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처음이 시작되는 순간은
선후배 AU | 첫사랑을 자각한 사토루의 연애 도전기
이타도리 유우지는 타인에게 살갑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에, 성큼 옮기던 걸음이 우두커니 세워졌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말소리를 흘려넘기며 사토루는 일전 유우지에 대해 내렸던 정의를 재차 곱씹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남을 따르게 하는 힘이 있는 녀석.
그 덕분인지 유우지의 주변엔 언제나 여럿이 모여있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거슬려 애먼 머리를 털어 넘긴 적도 더러 있다. 초면인 사람들과 잘도 떠들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가 어쩐지 얄궂게 느껴져 입술만 잘근거린다. 이대로 유우지에게 직행해 무리에서 끌어내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수업에 성실히 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출석은 빠지지 않고 한다. 지각은 최대 8분을 넘기지 않는다. 철칙이라기엔 고리타분하지만 나름대로 지켜온 것들이다. 분명 그래왔는데. 슬쩍 본 손목시계의 분침은 이미 수업이 시작한 지 20분이 넘어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대로라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당장 몸을 돌려 부지런히 움직여도 모자랄 판인데. 야가에게 시원스레 날아올 호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나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타입이었던가. 의아함에 기반해 툭 던진 자문에 곧바로 대답을 도출한다. 결코 아니라고. 고죠 사토루가 다른 이에게 관심을 쏟는 건 태어나서 처음, 유일하게 한 명에게만. 남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난다. 그 옆자리에 저만이 서 있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겨우 연심을 자각했다.
오가는 이 없는 정숙한 복도.
목 끝까지 단정히 채워 잠근 회오리 문양 단추.
따각대는 굽 소리가 좋아 언제나 즐겨 신는 구두.
첫사랑을 맞이한 순간은 이렇게나 단조로운 일상 한가운데서.
이상한 거나 삼키고 술식도 없다며 싫은 소리만 잔뜩 늘어놨던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감정의 시작점은 모르겠지만, 대신 다른 건 알 수 있었다. 엎질러진 물과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
제 감정을 시인한 날 사토루는 그간의 언행들을 되돌아보며 밤을 지새웠다. 몇 번이나 뒤척이며, 이불자락이 구겨지는 소리와 간간이 몰아서 내쉬는 한숨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메웠다. 언제나 고민 대신 순간의 흥미 본위로 움직이던 저답지 않게, 한참이나 머리를 싸맨 끝에야 겨우 낙착을 지었다.
지금부터라도 잘해주자.
기숙사 방에 내려앉았던 어둠이 걷히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내린 결론이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자신은 과거를 후회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를 생각해야 한다. 이제라도 조금씩 달라지면 그간의 과오를 무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교실에도 없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오전 임무를 급히 마친 뒤 돌아온 고전. 1학년 교실 앞을 괜히 기웃거려봤지만 유우지는 보이지 않았다. 고전으로 돌아오던 길에 보조 감독에게 물은 바로는 오늘 오프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판기 쪽에 있으려나. 평소 유우지의 단순한 행동 패턴을 되짚어가며 성급히 발을 움직였다. 자판기에 다다랐을 즈음 예상대로 익숙한 핑크 브라운의 머리칼이 시야에 잡힌다. 입꼬리가 제자리를 벗어나 멋대로 치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유우지.”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게 이런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무슨 엄마 찾은 미아도 아니고. 스멀스멀 몰려오는 부끄러움은 애써 모른 척 넘겨버린다. 한 뼘도 훌쩍 넘게 나는 키 차이 덕분에 구부정한 자세가 되었다. 유우지는 갑작스레 팔에 내려앉은 무게감에 당황한 듯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뒤돌아 온다. 그 찰나조차 기다리기 어려웠다.
“어라? 고죠 선배잖아.”
예상치 못한 인물인지 유우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기야 그럴 법도 하다. 먼저 걸어오는 말도 시큰둥하게 넘겼던 주제에 외려 먼저 찾아오다니. 와중에 몸을 돌리면서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사토루는 다시금 팔을 뻗어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진짜 어린 애라도 되고 싶은 거냐고. 연신 생각과 달리 움직이는 손을 한 대 내리치고 싶다.
이러려고 찾아다닌 게 아닌데. 오늘은 먼저 말을 걸어볼 요량으로 고전을 들쑤시고 다니긴 했지만 이런 그림을 원한 건 아니었다. 좀 더 고심해서, 인사말을 고르고 골라, 보다 멋드러지게….
“이건 뭘까나.”
“…유우지가 도망갈까 봐.”
그러니까, 간밤에 몇 차례나 돌린 시뮬레이션 속 어느 곳에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고. 제 소매 끝자락을 움켜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유우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놀란 기색이 가시고 그 자리를 메꾼 활기에 사토루는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다.
“나 선배 앞에서 도망친 적이 있었던가.”
“…혹시 모르잖아.”
“푸핫. 나 혹시 야생동물?”
와중에 눈 밑에 옅게 자리한 다크서클을 보이기 싫어 다른 손으로 선글라스를 고쳐 쓴다. 제 속도 모르는 주제에 연신 생글거리는 낯이다.
“나 도망 안 가, 선배.”
거봐. 이렇게 웃으면서 다정히 굴어주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유우지, 안녕.”
“에, 이제 와서? 뭐 상관없나…. 안녕, 고죠 선배!”
한발 늦은 인사에도 호쾌히 대답을 돌려주는 아이의 손에 들린 콜라 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음료를 마실 일이 있으면 언제나 콜라를 고르는 것 같다. 자신이 본 것만 해도 몇 번이나 된다. 그렇게나 좋은 걸까.
제일이라곤 없는 것처럼 모두에게 두루 곰살맞은 아이가 매번 고르는 음료가 어쩐지 싫게 느껴진다. 후드 색을 꼭 빼닮은 새빨간 캔을 공연히 원망을 담아 째려보았다.
네가, 그런 것보다도 나를 좋아하게 되면 좋겠어.
“그러고 보니 이타도리 교복은 고죠가 커스텀한 건가?”
“응. 유우지 패션 센스를 못 믿어서 자기가 했다고, 웁.”
“배가 많이 고팠나보네 스구루.”
많이 먹어? 악 다문 잇새 사이로 말을 흘리며, 눈치 없이 잘도 떠드는 입에 아무렇게나 쥔 감자튀김을 욱여넣었다. 저와 유우지를 좀 도와달라고 간곡히 말한 게 겨우 어제의 일이다. 사토루가 부탁이란 걸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며 흔쾌히 오케이 해놓고선, 이렇게 하루 만에 망쳐도 되는 건가. 감자튀김에 엉겨있던 소금들이 고스란히 손바닥에 달라붙어 냅킨으로 아무렇게나 털어 냈다. 입자 굵은 알갱이들이 맥없이 테이블 위로 툭툭 내려앉는다.
점심때를 다 넘기고서야 끝난 임무에 허기를 달래고자 들어온 맥도날드. 비싼 밥을 사주겠다는 제 말에 비프테키도 좋지만 오늘은 맥이 끌린다는 아이의 의견을 따라 정한 메뉴였다. 비싼 밥의 귀결점이 겨우 고기인 것도, 스테이크가 아닌 비프테키라고 말하는 것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저를 흘겨보며 우물대고 있는 스구루는 가볍게 무시한 채 유우지의 반응을 살핀다. 일순간 물음표를 띄운 듯한 눈망울이었지만 금새 신경을 다른 데로 넘겨버린 것 같다. 이를테면 손에 들린 햄버거라던가.
“유우지 맛있어?”
“웅.”
“푸핫.”
입에 양껏 넣은 탓인지 웅얼대는 대답이 돌아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쯤 벗긴 햄버거 포장지에 얼굴을 묻은 채 와구 와구 잘도 먹고 있다. 틈틈이 콜라로 목을 축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참 야무지고 복스럽게 잘도 먹는다. 벌써 다 마셔가는지 빨대로 들이킬 때마다 짜르륵 달해가는 소리가 난다. 맥도날드의 짭짤한 감자튀김을 썩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유우지가 맛있다면 그만이다.
코카콜라와 맥 셰이크 바닐라 맛.
곁들이는 음료 취향마저 이렇게나 다르다. 몇 마디 나눈 대화로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럴 때 보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게 여실히 와닿는다. 타인을 이렇게나 들여다보게 될 줄이야.
사토루가 음료 취향에 대해 곱씹으며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쇼코는 진즉 제 몫의 햄버거를 해치운 참이었다. 벽에 보기 좋게 붙은 금연 마크에 치마 주머니 속 담배곽을 만지작. 멀뚱히 입맛만 다시다 말고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이타도리는 교복 맘에 들어?”
순전히 사토루를 놀릴 요량에서 비롯된, 부정의 회답을 기대하며 띄운 물음. 입의 심심함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볼 셈이었다. 그에 사토루는 쇼코를 쓱 째려보다가도 영락없이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교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은 별로라 생각했으면 어쩌지. 적색보단 곤색이 더 좋았던 거 아닐까. 알고 보니 후드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던 거면. 바짝 타들어 가는 목을 축여볼 심산으로 셰이크를 쪽 빨아들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늑장 부리며 마신 탓에 물처럼 녹은 셰이크가 매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맘에 들어!”
낭창하게 돌아온 대답에 사토루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제 안목이 틀렸을 리 없다.
“진짜?”
“응. 선배가 직접 커스텀 해준 거니까. 하나밖에 없는 거고.”
그러니까 좋아.
샐샐 웃으며 덧붙여진 말에 하마터면 손에서 컵을 놓칠 뻔했다. 자꾸만 스르르 풀리려는 손의 힘을 억지로 다잡아본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춰주는 선글라스가 고마울 지경이다. 아니, 선배가 해줘서 좋다고 콕 집어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
좋아. 아이가 마지막에 말한 두 글자가 연신 귓가를 타고 맴맴, 빙그르르.
“사토루.”
“시끄러워.”
“얼굴 빨개졌다.”
“시끄럽다니까.”
“에, 선배 더운 거야? 여기 에어컨 잘 나오는데.”
얼굴을 붉히게 만든 장본인인 주제에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다.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라 됐다며 고개를 돌리려던 차에 대뜸 볼에 시원한 게 와닿았다. 제 콜라 컵을 가져다 볼에 대어 준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사토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너는 대체….
“어, 더 빨개졌다.”
“…하…….”
컵에 반쯤 남은 얼음을 죄 녹일 요량인지 계속 달아오르는 볼이 얄궂다. 늘 이렇게 다정한 아이다. 이번처럼 맥을 못 잡는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구석을 어루만져올 때도 있다.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육안을 갖고 태어나 늘 꿰뚫어 보는 쪽이었던 사토루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보여지고 있다는 감각. 이상한 거나 삼킨 이 아이가 제 처음을 죄다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못내 억울하고 한 번씩은 분할 정도지만, 그래도.
감았던 눈을 뜨고 눈앞의 아이를 마주 보며 재차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좋다고.
“선배랑 임무 엄청 간만이네!”
“그러게.”
유우지의 말마따나 무척이나 간만의 합동 임무다. 아직 심사에 오르지 못해 등급도 없지만, 유우지의 실력은 거즘 1급에 상정하니까. 특급인 자신과 같이 임무에 나설 일은 드무므로 오늘은 그야말로 기회나 다름없다. 소풍이라도 가는 어린 애라도 된 듯이 동이 터올 무렵에야 어렵사리 눈을 붙였더랬다. 티 내기 부끄러워 태연한 척 굴고는 있지만, 들뜬 건 이쪽도 매한가지란 소리다.
유우지가 고전에 온 직후 현장을 알려주라는 명분 하에 함께한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가능하다면 없던 일로 치고 싶다. 온갖 트집을 잡아 싫은 소리만 남발했던 기억밖에 없어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멍청이가 자신이란 걸 믿고 싶지 않다.
“선배 끝나고 다른 임무 있어?”
“아니, 없어.”
“그렇구나.”
실은 있었지만 없앴어. 뒷말은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납작이 합. 끝나고 밥이라도 먹자고 해볼 요량으로 뒤의 임무는 죄다 스구루에게 떠넘겼다. 조만간 잠잘 틈도 없이 종일 임무만 돌게 될 줄 알라는 으름장에도 어깨만 가벼이 으쓱였다. 그깟 잠 하루쯤이야 꼬박 새워도 그만이다. 피로에 뻑적지근해질 눈보다 오늘의 밥 한 끼가 제게는 더 중요했다.
보조 감독의 차에서 내려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 내내 유우지는 달뜬 듯이 재잘거렸다. 그에 호응해주기도 바쁠 판에 사토루는 대답도 설렁하게 넘기며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렵사리 굴러 들어온 기회를 왜 제 발로 걷어차고 있는가 하면.
유우지와 걷는 속도를 맞춰보려고.
스스로도 우습다는 자각은 있다. 분에 맞지 않는 짝사랑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그간의 행실을 되짚어보며 앞으로 어떻게 굴어야 할지를 고심하는 쪽이었다.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제는 엎지르지 말아야 하니까. 함께 이동할 때면 늘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오던 아이를 불현듯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기본적인 관념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우지가 어떤 표정으로 제 등을 바라봤을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뒤돌아 살펴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부터라도 나란히 걷게 된다면 신경 써서 속도를 맞추자. 서투른 다짐 아래 넘겼던 어느 날의 밤이 있었다.
허나 말은 뱉으면 그만이라 편이하며, 행동으로 옮기기까지가 어려운 법이다. 이런 것도 해봤어야 말이지.
멋대로 내뻗치는 길쭉스름한 다리에 제약을 두는 건 생각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보폭을 좁혀보는 건 처음이다. 애초에 걷는다는 행위에 신경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사토루의 주변인들이 이 모습을 알면 뒷목을 잡고도 남을 것이다. 그간 천천히 가자는 말을 진탕 무시해온 전적이 다분하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사람을 단번에 바꿔버린다.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이런 데엔 무지했음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유우지는 속도를 늦춰달란 말 대신 제 걸음을 더 빨리하기 바빴다.
“고죠 선배 오늘은 천천히 걷네.”
“어? 어.”
“나란히 걸으니까 좋다.”
선배 옆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기분이라 기뻐.
예상치 못한 언사에 발이 우뚝 세워졌다. 맞아. 유우지는 이런 아이였지.
약한 사람은 피곤하다는 제 말에도 모질다 탓하기는커녕, 빨리 강해져서 나란히 서겠다며 주먹을 쥐어 보였던가. 뼈의 굴곡이 훤히 보이는 손등에 가늘게 도드라졌던 핏대를 기억한다. 고작 그런 말 한마디를 뱉으면서 저렇게나 힘을 실을 일인가.
대뜸 거부감이 앞섰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 아니라서. 저와 대등해질 때까지 노력하겠다던 이는 꽤 여럿이었다. 무릇 꼭대기라는 건 누구나 올라오고 싶어 하는 자리니까. 노력이란 건 어렵고, 꾸준함은 곱절로 힘이 든다. 상전 술식과 타고난 전투 센스까지 갖고 있음에도 의외로 노력파인 사토루는, 그에 드는 노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술식을 타고나놓고도 적당한 등급에 안주하는 주술사들이 여럿이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그에 상정하는 위험한 임무가 배정되고, 이는 생사의 당락에 직결되니까. 아무리 직업이 직업이라지만 막상 목숨을 내거는 건 겁이 난다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느껴본 적 없는 자신은 이해 못 할 감각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와 남들이 다른 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잔뜩 봐서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올 뱃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다고.
오밤중에 끝난 임무에 뻐근한 어깨를 주물러가며 돌아왔던 고전. 몸을 풀고 잘 요량으로 체력 단련실을 찾았다가 뜻밖의 환한 불빛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기 때문이다. 핸드폰 플립을 열어 확인한 시간은 새벽 두 시를 아슬하게 넘기지 못한 어드메.
얼마나 여기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흠뻑 절은 머리칼과, 미약한 바람결을 타고 스쳐온 땀 내음. 모두가 잠든 어슴푸레한 새벽에 두 사람만이 깨어있었다. 얼굴에 송글하게 맺힌 땀방울이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지고, 유독 반짝이는 섬광에 사토루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이후로도 새벽에 단련실에서 유우지를 발견하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돌아가는 날이 늘었다. 술식 대신인가 싶을 정도로 타고난 몸과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는 주제에 계속해서 자신을 단련한다. 그 우직함이, 끈덕짐이 싫지 않았다.
이 녀석은 진짜 올라와 볼 생각인 거구나. 정말로 나와 나란히 서고 싶은 건가. 좋을 거 하나 없는 이 지옥 바닥에. 아마 그즈음부터 유우지를 볼 때 얼굴을 느슨히 풀게 되었다.
“선배?”
“…유우지.”
“응?”
“끝나고 같이 밥 먹자. 사줄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전날 몇 번이고 연습한 대사 한 줄. 제 옆에 서겠다고 그렇게나 노력해준 아이인데, 긴장에 절어 할 말도 못 한다는 게 싫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이유에 저와 같은 감정도 실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좋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일순간에 환하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멀거니 바라본다.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도 기뻐해 주는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좋아!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이쪽이 할 대사지 않나.
아마 말하더라도 어째서? 하고 고개나 갸웃거리겠지만.
긴자에 즐비한 고급 스시 집들을 뒤로한 채, 유우지가 가고 싶다며 손가락으로 콕 집어 가리킨 곳은 회전 스시 집이었다. 스시가 먹고 싶은 건가 싶어 데려가고 싶은 1인당 3만엔의 가게가 있다고 하자, 유우지는 곧바로 양 검지 손가락을 엇갈려 X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 비싼 건 먹으면서 바로 체할 것 같다나. 우선 먹이고 난 뒤에 금액을 알려 주던가 할 걸. 회전 스시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사토루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해야지. 약속도 잡지 않은 주제에 멋대로 나중을 기약한다.
오전부터 이어진 임무라 식사를 마치고도 이른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갈 기미조차 없는 오후 3시. 이대로 곧장 고전으로 돌아가자니 아쉽고, 더 붙잡을 구실은 없고. 애꿎은 휴대폰 플립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궁리한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유우지. 영화 볼래?”
자신의 제안에 또록, 눈을 반짝이는 아이의 커다란 눈에는 긍정의 뜻이 담뿍 실려있었다.
“선배 방 깔끔하네!”
다행이다. 생각보다 멀쩡한 방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사토루는 굳어있던 어깨에 힘을 스륵 풀었다. 평소 사용 공간을 어지럽히는 타입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아이를 들이려니 신경이 쓰였다. 고전으로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아침의 방 상태를 되짚었던가. 영화관 대신 제 기숙사 방으로 데려온 건 엄청난 용기였다. 좁은 방 안에 단둘이 있게 될 거라 생각하니 메마른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권유하기까지의 찰나, 극심한 긴장에 귀까지 먹먹했다. 금요일 오후,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긴자 중앙로가 고요하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난 후, 조심스레 제 방으로 가자고 말하자 유우지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아, 의아할 만도 하다. 유우지의 의문을 눈치챈 사토루는 기숙사 구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고전 기숙사에 널린 방들은 저마다 구조가 조금씩 달라서, 조리 시설이 있는 방도 있고 제 방처럼 작은 TV가 달린 방도 있다. 그러고 보니 유우지의 방은 어느 쪽도 해당이 안 됐던가. 유우지가 기숙사에 들던 날 복도를 지나다 열린 방문 너머로 슬쩍 본 게 전부라 가물하다. 요리를 하고 싶을 때면 식재료를 챙겨 옆방으로 간다고는 들은 적이 있다. 방을 바꿔주라고 말해볼까. 자신이 아닌 이와 요리를 하고 도란대며 나눠 먹을 거란 생각에 속에서 부레가 끓는다.
“이거 볼래?”
“좋아. 무슨 내용?”
“가족에 대한 얘긴데, 감동적이고 좋았어. 마지막에 개가 죽는 건 슬펐지만.”
“와, 엄청난 스포일러….”
방심하다 당한 스포일러에 유우지가 탄식을 뱉고 있을 때, 사토루는 대답 대신 자세를 낮춰 쌓아둔 테이프들에 손을 뻗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케이스의 이음새를 비집고 벌린다. 달칵 소리와 함께 얇은 플라스틱의 틈이 맥없이 벌어지고, 테이프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내용물이 빠진 빈 케이스를 아무렇게나 얹어두고 도로 몸을 일으킨다.
“테이프가 엄청 많네! 선배 영화 보는 거 좋아해?”
“나름? 자주 보는 편.”
“그렇구나.”
임무가 바빠 짬이 자주 나는 편은 아니지만, 여유로운 틈이 있을 때면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머리를 써야 할 때도, 너무 굴려 쉬게 해줘야겠다 싶을 때도. 장르만 바꿔가며 보면 그만이라 요긴한 취미다. 그렇다 보니 아이의 말대로 꽤 다양하게 모아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화를 고른 데엔 이유가 있다.
“영화 보면서 뭐 먹을래?”
우는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어서.
매사에 방실대는 낯으로 일관하는 유우지가 울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애초에 영화부터가 슬픈 걸 보여줄 작정으로 던진 수긴 했다. 극장 대신 방을 고른 이유는 하나. 유우지가 우는 모습은 자신만 보고 싶어서. 물론 이래놓고 의외로 눈물이 없는 타입일 지도 모른다. 어느 쪽도 상관없긴 하지만, 조금은 아쉬울지도.
“혹시 감자칩 있어? 콜라도! 아까 사올 걸 그랬나.”
“둘 다 있어.”
“오!”
감탄사를 날리며 반색하는 모습을 보고 사토루는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서랍장 문을 열어 언젠가 유우지 생각에 사두었던 감자 칩을 꺼낸다. 설마 이걸 본인에게 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냉장고에서 마찬가지로 유우지 생각에 사둔 콜라 캔 두 개를 꺼내 자리로 돌아간다.
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상념들이 퐁퐁 솟아오른다. 책상 의자를 제외하곤 방에 달리 앉을 데가 없어서긴 하지만, 여러모로 곤란한 풍경인 건 사실이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 영화 볼까.”
“휴지 더 줄까? 물은? 목 안 말라?”
안절부절. 티슈를 옆구리에 끼운 채 사토루는 연신 유우지의 상태를 살폈다. 걱정이 실린 물음에 유우지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단 철없는 생각에 고른 영화였지만, 설마 이 정도로 울 줄은 몰랐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나올 땐 흐뭇하게 보던 유우지는 개가 점점 나이 들며 아파하는 모습에 얼굴을 구기더니, 죽는 부분에 다다르자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옥견을 유독 예뻐하던 유우지였지.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든 채로 코를 팽 푸는 모습을 보면서 사토루는 멋쩍음에 볼을 긁적였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마음 반, 우는 모습도 귀엽네 싶은 마음이 반이다.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에게 걸린 건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괜찮아?”
“응. 고마워, 선배.”
김이 다 빠져 맹탕일 콜라를 쭉 들이킨 유우지가 진정된 듯 후, 하고 밭은 숨을 뱉었다. 눈망울에는 여전히 물기가 서려 있다.
“그래도 좋았어. 오랜만의 영화여서 더 그런가.”
“다행이네.”
유우지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사토루가 계속 옆에 끼고 있던 티슈 곽을 빼내어 침대 구석에 밀어두었다. 이제 여기 좀 앉아 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토루를 빤히 쳐다보며 유우지는 제 옆을 톡톡 두들겼다. 제 침대임에도 머뭇거리던 사토루는 한참을 쭈뼛댄 후에야 겨우 걸터앉았다. 사토루가 옆에 앉은 걸 확인한 아이의 시선이 창가로 돌려진다. 차츰 어두워지고 있는 바깥을 빤히 응시하는 모습에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음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내가 종일 선배를 독점했네.”
독점? 갑작스러운 말에 사토루는 단어를 곱씹으며 가만히 하루를 되짚었다. 함께 임무를 하고, 밥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와 영화를 본 지금까지. 아이의 말마따나 온통 유우지로 꽉 채운 하루였다. 그래서일까. 엄청난 긴장이 동반되긴 했지만 그런 걸 전부 상쇄시킬 정도로 충족되는 느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에 휩싸인다.
“있지. 나는 오늘 엄청 좋았어.”
“…나도, 좋았어.”
“진짜?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쁜데.”
잔뜩 울어 발갛게 물든 눈꼬리를 살풋 접어가면서 그런다. 코가 막혀 맹해진 목소리로 유우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 선배의 하루에 내가 들어가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
유우지의 말을 뒤따르듯 띄워진 의문. 뜻을 헤아리지 못해 되물어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다. 기어코 제 처음을 하나 더 갖고 간다. 심히 긴장한 탓에 사고가 멈춰버린 것 같다. 사토루는 깜빡여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커다란 눈을 멀뚱히 뜨고만 있었다.
“그야 선배를 좋아하니까. 당연한 거잖아.”
“…….”
뭐라고.
사토루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다물어야 한다는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 언제부터? 물어보고 싶은 말은 잔뜩인데, 어지럽게 뒤엉켜 꽉 막혀버려 어느 것 하나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설마 좋아하는 아이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 낡고 좁은 고전 기숙사 방에서, 슬픈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너무 놀라면 입이 벌어진다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 제 모습에 유우지는 말아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는 작게 키득거렸다.
아, 웃는 거 귀여워. 와중에 이런 생각을 잘도 한다.
“나 그다지 욕심도 없고, 뭘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거의 없어. 취향이랄 것도 딱히 없고.”
알고 있다. 유우지는 매번 한 발짝 물러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쪽이다. 출장의 기념품 등을 나눌 때 언제나 마지막에 남는 걸 고르는, 이타적인 걸 떠나 순수히 바라는 게 없다.
“근데 선배한테는 계속 다음을 바라게 되는 거야. 나를 싫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좀 더 살갑게 대해주면 좋겠다, 대화도 좀 나눠보고 싶다. 자꾸 욕심이 생기고….”
“…….”
“내가 자꾸 바뀌는 게 싫지가 않고, 신기하고 좋았어.”
“…….”
“거기다 선배도 점점 변해서 나한테 잘해줬잖아. 내 욕심을 다 이뤄주니까 더 다음을 바라게 되고….”
“…….”
“선배는 왜 변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
또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생글 웃는 모습.
당장의 형세가 싸움이고 승패를 가려야 한다면, 명백한 이쪽의 패배다.
“…유우지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순순히 졌다는 걸 인정하고 원할 법한 대답을 되돌려준다.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아마 자신이 이길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막 시작되려는 순간에 평생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긴가.
“나랑 사귀면 더 달라지게 될 거야. 두 사람이 좋아한다는 건 혼자일 때랑은 또 다르니까.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응. 하게 해줘.”
빙글, 제 세계가 반전하듯 뒤집힌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생경하고 긴장되며 못 견디게 즐거울 나날들의 연속.
낯선 세상에 두 사람이 나란히 발을 들이기 직전.
제 말에 아이는 가장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 고마워!”
그니까,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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