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처음이 시작되는 순간은 외전

Adore U by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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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허공 위를 떠돌길 몇 분째.

내려앉을 기미 없이 어물거리는 모양새를 곁눈질로 흘끔거린다.

 

저 손바닥의 온도를 알고 싶다.

 

 


 

 

 

“사람이 엄청 많아!”

“하라주쿠니까.”

 

며칠 전부터 고대하던 첫 데이트. 데이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간질거리는 거였던가. 사귄 지 한 달이 꼬박 넘어가고 있지만, 서로 임무가 바빠 밖에서 따로 만나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고심 끝에 선택한 첫 데이트 장소는 하라주쿠. 저나 유우지 모두 걷는 걸 좋아해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리부터 둘러보자 싶어 타케시타도오리에 들어섰다.

평일 낮이니 인파에 휩쓸릴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적잖게 바글거리니 옆구리에 딱 붙여두면 좋겠는데. 기대감에 들떠 방방거리는 모양새는 귀엽지만 초입부터 제 옆에서 떨어지면 곤란하다.

이럴 땐 역시 손을 잡아야 하는 거지. 알고 있는데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다. 손을 쥐었다 피기만 하며 사토루는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훑었다.

 

손을 못 잡겠다.

말하기도 우스운 소재거리지만 최근 사토루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다. 그 고죠 사토루가 고작 손잡는 것 하나를 못 해 속을 끓이고 있다.

스구루에게 말하면 배를 잡고 웃다 쓰러지기 충분한 이야기 감이다. 저보다 눈치가 좋은 녀석이니 이미 파악하고 놀려먹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애먼 손만 꿈지럭대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유우지와 사귀고 나면 이제 머리 싸맬 일은 없겠다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번뇌의 연속이다.

 

 

“어! 나 저거!”

 

 

한참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제 옷소매를 잡아 오는 무게감에 사토루의 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가게 옆에 진열된 온갖 종류의 모형과, 저마다 길거리에 서서 하나씩 크레페를 먹고 있는 사람들. 평일인데도 계산대 앞에 줄이 제법 늘어져 있다. 보아하니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인 것 같아 반신반의한 마음이 들었지만,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유우지를 보며 사토루는 군말 없이 줄의 가장 끝자락에 섰다. 숙달된 직원들의 손이 어찌나 날쌘지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빠르다. 금세 차례가 되어 계산대 앞에 나란히 섰다.

 

 

“주문하시겠어요?”

“저는 96번으로. 유우지는?”

“점원 누나, 여기 제일 잘 나가는 게 뭐야? 추천 메뉴!”

“엣, 21번이 제일 잘 나가는데….”

“그럼 그걸로 부탁해!”

 

 

어른들한테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더니, 초면인 점원에게까지 대뜸 반말이다. 곰살맞게 웃으면서 말해오니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고. 아무래도 어리광의 일부인가 싶어 가벼이 넘어가게 된다. 주문을 마치고 20분 가량을 꼬박 기다려 받은 크레페는 예상대로 유우지의 반응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대단해. 엄청 예뻐. 맛있겠다!”

“서서 먹긴 좀 그렇고, 먹으면서 돌아다닐까.”

“좋아!”

 

 

복작하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먹고 싶진 않아서, 거리를 구경하면서 먹는 쪽을 택했다. 제 손에 들린 건 치즈 케이크와 딸기 아이스크림, 생크림과 딸기가 들어간 맛. 유우지의 손에 들린 건 생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맛. 일전에 같이 카페에 갔을 때도 유우지는 별 고민 없이 이달의 메뉴를 골랐다. 아무거나 잘 먹는 쪽인 건지, 경험이 부족해 취향이랄게 그다지 없는 건지. 둘 다려나 하는 생각을 잠깐. 그렇다면 앞으로 다양한 경험을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은 좀 더 길게.

 

 

“맛있어!”

“다행이네.”

 

 

속으로 뭉게뭉게, 생각의 구름을 띄우며 연신 옆만 흘끔거리던 사토루는 맛있단 감상을 들은 후에야 안심한 듯 제 입에도 크레페를 밀어 넣었다. 딸기와 치즈의 궁합은 역시 좋다고 할까. 두뇌 회전을 위해 온갖 스위츠를 섭렵하면서 제 입맛에 맞는 조합을 알아가는 중이다. 취향을 찾아가고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가. 아직 단 걸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먹을수록 괜찮다 싶고, 아무래도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단 건 계속해서 먹어야 하니, 이렇게라도 맛을 들이는 편이 낫겠지.

 

뭣보다 이제 같이 먹어줄 사람도 생겼고.

생각에 골몰하다 말고 슬몃 웃으며 한입 더 크게 베어 물었다. 크레페에 반달 모양 잇자국이 새겨진다.

 

 

“선배.”

“응.”

“내 거 먹어볼래? 커스터드 크림이 엄청 맛있어!”

 

 

발랄한 음성과 함께 제 앞에 불쑥 들이 밀어지는 크레페를 보고 사토루는 심중으로 당황했다. 그야 당연하잖아. 아직 손도 제대로 못 잡아봤는데, 이건 완전 간접…….

 

 

“선배 더워? 얼굴이 빨개.”

“…….”

“얼르은. 아이스크림 녹을 거야.”

 

 

그리 말하며 한입을 종용하듯 크레페를 쥔 손이 흔들린다. 유우지의 말마따나 아직 늦더위가 머물러있는 9월이다. 얼른 먹지 않으면 녹을 테고, 그리고 스킨십도 이제 차근히 해 나갈 거니 괜찮을 거고…. 어째 생각이 이어질수록 얼굴이 붉어지는 듯해서, 고개를 내젓고는 눈앞의 크레페를 작게 베어 물었다. 적당한 달큰함이 입안에 퍼진다.

 

 

“맛있네.”

“그치? 나 선배 것도 먹어볼래.”

“어? 어….”

 

 

얼결에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입 크게 앙, 깨문다. 새로이 새겨진 반달 문양을 멀뚱히 보길 한참, 아이의 치열이 고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거나 관찰하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와중에 유우지는 전혀 부끄럽지 않은 건가 싶어 혼자 억울하기도 하고.

 

 

“선배 것도 맛있다. 나 저기 구경할래!”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며 아무래도 상관없나 싶어졌다. 다시금 제 옷자락을 쥐어 잡은 이 무게감과, 한껏 즐거워 보이는 낯이 좋으니 그만이다.

 

 

 

“유우지. 다 녹았다.”

“으…. 어떡하지.”

 

 

초반엔 잘 먹던 크레페가 구경에 밀려 유우지의 손에만 자리하기를 한참. 굼뜨게 먹은 탓에 밑동과 종이를 뚫고 묽게 녹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똑 또옥, 바닥에 작은 원이 하나 둘 새겨지기 시작한다. 가방도 없이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나온 탓에 티슈가 있을 리 없고, 길거리 한복판이라 당장 닦을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근처에 아무 화장실이라도 들어가서 손부터 닦자.”

 

 

급히 아이의 남는 손을 끌어다가 움켜잡는다. 흐르는 걸 막아보겠답시고 유우지가 반대쪽으로도 쥐었던 탓에 아이스크림이 제 손에도 묻어났지만, 사토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보폭을 빨리했다.

 

 

“저기 롯데리아로 가자.”

 

 

머릿속엔 유우지가 찝찝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손부터 씻자. 화장실을 먼저 빌리고 나올 때 적당히 마실 거라도 사면 되겠지. 궁리를 세워가며 걷고 있던 차에, 어느 순간부터 옆이 조용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로 제 손을 맞잡고 있는 유우지가 있었다.

아, 그렇구나. 작금의 상황을 자각함과 동시에 사토루의 얼굴에도 달뜨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잡는다는 가볍게 넘길 법한 행동에 잔뜩 의식했던 게 저만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린다.

똑같이 서툴렀던 거구나, 우리.

 

 

“…처음 잡았네, 손.”

 

 

대답 대신 꼬옥 힘을 실어 붙잡아오는 기분 좋은 압박감을 만끽하면서, 사토루는 들썩대는 입꼬리를 억눌렀다. 기대했던 상황도 아니고, 시끄럽고 요란한 거리 한가운데 눅진하게 손을 맞잡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좋았다.

 

 

“나갈까?”

 

 

손을 씻고 예의상 주문한 음료는 예상대로 바닐라 쉐이크와 콜라. 제 물음에 음료를 쪼록 들이키던 유우지는 빨대를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잡아끌 필요가 없는데도 조심스럽게 손을 그러쥔다. 유우지는 별다른 말 없이 마주 잡은 손을 보면서 샐쭉이 웃었다.

얼떨결에 첫 관문 돌파다.

 

 

 


 

 

 

“테이프 넣을까?”

“좋아!”

 

 

일정이 빌 때마다 찾아오는 영화 데이. 오늘 감상할 작품은 유우지의 취향에 입각한 호러 영화다. 사토루가 갖고 있던 영화는 진즉 다 본 지 오래이므로, 요즘은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면 대여점에 들렀다가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사는 것이 으레 일과가 되었다.

테이프를 좀 더 구비 해두겠단 제 말에 유우지는 대여점에서 같이 고르는 게 좋은 거야, 하고 소곤거리듯이 작게 말했다. 그게 못내 귀여워 얼굴을 싸맸던 기억이 있다. 처음엔 신기하다는 듯이 방을 두리번거렸던 아이가 이제는 제 방처럼 당당히 들어와 자릴 잡고 앉는 것도 좋다. 감회가 새롭다고나 할까.

 

영화는 역시 어두운 방에서 봐줘야 하므로 감상은 대체로 저녁이나 밤. 지금도 밤 10시가 가물히 넘어가는 시간이다. 대여점에 들르기 전 라멘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로손에서 주전부리를 잔뜩 털었다. 시내에서 고전까지 꽤나 걸어야 하니 도착할 즈음이면 다 소화될 거라며. 그 말대로 한창때의 사내 둘은 벌써 소화가 다 됐다고 깔깔거리며 과자 봉지를 뜯던 중이었다.

 

 

“있잖아.”

“응?”

“유우지는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펑.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놀라 봉지의 배를 아무렇게나 쥐어 뜯어버렸다. 이런 분위기에 그런 질문을 던지다니. 매실 맛이라니 웃기겠다며 야심차게 골랐던 감자칩이 바닥에 후둑 떨어진다. 예상보다도 세찬 반응에 사토루의 눈이 댕그랗게 떠졌다.

 

 

“헛, 미안. 지금 치울게.”

“아니 이따 해도 되는데….”

 

 

기숙사 방에 청소기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고, 현관 옆 구석에 하나씩 구비된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전부다. 자신이 치우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유우지의 손목을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그 찰나 도망갈 구석도 없게 안쪽에 앉힌 자신의 철두철미함은 칭찬해주고 싶다.

 

 

“저번에도 물어봤는데 안 알려줬잖아.”

“…그거언…….”

 

 

사실 이미 한 번 날려본 적 있는 공격이다. 일전 사토루가 물어봤을 때도 유우지는 뭉기적거리며 넘겼던 전적이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무조건 대답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보통 이렇게 몰리면 내가 고백했으니 선배부터 대답해보라며 되받아칠 법도 한데,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는지 그저 우물쭈물. 늘 또랑한 목소리로 요연히 즉답을 해 오던 유우지 답지 못 한 모습이다.

 

 

“응? 유우지.”

 

 

나직히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가까이한다. 성큼 좁혀진 거리감 사이로 멀뚱히 바라보자 유우지의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졌다.

 

 

“나 선배 얼굴에 약한 거 알고 그러는 거지.”

“맞아. 들켰어?”

 

 

제 말에 이제는 아예 울상이다. 자꾸 비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사토루는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언제부턴데.

 

유우지와 연애에 접어든 지 세 달.

만남을 이어오면서 사토루는 아이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의외로 단 걸 좋아하는 편이고,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면서 자꾸 도전해 다음 날 고생하기 일쑤며, 코믹 액션을 좋아할 것 같은데 예상외로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신메뉴나 추천 메뉴를 주로 먹는다. 설령 그게 맛이 없더라도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전부 먹긴 한다. 또 외로움을 잘 탄다는 본인의 말대로 이따금 응석을 부려올 때가 있고, 그리고.

 

 

‘유우지, 눈 안 감을 거야?’

‘힉.’

 

 

제 얼굴에 약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손도 겨우 잡았던 때를 지나 포옹과 가벼운 입맞춤, 키스까지 차근차근히. 수줍음을 딛고, 연애에 서투른 유우지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단계를 밟았다. 이제는 셀 수 없을 만큼 해본 키스인데도 분위기만 잡히면 눈에 띄게 굳어버리고, 다가가면 흠칫거리고, 허리를 감싸 안으면 바들대면서도 등에 팔을 겹쳐 오는 게 못내 귀엽다.

그러면서도 제 반응이 궁금한지 키스를 한창 이어나갈 때 꼭 한쪽 눈을 슬쩍 떠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다시금 힉 소리와 함께 질끈 감아버리기 바쁘면서. 맞닿은 입술 새로 놀람의 탄식이 뭉개져 들어오는 게 귀여우면서도, 죄다 집어삼키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제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을 유우지로 인해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요즈음.

얼굴을 빤히 갖다 대고 있길 한참. 우직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유지는 한참이나 입술을 뭉개다 운을 떼었다.

 

 

“그… 전에 수돗가에서 있잖아.”

“수돗가?”

 

 

 

지금으로부터 몇 달 가량 전.

여름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리듯 울창하게 깔린 나무들의 잎사귀가 차츰 진해지던, 7월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날. 운동장에서 체술 훈련을 마치고 하나 둘 샤워실로 향하던 참이었다. 당장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싶은 마음에 유우지는 샤워실 대신 목전의 수돗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냉수에 땀을 씻어내고, 젖은 앞머리를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마땅히 물기를 닦을 게 없어 곧장 샤워실로 직행할까 싶던 찰나, 옆에서 불쑥 무언가가 들이 밀어졌다. 곱게 접힌 손수건과, 그와 대비되던 투박한 손.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올려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저만 보면 연신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던 두 학년 터울의 선배. 칠흑처럼 짙은 선글라스에 가로막혀 눈이 마주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적잖게 당황해 일순간 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있자 손아귀에 억지로 쥐어졌다.

 

 

‘이거 써.’

‘엇, 나 괜찮은데….’

‘그냥 써.’

 

 

그러고는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홀연히 사라졌다. 기숙사 방에 돌아와서도 유우지는 몇 번이고 수돗가에서의 찰나를 되새겼다. 고맙다고 하지 못한 게 계속해서 맘에 걸렸다. 본디 머리 굴리는 게 싫어 이미 지난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인데도.

베개에 머리만 뉘면 곧바로 잠들기 일쑤였던 저답지 않게 몇 시간이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싫게 여기는 후배에게 도움을 줄 리가 없으니 적어도 자신을 미워하진 않을 거라는 낙착을 내렸다.

 

다음날 세탁하고 말려 곱게 되접은 손수건을 돌려주러 갔을 때도 사토루는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우물거렸던 고마웠단 말을 겨우 전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수업 내내 선글라스 너머로 살짜금 보였던 푸른 빛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토독. 책상 위를 손톱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보조 감독의 말소리에 먹혀 허공에 흩어진다. 이유 모를 감질이 올랐다.

 

이후 자연스럽게 사토루에 대해 골몰히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도련님이라고 전해 듣긴 했지만, 이따금 마주칠 때면 그저 철없는 남고생으로만 느껴졌던 선배. 허나 손수건을 갖고 다닌다는 점에서 의외로 세심함을 겸비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선뜻 꺼내 건네주는 걸로 보아 다정한 면도 있는 것 같고. 늘상 봐왔던 퉁명스러운 모습 말고도 다른 면모가 더 있구나. 여러모로 의외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찾아내고 싶어졌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일면을.

 

그 뒤로 복도나 운동장, 자판기처럼 여럿이 모이는 곳을 갈 때마다 주위를 훑는 습관이 생겼다. 계속해서 눈길이 가고 관심이 동했다. 혼자 그를 보는 일이 늘어나며 알게 된 것은 사토루는 의외로 웃음이 많고, 단 걸 정말이지 엄청나게 먹어대며, 툴툴거리면서도 친구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둘의 옆에 있을 때마다 풀어지는 얼굴 표정을 읽었다.

홀로 배정된 임무를 마치고 보조 감독을 기다리던 시간의 여백. 한 번 트인 생각의 물꼬는 막을 새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장 저녁은 뭘 먹을지부터 시작된 가벼운 고민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자연스레 요즘 머릿속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의 생각으로 귀결됐다.

 

짧게나마 지켜본 게 전부지만 실은 숨겨진 온정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속내를 보일 줄 모르는 건지, 부끄러워 일부러 감추고 있는 건지. 조금만 드러내면 바닥을 치고 있는 주위의 평판도 높이 치솟을 텐데. 그렇게 되면 주위에 여자들도 늘어나려나.

 

 

‘…그건 싫은데.’

 

 

그의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속에서 거북함이 몰려와 뱃속을 헤집었다. 구역질이 이는 듯한 착각에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틈새를 비집고 저도 모르게 부정의 말이 튀어나와 당혹스러웠다.

 

싫어? 어째서?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파헤쳐 뿌리를 찾아내야 한다. 비단 호기심으로 치부하기엔 선을 넘은 지 오래다. 그의 주위에 다른 여자들이 있는 게 싫을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진 않다.

 

나 선배를 좋아하는구나.

저도 모르게 샘솟고 있던 연심을 겨우 알아차렸다.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단 것만 겨우 알고 있는 사내를.

 

 

 

눈을 꼭 마주 보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것뿐이었다. 그쪽도 자신을 좋아했으면 한다던가, 이어지고 싶다던가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건 뭘까나.’

‘…유우지가 도망갈까 봐.’

 

 

하지만 자판기에서 옷자락을 붙잡혔던 날, 도망갈까 그랬다며 변명을 늘어놓는 사내의 눈을 처음 볼 수 있었다. 옅게 내리깔린 다크서클에 피곤한가 싶은 생각이 일순간 들었지만, 그보다 영롱히 빛나는 푸른 빛을 감상하는 게 먼저였다. 금새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가려졌지만, 일단은 목표를 이룬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을 바라봐도 괜찮을까.

 

제게 좀 더 살갑게 굴어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으레 이뤄지지 않을 바람이라 치부했는데, 속으로만 뇌까린 제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사토루는 눈에 띄게 다정해졌다. 그렇다면 다음엔 대화를 길게 주고받아 보고 싶다, 단둘이 임무에 나가보고 싶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으면 좋겠다,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뻔뻔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계속해서 다음을 바라게 되었다. 이렇게나 많은 욕심이 제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달라지게 만드는구나. 사토루가 제게 미친 영향이라고 생각하니 이 생경한 변화마저 기쁘게 느껴졌다.

 

그러니 굳이 시작점을 꼽아 보자면 수돗가였을 거라고,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유우지는 이야기를 마쳤다. 말하는 내내 바닥만 주시하던 호박빛 눈동자는 부끄러움에 어지러이 일렁였다. 그 동요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져 지긋이 보고 있으려니, 기어코 양손을 펼쳐 제 얼굴을 가린다.

이미 늦었는데.

 

 

“이번에는 유우지 얼굴이 빨개졌네. 드물잖아.”

“…조용히 해.”

“싫은데. 귀한 모습이니까 좀 더 보게 해줘.”

 

 

그리고 말이지.

말을 이으며 넌지시 긴 팔을 뻗었다. 손톱 끝까지 발갛게 물든 손을 풀어내자 사이로 보이는 앙 다물린 여린 살. 그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다. 제 한 손에 다 잡힌 아이의 포개진 두 손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나는 아마, 그때도 유우지를 좋아하고 있었을 거야.”

 

 

이어진 제 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다. 본래 자신은 타인에게 뭔갈 빌려줄 만한 성격이 못 된다. 그런데도 부러 지나가다 말고 아이에게 가서 손수건을 건넸다는 건.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때도 자각하지 못했을 뿐, 유우지를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좋아한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구경하면서, 사토루는 두 사람의 처음을 곱씹었다. 오늘처럼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어렵게 어렵게 내뱉었던 연심. 그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진 상황이 한없이 즐겁다.

 

전세 역전이 이런 데에 쓰는 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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