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에스아이] 금연할까요

2021. 4. 12.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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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지금, 아이메리크는 몹시 억울하다.

……제 입으로 말하길, 에스티니앙은 한때 헤비 스모커였다고 했다. 그건 무려 대학 시절 만났던 아이메리크가 알기도 전의 일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배웠던 담배에 그대로 빠져들어 근 1년간 그렇게나 담배를 피웠다던가. 건강 문제를 느끼기에는 어렸고 주변 눈총을 신경 썼다기엔 제 성정이 원래도 그렇지 않았으므로 왜 끊었는고 하니 가뜩이나 부족한 학생의 용돈 탓이었단다. 생활비에 지장이 갈 정도였다니 얼마나 피웠는지 알 만했다. 독한 마음 먹고 끊고 나니 끊기를 잘했다 싶었고, 그 덕에 에스티니앙은 대학을 졸업해 한 회사의 버젓한 팀장이 될 때까지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아이메리크는 상당히 가벼운 스모커였다. 임원이나 거래처에서 담배 타임을 요구할 때 응하려 시작했던 담배는 하루에 한두 개비나 피울 정도로 지속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갖고자 할 때 스스로에게 대기 좋은 핑계이기도 했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운 일을 정리하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취할 수 있는 마땅한 행동이기도 했다. 아예 끊을까 고민하기엔 크게 중독성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가끔 피우는 정도다 보니 흡연의 단점을 크게 느끼지 않기도 했다. ……그런 아이메리크가 담배를 끊어야겠다 결심한 이유는 오직 에스티니앙이었다.

한번 피웠다 끊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특히나 담배가 갖는 장점을 완연히 거부했고 단점을 크게 보았다. '담배 피우며 할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해도 충분하고, 머리를 비울 거면 멍하니 바깥이나 바라봐도 되고, 쉴 거면 커피 한잔 마시면 그만이고. 굳이 돈 들여 제 몸 망칠 이유가 없다니까.' 아이메리크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나,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자리와, 그 행동만이 갖는 유일하고 예민하며 미묘한 포인트가 있으니까. 물론 에스티니앙도 그리 말은 하지만 아이메리크가 굳이 담배를 피우는 기분은 아는 모양인지 '그러니까 너도 끊지그래'라는 말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메리크가 담배를 끊어야겠다 결심한 이유는, 오직 에스티니앙이었다.

제아무리 관리를 하고 자주 피우지 않고 그의 앞에서는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해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료이자 연인인 에스티니앙과 흡연 직후 마주치는 일을 아예 없애기는 어렵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그랬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아닌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표정은 오래도 기억에 남더군. 그런 데다, 아이메리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아직도 피워?'라며 책상 위나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을 톡톡 건드리는 에스티니앙의 말도 왜 잊히질 않는지.

그래서, 끊기로 했다. '담배 한 대 하지'라며 저를 끌고 나가 이야기를 나누려던 임원과의 대화는 굳이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하고, 쉬는 시간도 없이 일 하나라도 더 처리하려는 급한 마음을 끊어줄 마땅한 다른 핑계를 찾아야 하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때 그만큼의 시간을 제공해줄 간식거리라도 찾아야 하지만. 그래도…… 제게 에스티니앙이 한 번이라도 싫은 표정을 덜 짓고, 한 번이라도 싫은 소리를 덜 했으면 했다. 그래서, '담배 끊으려고 한다'는 말을 에스티니앙에게 꺼내놓았고, 그런 아이메리크에게 에스티니앙은 멋진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하지만 말이다. 지금, 아이메리크는 몹시 억울하다. 그야 그렇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여기저기 계약서에 딴지를 걸더니 끝까지 이럴 줄이야. 삐걱거리기는 했어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진행해온 건이었는데, 거래처에서 임원까지 나서서 다 진행한 프로젝트의 초기 계약 조건부터 변경하자고 들 줄은 몰랐다. 다시 구스르고 구슬러 다른 특약을 제공한다고 하면 될 것도 같지만… 그걸 위한 접대며 지난한 회의를 겪어 갈 생각을 하니 그저 까마득하고 끔찍하다. 한참을 통화하고도 결론이 나지 않아 며칠 후 미팅까지 잡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자… 속이 부글부글 끓고 머릿속이 휘몰아쳤다.

후우.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아주 깊고 긴… 한숨을 내뱉으며 양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괴고서는 그저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입술을 씹지 않기 위에 이에 힘을 주고 꾹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계약서를 보고는 있지만 아까까지 지겨울 정도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던 탓인지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이 일을 담당한 팀과 회의하고, 대책을 강구한 후에, 미팅 전략을 잡아야 하는데. 일 생각을 하자 끓다 못해 내려온 열이 전해져 함께 뜨거워지는 눈까지 꼭 감았다.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이런저런 계획의 한쪽 구석을 비집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익숙한 향과 맛이다. …담배다. 지금껏 금단 증상을 잘 이겨오기도 했고 그리 중독되지는 않았던 탓에 이토록 이 맛과 향이 떠오르는 적은 없었는데. 끊기로 결심하고서 주변에 두었던 것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다가, 잘 쓰지 않는 회사 서랍 한구석에 두었던 것을 아까 발견했던 탓이다. 보지 않았다면 생각나지도 않았을 텐데. 발견한 즉시 바로 버렸다면 또 이런 유혹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텐데. 입 안을 공허하게 메웠다 빠져나가며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흐릿하게 만들어줄 그, 감각이, 어찌나 그리운지.

…하지만 끊겠다고 에스티니앙에게 말도 해두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 ……그런 아이메리크를 움직이게 한 것은, 다시금 눈을 떴다가 마주친 모니터 속의 계약서였다. 한참 통화한 임원이 계속해서 물고 늘어진 계약서 한 줄을 보고 나니 열이 뻗쳐서 어찌 할 도리가 없더군. 결국 콱, 서랍을 잡아 뽑듯이 빼고 그 안에 든 담배를 잡았다. 남은 것도 딱 두 개비였다. 한 개비만 태우고, 한 개비는 버리자. 그리고 바람을 쐬며 감정을 정리한 후에 돌아와서 회의하자. 그래. 그리고 에스티니앙에게는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투정을 부리며 담배를 발견한 바람에 한 개비 정도만 태웠다고, 나머지는 버렸다고 조심스레 말해야지. …그래. 그렇게 하자.

재차 이야기한다. 지금, 아이메리크는 몹시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쫓기듯 옥상에 올라와 입에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이고서 한 입 빨았다. 오랜만인 탓인가, 예전 같았다면 입 안에 붙는 느낌이 들었을 매캐한 연기가 영 입 안에서 헛돌기만 하더군. 전이었다면 그대로 연달아 스트레스받은 만큼 빠르게 뻑뻑 피워댔을 담배인데, 어쩐지 불쾌한 기분이 들어 더 입에 대지 않고 그저 빨았던 후우우, 연기를 뱉어내기만 하고 있었다. 역시, 피우지 말걸 그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때였다. 흡연자들의 단골 장소니 들리는 것이 당연한 인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그 뒤를 굳이 돌아본 것은 아무래도 어쩐지 한구석이 켕기는 듯한 마음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이메리크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분명 이곳에 웬만하면 잘 오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되는…… 에스티니앙이 있더군! 심지어 아이메리크의 뒷모습을 보고 그를 알아보았는지, 마치… '너… 어떻게 여기서 이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마치 강렬한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눈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딱 한 번 빨아본 장초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조차 몇 초가 흐른 후에야 알았다. 땅에 떨어진 담배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올리자 여전히 충격받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이 먼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마저 피워라.' 그제야 아이메리크도 정신을 차렸다. 에스티니앙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고라도 쳤는지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추욱 처진 팀원을 데리고 있다. …아마, 위로도 해줄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해주려고 옥상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묘하게 삐걱대는 움직임으로 팀원을 데리고 최대한 담배 연기가 오지 않을 구석으로 가는 에스티니앙을 한참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져 비실비실 연기를 피워내는 장초를 바라보았다. 하……… 제기랄. ……담배는 그대로 밟아서 꺼버렸고, 올라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도망치듯 옥상에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옥상에서 에스티니앙과 마주친 충격에서 겨우 헤어나온 지금, 아이메리크는 몹시 억울했다!

정확히 하자. 에스티니앙은 지금까지 아이메리크의 흡연에 개입한 적이 없으므로 '너 담배 끊지 않으면 두고 보자'고 하지 않았으며, 금연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오직 아이메리크였으므로 이 약속에는 큰 강제성이 따르지 않는다. 더더욱 정확히 하자면 약속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이메리크가 스스로 선언을 했을 뿐이다. 이 선언은 어디까지나 아이메리크가 제자신과 한 약속에 가깝고, 끊겠다는 이유가 에스티니앙에게 있을 뿐 그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으므로 에스티니앙과의 관계성은 상당히 작다. 그 담배 한 대를 피우기까지 그리도 망설였던 것은 에스티니앙에게 '담배를 끊겠다'고 말했던 아이메리크 스스로의 마음속 높은 기준 때문이다.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지키고 싶다는 그의 완고한 고집 말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아이메리크가 그 선언을 깨고 담배를 피웠을 때 비교적 크게 깎여 내려가는 것은 아이메리크의 스스로를 향한 평가이지, 에스티니앙의 아이메리크를 향한 평가가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에스티니앙이 왜 그렇게 충격을 받는단 말인가. 아이메리크에게서 눈을 떼고 팀원과 걸어갈 무렵엔 왜 그렇게나 어두운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마치 제가 그렇게나 끊으라고 해서 이쪽이 단단히 약속했다는 양, '나랑 약속했는데 네가 이렇게 어길 줄은 몰랐다'는 듯한 에스티니앙의 표정은 뭐냔 말이다. 사실은 담배를 피우는 게 그렇게나 싫었나? 다시 피우면 그렇게 크게 실망할 정도로? 네게,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일이 그렇게 중요했으면 말을 했어야지!

[Aymeric de Borel] 에스티니앙.
[Aymeric de Borel] 저녁이라도 함께 할까?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속이 너무 복잡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메신저로 그에게 연락을 남겨놓았다. 앉은 채로 몇 번이나 몸을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끝에, 오래지 않아 에스티니앙에게서 답이 왔다.

[Estinien] 음
[Estinien] 그래 이따 얘기해

…이 무렵부터는 억울함이 최고로 치솟았다. 담배 피우는 걸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도 않았던 데다, 그저 끊겠다고 얘기했던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사실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나? …겨우, 겨우 담배 한 대인데. 지금껏 그랬던 적도 없고, 에스티니앙과 아주 중히 약속한 일도 아니었는데. 왜,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이렇게까지 떨떠름하게, 실망했다는 듯 반응하냔 말이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식자. 방향이 잘못되었던 감정은 금방 바른 길을 찾았다.

그래, 에스티니앙의 이런 태도에 불안한 제 마음이 모든 문제의 답이었다. 이렇게 억울한 것도, 도리어 화가 나는 것도 다 그 탓이었다. 담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금연한다고 했다가 다시 피우는 행동 자체의 문제도 아니었다. 아이메리크의 이 불안함도, 에스티니앙의 충격도 모두 같은 곳에서 기인했다. 지금껏, 아이메리크는 에스티니앙에게 했던 말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에스티니앙도 그래왔다. 한 번도 제게 말했던 것을 어겼던 적이 없었고, 잘되지 않거나 힘겨운 순간에는 행동하기 전에 말을 해두었다. 그렇게 상호 간에 쌓아온 신뢰였다. 네게 몰래 하는 일이 없다는 것. ……적어도 담배를 피우기 전에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아이메리크가 제 손으로 그걸 깨버린 셈이었다.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한 시점부터 그는 스스로 떳떳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불안한 거였다. 에스티니앙이 이 모습을 보아 버릴까 봐. 그러다 정말로 들켰고, 그러자 그 떳떳하지 않은 제 잘못을 가리려 도리어 에스티니앙의 배신감에 탓을 돌리고 억울해했던 거였다.

꼴사납군. ……하아아아. 이번에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뱉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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