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4박 7일 크루즈 여행기(4)
4일차는 모든 크루즈 여행에 하루쯤 꼭 있는 바로 그 날 - 전일 크루징 데이였다. 바꿔 말하면 5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전날이나 전전날 기항지에서 실수로 시간을 놓치고 못 탄 사람을 제외하고) 배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시 말한다. 5천 명이다.
물론 크루즈 선사 측에서도 이 5천 명이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최선을 다한다… 이날은 하루 종일 공해 상을 달리기 때문에 면세점도 성업 중이고(지나가면서 언뜻 본 거라 확실치는 않지만 세일 행사도 하는 듯했다), 대극장에서 공연도(아마도) 하고, 그 외에도 스포츠 코트에서 벌어지는 농구라든가 범퍼 카라든가 수영장이라든가 암벽등반이라든가 파도타기라든가… 있긴 한데…
5천 명이 먹고 놀고를 다 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윈재머 뷔페의 수용인원이 740명 정도라고 한다.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5천 명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어 보인다. 정찬 식당… 거기도 비슷한 숫자라 해도 한 번에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1500명 가량이다. 그 외의 다른 식당들은 규모가 훨씬 적기 때문에 각종 유료 식당과 소규모 카페를 다 더해도 2천 명이 안 될 거라 거의 확신한다. 고로 부지런한 자들만이 제때 밥을 먹을 수 있다. 번잡한 것이 싫은 사람들은 윈재머에서 음식을 싸들고 방에 틀어박히거나, 애초부터 유료 식당을 예약하는 쪽을 추천한다. 아마 빨리 해야 할 것이다. 다들 생각은 비슷할 테니까(…)
우리는 부지런하게 아침 일찍 윈재머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 배에 수영장이 세 개나 있는데 정작 이용은 못 해봤기 때문에, 밥을 일찍 먹고 수영장 오픈 시간에 맞춰 오픈런을 할 계획이었다. 일찍 간 것 같은데 뷔페가 붐빈다… 자리가 난 건 천운이었고 그게 창가였던 건 가히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거의 확신한다. 뷔페 운영자들은 오늘도 우리의 사육에 열심이었고 우리는 그 뜻에 부응하여 아주 열심히 먹었다… 이제부터 수영장 가려는 자들의 자세가 아닌 것 같지만 기분 탓이다.
딱히 어디부터 수영복을 입고 다녀도 좋고 어디부턴 환복을 하라는 지시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헐벗은 몸을 드러내놓고 다닐 만한 두꺼운 얼굴 가죽이 없었기에 우리는 수영복을 방에서 입고 그 위에 간단한 원피스를 걸치고 가기로 했다. 나는 이때를 위해 주로 놀러갔을 때만 입는(등이 많이 파여 있기 때문에) 미니 원피스를 준비해 갔다. 잘 젖지 않고 젖어도 금방 말라서 이럴 때 최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야외 수영장 두 곳은 아이들도 같이 이용하니 붐빌 것 같아서 성인 전용 수영장으로 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사람은 별로 없었다. 메인 수영장에 세 사람 가량, 그리고 한쪽에 딸린 작은 온수풀 - 이라기보단 자쿠지라 부르는 게 어울릴지도 - 에 너덧 명 가량이었다. 우리는 적당한 선베드를 골라 씨 패스와 겉에 입은 원피스를 놓았다. 그리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물 온도는 겨울철 수영장 같았다. 처음 들어간 순간에는 좀 차가운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수영을 하다 보면 뜨거워서 숨이 금방 차오르는 그 온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수영장에서 격렬한 수영을 할 리는 없으니 딱 좋네, 그런 생각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친구가 없었다.
그는 춥다고 벌써 튀어나간 후였다… 아니 이게 춥다고? 나는 좀 있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 친구는 이미 온수풀에 몸을 담근 후였다. 나한테는 계속 거기 있어도 좋다고 말했으나, 아니, 그게, 여기서 나 혼자 뭐 해… 그래서 결국 온수풀로 친구를 따라갔다. 가서 보니 사람이 좀 더 늘어 있었다. 한 여섯 명… 아니 일곱 명… 한 명을 제외하고는 죄다 한국인이었다. 전원 60대 이상의 여성이었다. 그간 크루즈 여행을 하는 동안 거의 눈에 띄지 않던 한국인들이 여기 다 와 있었다. 그들은 정말 신명나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찜질방 온 줄 알았다. 목소리들도 컸고… 그 와중에 친구는 실내 수영장에 기온을 맞추려고 틀어 둔 에어컨이 춥다면서 야외 수영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별로 힘이 없었으므로 짐을 싸들고 그를 따라갔다.
물론 야외 수영장에 왔다고 친구가 메인 수영장에 들어가진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자쿠지를 찾아 둥지를 틀었다. 그 안에는 웬 문신을 한 남성만 혼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 나란히 앉아 있었으나… 나는 지루해지고 말았다. 아니 이건 수영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결국 10여 분쯤 그러고 있다가 내가 먼저 일어났다. 야외 수영장은 드나드는 사람도 많으니 친구가 선실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친구는 좀 있다 따라가겠다고 수긍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간 뒤에 곧바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아닥치더니 자쿠지가 물 반 고기 반이 되었고, 사람들이 가장자리에 둘러앉지 못 해서 중간에 어색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친구도 그쯤 되니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수영장 옆 부스에서 수건을 빌려 준다. 대여할 때 씨 패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수건이 아주 물건이었다. 거의 대고만 있어도 물기가 싹 빠진다 싶을 정도로. 돌려주지 않으면 벌금을 낸다고 하는데, 벌금 형태로라도 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래 봐야 쓸 데는 별로 없겠지만…
어쨌든 오늘의 교훈 : 수영장 갈 거면 빨리 갑시다… 시간적으로나… 날짜적으로나…
놀았으면 이제 먹으러 가야죠. 우리는 한껏 차려입고 다시 원더랜드로 향했다.
1편에서 내가 챙겨 간 물건 중에 원피스 4벌을 언급한 바 있었다. 평소에도 패션에 관심이 없는 주제에 그걸 바리바리 싸들고 간 이유는 크루즈 내에 드레스 코드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저녁 때, 정찬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갈 때 옷을 좀 차려입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동남아 쪽은 그런 문화가 약한 편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챙겨서 손해 볼 건 없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좀 차려입는 게 대접도 더 잘 받을 것 같고. 인터넷 상에는 한복을 싸갔다는 둥 대단한 사람이 많았으나, 나는 한복을 갖고 있지 않았고(크루즈 가겠다고 한복을 대여해야 하나?) 갖고 있다 한들 그걸 무슨 수로… 캐리어에 구겨 넣어서 가져간담… 그래서 그냥 원피스하고 샌들만 챙겨 갔던 것이다.
막상 가서 보니 우리 배는 나흘 내내 드레스 코드가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진짜 드레스 입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는 기겁을 했다… 정말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드레스… 그래서 내가 원피스 좀 입은 정도로는 아무도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ㅋㅋㅋ 그래도 간만에 평소 잘 입지 못 하던 원피스를 다양하게 꺼내 입는 건 좀 좋았다. 크루즈 안 온도는 딱 쾌적한 정도로 상시 맞춰져 있기에 더 그렇다. 나는 나흘째 날을 위해 가장 아끼던 원피스를 아껴 놓았고, 이날 퍽 오랫동안 입고 돌아다님으로써 원을 풀었다.
어쨌든 원더랜드는 대략 이런 느낌이다.
이날은 로얄 캐리비안 크루즈의 유명한 유료 식당들의 시그니처 메뉴를 모은 행사인 ‘Taste of royal’이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원더랜드의 참치 김치 유자 어쩌고에 낚여 추가로 예약했는데, 모든 식당에서 가장 자신하는 메뉴로만 꾹꾹 눌러담은 7코스 점심은 퍽 훌륭했다. 가격도 58달러(…기억이 슬슬 가물거리지만 대충 맞을 거다)였으니까 꽤 괜찮았다. 만약 이런 행사가 열리는 걸 보게 된다면 가보는 걸 추천한다.
그 뒤에는 배도 부르겠다 활을 쏘러 갔다. 그런 행사를 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렇다면 한 번 해 봐야지. 나는 슬슬 be동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단어 한두 개만 주워섬기며 대화를 하고 다녔는데 이때도 이런 식이었다.
나 : I find archery. Where it?
직원 :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길 안내하는 유창한 영어) 당신은 선수인가요?
나 : No. I just… want play.
…어떻게 알았냐 내가 바로 레골라스다 하고 농담이나 해 줄 걸 그랬나 하고 지금은 좀 후회가 된다. 어차피 그 사람도 진심으로 물은 건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그는 우리를 중간까지 데려다 주었다. 배 안에서 진행되는 궁도는 화살촉 대신 커다란 우레탄? 비슷한 걸 댄 화살을 사용한다. 사람을 향해 쏘는 건 당연히 금지되어 있으나, 어쩌다 오사하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하는 설계다. 그 화살을 인당 네 개씩 받은 후 탁구공보다는 크고 테니스공보다는 좀 작은 공을 화살로 맞추어 떨구면 된다. 맞춘다고 딱히 상이 있지는 않은 것 같고 그냥 재미다.
그런데 내가 첫 번째 화살로 첫 번째 공을 단번에 맞추고 말았다! 순간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의외로 몰랐던 재능을 발견한 것인지도? 물론 턱도 없는 소리였고 그 뒤 세 발은 전부 빗나갔다… 그 자리에 열 명 정도 있었는데 공을 맞춘 적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그날 저녁에 일이 하나 있었다. 정찬 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중 친구가 알러지 증상을 보였다. 사실 첫날 윈재머에서도 느낌이 있었는데(아니 당근 케이크가 화끈한 맛일 리가 없지 않냐고) 친구는 평소 알러지가 없었던지라 깨닫는 게 좀 늦었다. 심한 증상은 아니었으나 어떤 재료가 문제인지는 알고 싶었다. 우리는 웨이터를 붙들고 문제의 음식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물었다. 내 영어 실력에 그게 얼마나 힘겨운 과업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어쨌든 나는 표정과 손짓을 동원하여 ‘우리는 그냥 이게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며 친구의 증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라고 최선을 다해 어필했다. 그러나 웨이터는 그 안에는 월넛과 사과만 들어 있다고 했다. 월넛과 사과만 합쳤는데 매시드 포테이토 같은 비주얼의 음식이 나올 리가 없잖아… 게다가 둘 다 흔한 식재료라 그런 데 알러지가 있었으면 친구가 이날 입때 몰랐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특정 크림이나 향신료 같은 것이 원인이었을 것 같은데… 아직도 진실은 모르고 있다. 친구는 집에 가면 본사에 메일을 보내 보겠다고 했는데 그 뒤로는 나도 이야기를 못 들었다.
어쨌든 알러지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기에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갔다. 항해 마지막 날 정찬 식당에서는 일종의 행사를 한다. 선장이나 수석 쉐프를 소개하고, 웨이터들이 춤을 춘다. 떠들썩한 행사가 싫거나 편하게 밥을 먹고 싶은 사람은 이날 정찬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참 이상하게도 나는 웨이터들이 춤추는 걸 지켜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딱히 슬픈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친구를 걱정하게 하기도 싫고 분위기를 망치기도 싫어서 꾹 눌러 참았다. 그 와중에 웨이터들 중 누가 이런 걸 즐기고 누가 어쩔 수 없이 하는지가 눈에 너무 빤히 보여서 좀 우스웠다. 그리고 잠깐 정도는 이런 데서 종업원으로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쩐지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음, 진상 손님 만나면 즐겁다 소리가 쑥 들어가겠지… 그러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님 영어 못 하잖아요. 아 넵 조용히 할게요.
방으로 돌아와서 친구는 싱가포르 입국 심사서를 미리 작성했다. 배 안에서 앱 이용할 때만 쓰는 무료 한정 와이파이로도 이건 쓸 수 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싱가포르에 돌아가 있으리라. 우리는 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쓴 것도 없는데 좀 길어지니 싱가포르 이야기는 다음에…
그냥 끝내긴 좀 아쉬우니 1편에서 언급해 놓고 말 안 했던(…) C to C 케이블에 대해서 마저 적어 본다. 요즘은 공항에도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자리가 많고(누가 차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그렇지) 비행기가 좀 크면 거기도 충전 케이블을 꽂을 자리가 있다. 그리고 크루즈 선실에도 당연히 콘센트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행기에 있던 케이블 꽂을 자리는 USB 포트였다. 크루즈 선실 콘센트도 종류가 다양했는데 220볼트 콘센트는 하나뿐이었고, 나는 변압기를 따로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외에 쓸 수 있는 건 USB 포트밖에 없었다. 그리고 C 포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혹시 C 포트도 좀 더 추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2024년 1월 기준으로는 도통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여행을 가면서 집에서 C to C 케이블로 된 충전기를 가져갔고, 중간에 혹시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회사에서 삼발이 충전기(한쪽은 USB 포트이고, 다른 쪽은 5핀, 8핀, C 세 갈래로 갈라지는 충전선)도 하나 챙겼는데… 결과적으로는 삼발이밖에 쓰지 않았다. 220볼트 콘센트는 친구가 가져온 선을 꽂아 두고 둘이 번갈아가면서 썼다. 모든 배가 이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음. 여행에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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