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전수정] 이세계 사람들은 부탁받는 걸 좋아한다며
2022. 2. 22.
들켰다. 다행인 건, 아직 누구랑인지는 모른다는 점이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 '설마 그 사람이겠어?' 해서 예상도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러니까 뭘 들켰냐는 거냐면, 요즘 영웅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뜻이다. 어… 그러니까. 야슈톨라랑, 산크레드랑, 위리앙제한테 말이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나요? …하긴, 저 얼굴을 보고서는 연애가 아니면 이상하다 싶었어요.'
'요즘 마주칠 때마다 입이 귀에 걸려 있다니까. 볼 때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얼빠진 얼굴이야.'
'영웅님께도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겠군요. 좋은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합니다만….'
그렇게… 티가 났나? 어제 야슈톨라가 크리스타리움에 방문한 기념으로 가졌던 술자리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표정 말이에요. …설마 요즘 연애라도 하나요?'라면서 바로 들키고는 그 후로 엄청나게 놀림받았다. 누군지 은근슬쩍 돌려서 캐묻던 야슈톨라와 산크레드, 대놓고 묻는 위리앙제를 어떻게 방어하긴 했는데… 안 알려준다 싶으니 그때부턴 엄청나게 놀리더라. 그렇게 좋냐는 둥, 어디가 좋았냐는 둥, 얼마 전까진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바빴는데 대체 언제 연애를 했냐는 둥, 얼뜨기인 줄 알았는데 할 건 한다는 둥. ……뭐, 그 자리에서도 진짜 얼뜨기처럼 별 이야기 못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 그 연애 상대가 워낙 특수한 사람이라서 어디서 말도 못 꺼내본 연애담 자랑도 쪼- 쪼금은 할 수 있었고.
그런데 말이다. 그 자리를 갖고 나서, 영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단 말이다. 그 말 말이야. 그 말. 산크레드가 한, 그 말. '어쨌거나, 좋은 일이라니 잘됐지. 상대한테 잘해서 잘 지내봐. 너, 눈치가 그리 빠른 타입은 아니니까. 그냥 무조건 잘해. 알겠지?'라는 말 말이야.
사실 알고는 있다. 제가 눈치가 빠르지도 않고, 연애를 잘하는 타입도 아니라는 거. 생각을 잘하는 타입도 아니고 세심하지도 않아서 상대를 잘 살피는 일도 못 한다. 안 그래도 이 점에서 불안했는데 저렇게 지적까지 들으니 더 신경 쓰인다. ……나, 잘하고 있나? 이쪽이야 그저 곁에만 있어주고 만져볼 수만 있으면 뭐든 좋아서 특별히 뭘 더 해야겠다거나, 해줬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야 그쪽에서도 말이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딱히 이쪽한테 뭘 해달라고 말할 타입도 아니다. 감정의 깊이와 무게와 농도로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과하게 받고 있으니까, 역시 뭔가 모자라다고 생각되진 않을까? ……괜찮나? 혹시 내가 더 해줘야 하는 거 있었던 거 아냐?
"오늘도 와줘서 고맙다."
"뭘, 당연히 와야지."
수정공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보며 영웅도 웃었다. 잡았던 손을 놓는 건 아쉽지만, 슬슬 물러가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손등을 한 번 더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보고서 손을 놓아주었다. '그럼, 슬슬 갈게'라는 말을 꺼내며 앉았던 자리에서 물러서려는데 수정공이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부탁이 있는데."
부탁? 영웅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수정공과 '이런' 사이가 되고서 처음으로 듣는 단어다. 게다가 요즘 영웅이 신경 쓰던 문제에 관한 부분이 아닌가. 부탁? 나한테 해달라고 할 만한 게 있다고?
"어! 좋아, 뭐야? 말만 해, 뭐든! 뭔데?!"
…아, 너무 달려들듯이 말했나? 격렬한 반응에 수정공이 잠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었다. 하하, 하고 자애로운 웃음소리까지 낸다.
"그대는 여전히 상냥하군. 누군가가 건네는 작은 부탁에도 귀 기울여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수정공이니까 이러는 거거든… 물론 내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치고도 기뻐 보였어. 꼭 응 모우족이 떠오르는군."
그렇게… 재밌었나. 손을 입에 가져다대며 수정공이 연이어 즐거운 듯 웃는다. 연인이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은데, 그게 '내가 응 모우족처럼 보여서'라니 좀 쑥스럽다. 아, 진짜,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뭔데? 부탁이라는 건."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두근거리고. 또 어떤 종류인지 상상도 안 간다. 수정공이 나한테 할 부탁이 뭘까. 다음에는 언제쯤 와달라거나, 어떤 이야기를 해달라거나… 어떤 선물을 해달라거나… 그런 걸까?
금방 웃음을 갈무리하고 다시 평화로운 얼굴로 돌아온 수정공이 가볍게 입꼬리를 늘인다. 그 입술이 곧 다시 움직인다. ……그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과연 영웅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종류이기는 했다.
"나가는 길에 추종자의 문에 있을 라이나에게 와달라고 전해줄 수 있을까? 방비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는데, 그녀가 지닌 통신기가 워낙 구형인 탓에 지금 수리하고 있어서 연락이 되질 않거든. …부탁하지."
아니 무슨, 이런, 연인이 되고 나서 들은 첫 부탁이라는 게 겨우 이런 거여도 되냐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영웅에게 그 어떤 사적인 부탁도 하지 않은 수정공이 할 만한 부탁이기는 했다. 어쩐지 수정공이 이제 와서 나한테 뭘 해달라고 할 것 같진 않더라….
"응, 알았어. 성견의 방으로 바로 와달라고 하면 되는 거지?"
"그래. 별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레이크랜드로 나갈 예정이라고 하기에…."
"아니야. 뭐든! 부탁해도 된다고. 앞으로도 편하게! 뭐든 이야기해. 알겠지?"
"……그래, 고맙다."
씰룩거리는 입술이 또 '응 모우족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머리를 벅벅 긁고 나서는 뒤돌아 나왔다. ……하아, 그냥 대놓고 물어봐야 하나. 나한테 뭐 원하는 거 따로 없냐고.
"아, 어제 보고를 들은 이야기로 상의하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바로 성견의 방으로 오면 된다고 했는데, 바로 갈 거지?"
"네. 그래야죠."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나를 보고는 이쪽도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돌리려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반쯤 돌렸던 발을 다시 돌려서는 라이나를 마주하자 마찬가지로 몸을 돌리려던 라이나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영웅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느냐는 표정이다. 어어… 이상한 질문일 것 같기는 하지만.
"라이나는, 수정공한테 부탁받은 적 있어?"
……예상대로 엄청나게 이상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라이나가 감정을 누르기는 했지만 다 눌리지 않은 탓에 얼굴에 이상함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을 짓는다.
"그야… 많죠. 작은 부탁부터 무리한 부탁까지요. 그분은 스스로도 무리를 하는 만큼 타인에게도 가끔, 나중에 사과할 정도의 부탁을 하기도 하거든요."
아. 그 방향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크리스타리움 운영'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아니, 아니. 뭐 그런 거 말고. 나랑 수정공은 요즘 가까이 지내니까 말이야, 나한테 바라는 게 있다거나 하면 나한테도 좀 부탁을 해도 될 텐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최근 두 분이 가까이 지내시는 건 알고 있지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수정공이라고 해서 어둠의 전사님을 부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수정공도 그 점을 알고 계실 테고요. 이제서야 겨우 휴식을 취하시는 중인데, 방해를 하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니까, 그런 부탁이 아니라……… …아, 이것참. 라이나한테 '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부탁 같은 거 말이야'라고 말할 수도 없고!
"뭐, 그래도. 수정공이 나한테만 할 수 있는 부탁이라면 해도 될 텐데 싶어서 말이야. 하하. 별얘기 아니었어."
"으음……."
역시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어 얼른 이야기를 정리하기로 했다. 괜히 이상한 눈치를 채면 이쪽보다도 수정공이 곤란해지니까. 수정공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해줄 것 같지만, 제대로 해주지도 못하는 입장에 폐까지 끼치면 안 되잖아.
"혹시, 최근 무료하십니까?"
"어?"
"최근 위병들도 종종 겪는 현상입니다. 대죄식자가 사라지고 밤이 찾아오면서 바빠지기도 했지만, 대죄식자 대비라는 큰일이 사라지면서 갑작스러운 허무함이나 무료함을 겪는 이들이 있어서요."
"아, 아니야. 그런 건."
젠장, 하다못해 이상한 오해까지 샀다. 절대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괜히 생각나서 해본 말이라고 어떻게든 둘러댔다. 이야기가 더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전에 크리스타리움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더니 들어가는 길에 병사들을 만나야 한다고 하기에, 예정대로 낚시나 하러 레이크랜드로 향했다. …수정공한테 이상한 얘기가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잘 변명해둬야겠다… 정 안 되면 솔직히 털어놓거나 해야지…….
괜한 말을 꺼내서 이상한 대화나 나눴고, 연인에게는 응 모우족 같다는 이야기나 듣고,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찜찜한 마음을 안고 물가를 향해 걷는데, 문득 눈에 보랏빛 레이크랜드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보랏빛 들판에서 갑자기 초록색 꽃이 눈에 들어온다. 하도 화려한 꽃들 사이에 섞여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만도 했는데, 원초 세계였다면 더더욱 풀에 묻혀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그 꽃이 왜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풀꽃이나 다름없는 그 수수한 꽃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 영롱하지도 않고 짙은색도 아니지만, 그 초록 꽃을 보고는 문득, 그라하 티아의 왼쪽 눈이 생각났다. 이런 색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비슷한 색이잖아.
보여주면 기뻐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톡, 꽃을 꺾었다.
"안녕."
"아. ……또 올 줄은 몰랐는데. 볼일이 생겼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보고 싶어서."
그 말을 건네니 수정공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저게 부끄러워하는 반응이라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꽤 귀여운 얼굴이지.
"덕분에 라이나는 금방 들렀다 갔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웠다."
"별거 아닌걸.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무 때나 시켜도 돼."
수정공이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는 그 표정이 웃고는 있지만 자못 심각하다. 왜 그래?
"라이나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왜? 무슨 일 있대?"
"별일은 아니지만… 아니, 별일인지도 모르겠군. 최근 그대가 많이 무료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아, 젠장. 결국 이야기가 들어갔잖아.
"아니아니, 그런 거 아니야."
"라이나도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고는 했지만, 내가 신경을 써주지 못했나 염려가 되더군. …오늘 성견의 방에 다시 온 것도 그렇고, 아까 내게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렇고, 혹시 흥밋거리가 필요했는데 내가 몰랐나 싶어…."
"아니아니, 괜찮아. 진짜 그냥 해본 소리니까. 그리고, 여기 다시 온 건 이유가 있어서야."
"으응?"
날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잊고 괜한 말을 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지…… 얼른 말을 돌리기 위해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두었던 꽃을 후다닥 꺼냈다. 꺾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난 탓에 벌써 꽃잎이 조금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꽃대를 들고 있으면 고개를 잘 들고 있을 정도로는 싱싱했다.
"이거. 레이크랜드에 나갔는데 보여서, 수정공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예전의 수정공 눈 색이 생각나서."
수정공이 천천히 손을 들어 꽃을 받아 들었다. ……한참, 꽃을 든 수정공은 한참 말이 없다.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물었다 놓는 그 반응을 보고서야 아, 이번에는 제가 제법 부끄러운 일을 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너를 생각했다는, 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보여준 꼴이니.
"……고마워."
"뭐,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꽃을 바라보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정공의 눈은 제법 반짝이고 있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재차 입술을 물었다 놓았던 그가 겨우 말을 이어 꺼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응?
"네가, 이렇게나 잘해줘서…… 더 바랄 것이 없어. 나는 더 이상 네게 줄 것이 없는데, 늘 넘치도록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야… 나야말로 네게 더 해줄 만한 일은 없을까…."
"아, 아니, 나야말로 충분히 받았으니까! 수정공은 진짜로 그만해도 돼!"
얼른 손을 덥석 붙잡고 황급히 말을 틀어막으니 수정공이 잠깐 놀랐다가, 웃는다. '그래도.' 그렇게 입을 달싹이기에 얼른 또 고개를 저었다. 진짜, 더 받으면 이쪽이야말로 돌려줄 수가 없다니까. 가뜩이나 지금도 빚만 가득인데.
"수정공이야말로 나한테 더 이것저것 부탁해도 돼. 뭐, 부탁할 게 없으면 곤란한 마물 처리라든지. 모처럼, 싸움은 잘하는 연인이니까. 그렇게 막 써먹어도 돼."
"아니, 하지만…."
"그러면 아까처럼 심부름이라든지. 뭐, 맛있는 걸 사와 달라든지. 정말,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그래도 내가 어떻게……."
"아니면, 음. 잠이 안 오니까 밤에 자장가를 불러달라는 것도 괜찮으니까."
아무 말이나 꺼낸 건데, 이번에는 수정공이 아무 말도 없다. 그저 눈을 마주친 채로, 한참 바라보며 미소만을 그린다. …으흠, 흠흠. 이번에도 뒤늦게 눈치챘다. 또 부끄러운 짓을 했네….
"나, 노래는 잘 못 하기는 한데…."
"그럼, ……오늘 밤 부탁해도 될까?"
"아, 응, 그럼…! 힘, 힘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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