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서있는 사람

장미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공원 환경 조성에 돈을 붓자 그 결과가 빠르게 나타났다. 푸른 녹지가 조성되고 그 위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덮은 예쁜 꽃들이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마을 신문에 기사가 나고 마트에서 장을 보던 사람들의 입을 타며 퍼진 소문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디즈니랜드에 놀러가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들이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끌려와서 즐겁게 웃는 얼굴로 돌아갔고 새로운 데이트 장소를 찾던 연인들이 행복함을 뽐내는 사진을 잔뜩 찍어 올렸다.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노점상이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 핫도그, 풍선, 솜사탕, 인형 등 귀엽고 깜찍한 것들을 팔았다.

꽃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라 사람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어갔다. 하지만 10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공원에 심어진 꽃들은 시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꽃이 시들기도 전에 새 꽃으로 바꿔 심어버리면 거기에 드는 행정력과 비용이 얼마나 많겠냐며 불만을 표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기뻐했다. 24시간 개방된 이 공원에서 대체 언제 꽃을 바꿔 심는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사람이 몰리면서 발생하는 긍적적 효과가 컸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사소한 것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5월이 되자 공원에 피어있던 대부분의 꽃이 갑자기 장미로 바뀌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장미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들은 감탄을 표하며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불면 짙고 향기로운 장미 향이 마을까지 흘러갔고 공원을 걷는 사람들은 순수한 장미의 향기로 폐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었고 조용하던 마을은 제법 활기를 띠게 되었다. 평일에도 일부러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늘 정도가 되자 메리는 볼멘소리를 냈다. 창문이 닫혀있는데도 틈새로 들어온 장미 향기가 옅게나마 맡아지는 오후였다. 빛이 잘 드는 식탁 위에 올려진 큰 쟁반에는 색색의 장미꽃잎이 널린채로 바싹 마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연관찰을 느긋하게 할 수가 없어. 나무가 제대로 심어져서 그늘이 생기고 생태계가 조성되는건 정말 마음에 들지만 꽃을 과하게 심으니까 사람이 없을 때가 없잖아. 그렇다고 밤에 돌아다니는건 위험하고.”

소다가 사람이 가장 없을 평일 아침에 자연관찰을 하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메리의 마음은 굳은 채로 딱딱해졌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시내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설득도 마음을 풀어주는데 한 몫 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준비하고 나들이 옷을 갖춰입은 스윗 쌍둥이가 집을 나섰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풍기는 달콤한 향기는 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졌다. 조깅을 하는 마을 사람 한둘을 빼면 공원 안에 아무도 없어서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새벽에 맺힌 이슬이 아직 남아있는 꽃잎과 잎사귀가 마치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몇 시간만 지나면 사람의 존재감이 내뿜는 활기가 이 공간에 가득 찬다는게 믿기 힘들 정도로 적막했다. 이 고요는 메리가 원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쌍둥이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양상추와 계란 후라이로 만든 간단한 아침 덕분에 기운이 솟아나자 메리의 눈이 반짝였다.

쌍둥이는 한적한 공원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메리는 나무 뿌리 부근에 돋아난 버섯이나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 또는 먹이를 찾아 풀밭을 헤치는 소동물을, 소다는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미나 카메라에 얼굴을 대고 집중하는 메리를 주로 촬영했다. 공원의 거의 모든 곳에 피어있으면서 구역을 잘 구분해두고 안내팻말까지 세워둔 장미꽃의 향이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점점 강해졌다. 사진을 찍고 자신이 본 것을 메모하느라 바빴던 메리가 잠시 한 숨 돌리기 위해 기지개를 쭉 켰을 땐 산책을 나온 마을사람 몇 명과 일찍도 찾아온 외부인 몇 명이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

벌써부터 시끄러워지겠군, 혼잣말을 하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점검하던 메리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 실수로 촬영 버튼이 눌린 것처럼 기억에 없는 장미 덤불을 흔들리게 찍은 사진을 봤기 때문이다. 그 사진에는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섞인 큼지막한 장미가 피어난 덤불의 뒤쪽에서 나부끼는 하늘색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메리의 기억상 그 장미 덤불은 키가 작아서 머리카락이 이런 식으로 찍히려면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서 고개만 들거나 그 정도로 몸을 웅크려야 했다. 게다가 이 머리색은 쌍둥이의 머리 색과 똑같았는데, 둘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서 항상 머리를 묶고 다녔다.

동그랗게 잘 말린 자신의 뒷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빠진 메리는 석연찮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소다를 불렀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을 놓고 사진을 찍는 자신에게 흥미가 떨어져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러 간건지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에 평일은 노점을 여는 시간이 조금 늦어서 아직 간식거리를 살 수 없을 터였다. 다문 입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이 좁아질 무렵,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흘러나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메리가 무언가를 보고 눈이 커졌다. 하늘색 머리카락이었다. 눈은 아마도 분홍색이나 빨간색에 노란색이나 하얀색이 섞인 것처럼 보였고 장미 덤불 가운데에 서있었다.

소다와 똑같이 생겼지만 머리를 풀어서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게 두는 모습이 이상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적대감이나 위험하다는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아서 메리는 누군지 모를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 또한 입을 열지 않고 메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메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소다가 아침에 챙겼던 음료수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집게를 사용해서 튼튼하게 고정한 반묶음 머리와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를 확인한 후에 마음이 놓인 메리가 서둘러 달려갔다. 자기도 모르게 흐른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소다! 잘 왔어. 내가 사진 찍고 일어섰더니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게다가 너랑 비슷한 무언가도 봤다고.”

“나랑 비슷한 무언가라면 혹시 저걸 말하는거야?”

소다가 메리 뒤편에 서있는 정체불명의 가리키자 메리가 뒤를 돌아봤다. 아까까지 눈싸움을 한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너를 더 닮았는데. 너무 멀어서 그럴지도 몰라.”

소다의 말은 메리의 팔에 소름을 돋게 했다. 보는 사람마다 보이는게 달라지는 사람이라니, 괴상한 일에 엮여들 것이 뻔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메리는 소다의 팔을 잡고 자연스럽게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아직 공원 안쪽까지 들어온 사람이 없어서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퍼졌다. 그 와중에 소다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챙겨온 음료수를 마셨다. 그걸 본 메리는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바라보며 손으로 뒤를 가리켰다.

“소다. 지금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진건 아니지만 그럴지도 모르는 위험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데 너무 태평한거 아니야?”

“음… 우릴 따라오는 저걸 말하는거라면, 저건 무시해도 괜찮을거야. 메리는 이벤트 소식엔 빠르지만 마을 소문은 느리구나.”

소다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공원이 대부분의 꽃을 장미로 바꾼 이후로 친한 사람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를 장미 덤불 틈새나 뒤에서 봤다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들이 본 그 무언가는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말을 걸어도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서있는 장미 색깔이 오묘하게 섞인 눈 색깔로 진짜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고도 하는데, 메리는 소문이 그렇게나 자세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뭐,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마을에선 크게 문제삼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못들었을지도 몰라.”

해를 끼치지 않는다. 확실히 메리가 저것과 마주쳤을 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다와 자신이 동시에 저걸 보아도 서로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인식한 것에서 공포심을 느낀 것이었음을 떠올리자 팔에 돋은 소름이 가라앉았다. 사람이 아닌건 확실하지만 아마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언가. 저것은 이 공원이 꽃을 절대로 시들지 않게 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걸까? 장미의 계절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질까? 사라진 두려움의 자리를 차지한 호기심을 뭉개지 않고 고스란히 느끼며 다시 뒤를 돌아보자 제자리에 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있던 그것이 손을 흔듬과 동시에 사라진 것을 보았다.

이 공원에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목격한 걸 인터넷에 올리면 조회수가 제법 나올지도 모르지만, 메리는 이 공원에 사람이 더 몰리는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트에 적고 말기로 결심했다. 소다가 챙겨준 음료수를 마시며 왔던 길로 돌아가자 요란하게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저런걸 찍으려고 사람들이 더 몰려들면 어떡하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쌍둥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추가태그
#연성교환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