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다
한 남자가 넓은 방 안에 홀로 있었다.
똑똑.
넓은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창문으로는 바깥이 보이고, 몸을 뉠 침대가 있고, 그 외에 여러 가구가 있는 넓은 방에 사람이라곤 남자 한 명뿐이었다.
신앙심 없는 이들도 신이라고 칭송할 미모의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예전에는 넓은 방에도 사람이 많았다.
남자와 함께 신의 뜻에 따라 살며 이단을 뿌리 뽑고자 했던 동료들이었다.
방의 가구들은 대부분 그들과 함께하던 시절, 동료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방에서 남자는 바빴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때의 남자는 행복했었다.
어느 날 그를 빚은 신으로부터 계시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미래의 존재와의 교감이었지만, 시간 역시 신의 영역이므로, 계시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계시에 따라 안온한 요람을 떠났다.
오랜 방랑의 시작이었다.
요람을 떠나기 전, 그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죽음의 장막 너머로 넘어가는 걸 홀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누구도 그의 방에 새로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의 방이 있는 건물에 들어와 복도까지 진입한 사람이 없진 않았다.
그의 방문을 두드린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마주했던 흰머리의 소년도, 같은 믿음을 지닌 새로운 동료들도 그의 집에 들어왔을지언정 그의 방에 들어올 순 없었다.
그의 방문이 꽉꽉 닫힌 탓이었다.
대신 그들은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방의 창에서 보이는 곳에서 놀았다.
남자도 그들에게 그 정도는 허락할 수 있었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생긴 뒤로, 그는 문득 외로워질 때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에는 그의 집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놀고 있었고, 그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아졌다.
나름대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한 나날도 어느 날 끝을 맺었다.
그날은 창문 밖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백금발이 햇빛에 반짝였고, 녹색 눈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마치 예전에 교감했던 미래의 사람과 같은 외모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남자는 창가에 서서 그를 구경했다.
문득, 눈이 마주친 거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싱긋 웃어 보인 외부인이 주먹 한 방으로 창문을 부술 때까지는 그랬다.
박살난 창문을 보고 당황한 남자를 내버려둔 채 외부인은 뻔뻔하게 창틀을 넘었다.
남자의 방에, 발을 들였다.
방에 들어와서 당당하게 웃는 이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뒤, 남자는 창문을 보강했다.
또 외부인의 주먹 한 방에 부서졌지만.
그래도 또 내보내고 창문을 보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창문이 부서졌다.
그걸 몇 번을 반복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외부인은 창문을 부수는 걸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집 근처론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모양새였다.
외부인이 더이상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제 방의 침대에 누웠다.
사람을 쫓아내지도 않고, 부서진 유리 조각을 치워야 하지도 않고, 창문을 고치느라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는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오랜만에 푹 쉰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내다보았다.
매일 창문을 부수던 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심란했다.
남자는 자신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었다.
평소처럼 동거인들이 마당에서 노는 걸 지켜보았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새로운 업무가 생겼다.
그의 신을 부정하는 이들이 벌이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사실 늘 해오던 일에 더 가까운 일이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곤혹스러웠다.
이단들의 목적이 그의 동료들이 영원히 잠든 곳에 침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또 하나의 곤란한 점은 이 일에는 창문을 부수던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그를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만난 그 사람은 남자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선명하게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남자는 그건 그것대로 문제란걸 깨달았다.
차분하고 얌전해진 그 사람은… 남자가 보았던 미래의 존재와 닮아 남자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보았던 계시 속의 존재.
망설이던 남자는 멀찍이 보이는 백금발을 주시하며 늘 지니고 다니던 목걸이를 시내에 흘려보냈다.
그건 어떠한 도박이었다.
남자 자신도 그 도박이 어떻게 되길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자는 도박에서 패배했다.
아니, 어쩌면 승리했나?
그는 제 손으로 몇 번이고 방에서 내쫓은 이가 자신을 이 미래에 있게 한 바로 그 존재란 걸 알게 되었다.
저를 볼 때 차갑게 식는 녹색 눈을 창문으로 마주하며 남자는 이불을 그러모아 제 몸을 감쌌다.
방이 추웠다.
추위에 떨던 남자는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일어났다.
춥다고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남자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남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되찾은 권능은 육체의 피로를 잊게 했지만, 정신적인 피로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들고 나갔던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 엎드렸다.
저를 향한 공포에 새파랗게 질렸던 흰 얼굴을 떠올리며 이불을 그러모았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갈색 머리의 소년이 남자를 위로했다.
남자는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년의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소년이 보였던 용기를 떠올렸다.
그 용기를 지켜주려 제게 맞서던 같은 색의 눈도 떠올렸다.
남자는 이불을 두른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쓴 남자를 힐긋 바라보고는 넓은 방을 찬찬히 살폈다.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살펴보는 통에 방 주인조차 잊고 있었던 것들도 소년의 손에 들렸다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소년이 돌아가고도, 남자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과오를 알았으니, 남자에겐 할 일이 생겼다.
남자는 완전히 지쳐서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는 재앙이 찾아왔고, 그 덕에 남자는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래도 남자의 표정은 전보다 밝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녹색 눈이 남자를 다시 아군으로 받아들인 듯 퍽 미적지근해진 덕분이었다.
미소가 걸린 낯으로 남자는 침대를 뒹굴었다.
할 일이 많았지만, 두 쌍의 녹안이 저를 올려다보며 가끔은 쉬라고 염려했으니, 거기에 따를 생각이었다.
똑똑.
넓은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워있던 남자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방문자를 확인했다.
백금색의 정수리가 그곳에 있었다.
남자는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새초롬한 녹안이 미약한 온기를 품고선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안의 방문자는 새빨간 장미꽃을 남자에게 안기고는 멋대로 남자의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남자의 당황한 눈빛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남자의 침대에 누워버린 방문자는 이내 제 침대처럼 잠들어버렸다.
그런 방문자를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 남자는 손에 쥐어진 장미를 바라보았다.
새빨갛고 탐스러운 장미가 포장지에 곱게 싸여있었다.
그 장미에서 손수 가시를 제거한 남자가 잠든 방문자의 머리맡에 장미를 두었다.
제 몸을 감싼 이불을 풀어 방문자에게 덮어준 남자가 슬쩍 방문자의 곁에 누워 제 몸에도 이불을 덮었다.
체온 하나가 늘었을 뿐인데 방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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