤서니도 그걸 알아봤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원래는 시계를 주며 시킬 일이 있었는데, 골 아프게도 일회성 화해로 소비하게 생겼다. 조심스레 시계를 걸쳐보던 앤서니가 갑자기 의심의 눈초리로 히데를 보았다.

“설마 장물은…”

“깨끗한 거니까 그냥 써.”

섬에 장물 아닌 물건이 어디 있냐지만, 저 시계는 히데가 직접 오라돈에서 가져온 거니 확실하다. 오라돈에 가거나 제이 같은 도둑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영원히 앤서니의 것으로 남을 수 있다.

더 머무르다가는 또 싸움이 날 거 같아 히데는 고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겉옷을 챙겨 집에서 나왔다. 정말로 이 섬도, 집도, 가족도 모든 게 진저리 나지만 할 수 있는 건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게 전부다. 떨리는 왼손으로 비틀어진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내뿜고 나니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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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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