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갈래요

집에 돌아갈래요 4

빙의는 처음이라 4

공백 by 황제
1
0
0


"진짜 망했다. 진짜 망했어."

"그래도 서진이가 네게 난리를 치진 않을 거니 괜찮을 거란다."

정말 그럴까요? 역시 내가 전담이니까? 아무 능력도 없고 머리도 나빠진 나를 필요로 해주다니. 에스퍼에게 평범한 인간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 거지. 다른 소설에선 이상한 기운을 준다거나 하던데. 휴대폰으로 찾아본 결과 에스퍼 이외에 구분은 없었다.

"걔가 무슨 능력인지도 기밀인거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게 유난으로 검사를 받긴 했지만, 부모님은 저를 위한 건지 원래 이런 성격이신지 길게 슬퍼하진 않으셨다. 역시 현실적인 가족 같달까. 사실 조금 살짝 기대했을지도? 기억상실 빙의 클리셰가 두 가지 있지 않은가.

'너 또 지금 관심 받으려고 그러는 거지?' 하는 관계 개 박살 상태와,

'다행이야, 정말로. 네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 거지.' 오열을 하며 빙의자를 너무나 애정하며 난리법석인 상태.

최신에 올라오던 웹툰들이 죄다 그런 것 뿐이라서 거의 초반 화만 보고 안 봤었지. 사실 무료가 아니면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기도 했고, 웹소설 원작 웹툰들은 댓글만 좀 타고 들어가도 이미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스포해둔 것들이 있어서 그것만 슬쩍 보고 나오기도 했었다.

우선 이 세계 설정은 판타지인 것 같은데. 이미 백서진과 제가 전담을 맺어버렸으니 백서진 주역의 로맨스는 아닌 것 같다. 넓은 병실에 혼자 앉아 있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곧 있으면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 상태라서 머리가 어지럽기도 해서 멍하니 정면 벽에 부착된 TV화면에 비치는 인영을 바라봤다.

위화감이 없네 위화감이.

제 것처럼 움직이는 몸에 고갤 이리 저리 기울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생. 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데, 죽은 게 아니니까.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독립했다고 치기로 할까나. 아빠가 늘 하던 말이 있지 않았나. '너 이럴 거면 나가 살아!' 라고 하지만, 정작 진짜 제가 나가면 외로워 할 거면서. 키득이며 침대에 푹 누웠다.

이틀 뒤에 기숙사에 들어가야한댄다. 기억 상실이라고 해도 외상이 없어서 침상을 차지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여기 아빠와 함께 퇴근하며 퇴원하기로 했다. 말이 입원이지 그냥 아빠 직장에 놀러온 아들 취급이라. 기억도 안 나는 나이 지긋하신 의사부터 네가 원장님 아들이라며? 로 시작해서 줄줄이 얼굴 도장을 찍고 간식거리를 안겨주고 가셨다. 몇몇은 몇 번 얼굴 봤는데 기억나냐 운을 떼었지만 기억 상실이라는 걸 알고 껄껄 웃으며 사과했다. 그리 미안해 보이진 않으시던데.

뭐, 사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더 편했다. 진짜 기억 잃었으면 개 슬펐을 걸? 아저씨 다행인 줄 아세요. 제가 빙의한 25살 청년이라 오글 거리는 건 사양이거든. 제가 전생에도 사이다만 먹고 살았어요. 고구마는 쳐다도 안 봤어.

엄마도 출근해서 병실엔 저 혼자 뿐이었다. 할 일도 없고, 할 것도 없고. 내친김에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이제까지 자세히 보지 않아서 낯선 얼굴을 조금이라도 익혀두려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예쁜 여자 아이돌도 이만큼이나 확인하진 않았는데. 이참에 전부 볼까 해서 헐렁한 환자복을 가볍게 훌렁 벗어 전라로 거울을 확인했다.

본래 제 머리카락보다 짙은 검은 모발을 쓸다가 이마 뒤로 넘겼다. 바깥을 자주 돌아다니는 것 같진 않게 생겼는데. 의외로 근육이 잘 잡혀 있고, 거시기는... 평균이군. 아랫배를 만지다가 다시 양 뺨에 손을 얹었다. 살집이 없는 뺨. 단정한 눈썹과 조금 처진 눈꼬리가 순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잘생겼다는 아니고. 단정해 보인다?

턱에 손을 올리고 연예인처럼 -사실 좀 이정도면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이리저리 고갤 돌리고 있으니, 병실에 사람이 들어온 건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또 의사인가? 아니면 회진도는 간호사일지도. 나가기 위해 다시 환자복을 입으려고 드는데, 철컥 하며 잠기지 않은 화장실 문고리가 열렸다. 

"..."

"..."

미친놈이. 

...

"안 나가?"

"안 입어?"

누가봐도 백서진인 얼굴이 태연하게 화장실 문을 열고 거기서 맨 몸인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서로 눈을 크게 뜨고 놀랐지만 이내 녀석은 기가 막히게도 저보다 더 뻔뻔하게 굴었다. 그런 행동과 얼굴에서 비롯된 확신. 저놈이 백서진이 아니라면 손을 자를 수도 있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은 핸드폰 갤러리에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이 유난히 많은 비율을 차지한 놈이었으니까.

염색을 한 것처럼 예쁘게 빛나는 옅은 갈색의 머리가 문간에 기대진다. 나갈 생각도 없고 문을 닫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아예 팔짱까지 끼고 시위를 했다.

"계속 나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면 나야 좋지."

이러고 있어봐야 나만 손해라는 걸 깨달았다. 점이 어디어디 있나 보기 위해 (상)남자답게 다 벗은 게 문제였다. 말을 꾹 참고 시선을 모른 척 하며 옷을 입었다. 제가 나온 남고는 교실에서 까벗고 수업도 들었는데 이런 거라고 못버틸까. 제 거시기도 기죽을 크기가 아니니 당당하게 옷을 입고 백서진의 얼굴을 마주했다.

"머리가 어떻게 됐다며?"

너 이자식 아무리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아니 부부와 비슷한 전담같은 계약관계라도 애인이라고 했으면서 빙의 기억상실 클리셰 1번, 관계 파탄 발언을 해?

"응."

비키라는 듯이 바로 앞에 몸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더니 실실 웃고만 있고 문에서 비킬 생각을 않았다.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콱 구기며 평범한 체격의 황지현보다 1.5배는 큰 판타지 소설 주조연이라도 안 주면 억울하게 생긴 미남의 어깨를 퍽 밀어 길을 열었, 려고 했는데.

"뭐가 응이야? 그래서 내 연락에 그 지랄 한 거야 지현아?"

단단하다. 이자식... 듬직한데? 도, 돌덩이야 뭐야? 밀던 것도 관두고 아예 어깨에 얹은 손으로 몸을 만지작댔다. 게다가 목소리도 그리 낮지 않고 시원하고 사근사근한게. 어쩐지 친절하게 잔소리를 듣는 기분인데. 정작 내용은 삥 뜯는 시정잡배나 다름 없다.

"백서진."

"서진아."

"서진아."

둘이 성 떼고 부르는 걸로 약속하기라도 했나? 마치 부부싸움 할 때 성을 붙여서 기분 나쁜 것을 티내는 아내가 된 기분이다.

"왜 불러 지현아."

"비켜."

비키라니까? 황지현의 눈매는 쳐져 있어서 모난 눈을 해도 그냥 불쌍하게 보였다. 속에 있는 황제현은 지금 불만을 표하고 싶은데! 비키라는 말에도 당당히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어깨를 꾹꾹이만 해주고 있었다. 소설에서 에스퍼의 몸이 단단하고 강하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를 몸소 느끼게 해주는 중이었다.

"지현아, 여기 누가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옷을 죄다 벗고 있었어? 누구 보여주려고?"

"내가 보여주긴 누굴 보여줘! 그리고 문 닫아놨는데 들어온 건 너잖아!"

"서진이."

"서진이 너잖니."

목청을 높이는 쪽이 손해구나.이렇게 친절히 대화로 알려주니 얼마나 좋아.

좋긴 개뿔이. 왜 안 비키냐고.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눈을 맞추고 있으니 그제야 몸을 물렸다. 겨우 비좁은 병실 화장실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이자 이번엔 손목이 잡혔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내가?"

"응, 네가."

기억 상실이라고 다 듣고 온 주제에 뭐가 더 필요하다고? 정말 모르겠다는 무해한 얼굴로 벙쪄 있으니 또 마음에 안 든다며 표하는지 조금 펌이 들어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와, 화보 찍나. 정직한 미남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에 오른쪽 눈썹 위에 점이 하나 있어 더 돋보였다. 짙은 눈썹이 각지게 선이 똑떨어지고 속눈썹은 길고 조금 쳐저있어 음울해 보일 법도 한데 머리색에 맞춰 옅은 갈색의 홍채와 대비되는 선명한 동공이 저만을 비추고 있었다. 날렵한 얼굴선, 코도 높게 서있고 엷은 분홍빛의 입술은 터지지도 않고 부드러워 보였다.

와중에 애는 애라고. 볼살이 저보다 더 말랑해보여서 만지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

"기억 잃었다며 지현아. 너 전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됐다면서. 그럼 나한테 누구냐고 물어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상의 해야지."

누군지부터 시작하면 니가 누군 줄 알고 그걸 상의하는데. 또 이제까지 자연스럽게 이름 부르고 있었잖아. 뭘 더 물어봐야 하는데. 진짜 뻔뻔하게 잘생긴 미친놈 아냐 이거? 엄마의 말은 다 옳구나.

"일단 네가 누군지는 엄마한테 들었어. 네 전담이라며."

사실 누가 누구의 전담인지 모르겠다. 서약이라고 하면 서로를 위한 관계인데, 에스퍼를 위한 장치라기엔 본인이 너무도 하찮아서. 원래의 황지현은 똑똑하기야 했겠지만, 일반인과 능력자의 삶은 완전히 다르니까. 머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 그래서 필요하구나!

그래. 에스퍼들이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일전에 아이돌을 하던 사람들이 은퇴하고 나서 홀로 살기 어렵다고 했던 것 같다. 공부할 시간에 다른 것에 매진해왔으니 기본적인 상식에 대해 배울 기회가 적어진다고. 그것을 대신해 움직이는 존재가 매니저인거구나.

가장이 에스퍼고 그 일을 위해 노력하는 전담을 생각해보면 왜 결혼과 비슷하다 한지 알 것 같다. 만일 전담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에스퍼에게 사기를 치면 곤란하니까? 맞나? 제 빈곤한 상상력으론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검색해보면 뭐가 나오려나. 

"근데 난 그것도 생각 안 나고 사실 너에 대해서도 생각이 안 나거든. 우리가 무슨 관계고 어떻게 지내왔고 어떤 사이였는지. 나는 어떤 성격인지도."

하나씩 차근차근 말하자 백서진은 잡고 있던 손목을 풀어 놓곤 손을 잡아 제 손가락을 가지고 놀았다. 애도 아니고 이게 낯간지럽게 뭐하는 짓이야. 심심한가. 지금 나 얘기중인데. 말이 잠시 멈추니 시선이 다시 제 얼굴로 향해 왔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다.

"사실 내가 뭘 배웠는지도 몰라. 에스퍼니 게이트니 능력이고 기관이고 협회고 다 모르겠거든. 아예 모든 상식이 사라진 기분? 이 세상이 어색한 느낌?"

말 주변이 없어서 표현력이고 서술력이고 하나같이 비참했다.

"지현아.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얘 지금 내 말 들은 거 맞아?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