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크리스마스
제이솔 페어 헌정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공원의 모습은 얼핏 옛 유적지를 연상케 했다.
폭발 테러로 인해 3년의 인고 끝에 완성 되려던 석탑의 잔해들이 눈에 뒤덮여 흙먼지속의 역사를 흉내냈고, 주변을 지나는 시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자신의 걸음걸이를 입장료로 지불한 관광객의 전형이었다. 솔은 경비원의 마음에 입각했다. 폴리스 라인을 콘크리트 벽 삼아 모르는 채 하는걸로.
“그래, 조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다. 솔아. 현장 조사는 더 할 일 없으니, 바로 퇴근해서 집에 가라.”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너야말로 고생했다. 크리스마스 날 이게 무슨일이래냐.”
윤 반장님의 탁한 목소리는 얼마나 고생했는지 핸드폰 너머로도 전해졌다.
솔이 서 있던 장소는 내청동의 문화 광장이었다. 몇 년 전 재개발로 인해 오래된 건물들을 허물고 시민들을 위한 문화의 장으로 탈바꿈 된 장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근방의 주민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은 들르는 유원지. 그렇기에 솔은 중학생 이후 이 곳에 온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 후 내청동을 떠나 돌아오는게 겁이났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 친구는 어떴다냐?”
감상에 잠겨 오래전의 추억을 떠올리려던 솔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치, 친구 말입니까?”
“응? 그래, 그 덩치 큰 친구 말이다. 퇴원잘 했대?”
“예, 예. 큰 부상은 아니라 오늘내일 중으로 퇴원할 것 같습니다.”
버벅이는 목소리를 황급히 평소대로 되돌리자, 윤 반장의 긴 호흡이 넘어왔다. 설마 의심하는 것일까, 그럴리가.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지만, 이번 피해 보상은 시에서 진행한다니까……”
언제나 그러하듯 자식을 사회에 내놓아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처럼 하나하나 조언을 늘어놓으셨다. 두 선배들은 저 조언에 듣는등 마는둥 하지만 솔에게는 각별한 하나의 신호였다. 진정 자신의 팀원이자 가족에게 하는 그만의 주문이었다.
솔은 미소지었고 진정한 팀원이자 그의 자식처럼 고마움을 담아 답했다
“감사합니다, 반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진짜 어린 자식들이 그러하듯 완곡한 대화의 끝으로 전화를 끊듯이. 솔은 커다란 석탑의 파편을 의자 삼아 광장을 바라봤다. 개방감을 주는 이 넓은 공간이 거미줄같은 골목이었단 사실을 아는 건 지금엔 그리 없는 편이다.
이 곳은 달동네에 가까운 동네였고, 도시 개발 사업으로 청년들은 모두 다른 동네로 떠났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 사이는 비좁았고 발소리가 웅웅 울리는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도 반쯤 풍경처럼 신경쓰지 않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삐걱거리는 사슬 그네, 칠 벗겨진 정글짐, 엉덩이가 아픈 시소와 미끄럼틀. 어린아이들의 선택은커녕 어르신들의 쉬어가는 휴식처 취급을 받으며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던 곳.
제법 잘 놀았었는데.
아파트와 도시사업으로 새롭게 지어진 놀이터를 좋아하던 아이들에게 이 놀이터는 잊힌 공간이었다. 오히려 으스스한 분위기에 오지 않으려고 했고, 갈 이유조차 없었다. 모든 친구들이 자신들의 친구와 놀러 사라졌을 때 이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어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친구가 별로 없던 아이에게는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공간이었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은 겉도는 아이들은 딱히 그룹으로 선을 긋지 않았다. 놀면 놀고, 안 놀면 안 놀뿐인 친구니까.
몸을 일으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겨 놀이터의 모습을 조금씩 상상했다. 이곳에는 시소가, 저곳에는 그네가, 이 자리에는……
- 형씨, 정말로 기억 안 나? 내가 솔이 친구 하면서 불렀는데?
솔이 머리를 황급히 저었다. 그날의 하얀 눈도, 한 손에 들고 있던 과자 봉투도, 모종삽으로 열심히 파헤친 흙 땅도 없건만 자꾸 정글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린 소년의 두 배 정도는 돼 보이던 정글짐은 소년의 비밀기지였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유령에게 이곳을 추천한 건 순수한 호의이자 욕심이었다. 자신의 기지에 같은 비밀을 가질 친구를 내심 원했던 소년의 욕심.
- 그때 나한테 과자 사준 것도 기억 안 나? 내가 책 골라준 건? 장난감 가게에서 나한테 줄 선물 산 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때의 이야기를 지우려 했지만, 손은 지우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먼지 쌓인 기억을 털어내는 역할만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었다.
어떻게 그때의 일을 잊은 건지, 그때 만난 사람이 대체 왜 그 사람인지, 아무렇지 않게 형이라고 불렀던 자기 모습까지. 16년 전 의 어릴 적 이야기라지만 얼굴을 안 붉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선명해진 기억에 얼굴을 칠판 지우듯 쓸어내렸지만, 별 소용 없었다. 생각은 더 또렷해졌고 그때의 감정은 물을 먹은 씨앗처럼 다시 발아하려 했다.
- 그럼, 그때…… 약속한 것도 기억 안 나?
솔은 주먹을 꽉 쥐었다. 새끼손가락이 간모기에게 물린 게 분명하다.. 어제까지 눈이 내렸고 한파 주의보가 내렸모기에게 물린 게 확실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모기는커녕 강 표면에 총을 쏴도 총알이 박혀 있을 날씨다.
그날도 그랬었다. 춥고 외로운 날이었다. 하얀 눈 사이에 갇혀 어디로 갈지 모르던 2007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어린아이 홀로 조용히 보냈을 그날은 조용히 잊혔었을 것이다.
솔은 눈을 깊게 감고 목덜미를 감싸쥐려 했다.
“마법사는 무슨, 도둑이지.”
목을 감싸고 있는 목도리의 감촉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날도 이렇게 따듯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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