底流

말하지 못한 고백

BGM: Taylor Swift - Willow


별이 뜨는 밤 우리 만나자

내 부끄러워 차마 네게 못할 말

이쪽 별이 아니면 저쪽 별이

다 전해주리라 약속했거든

향돌, 별이 뜨는 밤 우리 만나자


아무도 눈 뜨지 않은 새벽 4시 30분,  다시 도배한 페인트 냄새가 아주 약간 남아있는 오래되고 넓은 연립 주택의 꼭대기 층. 창극 너머로는 백짓장만 같은 설경이 펼쳐졌고, 커다란 원형 카펫을 깔아놓은 침실의 벽에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장작을 태워댔다. 

진의 전자시계가 특유의 요란스럽고도 정신 사나운 소리를 울리기 전에 먼저 눈을 뜨는 것은 뮈르 캠벨의 새로운 습관이었다. 갓 깨어난 탓에 시야가 어슴푸레 번졌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계의 버튼을 찾아누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 허숄트는 모든 물건을 자로 잰듯 반듯하게 정리해놓는 사람이었으므로. 

까만색으로 칠해진 철제 침대의 오른편으로 팔을 뻗으면, 손이 소품 따위를 올려놓는 낡은 협탁에 닿았다. 이 협탁은 뮐의 자랑스러운 전리품 중 하나로, 저번에 진의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창고에서 얻어온 물건이었다. 진은 여기저기 난 흠집을 이유로 들어 이 가구를 이사한 집으로 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결국 뮈르 캠벨의 눈초리 몇 번에 의견을 철회하고 말았다. 

뮐은 이것 외에도 흔들의자나 유리 전시대 따위를 짐으로 실었고, 우여곡절 끝에 침대 곁에 자리하게 된 협탁은 뮐 보다도 진이 더 자주 쓰는 물건이 되었다. 

뮈르 캠벨은 이 탁상의 위에서 아침마다 시끄럽게 구는 전자시계를 찾아냈다. 손끝을 더듬어 볼록 튀어나온 버튼을 누르고 나면 그 작은 움직임에도 저를 안고 있던 진이 몸을 가볍게 뒤채는 게 느껴졌다. 

“깼어요, 진?”

“…뮈르.”

고대하던 목소리가 손쉽게도 목을 빠져나오긴 했으나, 진은 아직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규칙적인 삶을 영위하는 뮐 캠벨의 주인님께서는 정해진 시간까지는 수마를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뮐은 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저 바깥에 쌓인 눈과 같이 조용하기만 한 상대를 구경했다. 

짙고 남성적인 선의 굵은 눈썹, 지금은 눈꺼풀을 감아 보이지 않지만 어떤 빛보다도 찬연한 검은 눈동자, 그리고 벼랑처럼 가파르게 깎아내린 콧대를 지나면 붉고, 조그만 입술이 시야 속에 들어찼다. 진에게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지만, 색이 짙은 구순은 뮐이 남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부위 중 하나였다. 

그것은 늘상 속이 울렁일 정도로 다정한 낱말들을 수놓는 것이 저 입이며, 또한 숨이 부족할 때마다 호흡을 보조해주는 것 또한 저 입이기 때문이었다. 진은 이따금 아주 낯 간지럽게도 뮈르 캠벨을 인어에 빗대고는 했는데, 뮐은 자신이 정말 인어였대도 분명 저 입술이 넘겨주는 산소로 지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 아직도 주무세요…?”

그리하여 진의 구순에 맺힌 강렬한 색감을 눈독 들이던 뮈르 캠벨은, 다시 한번 자신이 정말 그 신비로운 수중 생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대하던 진의 태도를 떠올리곤 충동적으로 남자의 이름을 불러냈다. 

예상대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인어는 인간의 살갗에 닿으면 열상을 입고는 했으므로. 진 허숄트라는 인간을 향한 인어의 감정은 늘 선망과 두려움을 동반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아마도 그것의 기상 시간이 5시간이나 일찍 당겨지기 전부터 뮈르 캠벨이란 인어는 절 육지로 끌고온 이 인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밖으로 뱉으려면 마침 인간이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해야 했다. 

동화에 따르면 고백을 마치고도 그 마음을 보답받지 못한 인어는 한길 물꽃이 되어 사라져버리므로. 

“진… 너무 좋아해요.”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코끝에는 남자의 겨울 내음이 맴돌았다. 물에 사는 것인 뮈르 캠벨은 이 겨울향 짙은 남자에게 더욱 다가갔다간 몸이 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으나, 어쩐지 자꾸만, 어쩔 수가 없이 뭍이 가진 인력에 당겨졌다. 이번도 그래, 최초의 고백이 혀끝에서 스러진지 채 수 초가 지나기도 전에 뮐 캠벨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정말, 좋아해요. …아마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 어떤 누구보다도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할 텐데. 흐린 음성이 공중에 나부끼거든 뮐은 다시 눈을 감고, 맞닿은 체온을 목숨처럼 껴안았다. 전해지지 않은 애정에는 아무것도 돌려받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랑은 이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당신이 그것에 대하여 알든, 알지 못하든, 그 감정은 이미 엎질러졌다. 목소리로 전하지 못해도 인어는 인간을 애틋이 여겼고, 단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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