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4박 7일 크루즈 여행기(完)

오늘은 꼭 끝내는 것을 목표로

배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이미 싱가포르에 도착해 있었다. 발코니 밖으로는 항구가 보였고,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저 너머의 정경은 마치 야경처럼 빛을 발했다. 연중 더운 나라라도 일 년 중 어느 때는 해가 길어지고 어느 때는 짧아질까? 그런 쓸데없는 의문을 품으며 나는 한동안 발코니 앞에 서 있었다.

원한다면 크루즈 직원들이 짐을 내려 주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단, 그러려면 하선 전날 오후까지 짐을 다 챙겨서 미리 문 밖에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마지막까지 쓰기로 결정했기에 이번에도 짐 운반 서비스를 받지 않았다. 여정 동안의 모든 끼니를 책임지는 크루즈답게 하선하는 날도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다. 우리는 일찍이 윈재머에 가서 마지막으로 아침을 먹었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기에 식당은 북적북적했다.

싱가포르와 페낭에서는 제 발로 걸어서 내리고 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인원 규모에 비하면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걸어 나가다 보면 엄청난 양의 캐리어가 주인을 기다리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음, 안 맡기길 잘한 건지도… 우리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을 것인가? 그랩을 부를 것인가? 지하철을 탈 것인가? 원래 나의 계획은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어딘가에 있다는 카지노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관광을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다소 애매했지만… 지도를 보니(첫날 공항에서 관광지도를 하나 챙겨 두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아주 가까워 보였다. 걸어가도 될 것처럼.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 걸어가자!

저 뒤로 보이는 게 우리 배는 아니고… 항구 건물이 저렇게 언뜻 보면 배처럼 보이게 생겨 있다. 마리나베이 항구는 바로 옆에 제법 커다란 공원을 끼고 있는데, 이때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오전 8시 반경) 공원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 싱가포르의 도시 풍경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다. 하다못해 아무 공사판을 찍어도 그림이 될 정도로. 날은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샌들을 신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는.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나는 여행을 앞두고 신발을 2개 준비했다. 관광을 다닐 때 신을 운동화와, 정찬 식당 갈 때 원피스 밑에 받쳐 신을 샌들. 그런데 첫날 운동화를 신은 채 30시간쯤을 보내고 나니(…) 발이 정말 너무 답답하고 냄새도 날 것 같아,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날 공항까지는 샌들을 신고 다니기로 결정하고 짐도 그에 맞춰 다 꾸려 두었다. 덕분에 이때부터 인천공항까지는 샌들을 신고 다녔다. 문제는 귀국일 한국의 기온은 영하 14도쯤이었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비명을 지르게 되지만… 뭐… 이때 시점에서는 아직 멀고 먼 일이다.

20여 분쯤 걸었을까, 주위에 신기하게 생긴 새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좀 부비새 같기도 하고… 갑자기 새를 좋아하는 K양이 생각나서 표지판 위에 앉은 새를 찍어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C양(여정 내내 하도 많이 생각해서 이름 다 닳아버림) : 비둘기같은데 넘귀엽

나 : ……?

C양 : 얜가? (뿔까마귀 사전 설명 같은 것을 보내며)

나 : ????

…아니야!!!!!!! 나는 절규했으나 내가 찍은 사진을 다시 확대해 본 후 뭐가 문젠지 깨달았다. 새가… 등을 돌리고 있다… 얼굴이 하나도 안 찍혔다… 그러나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는 길 내내 그 비슷한 새들이 주위에서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30여 분쯤 걸은 후 우리는 드디어 이 장엄한 표지판을 목도하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나는 호랑이 기운이 솟았고, 친구는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사라진 후였다. 물품보관함만 빼고. 그러나 입구 근처에는 물품보관함이 없었고, 공원 지도를 보아도 표시된 바가 없었다. 중앙에서 조금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방문객 안내센터가 보였다. 저 근처에는 물품보관함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뭐 사실 달리 방법도 없고) 더 진행하기로 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어쨌든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아름답다. 이 말을 벌써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사진을 보시면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고요.

오전이라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깔때기(아님)을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작고 귀여운 도마뱀도 돌아다니고

이렇게 늘쩡하게 도로를 걸어서 건너는 부비새… 아니 인도구관조도 있으며(물론 C양이 알려준 정보이며 나는 봐도 무슨 새인지 모르지만)

물가에 가면 수달(인지 해달인지) 가족까지 있다! 심지어 사진 찍는 순간 한 마리가 날 봤다! 포토제닉이다!(대흥분)

어쨌든… 자연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유료관람관도 아주 많은… 하지만 우리는 일단 유료관람은 패스하고 싱가포르 플라이어(대관람차)를 타러 가기로 했다. 방문객 안내센터까지 와서 보니 근처에 물품보관함이 있기는 했다. 4시간에 8싱가포르달러… 8천원… 하지만 짐이 무거우니 일단 맡기기로 했다. 첫 번째 보관함(큰 것)을 열고 내 캐리어를 넣고 10싱가포르달러를 넣었다.

그런데 거스름돈을 안 뱉어 준다.

이런 미친?! 이라고 당황하다 일단 침착하게 생각했다. 내가 현금을 넣었으니까… 음… 내가 4시간 만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 물건을 꺼내면 저 2싱가포르달러에서 차감하고 남은 돈을 돌려주려는 걸지도 몰라…(결론적으로 보자면 아니었음) 그리고 설령 아니라 해도… 저 물품보관함이 내 2싱가포르달러를 착복한 거라 해도 이제 와서는 무를 수도 없거니와 어차피 짐도 무겁고 우리 잔돈도 없고… 그래 그냥 맡기자… 침착하게 평정을 되찾고 두 번째 물품보관함을 신청하려 했다.

빈 칸이 없다.

이런 미친?!!?!??!?!?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빈 칸이 있긴 한데(작은 것) 빈 칸이 없다(큰 것). 그리고 앞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물구나무서서 봐도 이 물품보관함 크기가 너무 뻔하다. 큰 칸 아니고는 죽어도 캐리어 못 넣는다. 아니, 우리 캐리어가 기내용이 아니라 화물용이었으면 큰 칸에도 못 넣었을 판이다. 덕분에 몇 개 되지도 않는 큰 칸에 이미 다른 관광객들이 캐리어를 다 채워넣은 모양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내 거 말고 친구 걸 보관할 걸! 나는 좀 끌고 다녀도 상관없지만 친구 짐이 더 무거운데! 하지만 이미 보관은 해 버렸고… 어쩔 수 없다… 친구 캐리어를 내가 끌기로 했다. 가다 보면 또 다른 보관함이 나타날지도 모르지.

음? 그런데 끌어 보니 이거… 내 캐리어보다 잘 굴러간다. 바퀴 돌아가는 게 차원이 다르다. 그냥 들어 보면 내 짐보다 무거운데, 바닥에서 구를 때는 내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굴러서 오히려 더 가볍게 느껴진다. 진리의 S기사… 언젠가 캐리어가 고장나서 새로 사게 되면 꼭 S밤 제품을 사겠노라고 퍽 쓸데없는 결심을 했다.

어쨌든 결심은 결심이고 정보는 정보죠. 가든스 바이 더 베이 가시는 분들이 저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약간의 정보를 더 드리자면.

1. 물품보관함은 하나가 아니다

내가 이용한 곳은 맥도날드 매장 근처에 바로 보이는 물품보관함이었다. 거기서 언덕 위로 조금 더 올라가서 매표소 근처에 보면 물품보관함이 하나 더 있다. 다만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 기준에서는… 이 보관함이 각종 ATM들에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관함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지나쳤고, 나중에 짐을 찾으러 갔던 길을 되짚어 왔을 때에야 두 번째 보관함을 볼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내내 친구 캐리어는 끌고 다녔다는 뜻이다…

2. 물품보관함 재사용 가능

열려고 하면 옵션이 두 가지 주어진다. 재사용이거나, 물품회수 후 보관함 반납이거나. C양이 있었으면 바로 알아봐 줬을 텐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챘고(즉 처음에 가방 잘못 넣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냥 빼고 친구 걸 넣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정작 물건 찾을 때는 재사용으로 찾는 바람에 보관함 반납이 안 돼서 다시 했다(…). 아 뭐 물론 나는 관광객이고… 안에 든 게 없으니 처리될 물건도 없지만… 몇 개 되지도 않는 큰 칸을 아무 이유 없이 점령해 버리면 뒷사람들이 골치가 아플 테니…

결론 : 잘 좀 살펴보고 생각도 좀 하고 살자

더불어 그러거나 말거나 여행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든 캐리어를 질질 끌고 또 걸었다. 수달을 보았을 즈음에는 이미 물 건너편으로 플라이어가 보였다. 저 다리만 건너가면 되겠네. 가까운 곳에 다리가 세 개나 연달아 걸려 있었고,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우리는 다리로 올라갈 만한 길을 찾으려고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 유명한 건물(건물 세 채가 머리 위에 배 이고 있는 것처럼 생긴 그거) 앞까지 갔다.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어라. 어라라. 저게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그 카지노 물품보관함 아닌가?

마침 쇼핑몰 들어갈 길이 눈앞에 있었기에 쏙 들어가 보았다. 음…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고 쾌적하고… 문을 안 열었다. 카지노까지도 가 봤으나 정말 어둡고 근사하게 장식되어서… 문을 안 열었다. 지금 시각… 10시 6분. 문 여는 시간… 10시 반… 앉을 곳 : 없어 문 연 가게 : 없어

음. 포기하자! 우리는 깔끔하게 보관함을 머리에서 지웠다. 다시 나와 보니 마침 다리 건너기 딱 좋게 생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리를 건너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사람도 별로 안 보이는 도시를 이리저리 가로질러 플라이어까지 갔다. 매표소까지 가 보니 눈앞에 오렌지주스 자판기가 또 보인다. 내려오면 저걸 마셔야겠다고 친구는 결심에 결심을 거듭했고, 우리는 현금이 되는 기계를 찾겠다고 반대편 매표소까지 갔다. 그런데 거기 가서 보니 생각보다 이용료가 비싸서 결국 카드 그었다. 음, 가격부터 물어볼 걸… 아무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수확이 바로 그거였다. 머릿속이 아주 단순해졌다는 거. 아 물론 한국에 돌아온 후 일주일만에 원복되긴 했지만…

그렇게 대관람차에 올랐다. 한 칸 한 칸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 둘이 타도 괜찮은 건가 묻고 싶어질 만큼. 모르긴 해도 한 20명 타도 문제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커서 그런지 관람차가 전혀 흔들리지도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그거아님) 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친구는 고소공포증이기 때문이다. 고소공포증인 애를 왜 대관람차에 태웠냐 하면 내가 극악무도해서는 아니고(…) 그런 게 있다고 말했을 때 친구가 타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겠냐고 몇 번 물었고 바로 아래까지 도착해서도 또 물었지만… 결국 일정은 강행되었고 그는 좀 괜찮지 않아서 중간쯤에는 양산 두 개를 펼쳐 시야를 차단한 채 앉아 있었다.(…) 음… 그냥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건지도…

어쨌든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사실 비밀이 있다… 사진 한중간을 최대한 확대해 보면 거기에 머라이언 상이 있다. 그 싱가포르의 상징, 입에서 물 뿜어내는 사자머리 해마 말하는 거 맞다. 일정 상 우리는 머라이언 상을 직접 보러 가지는 못 했는데, 플라이어 안에서는 볼 수 있었다. 친구는 엄청난 확대가 가능한 카메라가 내장된 핸드폰을 갖고 있어서 그걸로 확대해서 사진도 찍었다. 정면에서 본 머라이언 상은… 제법… 사납게 생겼다… 물론 내 카메라로는 그 정도 확대가 불가능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그래도 입에서 물 뿜는 건 보이니까! 난 (친구 카메라를 통해) 봤으니까!

플라이어 안에서 사진을 수십 장은 찍었지만 다 올리기엔 스크롤도 모자라고 사진 편집도 번거로우니 생략하고… 우리는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잠깐 쉰 후 다시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되돌아갔다. 이제 공항 갈 시간이다. 비행기 시간이 빡빡하단 뜻이 아니라 체력이 다 바닥났다는 뜻이다. 이미 땡볕에 캐리어를 끌며 17,000보 이상 걸었고, 샌들을 신은 것이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물집 다 잡혔을 것 같았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물품보관함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건너던 중 아쉬워져 사진이나 한 장 찍었다.

(건물 세 채가 배를 이고 있는 - 이 각도에선 좀체 그렇게 안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 문제의 그 건물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보관함까지 돌아가 짐을 찾고 보니 그랩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랩 부를 만한 곳을 찾다 우리는 다시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앞으로 갔다. 호텔 직원이 우리가 부른 그랩 문을 열어주고, 캐리어 싣는 것도 도와줬다. 죄송합니다… 우리 거기서 안 잤는데… 아마 앞으로도 못 잘 텐데…ㅜㅜ 영혼을 담아 고맙다고 인사해 준 뒤 차에 올랐다. 2~30분 정도 달리니 공항에 도착했다. 배가 고파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쥬얼로 이동하여… 관광객이 뽑았다는 무슨 베스트 식당 중 한 곳에 가서 싱가포르의 맛을 느껴보기로 했다.

정말 아름답고 근사한… 그리고 비싼… 식당이었다. 해산물 팟타이(비슷한 그 무엇) 24싱가포르달러… 2만 4천원 도랐냐고… 아니 맛은 있었지만 2만 4천원인데 맛이 없으면 그게 문제인 거 아니냐… 어쨌든 우리는 지쳐 있었고 열심히 퍼먹었다. 50싱가포르달러쯤이 훅 날아갔지만…ㅜㅜ

그 뒤에는 또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공항 내부를 돌아다니며 분수 구경을 하고… 포켓몬 센터도 들여다보고… 아이스크림 카페 한구석에 둥지를 틀고 몇 시간 앉아도 있다가… 저녁을 먹고 비행기를 타러 가기로 했다. 미슐랭 뭐 별을 받았다나 뭐라나 한 라멘집이 있어서 가 보았다. 돈코츠라멘 작은 사이즈에 9.5 싱가포르달러… 달걀 반숙 추가하면 2싱가포르달러…(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그런 느낌) 물가 진짜 미쳤나… 한국 물가가 정상으로 보이는 곳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거기다 물을 사서 마셔야 한다. 오늘 아침까지는 물이 무제한으로 나오는(그 와중에 따뜻한 거 줄지 차가운 거 줄지까지 내 취향을 물어보는) 천국 같은 배에 타고 있었는데…? 눈물 섞인 라멘이 짰다…

화룡점정은 면세점에서. 싱가포르 관광하러 가는 사람들이 바샤 커피니 TWG니 뭐 이런 걸 산댔는데 물가가 눈 튀어나갈 지경이었던지라 나는 얌전히 킨더초콜릿이나 사기로 했다. 싱가포르 명물이라는 무슨 파인애플 들어간 과자(친한 사람들 줄 용도) 두 박스하고 킨더초콜릿 미니가 잔뜩 든 포장 두 개(회사에 돌릴 용도) 샀더니 10만원. 중요하니까 다시 쓴다 10만원.

…싱가포르 관광하러 간다는 사람들은 무슨 갑부인가? 바샤 어쩌구는 이보다 더 비쌀 것 같은데 이걸 막 인원수대로 산다고?? 한국에 있을 가족과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긴 하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패스했다. 눈물을 머금고…

그러고 그 뒤에 비행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주 어이없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ㅎ 나는 또 C양을 부르짖었고… 이제 I양 됐을지도… 아니 .양 된 걸지도… 좀 부끄럽긴 한데 읽는 사람은 재밌을 테니(…) 적어보겠다…

사건의 발단은 공항 내 방송이었다. 우리는 캐리어를 화물로 부친 뒤 비행기 탈 곳 근처의 의자에 대충 주저앉아 있었다. 뭔가 좀 알아듣지 못 할 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대충 들어 보니 사람을 찾는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또박또박 읽어주는 이름이 어째 내 것 같았다. 음? 어라? 아무리 생각해도 캐리어에 뭐 문제될 만한 걸 넣지 않은 것 같지만 내 캐리어가 폭발했다든가, 파손됐다든가 뭐 그럴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었으나 놀랍게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를 하지 않고 그냥 끝내 버렸다. 아니, 아니겠지? 하지만 어쩐지 싸하다. 결국 나는 알아보고 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공항 직원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무슨 화면을 통해 직원을 연결해 준다는 기기 앞에서 멈춰 섰다. 직원이 나왔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좀 전에 나왔던 안내방송에 내 이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안내방송이 영어로 뭐였더라?

나 : I… think I heard my name… in… broadcast.

직원 : ???? broadcast???

나 : Yes.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방송 탄 범죄자라고 말한 것 같은 느낌이군… 어쨌든 직원은 당황할 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고, 나는 약간 패닉에 빠진 채로 머리를 굴렸다. 음, 번역기. 그러고 보니 여긴 공항이라 인터넷이 된다. 영어사전을 불러내서 안내방송을 쳤더니 announcement 가 나왔다. 직원한테 그 단어를 불러주자 그는 확연히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떨어진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라고 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조금 전 했던 얘기를 다시 반복했다. 직원은 여기가 안내방송 센터가 아니라고 답했다. 아니 그거 말고요. 항공사 이름을 말했더니 항공사 카운터로 가라고 했다. 그가 말한 곳으로 갔는데 그 항공사 카운터가 없었다. 카운터 직원한테 물어보려고 하니 줄을 서라고 했다. 줄이… 없었다. 사람은 많은데 다들 의자에 앉아 있다 보니 누가 어디 줄을 어떻게 선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모르겠어서 인포메이션 센터로 다시 돌아갔다. 조금 전과 다른 직원이 나를 응대했다. 한참 설명을 하는데 아까 그 직원이 다시 나타나서 아까 안내를 해 줬는데 왜 다시 왔느냐고 했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아니 나 진짜 피곤하고 다리아프고 걷기 싫고 나도 그냥 주저앉고 싶은데 이름은 불린 것 같고 말은 안 통하고 돌아버리겠다고) 그가 말한 곳에 항공사 카운터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다시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다시 갔다. 갔더니 사람이 좀 줄어 있었다. 그 와중에 핸드폰 자리에 놓고 가는 자가 있어서 그걸 또 찾아 줬다. 그러고 좀 기다렸더니 내 차례라고 오라고 해서 갔다. 아무리 봐도 대한항공 아니면 아시아나항공 카운터 같은데 동방항공을 불렀더니 해준다고 했다. 카운터 직원은 내가 가야 할 게이트 번호를 알려주며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이제 정말 지쳤고, 설령 좀 전에 불린 게 내 이름 맞다고 해도 이쯤 되면 나한테 알려 주지 않은 이 모든 자들의 잘못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 : Is… anything… all right?

직원 : Yes, sure. Have a nice trip.

나 : Yeah… Thank you so much…

뭐 실제로도 아무 일도 없었다. 나와 착각할 만한 이름을 가진 그 누군가가 문제를 잘 해결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하고… 인천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올 길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 먹을 때랑 내리고 탈 때를 제외하면 그 외의 모든 시간을 거의 자고 있었으니까… 물론 인천에 도착했을 땐 정신이 번쩍 들었다(추워서). 롱패딩 맡겨놓고 갔기 망정이지!

음. 끝을 어떻게 내지. 음. 아무튼 그랬습니다. 여러 가지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퍽 즐거웠습니다. 크루즈 여행 한 번 해 보는 건 대략 2008년 즈음부터 제 로망이었습니다만, 겪어보니 역시 한 번쯤 해 봐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드는군요. 로망은 이루고 볼 일 아니겠습니까=ㅂ=

그럼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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