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용

[리온톨비] 자기소개

살다 보면 남 자소서를 봐줄 일도 생긴다.

드림용 by Garn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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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여느 때와 같은 알반 엘베드였다.

다시 말해, 리온은 무언가를 잔뜩 쌓아둔 채 읽고, 톨비쉬는 그런 리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리온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조용한 광경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톨비쉬와 함께 있을 때의 리온은 대개 말없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 늘 밀레시안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보내던 사람이라곤 상상도 못 할 만큼 차분한 모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가져온 책은 대개 소위 장르소설이라고 불리는 책이나 요리 등의 입문용 실용서이므로, 딱히 차분한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책을 읽는 리온의 모습은 꽤 변화무쌍해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면 허리를 세우거나 납득이 안 되는 내용에 눈살을 찌푸리는 둥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가 독서의 정의를 ‘스킬을 익히기 위해 책을 눈으로 훑어본 뒤 버리는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게 아닌지 의심되는 밀레시안의 일원임을 고려하면, 앉아서 끝까지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퍽 신기한 광경이겠지만.

톨비쉬에겐 다행스럽게도 리온이 가만히 책만 읽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리온은 ‘아무리 나가서 데이트도 못 한다지만 이건 너무 건조한가?’라고 민망해하면서 책의 내용 따위의 화제로 톨비쉬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곤 했다.

다만, 리온의 걱정과 달리 톨비쉬는 책을 읽는 리온을 지켜보는 것이 꽤 좋아서 딱히 그 고요한 시간에 불만은 없었다. 책을 보는 리온의 사소한 모습들은 오직 그가 홀로 있다고 믿을 때만 나오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을 최근에는 톨비쉬가 앞에 있어도 보여주기 시작했으므로, 톨비쉬는 오히려 그런 시간이 기뻤다.

심지어 리온이 보여주는 풀어진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지루해졌는지 책에 책갈피를 끼워버리곤 낮잠을 자자며 톨비쉬를 부르거나, 낮잠에서 막 깨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로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 그 외의 수많은 모습이 오직 톨비쉬의 앞에서만 펼쳐졌다.

리온의 몰랐던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 톨비쉬는 바로 그 점이 기꺼웠다.

그런 리온이 책이 아니라 서류처럼 보이는 어떤 종이 더미를 잔뜩 들고 와서 고민하며 읽고 있는 것은 톨비쉬에게 나쁜 징조였다. 제 고향과 에린을 오가는 리온은 고향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일이 해결될 때까진 한없이 그곳에 머무르곤 하고, 당연히 톨비쉬와의 데이트도 한없이 미뤄지기 때문이었다.

“으음…. 어렵다.”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톨비쉬가 조심스레 리온의 곁에 앉자 자연스럽게 톨비쉬의 품에 기댄 리온이 톨비쉬에서 서류를 보여주었다.

“이게 자기소개서라는 건데, 예전에 알던 학생들이 벌써 수험생이 되어선 좀 봐달라네? 근데 난 이런 거 처음이란 말이야. 봐도 다 내용이 비슷비슷해서 딱히 차이도 모르겠고. 어쩌지? 알반에 입단할 때도 이런 거 해?”

“자기소개서. 스스로를 소개하는 서류겠군요. 알반의 입단에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만 완전히 낯선 개념도 아닙니다.”

서류를 가져온 이유가 예상보다 가벼운 것인 덕에 마음이 가벼워진 톨비쉬의 시선이 서류를 훑어내렸다. 단순히 서류를 볼 뿐인데도 그림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리온이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쪽에선 흔한 일이야.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걸맞은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제출하고 그걸 읽어본 평가자가 이 사람을 학교나 회사에서 합격시킬지 말지 정하는 거. 그렇지만 정작 나는 입시에서도 취업에서도 자소서 쓸 일이 없었단 말이지. 아예 요즘은 내가 내 입으로 자기소개할 일도 드물고. …그래서 더 모르겠어. 이거 진짜 어떻게 하는 거지?”

검은 달의 교단과 관련된 일을 해결한 덕에 어딜 가도 “아~! 당신이 바로 그 밀레시안!”라는 이야길 듣는 리온을 여러 번 지켜본 톨비쉬가 가만히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능숙하지 못한 일이라도 어떻게든 남을 도와주고 싶어 고민을 거듭하는 리온을 보니 톨비쉬 역시 그런 리온을 돕고 싶어졌기에 제 과거를 더듬어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고르며 톨비쉬는 리온의 동그란 정수리를 응시했다.

“으잉, 모르겠다. 한 번씩 전부 훑어는 봤으니까,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지 뭐.”

다만 미처 톨비쉬가 조언을 다 고르기 전에 성격 급한 리온이 서류를 치워버려 조언의 말을 꺼내기가 애매해졌을 뿐이었다. 조언할 타이밍을 놓쳤음을 직감한 톨비쉬는 얌전히 신경질적으로 제 품에 파고드는 리온을 마주 안았다.

“자기소개 같은 건 딱 질색이야. 내가 보는 나를 소개하는 거다 보니까 남이 보는 나랑 달라서 종종 귀찮아진단 말이야. ‘너 사실 그런 사람 아니던데?’ 하면서.”

제 품에 고개를 묻고 칭얼거리는 리온의 머리를 톨비쉬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다행히 조언할 기회가 완전히 달아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관찰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사람의 인상은 달라집니다. 관측자의 주관이나 관측 대상과의 관계가 인상에 영향을 주니까요.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요즈음의 당신을 보면 종종 놀라곤 합니다. 연인이 아니었을 때는 제 앞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들을 요즘엔 많이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글쎄? 내가 그랬나? 그치만 내가 혼자 있을 때의 모습도 루나사는 관찰하고 있었던 거잖아? 오히려 루나사가 오랫동안 관측해 온 모습이나 톨비쉬 네가 수호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나의 모습이야말로 객관적인 ‘진짜 나’일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에린에서의 당신에 한하면… 그럴 수도 있겠죠.”

잠시 말없이 리온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을 고른 톨비쉬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린 당신의 고향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아마 알터 말고는 아무도 모르겠죠.”

“딱히 다르지 않을걸?”

톨비쉬의 품에 묻혀 있던 리온의 녹안이 어느새 톨비쉬의 눈을 마주 보고 있어 톨비쉬는 그런 리온에게 웃어주며 그의 뺨을 매만졌다.

“다른지 다르지 않은지는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아는 당신과 내가 보는 당신은 다를 수 있다고.”

톨비쉬의 손길에 얌전히 제 뺨을 맡긴 리온이 납득한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톨비쉬는 그런 리온을 제 품 안에 다시 껴안아 가두었다.

“그러니 많이 알려주세요, 리온. 내가 모르는 당신의 모습들을. 그리고 많이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 알아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어디든 써먹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장난기가 완연해진 톨비쉬의 얼굴을 본 리온은 한숨을 푹 쉬곤 톨비쉬의 품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래서 이 자기소개서는 진짜 어쩌지. 뭘 검토해 줘야 해?”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모른다면 진솔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상대의 취향에 맞길 신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합격을 위해서 스스로를 과하게 속여서 소개하는 건 아닌지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이 종교인이 진짜…. 정작 자기는 몇 겹으로 숨기고 다녔으면서….”

불만 어린 얼굴로 톨비쉬를 올려다보던 리온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른 수도 없네. 하긴, 붙고 싶어서 오히려 자신을 숨기고 합격하기에 알맞은 사람으로만 서술하는 자소서는 시험관들도 많이 봐서 지겨울지도 모르지. 일단은 네 조언을 듣기로 할까.”

그 말에 리온이 서류를 편히 볼 수 있게 리온을 놓아주려던 톨비쉬는 이내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온이 여전히 톨비쉬를 껴안은 채로 그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었지? 나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좋아해. 서로 껴안고 있는 거. 그러니까 이러고 있자.”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톨비쉬에게 답을 들려준 리온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귀는 평소보다 조금 붉어서 톨비쉬는 얌전히 다시 리온의 허리에 제 양팔을 감았다.

다행히 가을 공기가 선선한 덕에 두 사람이 껴안고 있어도 전혀 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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