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에스아이] 찰칵

2019. 10. 31.

TYYYYYYYYYYY by 칙칙
52
4
0

현대AU

아이메리크가 눈을 떴을 때 날은 밝아 있었다. 언제 잠들었지… 섹스를 마치고 가볍게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워 에스티니앙의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한 번 더 하네 마네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던 기억까지만 있는데. 언뜻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평소 주말에 일어나는 시간에 한참 못 미친 시각이다. 더 잘까 싶었는데 눈꺼풀에서 잠은 제법 깔끔하게 달아났다. …모처럼인데 일어날까. 잠을 털어내는 하품을 한 번 하고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는데, 아이메리크가 자던 곁에 엎드린 채로 잠든 에스티니앙은 여전히 한밤중이다. 에스티니앙이 이 시간에도 이렇게 깊게 잔다니 별일이네. 일어날 때가 되면 잠귀가 밝아지는 탓에 아이메리크가 조금만 들썩여도 일어나곤 했는데. 이번 주는 피곤했던 모양이지. 아니면 어젯밤에 실컷 움직이고 잤으니 노곤한지도 모르고. 조금 더 자게 두기로 하고 조심조심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이메리크가 빠져나오느라 들친 이불을 에스티니앙에게 잘 덮어주려는데… 문득. 허리까지 이불이 내려간 탓에 드러난 에스티니앙의 팔뚝이며 어깨선이며 허리가, 몹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티니앙은 참 아름다운 사내다. 본인이 '듣기 싫은 소리'라거나 '낯 간지러운 소리'라고 일축하며 들으려고도 않아서 내키는 만큼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아이메리크는 늘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짓는 투박한 표정, 그가 내는 투박한 목소리에 가리었을 뿐 그의 몸을 이룬 하나하나는 그 어떤 것도 빼놓지 않고 섬세하며 유려하며 아름답다고… 아마 이 이야기를 한대도 에스티니앙은 이번에도 '콩깍지'라고 일축할 테지만, 눈에 무언가 씌었대도 어떤가. 아이메리크의 눈에는 에스티니앙이 이다지도 아름답다는데.

그래서 이번에도 그 아름다움에 빠져 침대 곁에 선 채로, 살을 드러내고서 곤히 잠든 에스티니앙을 오래도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도 어찌나 부드럽게 흩어져 있는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냈대도 믿을 장면을 오래도 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불현듯 충동이 들었다. 카메라로 찍어둘까. …음, 잠시 고민했다. 어쨌든 아이메리크는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더더욱이 잠든 상태의, 무방비한 상태의, 심지어 반라(사실은 전라지만!) 상태의 연인 사진이라니. 에스티니앙이 나중에 본다면 거리낌 없이 '뭐 이런 게 좋다고 찍었어?'라며 핀잔만 주고 말 테지만 그저, 아이메리크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과민이라 해야 할까… 허락받지 않은 상황에선 찍고 싶지 않다. 연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끄응.

그렇게 한참 고민하는데, 에스티니앙이 후욱, 잠시 큰 숨을 내쉰다. 동시에 손끝까지 움찔. 아. 깨려나? 아쉽다. 그냥 빨리 찍을걸 그랬네. ……그런데 별 미동도 없이 그대로 쌕쌕 잔다. ……한참 후에도 별 움직임은 없었다. 어지간히도 깊게 자는 모양이다.

인정하기로 했다. 이 순간을 놓치기 아깝다고. 아마 찍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생각날 장면일 거라고. 그때 찍어두고서 에스티니앙이 보고 싶거나 에스티니앙을 욕망하고 싶을 때 볼 걸 그랬다고 계속 후회할 거라고. 그래서 조심조심 협탁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조심히 에스티니앙을 프레임 안에 넣고서,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

아마- 찍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했을 테다.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그 후회를 남기지 않았고, 제 눈에 담겼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잘 찍힌 에스티니앙의 사진에 만족했고, 덕분에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그 덕일까… 에스티니앙이 부스스한 머리를 해서 늘어지게 하품하며 방 밖으로 나와 아이메리크를 찾을 무렵에는, 그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추천해줬던 레스토랑은 잘 갔어. 연인도 만족하더군."
"가 보셨습니까? 가격대가 있는 곳이라 쉽게 가긴 어려우셨을 텐데."
"큰맘 먹고 갔지. 내가 랍스터를 샀는데, 워낙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맛있다고 했어. 좋은 식당 추천 고맙다."

점심시간, 부하 직원이 게 튀김을 먹는 것을 보고서 잊고 있었던 감사 인사를 떠올렸다. 좋은 곳에 다녀왔다며 언젠가 데이트할 때 가 보시라며 식당을 추천받았다. 그간 추천받았던 곳 중에서도 유난히 가격대가 높아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한동안 에스티니앙이 만들어준 식사만 먹고 외식은 그다지 하지 않은 듯해 주말을 앞두고 한 턱 낸다며 에스티니앙을 데려갔었다. 처음에는 비싼 것 같다며 탐탁지 않은 듯하더니 메인 요리였던 랍스터가 워낙에 맛있었던 덕에 다 먹고 나오는 길에는 에스티니앙의 기분이 유난히 좋았다. 분위기 좋게 집에서 한잔하자며 충동적으로 좋은 와인까지 샀을 정도니까. 덕분에 그날은 와인과 함께 에스티니앙에게서 서비스까지 받으며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때 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다.

"저는 랍스터는 못 먹어 봤는데… 괜찮던가요?"
"좋더군. 가격대는 있더라도 그 값을 충분히 했어. 사이드도 좋았고."

기대했던 것보다 상차림도 좋았다. 오랜만에 비싸고 예쁜 밥을 먹었으니 사진도 많이 찍어두었지. 먹어 본 적이 없다니 사진이라도 보여줄까 해서 포크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뒤졌다. 지난 주말이니까… 조금 스크롤을 내려 썸네일이 화려한 사진을 찾았다.

"와, 괜찮군요."
"그렇지? 자네도 언젠가 먹어 봐. 추천 메뉴인 이유가 있더군."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진을 휙휙 넘기며 몇 장 보여주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에스티니앙도 몇 장 찍었을 정도다. 아이메리크는 그 배는 찍었다. 그래서 신나게 각도별로 찍은 랍스터 사진을 넘기며 보여주다가 사진 한 장을 더 넘기려던 무렵,

잠깐.

왜… 불길한 예감이 들까.

이 사진을… 언제 찍었더라?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와인을 마실 무렵에는 아이메리크도 분위기에 젖어 랍스터 이후로는 사진을 하나도 찍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고, 그다음 날인 토요일은 에스티니앙이 '오랜만에 힘써서 그런가 피곤해'라며 늦게 일어났다. 아이메리크가 에스티니앙보다 일찍 일어나는 날은 드물다. 그날은 웬일로 아이메리크가 먼저 눈을 떴다. 그래서 잠든 에스티니앙을 구경했고… ……아차! 에스티니앙이 벗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

왠지… 지금 핸드폰에 떠 있는 랍스터 사진 다음에 에스티니앙의 사진이 나올 것 같은데.

서늘해지는 등골을 느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집어들며 사진 구경을 마쳤다. 다행히 부하 직원은 충분히 보여줬으니 여기까지, 라고 느낀 듯했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내려놓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하마터면 남이 에스티니앙의 반라 사진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말라붙는 바람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랍스터, 랍스터였던가…?

"좋네요, 저도 다음에 먹어 보겠습니다."
"아… 그래, 추천하지. 정말 괜찮았어."

다행히도 직원이 웃으며 말을 꺼내주었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바싹 마른 입 안을 느끼며 먹던 수프를 마저 한 입 먹었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입 안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잊고 있던 그 사진을 떠올려서.

*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다음 사진은 에스티니앙의 사진은 아니었다. 다다음 사진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정말로 한숨 돌렸다. 조심해야겠어. 그런 사진은 찍어 본 적이 없어서 바로 다른 폴더로 옮겨둘 생각을 못 했거든…."

오늘 저녁은 아이메리크가 만들었다. 계란옷이 조금 터지기는 했어도 제법 동그랗게 덮인 오므라이스다. 그 중간부터 푹, 스푼을 꽂아 넣고 퍼먹던 에스티니앙이 한술도 뜨지 않고 고해성사하듯 한숨 섞어 오늘 있었던 일을 터놓는 아이메리크와 눈을 마주쳤다.

어련히 '그러게 남이 보면 안 될 사진을 뭐 좋다고 찍었어?'라는 잔소리가 나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진이냐며 보자고 할 것도 예상했다.

"그러게, 그런 건 전용 폴더에 저장해야지."

…그런데 어쩐지. 예상과는 다른 에스티니앙의 태연한 반응이 날아든다. 미심쩍긴 했으나 으응, 하고 수긍하며 스푼을 들어 오므라이스의 끄트머리부터 베어 입 안에 물었다. 아, 조금 싱겁네.

"그런 사진은 남이 보면 싫잖냐. 위험한 것도 있고. 앞으로는 따로 잘 빼놔."

일부러 대답을 않고 우물우물 볶음밥을 씹었더니, 한 스푼 더 기세 좋게 퍼든 에스티니앙이 조언까지 덧붙인다. 흐으으음….

"으음… 그래야겠다."

아무래도, 수상하지? 이건 에스티니앙을 12년간 알아 온 경력까지 들먹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보다… 잘 아는군, 에스티니앙. 마치 많이 해 본 듯한 말투고."

순간 에스티니앙의 스푼이 멈춘다. 순간 이쪽을 살피는 눈에는 명백히 낭패라는 눈빛이 깃들어 있었다. 뒤늦게 에스티니앙이 퍼낸 오므라이스 한 스푼을 입으로 앙 집어넣는다.

"뭐… 그냥 그렇다는…."
"너도 내 사진 몰래 찍었나?"

우물우물. 볶음밥을 씹던 에스티니앙이 눈길을 피하며 느릿하게 한 입을 삼키고는,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노골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이상한 사진은 없어."
"무슨 사진인데?"
"그냥…."

아이 씨. 이제는 거친 소리까지 내며 머리까지 벅벅 긁는다.

"들키면 지우라고 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좋은 의도로 찍은 사진이라면 굳이 지우라고는 안 한다."
"나쁜 의도로는 또 뭘 찍어? 그런 건 없는데… 너 여튼 몰래 뭔가 하는 건 싫어하니까."
"그래서, 무슨 사진이냐니까."
"그냥… 너 자고 있을 때나… 낮잠 잘 때나."

둘 다 자고 있는 건 똑같은데.

"네가 찍었다는 것처럼 반쯤 벗고서 자고 있는 사진이거나."

또 자는 사진인가. 자는 사진뿐이잖아.

에스티니앙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지우라고 할까 봐 그러는지 종종 이쪽 눈치까지 살핀다. 뭐, 얼마나 잘못을 했다고 보지도 않던 눈치까지 보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놀라서 이쪽이 웃지 못해서인가.

"그렇게 많진 않아. 찍은 이유도 그냥, 가끔 일하다가 너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어서…."
"그렇다면 그냥 내가 카메라 보고 있을 때 찍지."
"좀 달라. 너 자고 있을 때는, 아… 젠장. 어쨌든 표정이, 뭐라고 해야 하나. 평화롭다고 해야 하나… 부드럽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기도 하고…."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이쪽을 보지도 못한다. …문득,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일하다가 자그마한 핸드폰을 들고서 자는 아이메리크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픽 웃는 그런 에스티니앙이.

아, 정말이지. 이런 낯 간지러운 일은 전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귀엽게 굴 줄이야.

"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무슨 눈?"
"지금 낯짝 부끄러운 눈으로 보고 있거든."
"아… 하지만. 네가 귀엽잖아!"

하, 크게 한숨 쉰 에스티니앙이 젠장, 하고서 크게 외친다.

"아, 계속 숨길 생각이었는데!"
"그건 또 좀 그렇지 않나? 어쨌든 도촬인데."
"너 자는 거 한참 쳐다보다가 사진까지 찍었다는 거 알면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게 뻔하니까 그렇지."

자는 걸 한참 쳐다보기도 하는군. 하여튼 귀엽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데 빤히 보여주면 화를 낼까 봐 입가까지 살짝 가리며 바라보았더니 에스티니앙은 이쪽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뭐라고 꿍얼거리면서.

"어쨌든 싫으면 다 지운다."
"아니, 안 지워도 돼. 안 보여줘도 되고. 앞으로도 찍어도 괜찮아."
"됐어, 이제 안 찍어!"

에스티니앙도 어떤 한 순간을 꺼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이메리크를 하나하나 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벅차오르는 기분이다. 사랑받는다고, 실감하는 기분. 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정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밥이나 먹자."
"그래. …아, 그래도 앞으로는 내가 널 보고 있는 사진도 많이 찍어줬으면 좋겠다. 우리 둘 사진도 많이 찍고. 어때?"
"……아, 알았어. …밥이나 먹으라니까. 그런 눈으로 그만 쳐다보고…."

카테고리
#기타
  • ..+ 1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