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빛전수정] 무언가의 오류

2020. 3. 3.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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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공이 죽었다.

이 끔찍한 사실을 알린 사람은 당시 함께 있었던 어둠의 전사로, 수정공과 성견의 방에 함께 있던 중 의료원으로 와서 '수정공이 갑자기 쓰러져서 숨을 쉬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수정공이 쓰러지자마자 놀라서 뛰어온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해본 후에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곳으로 달려왔는지 어둠의 전사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찌나 씹어댔는지 잔뜩 깨문 자국이 있는 입술을 달싹이며 '뭐가 잘못된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라고 그가 중얼거렸고, 아주 드물게 어둠의 전사가 절망한 모습을 본 의료원 사람들은 아주 잠시나마 마찬가지로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쉐사밀은 모두가 최악의 혼란에 완전히 휩싸이기 전에 입을 열었다. 30년 전, 이 의료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됐을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겪었다고.

그녀는 따라오겠다는 모두를 만류한 후 라이나와 어둠의 전사만 대동하여 성견의 방으로 들어섰다. 수정공은 마치 시체처럼, 그렇다기에는 너무나 평소와도 같은 안색으로, 다만 숨은 쉬지 않고 가지런히 눈을 감은 채 바르게 누워 있었다. 쓰러질 때 상황은 어떠했냐, 전조 증상은 없었냐 등등 아무것도 묻지 않은 쉐사밀은 그저 주의 깊게 수정공의 몸을 살폈고, 한참 후에야 한숨을 쉬었고 고개를 저었다.

'30년 전 그때랑 똑같네. 젊었을 적이라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워낙 큰 난리가 나는 바람에 의료원 사람들 모두 한 번쯤은 수정공을 살폈거든… 그래서 어렴풋하게는 기억나. 그때랑 같은 상황인 듯해.'

'대체, 대체 왜. 왜 이렇게.'

'일단… 걱정 말고 진정해, 영웅님. 그때와 똑같다면 며칠 후에 눈을 뜰 테니까.'

'눈을 뜬다고요? 괜찮은 겁니까? 숨을 쉬지 않는데.'

'괜찮다고 하더구나… 며칠 후에 멀쩡히 깨어난 수정공이. 잠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만약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대도 며칠 후면 깨어날 테니 걱정 말고,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두면 된다고.'

'그게 무슨…….'

'워낙 특이한 점이 많았던 사람이었으니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말이 많았어. 수정공의 상태를 살피려는 사람도 많았고, 만약을 대비하자는 사람도 많았고. 수정공이 갑자기 쓰러지고 깨어나지 않은 며칠 동안 장례식을 해야 하네 마네 했을 때보다는 혼란스럽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어둠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일단 편안한 곳으로 모시는 게 좋겠어. 수정공을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으니까.'

성견의 방과 연결된 안쪽 공간, 수정공이 개인적으로 쓰는 곳으로 그를 옮겨 편안히 눕혔다. 그때까지도 수정공은 계속 숨을 쉬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힘없이 늘어져서는 어둠의 전사가 안아올려 내려놓는 그대로,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새하얗게 변한 어둠의 전사의 혈색도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수정공의 몸에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는 그의 손길이 떨리는 것을, 라이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크리스타리움의 자치 단체인 수정회 사람들을 모아 이 소식을 전했다. 개중에는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수정공의 장례식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한 번 겪었던 소동이었고 수정공은 그때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므로, 평화가 찾아온 크리스타리움에 이제 와서 수정공의 죽음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애써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사람에게 소식이 알려졌다간 큰 소동이 일 것이 뻔했기에 의료원 사람들에게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고,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에게는 수정공이 타워 안에서 볼일이 있으니 찾지 말라는 이야기를 흘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크리스타리움의 운영에는 수정공이 크게 개입하는 실정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큰 혼란이 생기지는 않았다. 수정공은 원래도 탑 밖으로 자주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없었다. 크리스타리움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낮이면 활기차고 밤이면 고요했다. 알려지지 않은 큰일이 있었고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고,

어둠의 전사는 밤이 깊고 날이 밝도록 수정공의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

"아직도 여기 계셨습니까."

느릿하게 이쪽을 돌아보는 어둠의 전사의 눈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크리스탈 타워로 들어오기 전 주변에 물어본 바에 의하면 그는 마치 평소의 수정공처럼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도 대충 처리하는 듯했고, 안색을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자지 않는 모양이다. 큰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 라이나."

"이렇게 계시면 몸이 상합니다. 그만 돌아가 쉬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라이나를 향했던 고개를 다시 수정공을 향해 돌렸을 뿐이다. 힘없이 말린 등이 역설적이게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힘있게 의사를 표하는 것 같았다.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라면 대신 제가 있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닌데…."

이내 그가 피식 웃는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염려하시는 건 압니다. 예전에 멀쩡히 깨어났다고 해서 수정공이 이번에도 그렇게 멀쩡히 일어나실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숨이라도 쉬고 있었으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이래서는, 꼭."

조금도 오르내리지 않는 수정공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말을 끝내지 못한 그가 어렵사리 시선을 떼어낸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쓸어내린다.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수정공의 곁에는 제가 있을 테니, 쉬고 돌아오세요."

"…그래."

힘없이 그가 일어났고, 잠시 수정공이 누운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이불을 끌어 올려 다시금 덮어준다. 라이나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수정공은."

계속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던 어둠의 전사가 막 발을 떼려던 때였다. 라이나가 입을 연 것은 충동에 가까웠다.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그의 손에 자라다시피 했던 저에게도요."

어둠의 전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이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였을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글쎄, 잘은 모른다. 수정공이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 눈앞의 이 사람은 과연 수정공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이 사람은 수정공의 어떤 모습을, 어떤 이야기를, 어디까지 알까. 당신의 앞에서면 늘 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이던 수정공과 당신은 어떤 관계였을까. …그런 당신에게도 수정공의 이런 모습은 갑작스러우느냐고. 우리는 과연 이 사람의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앉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모든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분명 수정공은 제게 아주 소중한 분이며, 가족 같은 분이지만… 가끔은… 전혀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 같은 때는 특히나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은 그제서야 들었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사람의 휴식을 방해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괜한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라이나."

"…네. 말씀하십시오."

"섭섭해?"

누구에게, 라는 말은 없었지만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묻는 어둠의 전사의 표정은 제법 피곤했고, 지쳐 있었고,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라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씨익 웃었다.

"나도 그래."

그리고, 여전히 미동도 없는 채로 누워 있는 수정공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웠다.

"…아주 많이."

*

잠에서 깼을 때는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런 몸이 되고서는 보통 사람만큼 자주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고, 자주 먹을 필요도 없어 편리했지만 한편으로는 피로를 푸는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곤혹스러웠다. 피로의 형태와 수면의 목적이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보통 사람처럼 잠시간의 수면을 통해서는 피로가 충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몸이 가벼운 적은 드물었다. 특히나 요즘은 영웅이 제1세계로 오고서 무리했던 탓에 몸이 삐걱거려서는… 이렇게 몸이 가벼운 적은 실로 오랜만이다. 이렇게나 몸 상태가 좋았던 적은 몇십 년 전에나 있었던 것 같은데…….

응…? 잠깐. 내가… 언제 잠들었지? 자리에 누운 기억이 없는데, 설마 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정공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푸른 벽, 어지러운 방 안, 평소 보았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휴… 다행이다. 또 '오류'가 생겨 며칠 동안이나 쓰러져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이전에 언질을 해두기는 했지만 워낙 예전 일이고 요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또 쓰러졌다가는 지난번처럼 자신을 빽빽이 둘러싸고 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꽃으로 가득한 관 안에서 몸을 일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류가 아닌 상황은 다행이지만,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운 기억이 없는 건 신경 쓰였다. 지금까지 수정공으로 살면서 기억이 사라진 일은 잘 없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라고 생각할 무렵. 여태까지 누워 있었던 침대 발치에 고개를 푹 처박고 몸을 웅크린 사람이 보였다. …낯선 모습이지만 엎드린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있든, 내가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까.

음,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이상한 모습이다. 영웅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하필 든 기억이 없는 잠자리에, 어딜 봐도 곁을 지키다 깜빡 잠이 든 듯한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자는 영웅이라. 관련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아 한참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번쩍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이쪽도 깜짝 놀랐다.

"아… 자, 잘 잤나?"

몸을 뒤로 물렸다가 떠듬떠듬 일단 안부를 물었는데, 잠이 덜 깬 눈으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철썩철썩 자신의 얼굴을 몇 대 때리더니 눈을 크게 뜨고 번쩍 일어나 걸어와서는 수정공의 얼굴을 덥썩 잡는다.

"왜, 무슨 일이…."

그리고는 대뜸 코 밑에 손을 대어본다. 놀라서 잠시 숨이 멈췄으나 더 심각하게 굳는 영웅의 얼굴을 보고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곧, 그의 표정이 풀린다. 그제서야 꽤 알싸한 직감이 목뒤를 타고 흐른다. 아무래도… 예감이 틀리지 않았군. 또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 오류가.

"…미안하다. 걱정했겠군."

"그걸 지금 말이라고."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더니 웃었더니 꽤 아프게 얼굴을 쥐고 있던 그가 손에서 힘을 풀고 긴 한숨을 내뱉고 침대에 퍽, 소리 나게 앉았다.

"일주일이나 지났어. 어떤 낌새도 없이 내 앞에서 주르륵 쓰러지고서. 간신히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는 붙잡았는데, 이미 팔 안에서 늘어진 낌새가 좋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부르고 얼굴을 때려도 반응이 없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코 밑에 손을 대봤는데…."

거기서는 그가 또다시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다. 수정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주일 동안 계속 그리했던 듯 그의 입술은 제법 꺼칠해 있었다.

"가슴에도 손을 대봤는데."

제 손을 올려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잠시 손바닥을 떤다. 아마… 보통이라면 느껴졌어야 할 박동이 전혀 없었겠지. 영웅의 눈에 아주 무거운 단어가 잠시 자리잡는 것이 보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불쾌하고 정신을 좀먹는 단어. 수정공이, 그라하 티아가 영웅과 관련된 기록에서 지우려 그토록 애썼던 그 단어.

씁쓸한 기분이 들어 눈앞에서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몇 번이고 쓸어내려 주었다. 이쪽을 쓱 바라본 영웅이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무래도 됐어. 어쨌든 눈 떴으니까. …아픈 곳은?"

"아… 괜찮아. 오히려 몸은 전보다 훨씬 가볍다."

"어딘가 이상하다거나, 안 좋아진 것 같다거나. 또 쓰러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거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일은 크리스탈 타워에서 날 복구하려는 목적인지도 몰라. 한동안 무리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말로 괜찮다… 상태는 아주 좋아."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영웅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몸을 기울여 수정공의 어깨를 끌어당겼고, 앉아 있는 탓에 쉽사리 끌려오지 않자 제가 한 움큼 다가와서는 와락 품 안에 완전히 집어넣었다.

"하… 진짜."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아까처럼 꾸물꾸물 그가 입을 다문다. 대신 붙잡힌 어깨가 아플 정도로 꽉 안아오기만 했다. 우악스럽게 안긴 탓에 다소 아프기는 했으나 밀어내기보다는 천천히 팔을 빼내어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닥, 토닥.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이럴 때가 있다. 생명에 관련한 문제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가 지나치게 힘을 썼거나, 크리스탈 타워와 멀어졌거나, 크리스탈 타워와 내 몸 상태가 맞지 않는 오류가 생길 때 어떤 연결이 끊기는 듯해. 그때는… 내 몸이 어떤 힘도 받지 못하니 숨도 쉬지 않는 듯하고. 많이 염려한 모양이군… 난 무사해, 정말 몸에도 이상이 없고. 그러니까…."

수정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어설프게나마 위로하며, 사과하고, 또 조금이나마 설명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꽉 껴안고 있다가 등을 쓸어내리고 팔뚝이며 여기저기를 마치 확인하듯이 매만지는 영웅의 손길을 느끼는 것 정도.

"다시 수정공한테 문제 생길 일 없을 줄 알았어."

"음… 미안하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잊고 있었거든…."

딴에는 자세히 설명했지만, 설명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을 테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설명해본 적도, 스스로 심각하게 연구해본 적도 없는 문제다. 몇십 년 전 처음 오류가 발생했을 때는 이러다 영웅을 구하기 전에 이 몸이 멈추어버리는 건 아닌지 꽤 걱정했었다. 하지만 최근까지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고, 영웅을 구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해 거의 잊고 있었다. 영웅 앞에서 그렇게 멈추어버리는 일이 생기리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영웅에게는 언질을 준 적도 없으니 많이 놀랐겠지. 특히나 소식을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하필 눈앞에서 쓰러졌으니 더더욱.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몸 함부로 쓰지 마'라든지 '또 숨기는 거 있으면 당장 말해'라고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던 다정한 사람이니 말이다.

"또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어?"

시간이 흐르고 나자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영웅이 천천히 몸에서 힘을 풀었다. 덕분에 편안히 안길 수 있었다. 수정공도 영웅의 등을 조금 더 편안히 토닥여주다가 그 품에서 빠져나와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안고 있을 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만.

"무슨?"

"쓰러진다거나, 몸이 이상하다거나 같은 상황이지. 그야."

"음…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내 몸은 일반적이지 않으니 특수한 일이야 종종 있었지만."

"그 특수한 일은 뭔데?"

"별일 아닌…! 데…."

갑자기 허리를 감싸와서 깜짝 놀랐다. 허리를 감싸고 옆구리를 파고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껴안기까지 한다. 영웅은 평소 스킨십이 많다거나 애정 표현이 많았던 타입은 아니다. 둘이서 시간을 보낼 때도 각자 다른 의자에 앉아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잠깐 몸이 떨어졌다고 금방 몸을 맞대는 사람은 아니었지… 왜 이러는지 의문을 담아 바라보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왜' 하고 볼을 씰룩인다.

음… 일주일 동안 쌓아온 불안의 표출인가. 의외로 어리광을 부리는 타입인지도 모르겠군.

"특수한 일은 뭐냐니까."

"정말로 별일 아니야. 일일이 시시콜콜 말하기에도,"

영웅이 슬쩍슬쩍 맞닿은 몸을 밀어 수정공을 눕힌다. 갑자기 들이받아 눕히면 몸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억지스러우면서도 꽤 조심스럽다. 그래서 미는 대로 못 이기는 척 천천히 누워주었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특별한 점도 없을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전부터 말이야, 예전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꼭 이렇게 피하더라. 언제는 이번 일이 끝나면 그동안 날 구하기 위해서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주겠다더니."

그야 그때는 말하지 못할 줄로만 알고 미련을 담아 한 말이었지. …이 말을 했다가는 또 그때 일을 들먹이며 한참 화를 낼 것 같아서 참았다. 피하는 이유야 구차하지만 많다. 말하자니 쑥스럽기도 하고, 영웅이 걸어온 발자취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듣고 나면 영웅이 화를 내거나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 많기도 하고, 지나치게 구구절절하기까지 해서 말하기가 꺼려졌다. 몇 번쯤 이야기해보라며 운을 띄우기에 적당히 빠져나갔는데 이번엔 꽤나 물고 늘어질 것 같은걸….

"알았다. 그럼 조금 말해줄까… 지루할 테지만."

"지루할 일 없으니까 다 말해. 지금 궁금해 죽겠거든."

누운 수정공의 위로 조금만 몸무게를 실은 채로 몸을 겹쳤던 영웅이 몸을 떼고 내려다보며 잔뜩 불만을 품은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엔 섭섭함이며 화, 걱정 등등이 뚝뚝 묻어난다. 저에게 쏟아지는 이런 표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때도 있었는데. 골난 그 표정을 한참 보고 있으려니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웃어버렸다.

"왜 웃어?"

화내려나, 했더니 역시나 더 골이 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대답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가만히…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만져보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를. 아주 천천히 느꼈다.

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떤 이야기부터 해주면 좋을까.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이미 무감해져 아무렇지 않은 일이, 다시금 새로이 떠올려 보면 영웅이 '제정신이야?'라고 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많고 커다란 일이 있었다. 힘겹기도 했고 끔찍하기도 했다. 돌이키기엔 너무 멀어진 것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이 몸이다. 지금도 가끔 시퍼렇게 변한 제 몸을 보면 새삼 정신이 아득한 때가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그럼에도 다시금 생각해 보면 역시나 영웅이 해낸 일에 비하자면 한없이 하찮은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고, 영웅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영웅이 이곳에서 밤을 찾아 온 여정을 생각하자면 역시… 내가 해온 일 따위에 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그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그대는 대단하구나'라면서. 이 앞에서 이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될지.

"음…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조금, 부끄럽지. 벌써 입을 떼기 어려워 입꼬리를 우물거리다 영웅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으앗, 소리를 내면서도 그는 순순히 안겨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빨리 말해달라며 다시 다그칠 만도 한데 왜 가만 있을까 싶었는데, 아마, 그가 지금은 뛰고 있을 수정공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오래도 얌전했다.

"…무력감 같은 건 이제 싫다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기분은."

한참 얌전히 있다가 꺼낸 말은 심상치 않긴 했다만. 무력감, 이라고?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대가 아무것도 아니라니, 무슨."

"별로. 그런 거 아니야. 수정공이 쓰러져 있는 게 제일 큰일이었지."

"그래도 어찌, 이렇게나 대단한 그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구나."

크리스타리움에 큰일이라도 있었나? 진지하게 물어야겠다 싶어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더니 품에 안긴 채로 고개만 빼꼼 든 영웅이 눈썹을 찌푸린다. 무어라 말할까 없는 말재주로 한참 머리를 굴리는지, 생각이 구르는 동안 눈썹도 같이 꿈틀꿈틀.

"그런 게 아니고. 적어도 나는, 수정공의…… 연인이잖아."

마지막 말은 하도 빠르게 중얼거린 탓에 못 알아들을 뻔했다. 아. 그렇지. '연인'. 그랬다. 하도 부끄러워하며 말한 통에 이쪽도 부끄럽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진짜, 마치 죽은 것처럼 쓰러졌는데도 거기서 아무것도 못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쉐사밀은 알고. 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나는 대체 수정공에 관해 아는 게 뭔가 싶고… 그래도 꽤 특별한 사이라고 자부했는데."

말하면서 다시 짜증이 났는지, 부끄러웠는지. 말을 마친 영웅이 '으아' 하고 다시 고개를 묻어버린다. 어. 아. 아하. 뒤늦게서야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마, 나는 심각하거든."

"미안하다. 걱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섭섭하게 했군."

"이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야. 라이나도 그랬거든. 라이나도 얼마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툴툴거리며 웅얼거리는 통에 다음 말은 아예 알아듣지도 못했다. 이래서야 웃음이 멈출 수가 있나. 그를 안은 채로 한참을 웃었다. 그랬구나. 내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구나. 내 하찮은 이야기나마 그대들에게 그토록… 중요하구나. 내게 섭섭하고, 내가 궁금한 만큼 날 사랑해주는구나. 아… 미안한 일이지만 어찌나,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드는지. 미안한 만큼이나 마음이 따듯하다.

"…다 웃었어?"

"그래, 응. 그래…… 미안하다. 좋아. …이제는 정말,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말할게. 그대가 원한다면."

다시 고개를 빼꼼 든 영웅에게 한껏 웃어주었다. 내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 그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모두 어찌 주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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