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은 바쁘지.
장마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뉴스는 틀리지 않았다.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습한 공기가 대지에 낮게 깔리면서 새들은 낮은 하늘을 날았고 개미들은 높은 지대를 향해 올라갔다. 비가 내리기 전에 그것들을 관찰하고자 마음먹고 집을 나섰던 메리는 그러한 환경 변화들을 공책에 기록하고 사진으로 찍었다. 찰칵! 필름 카메라처럼 찍히는 소리를 제법 잘 흉내내는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마지막으로 누르고 케이스에 잘 집어넣은 뒤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간 메리는 아직까지 숲 속 풍경에 빠져들어 있었다.
습기를 머금어 한층 눅눅하고 짙은 색을 띤 이파리들이 축 늘어져있는 모습이나 나뭇가지를 타고 재빠르게 다른 나무로 이동하며 자신을 지켜보는 청설모, 신발이 땅을 울리는 둔탁한 진동에 놀라서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는 뱀 같은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파드득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다가 날아오던 곤충들은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무섭지 않았다. 거대한 자연에 둘러쌓여 있으면 편안함이 느껴지니까.
버스 엔진이 가동할 때마다 느껴지는 바닥의 울림과 귀로 들리는 진동음은 머리속을 채운 잡생각을 지우는 힘이 있다. 거기에 버스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살짝 지직거리는 음악이 더해진다면 안개가 걷힌 내면을 훑어보기에 좋은 상태가 된다. 메리는 숨이 죽어서 묘하게 딱딱해진 버스 의자에 앉은채로 창틀에 팔을 괴고 머리를 기댔다.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아침나절을 후덥지근한 숲 속에서 보내서 알게모르게 지친 몸은 그걸 편하다고 느꼈다.
노후한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가끔씩 덜커덩거려도 메리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기만 할 때 쯤, 무언가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제법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창문을 두드린다는 생각을 하며 꿈쩍도 않던 메리는 라디오 잡음 소리가 심해지자 결국 고개를 들었다. 머리속으로 재생되던 아름다운 숲 배경 백색소음 10시간 반복 재생 광고없음 영상이 종료되고 도시로 향하는 황량한 현실의 들판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들판은 군데군데 점처럼 일그러져 있었는데, 조금씩 떨어지는 비가 버스 창문에 부딪혀 흘러내리기 때문에 생긴 착시였다. 신호등도 속도 제한 표지판도 없는 도로를 점점 더 빠르게 달리는 버스에 빗방울이 부딪힐 때마다 뒤로 주욱 미끄러지며 길고 투명한 굴곡을 그려놓았다. 메리는 그런 자국이 생기는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는걸 깨닫고 창문 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햇빛을 꼼꼼하게 가리는 두꺼운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채로 꾸물거리고 있었다. 도마뱀이 걸어가는 것처럼 빠르게 구불거리는 구름은 배가 고픈 듯 우르릉 소리를 내기도 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부터 오는구나….”
우비를 챙기긴 했지만 집에 가는 길에 소다에게 줄 간식을 사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메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망원경이니 공책이니 우비니 잔뜩 챙겨넣어서 꽉 찬 가방에 냉동 피자 박스를 넣을 순 없고 그렇다고 빈 손으로 가기는 싫다는 마음에 고민이 깊어졌다.
길을 걷는 모두가 우산을 쓰고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메리만 홀로 우비를 입고 비가 들어가지 않게 꽉 묶은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우수수 내리는 비가 손을 적시면서 냉동 피자와 도리토스와 냉동 버팔로 윙, 차이나풍 스파이시 누들, 냉동만두가 들어있는 봉투를 버리고 편하게 가자고 유혹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집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의자가 젖지 않게 내내 서서 가기까지 했다. 두툼한 백팩을 메고 품에 한가득 안기는 비닐봉지를 든 채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메리의 곁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서 그나마 편하게 갔다는게 좋은 점이긴 했다.
숲 속과 다르게 거대한 온기와 무시할 수 없는 인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좁은 공간 안에 있지만 메리는 그 안에서도 평화로움을 찾아냈다. 사람들이 손에 든 작은 화면으로 보는 숏츠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과 그걸 보는 얼굴에 지어지는 미소, 통화를 걸어서 다음주에 있을 시합을 보러 올 수 있냐는 말, 그런 것들에서 일상을 느끼며 불편해진 심기를 바로잡은 것이다. 풀벌레 소리와 비교할 수 없게 시끄러운게 사람이지만 이들도 소다와 자신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안정감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며 메리는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소다와 마주쳤다.
우산을 쓴 채로 정류장 안에 서 있던 그는 메리를 보자마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우산을 씌워줬다.
“메리!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
버스 안에서도 우비 모자를 내리지 않았던 메리가 자기 위에 씌워진 하늘색 우산을 보고 웃었다.
“소다랑 같이 먹을 간식을 고르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늦어버렸지 뭐야. 미안해. 빨리 가서 같이 먹자.”
두 사람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집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우산을 나눠썼다. 우비를 썼기 때문에 우산을 쓸 필요가 없는 메리에게 우산을 반 양보한 소다의 어깨가 젖어갔다. 그걸 본 메리가 빨리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도리토스는 자기 혼자 다 먹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기 때문에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즐겁게 걸어온 메리가 집 열쇠를 꺼내기 위해 봉투를 내려놓고 우비를 벗어 가방을 꺼낸 참에 문이 벌컥 열렸다.
“메리,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렇게 크게 웃은거야?”
소다가 집 안에서 문을 열고 메리를 맞이했다. 우산과 비에 젖은 어깨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집에서 입는 평상복 차림인 채로.
놀란 메리가 대답도 못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린채로 소다를 살펴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자신과 우산을 나눠쓰고 온 소다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메리를 여상하게 바라보던 소다는 바닥에 놓인 비닐봉투를 집어들었다. 빗물이 후두둑 떨어져서 손으로 몇 번 털어낸 다음에야 현관 안에 들여놓고는 손끝으로 메리를 콕 찔렀다.
“뭐야, 메리~ 비 오는 날은 동상놀이를 하기에 좋은 날이 아니야. 일단 들어가자.”
메리는 소다가 찌른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비에 젖은 쪽과 다르게 우산을 써서 물기가 한결 가신 어깨에 작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메리는 자신이 한눈을 판 4초만에 집 안에 몰래 들어가고 함께 쓴 우산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방법이 뭐냐고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면서 우비를 탈탈 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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