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나디]어떤 꿈
팬디 다하나디가 너무 아름다워서 본편 클리어 후에 썼던 글을 조금만 다듬어 올립니다. 2회차 안 뛰고 그냥 너무 좋았다는 감각만으로 쓴거라 캐붕설정차이있음.
2024.03.27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엷게 너울거리는 빛에 꽃잎을 닮은 다정한 색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그만 깜빡임도 숨도 잊고서 다하트는 나디아를 보았다. 모든 게 아득히 멀어 그 애만 남은 듯한 찰나. "나디아?" 기이한 울림이었다. 기쁨도 당황도 두려움도 불안도 모두 어딘지 '다르게' 느껴지는 목소리. 마주친 눈이 반갑게 휘어지고,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내려다본 바닥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어서 서둘러 주워 먼지를 털고 있으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다하트 군, 잘 잤어?"
웃음기가 묻어나는 인사를 듣고서야 달칵, 세상이 맞물린다. 맞아, 오늘은 나디아의 병문안을 왔었지. 철야 탓인지 나디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졸음이 몰려와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그새 무언가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첫 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흩어져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아핫,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볼에 손등을 대면 머쓱한 만큼 뜨거웠다. "미안해요, 나디아. 세레스 씨도요."
두 사람은 다정히 용서했다. 며칠간 연구실이 바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많이 피곤한지 묻는 목소리가 흐림없이 맑았다. 둘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이 깊고, 봄볕처럼 온화하며, 한껏 흔들리고도 피어나는 강인함을 가진, 서로를 꼭 닮은 친구. 그 깊은 애정을 마주하면 쌓인 피로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따뜻해지고는 했다.
"선물은 정해졌나요? 궁금하네요~." 잠들기 전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을 더듬어 물으면, 그들은 꼭 닮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있지, 비밀이야! 모두 기뻐해주면 좋겠는데." "나디아가 주는 선물이라면 무엇이든 기뻐할 거예요." 이런, 비밀이야기인가요. 사랑스러운 미소에도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쩐지 서늘했던 꿈의 잔향탓일까. 이성 친구라는 것은 으레 그런 법임을 알면서도 요즈음 다하트는 종종 나디아와 공유하는 비밀이 줄어가는 것에 쓸쓸함을 느꼈다. '예전엔 내게 제일 먼저 상담해주었는데.' 나잇값도 못하고 친구를 빼앗긴 소년처럼 거리감을 느끼고 만다. '리라이버'였던 시절에는 없었던 일이다. 자라나는 육체와 자유로워진 감정은 때때로 그가 살아온 세월을 잊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 동요를 태연한 척 숨길 수 있는 미소와, 유치한 감정을 모르는 척 눈감는 비겁함만이 그의 긴 삶을 증명했다.
어떤 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이었다.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온 시간동안 연구소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그 사이 이런저런 변화가 있어, 변화한 나라는 그가 생각했던 청사진과는 퍽 달랐다. 일그러진 아르페셸도 계획 속의 '리암의 나라'도 아닌, '평범한 나라'. 여전히 영원을 칭송하는 자들은 있었으나 죽음의 정화 없이도 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변해갔다. 범죄자든 뭐든 죽여서 편하게 해주기보다는 사회에 공헌하게 만들겠다는 시안의 판결을 받아들여 '평범해진' 육체로 시안의 부하이자 연구소의 톱니바퀴로서 움직이다보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병원에 들릴 때를 제외하곤 거의 외부와 단절되어 연구소에서 지낸 탓인지 지금처럼 '바깥'을 거닐다 보면 종종 이상한 나라에 헤매어 든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곳곳에 피어있는 붉고 흰 리코리스하며, 꽃을 주고받는 연인, 다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제 손수건을 빌려주는 사람들, 금발의 여인에게 절절매며 소리지르는 흰옷의 사내같은 것.
"저 사람에게도 친구가 생길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응? 뭐라고?"
무심코 중얼거린 목소리에 상인이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하하, 혼잣말이었답니다. 이걸로 주시겠어요?" 얼른 본래 사려던 물건을 가리키면 남자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인가? 퍽 오래 고민하던데." "네, 소중한 친구에게 축하할 일이 있어서요." 그럼 멋진 포장지로 포장해줘야겠군, 하고 남자는 흰 레이스 양산을 집어들었다. 직접 들어보았을 때 무게도 무겁지 않고 유려한 곡선하며 색감이 무척 아름다운 양산이었다. 짐 속에서 몇가지 포장재를 꺼내 보여준 것을, 연노랑색 포장지에 녹색 리본을 골라 포장해 들고서 다하트는 걸음을 옮겼다.
기뻐해줄까? 나다이가 걸을 수 있게 되고, 외출할 수 있게 되고, 완전히 퇴원할 수 있게 된 봄. 곧 이 기나긴 치료가 끝이난다. 당일에는 일이 있어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전에 무언가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곁에서 지켜봐왔으니까. 꽃을 전할까. 하지만 꽃은 시들어버린다. 향수를 전할까. 그의 향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 그렇다면 책을? 나디아는 책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발로 모험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 보였다. 이런저런 선택지를 고민해 고른 것이, 언젠가 나디아와 함께 삽화에서 보았던 듯한 아름다운 양산이었다. 그때의 그는 아직 스스로 서는 것조차 힘들어서, 그래서 지팡이도 휠체어도 아닌, 양산을 들고 햇볕 아래를 자유롭게 거닐며 때로는 날아 모험을 떠나는 소녀를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사랑스레 볼을 붉히며 바라보고는 했다. 비록 하늘을 날게 해줄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자유롭게 거닐 소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른 선물.
아아, 사실은 내가 주고싶었어. 자유롭게 살아갈 나라를, 가족과 함께 미소지을 수 있는 건강한 몸을, 평범한 일상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그가 소중한 사람들과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동시에,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바랐던 마음에 불을 밝혀준 게 나디아라서, 내 손으로 안겨주고싶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그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그가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멋대로 이루어졌다. 평범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세레스와 그 연인이고, 저주를 풀고 나디아를 치료한 것은 시안, 외국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마티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아, 완벽한 패배네요."
나디아가 돌아본다. 류카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으며. 햇살 아래 나디아의 머리칼이 꽃잎처럼 반짝인다. 바람에도, 비에도 지지않고 흔들리면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리고 산들바람처럼 달려오는 소녀를 보며, 생각하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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