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빛전수정] 8시부터 16시까지 비

2020. 2. 3.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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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쉬기 시작하니 늘어지는 건 끝이 없다. 하지만 쉴 때 쉬어야지. 그 모토로 어젯밤 펜던트 거주관 근처 주점에서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돌아와 잠들었던 영웅이 오늘도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니, 하지만 오늘은 과음을 빼고도 늦잠에 이유가 있었다. 어쩐지 자도 자도 몸이 늘어지고 창밖이 어둡더라니, 귓가에 제법 낯선 투둑투둑 소리를 들려주며 비가 오고 있었다. 꾸물꾸물 눈을 뜬 영웅은 침대에서 반쯤만 몸을 일으킨 채로 비가 주룩주룩 오는 흐린 창밖을 한참이고 내다보았다. …비는 정말로 오랜만이다. 비는커녕, 흐린 하늘조차 오랜만이다. 제1세계에 오고 나서 날씨 변화란 걸 겪은 날이 얼마 안 되니까. 아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비를 바라보며 영웅은 침대 위에서 한참 누워 있었다.

그러니까, 한참. …한참 누워 있었다. 숙취도 살짝 남았고 비까지 오니 몸이 처져 움직이기 귀찮아 누워만 있었더니 배까지 고팠다. 그제야 슬슬 반가웠던 비가 귀찮기 시작했다. 원초 세계에 있을 때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이 젖는 데다 무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니까. 심지어 컨디션이 날씨 영향을 좀 받는 타입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군. 반갑든 어쩌든 비가 오면 늘어지는 건 똑같네. 끄응. 아…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밥도 먹고, 수정공이 시간 날 때 찾아와달라고 했으니까 그리 가야지. …그렇게 굳게 다짐했으나, 침대에서 일어난 건 그로부터 30분은 더 지나서였다. 아, 이게 다 비 때문이라니까.

대충 배를 채우고 대광장으로 나섰을 때는 반가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딱 예전만큼 비가 지겨워졌다. 하필 지붕이 없는 곳을 나서자마자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는, 크리스탈 타워 앞까지 이르렀을 때 온몸이 눅눅하도록 축축하게 젖어 버렸던 탓이다.

"성견의 방으로 가십니까?"

"그래."

크리스탈 타워 앞을 지키던 위병이 이곳에 자주 드나드는 어둠의 전사에게 꾸벅 익숙한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도 그다지 지루한 눈치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그는 비 오는 광장을 유독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이들은 평생 그 어떤 날씨도 겪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자연이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는, 그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경험은 몹시도 신기할 만하지. 지금은 조용해졌지만 한동안 크리스타리움은 밤하늘이 까맣게 물들 무렵엔 참 시끄러웠다. 딱히 축제랄 것도 없었으나 잠들지 않고 밤하늘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덕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기상 현상 하나하나가 신기할 테지.

하지만 쫄딱 젖고 빗물을 뚝뚝 흘리며 성견의 방 앞에 이르렀을 무렵의 영웅에게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분명, 반가움이나 감상 따위는 몽땅 사라졌었다. 신발 바닥도 미끄러워서는 성견의 방 앞에서 쭉, 한 번 미끄러질 뻔하고서는 진짜 완전히 사라졌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눈이 마주친 수정공이 '왔나' 하고 인사해준 후에 영웅의 차림새를 살피며 눈을 제법 반짝이기 전까지는. 진짜로, 비가 그저 귀찮기만 했다.

"비가 오나?"

"응. 덕분에 홀딱 젖었어."

절퍽절퍽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영웅의 차림새를 수정공이 유심히 살핀다. 후드로 오랫동안 누르고 지낸 탓에 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됐다던데, 이렇게 흥미로운 무언가를 볼 때면 조금이나마 쫑긋거리곤 한다. 비 오는 게… 재미있는 모양인데.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금방 의식할 테니 움직이는 수정공의 귀를 모르는 척 살피며 툭툭,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비라… 반갑군."

수정공은 제법 부드럽게 웃었다. 흠뻑 젖은 영웅의 어깨를 한 번 털어주었다가 빗물이 묻은 제 손끝을 매만지면서.

"나도 제1세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날씨를 겪지 못한 지 오래되었거든. 아주 옛날엔 비 오는 날도 제법 좋아했었는데."

"그래?"

"원초 세계에 있을 때는 난 실내에 있기보다는 바깥에 있는 걸 좋아했어. 날씨마다 매력이 있으니까. 이곳에 와서는 그러질 못했으니 완전히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하긴, 노아 시절 그라하 티아를 찾으러 가보면 실내는커녕 바깥에서도 한군데에 있는 경우가 잘 없었다. 이것저것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여행하고 모험하기를 좋아했었지. 틈이 나면 '이곳엔 가보았느냐'며 영웅을 데려가기도 했고. 그런 사람이,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런 방에 있는 게 새삼 어색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는 전혀 밖이 보이질 않네.

"그럼 이젠 날씨도 생겼는데, 창문이 있는 곳에서 지내면 안 되나?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곳에서 살면 좋잖아. 답답하지 않고."

"아……. 음."

평이하게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수정공이 꽤 곤란한 듯 웃는다. 어, 방금 실수했나? 곱씹어보니 뭔가 잘못 말한 것 같기도 한데, 눈알을 굴리고 있으려니 금방 편안하게 표정을 고친 수정공이 먼저 답을 알려주었다.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나는 일단 크리스탈 타워의 일부이니까, 크리스탈 타워 안에 있을 때 가장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어. 멀어지면 그만큼 제약이 생기니까, 평소 생활하는 거처를 옮기는 건 곤란할 것 같다."

"어… 이런, 미안해."

"아니, 그대가 미안할 이유는 없다. 특수한 내 경우가 문제일 뿐이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수정공이 웃는다. …하지만, 으음. 지금도 단순히 '익숙해졌다' 뿐 바깥을 보고 싶지 않다거나 하진 않을 것 같은데. 비 오는 날도 좋아했다고 말할 정도니까. 옛날 일이라고는 해도 지금도 싫어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오늘 밤에 내 방에 놀러오는 건 어때?"

"응?"

충동적이고, 그다지 머리를 거치지 않은 평소 같은 제안이었다. 아예 거처를 옮기는 게 어렵다면 하루쯤은 비 오는 하늘을 보며 잠들면 좋겠다 싶어서였다. 모처럼 비가 오는 날이니 오늘이 좋을 것 같고, 다른 방 잡을 것 없이 하루 정도니까 제 방을 쓰면 되고. 그런데 바로 추측 가능한 의도는 아니었는지 수정공이 인상을 찌푸리며 웃는다. …어, 설명을 해야겠군. 익숙한 일이다. 새벽에서도 입을 열면 '그게 무슨 말이야'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하니까.

"음, 그러니까. 수정공도 하루쯤은 풍경을 보면서 자도 좋을 것 같아서.…찾은 지 얼마 안 된 밤하늘을 봐도 좋고, 비 오는 창밖을 방 안에서 오래 내다보면 좋잖아? 굳이 방에 오라는 건 비 오는 날이나 밤에는 밖에 오래 있기도 뭐하니까…."

"그런 뜻이었나."

수정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다.

"배려 고맙다."

그런데 어째…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말은 어째 거절의 포문이다. 음,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겠다 싶은가…? 이젠 별로 흥미가 없다거나? 아니지, 거처를 옮기는 게 곤란하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라이나한테 '수정공은 외출을 싫어한다'고 듣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갑자기 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방에 오라니 좀 이상한 말 같기도 하군…. 요즘 수정공과 좀, 어쩌다 보니, 그렇고 그런 관계 비슷한 게 된 처지라 밤에 하필 내 방에 오라니 좀 더 뭐할 수도 있겠다. 아… 역시 좀 더 고민이라도 해보고 제안할 걸 그랬네.

"그럼… 그렇게 할까."

"아 뭐, 그… …어?"

그럼 다음에. …라고 하려는데. 재빨리 들은 말을 되짚어봤다. 어, 수락한 건가? 허어?

"어… 크리스탈 타워 안에 있을 때 컨디션이 가장 좋다며?"

"그렇다고는 해도 크리스타리움 안이라면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하룻밤 정도라면 눈에 띄는 문제도 생기지 않고."

"으, 음. 그러니까…."

제안이 좀 이상하진 않았는지, 그러니까 좀… 해괴망측하거나 음흉한 수작이 아니라 정말로 비 오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변명을 해야 하나. 아니, 안 하는 게 낫나? 쉬이 수락한 거 보면 그냥 별거 아닌 줄 아는 모양인데. 팔까지 허우적거리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으니 곧 수정공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 미안하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어?"

"그저 해본 말에 진심으로 답해 곤란했겠군. 말만으로도 고맙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괜히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었네. 기분 탓인지 수정공의 귀까지 축 내려가 있어서 황급히 팔을 더 휘저으며 변명했다. 아니, 변명은 무슨! 해명이지. 놀라서 그랬다, 진짜로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해서 그랬다, 너무 갑자기 한 말이라 거절할 줄 알았다, 등등. 문장의 앞뒤가 맞는 것 같지도 않는데 일단 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봤더니 수정공은 그제서야 꽤 밝게 웃었다.

"그대의 제안이라면, 뭐든 가능하면 거절하고 싶지 않아."

"음……… 그래. 고마워."

"나야말로. 정식으로 초대받아 가는 건 처음이네."

기쁜 듯이 웃는 수정공을 보며 따라서 웃었다. 그러고 보면 수정공이 방에 온 적은 몇 번 있었다. 제대로 들어와서 이야기한 적은 아예 없지만. 오늘은 제법 오래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하던 그 순간, 아차. …정말로 생각 없이 막 내뱉기는 했구나 싶었다. 방 꼴이… 말 그대로 꼴인데.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배를 채우느라 하나도 정리하지 않은 이불이며, 며칠 동안 갈지 않은 침대 시트, 정비하려다 그대로 던져둔 장비들, 밥을 먹고 나서 치우지 않고 나와서 이런저런 쓰레기로 너저분한 테이블 등등이 떠오른다. 그런 꼴의 방에 누굴 초대해. 심지어 그보다 나은 방 꼴이었을 때도 산크레드에게 한 소리 듣기까지 했는데.

"미안한데, 나 방 좀 치우고 오면 안 될까."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심각하게 말하자 따라서 표정을 굳혔던 수정공이 꽤 크게 웃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진짜 심각하거든."

"괜찮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도… 방을 깨끗하게 쓰는 편은 아니라서."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사실이다. 주변에 하도 책이 많아서 책꽂이가 아니라 바닥에 쌓아두는 사람을 많이 봐서 심려의 방에 갔을 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수정공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면 은근히 쓴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늘어놓는다거나 하는 타입이었지. 아니, 그래도 지금 버려두고 나온 방 꼴은 심려의 방과 비교해도 좀….

"수정공이 질려버릴 정도로 진짜진짜 심각해. …방 치우고 이따가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 보자."

"그래… 알겠다. 기다리지."

약속을 정했으니 후다닥 치우고 돌아올 생각으로 한 번 손을 들어 보이고 등을 돌리려는 찰나, 아.

맞다. 여기에 애초에 왜 왔었더라. 어제 잠깐 얼굴 보려고 들렀을 때, 수정공이 '내일 시간 나면 와줄 수 있겠나' 하고 새삼 부탁하기에 왔던 거였다. 오늘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무슨 일 있어?"

"별다른 일은 없다. 그대의 방에는 언제 가도 문제 없어."

"그게 아니고. 시간 나면 와줄 수 있냐고 했잖아? 나하고 할 일 있었던 건 아닌가 해서."

"음? 아… 그냥, 오늘도 같이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물어볼 거 있어?"

"그대에게 늘 궁금한 일이야 많지. …사실 그보다는, 음…."

큼큼, 헛기침이라도 하듯 목을 가다듬고 시선을 잠깐 뗀 수정공이 이쪽을 짧게 흘긋 쳐다보았다.

"오늘도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답이 되나?"

아, 이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 젠장, 이쪽도 얼굴이 터지겠군. 얼굴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어, 음, 되지 그럼. 충분하지.' 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휙 등을 돌렸다.

아, 가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다시 등을 돌렸다. 바보 같아 보인다는 건 아는데 어쩔 수 없었다.

"방 치우고 올게!"

손을 흔들어주는 수정공을 보고서는 또다시 등을 돌려 후다닥 뛰어나왔다. 아직 비가 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위병에게 시뻘게진 얼굴도 들키지 않고, 차가운 얼굴을 식힐 수도 있었으니까.

…아. 오늘 밤, 같이 보내는 거구나. 으음…… 괜찮을까, 내 인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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