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베리드 스타즈. 신승연과 이규혁 이야기
* 게임 전체 스포일러, 폭력적 묘사(우울, 자살, 살인 등) 주의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매서워, 갈수록 가을의 낯을 보기 힘들어지는 때에 찰나를 위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횡단보도 앞에 모여 있었다. 여름과 겨울 사이에 놓인 계절의 시침이 가을이라며 가리키는 시기, 가만히 두어도 나날이 겨울에 가깝게 기울어지는데, 해를 넘길수록 이름을 간직할 수 있는 기간 또한 작달막해졌다. 짧은 시간 속에 세상은 서둘러 여름 탈을 벗고 겨울 털을 뒤집어쓸 준비를 마친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심은 가로수의 밑동마다 물기를 잃은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여 언덕을 이루고, 일부는 바람을 타고 인도와 차도로 넘어와 신발과 타이어에 밟혀 바스러졌다. 신승연의 발치에서 바스락거리는 것들의 끝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 남자는 신호등 옆에 서서 신승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단정한 얼굴로 신승연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남자는 다만 지켜볼 뿐 건널목 너머로 말을 걸진 않았다. 남자 옆 삼단 신호등 가장 아랫단에는 보행자를 위하여 적신호가 점등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표기되었다. 이 횡단보도에게 주어진 시간은 30초. 제법 긴 시간이며, 그만큼 긴 거리를 의미했으니 빵빵거리며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와 화물차의 경적을 뚫고 맞은편에 도달하기에 남자의 목소리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불규칙하게 뒤섞인 시끄러운 소리가 제가 아닌 소리를 남김없이 먹어 치운다. 소음은 신승연의 심기를 거스르며 그와 맞은편 남자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신승연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내나 걸어서 지나온 적은 신승연에게도 몇 번 없었다. 버스나 기차같이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장시간 이동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까닭에 그는 어지간하면 자가용을 모는 것을 선호했다. 기껏해야 시내에 나가는 정도로 장시간 운운하는 것이 우습게 들릴 수 있으나, 운이 나쁘면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서 가야 하는 버스를 굳이 선택할 당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신승연의 주머니엔 차 키가 들어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택시를 잡지도 않아 그는 지금 횡단보도 앞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서 미미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변을 메운 사람들은 신경을 차단하고 관심을 거두면 그만이니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보단 자신의 의지와 이지를 거스르며 흘러가는 것 같은 상황이 거슬려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은 명확히 집어낼 수 없어 더욱더 마뜩잖았다. 이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어긋난 조형을 보았을 때와 같이 속이 더부룩하고, 눈이 마주쳐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무시할 수 없는 저것이 원인인 게 분명하다.
시계를 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시간은 4시쯤 되었다. 노을 질 때는 아니지만 채도가 낮은 하늘은 흐리고 명쾌하지 못했다. 아직 패딩을 입기엔 더운 날씨였고 스웨터나 카디건, 얇은 가을 코트가 어울리는 시기에 신승연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남자는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아 아이보리색 두툼한 털실 카디건 사이로 속에 받쳐 입은 검은 티셔츠가 드러났다. 티셔츠의 넥은 둥글었고, 카디건은 허리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왔으며, 멀리서도 품이 넉넉해 보였다. 주머니 입구가 양옆으로 넓게, 사선으로 열려 있지만 손은 밖으로 빼낸 채다. 앞머리는 내려 이마를 덮고 있었다. 안경은 쓰지 않았다. 밖에 잠깐 외출할 때 입기 좋고, 지금보다 날이 더 추워진다면 집에서 입어도 좋을 코디였다. 카디건을 위에 걸쳤다고 해도 티셔츠는 조금 쌀쌀할 때인지라 실내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를 타지 않는다면 아직은 크게 시선 끌 일이 없는 차림이다.
신승연은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사거리로 인해 차량 통행량이 상당하여 이곳은 대화가 오갈 공간으론 마땅치 않다.
이윽고 차들의 속도가 더뎌졌다.
도로 신호등의 불이 청색에서 주황색, 적색으로 옮겨붙었다. 성격 급한 사람들은 보행자 신호등이 바뀌기도 전에 차도로 발을 내리뻗었다. 한중간에 서 있던 신승연도 흐름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는 앞서 건너는 사람들에 의해 몇 번이고 가려졌지만, 그에게 도달하는 시선은 여전히 올곧아 신승연은 넌더리가 났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신승연을 기다리고 있으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신승연이 제가 있는 이리로 올 것이니 멈춰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마침내 신승연의 발이 아스팔트를 벗어나 보도블록 끄트머리를 밟고 올라오면, 드디어 그들 사이 거리는 다른 이들의 소리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좁혀졌다. 가까이서 본 그는 여전히 키가 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작아 보였건만, 그래,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안녕하세요. PD님.”
인사를 건네는 그에 신승연의 대답은 한숨이었다.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찾은 건 담배였다. 불을 붙이기 무섭게 다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모인 사람들이 눈을 흘겼지만, 어차피 여기 계속 서 있을 것도 아닌 신승연은 연기를 한 차례 허공에 뿜은 후에야 발을 떼었다. 걸음에 맞춰 내뱉는 욕설이 나직하다.
“씨발.”
단지 내로 들어서자 옥외 주차장에 주차된 차만 몇 대 보일 뿐 들어오는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시속 10km 이내로 규정 속도를 지켜 운전해 달라는 푯말을 지나 한 층에 두 세대씩, 네다섯 개의 공동 현관문으로 이뤄진 아파트들 사이를 신승연은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복도식 아파트를 고르지 않은 건 귀찮게 사람들의 얼굴을 볼 일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이 동엔 아이들도 많지 않고, 놀이터도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낮에도 밤에도 소음이 적었다. 혼자 살기엔 평수가 지나치게 넓은 게 아니냐는 개소리는 감히 신승연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문제라면 무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저것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아파트 입구로 다가서는 신승연 뒤로 적절한 간격을 두고 따라붙는 이규혁, 횡단보도에서 만나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 거리를 유지하는 저것이 지금 신승연의 문제였다. 멀지도 않고 딱 붙지도 않으나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열린 공동 현관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는 처음 만난 순간엔 알 수 없었다. 기분 나쁠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있었다. 문이 열린다. 아무도 없다.
“PD님 집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네요.”
당연한 사실을 이규혁은 대사를 외우듯이 읊조렸다. 신승연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가 지난밤 과음을 한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간밤에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마셔야 했던 술의 취기가 이튿날 오후까지 깨지 않는 건, 그의 주량을 생각하면 드문 일이나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등 뒤에 선 이규혁이 미치도록 거슬리는 이유를 이제야 몰려오는 숙취로 치부하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저를 따라오는 내내 아무도 제 옆을 지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많았던 사람이 다 죽어버린 것처럼 거리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사장과 저명한 평론가 사이 깊은 친분이 어쩌고저쩌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사정이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흔들리는 잔에선 술 방울이 튀었고 신승연의 얼굴엔 사장의 침방울이 튀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맥아리가 없고 열정이 없으며, 자기 때는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해야 했는지 몰라 감사할 줄도 모른다, 고 거나하게 취한 사장의 주정을 신승연은 자기 과시로 범벅 된 찌질한 애원으로 요약했다. 청년 세대에게서 존경받지 못하는 사실에 억울해하면서 그들을 향한 몰이해도 숨기지 않는 사장 옆에는 점잔 빼며 교양 있는 노신사인 척 구는 평론가가 앉아 있었지만, 평론가이자 작가인 그 역시 문하생들의 고발에 의하면 더 빼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 신승연에게 어떠한 긍정적 감흥도 주지 못했다. 밖에선 깔끔 떨지만 안에선 바닥을 드러내는 사람이 이 바닥에 얼마나 흔한가. 발에 채는 낙엽만도 못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면서도 서로 선을 긋는데, 헛된 노력이란 것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 모양새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 턱도 없었다. 이들 사이에서 비위를 맞추다 비위가 다 상하는 제 속이 가장 안타깝다. 두 사람 다 저에 비하면 주량은 가소로우나, 본디 주량보단 오기로 이어지는 술자리에선 이런 장점이 덕을 볼 일은 좀체 없었다.
대리운전을 부른 뒤 신승연은 신발장에 걸터앉아 조는 사장을 뒤에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지쳐서 그렇다기보다는 그편이 어느 쪽으로든 표정을 바꾸기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신승연 옆에 선 평론가는 용케 선 자세를 유지했지만 주저앉지 않는 게 고작인지, 자리하는 동안엔 냉정하리만큼 표정 관리를 하더니 지금은 적잖게 들어간 술에 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게 의문스레 굴던 것은 실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것뿐 내실은 보잘것없었다. 가끔 방송에서 전화를 받아 목소리로 출연하는 자녀들과의 사이가 과히 좋은 편은 아니라는 소문에도 힘이 실린다. 가까운 이들에겐 폭력적으로 군다는 이야기가 허황한 풍문은 아닌 듯하나, 아무래도 신승연과는 초면이니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의 정신은 차린 모양이었다.
이 친구야, 간도 좋지 않으면서 무슨 술을 그리 마시나. 춘부장께서도 그러시더니, 정신 좀 차리게. 어? 친우로서 의례적인 시도가 끝나면 지켜보던 식당 주인의 아들로 보이는 청년의 시선도 슬금슬금 카운터 아래로, 스마트폰이 있을 그곳으로 내려가고, 다른 손님이 없는 가게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도착한다고 한 기사는 눈 때문에 길이 막힌다는 메시지 이후로 연락이 없고 카운터 청년의 눈도 슬그머니 감기는데, 신승연도 늙은 평론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아니었으면 그 역시 따라 잠든 줄 알고 이곳에 저 혼자 깨어 있음에 욕설을 뇌까릴 뻔하였다. 노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고인의 이름이었다.
‘이병희 그놈이…….’
신승연은 사장이 그를 저에게 소개할 적에 그가 이병희와도 막역한 사이였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음을 상기했다. 그렇다고 하나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역시 술이었다. 술 외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없어야 했다.
‘제 마누라만 잡아먹고 갈 줄 알았더니 자식새끼까지 잡아먹데…….’
신승연은 제집에 처음 온 손님에게 차 한 잔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야. 이규혁.” 곧장 부엌으로 가서 생수로 목을 축이고 다시 긴 한숨을 내쉰 다음에 이름을 부르니, 그는 현관에서 신발장을 거쳐 거실로 들어오는 목에 선 채였다. 식탁을 붙잡은 손을 떼어낸 신승연은 시내에서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그 앞에 똑바로 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블라인드가 올라간 낮의 거실은 아직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밝았다. 그 빛으로 신승연은 얼굴에 진 그림자부터 모든 것을 다시 볼 수 있었고, 그 모든 건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20여 분을 걸어오는 내내 걸음은 반듯했고, 양쪽 입꼬리는 내려갔으며, 눈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러나 연초의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던 감각은 신승연에, 끝이 아래로 내려가 유순한 인상을 만들어 내기 좋았던 눈매는 이규혁에 한정되었다. 신승연은 날카롭게 간 눈빛으로 이규혁을 노려본다.
이규혁. 이병희의 독자. 이병희의 재능을 물려받은 후계자. 죽은 거장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남기고 간 유산. 그렇게 포장한 건 신승연이었다. 독자는 맞지. 친아들도 맞았다. 밖에서 만든 자식이라는 사실만 감췄을 뿐이다. 그를 따르고 그의 아들을 칭송하는 이들은 모를 것이고, 모르니까 그들을 칭송하고 찬양했다. 사람들은 ‘된 것’보단 ‘난 것’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태생의, 유전된 재능은 대중에게 먹음직스러운 오락 거리였고, 처분할 수도 없는 유산에 본인이 달가워하는지 아닌지 여부엔 관심 없었다. 카메라도 부러 그런 쪽으론 비추지 않았다. 그림이 안 되니까, 각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니까, 방송에 적합한 그를 만드는 데 있어 그 이상 그 이하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만하면 적당히 방치해도 알아서 몫을 다하는 편리한 인자였다. 속성만 보면 따로이 더 투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은 그는 단연 비가시적이고 잠재적인 문제였으며 신승연에겐 가시적이었다. 신승연의 목소리에 점차 짜증이 섞인다.
“원하는 게 뭐야.”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짓는 흐린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작할 수 없는 속내가 못내 거슬렸다. 몇 번이고 운을 떼며 시험하는데도 걸려들지 않는 그에게선 도통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실은 그가 내놓는 어떤 답도 신승연의 마음에 드는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규혁은 인자였으나 결코 상수는 아닌 까닭이다. 의뭉스러운 변수임은 분명하다. 딱 보기에도 제 속을 숨기는 데 이골이 난 놈이기에 범위를 지정하기 까다로웠다. 예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되면서 신승연은 이대로 미결된 식을 남겨둬도 될지 거듭 고민해야 했다. 지금까진 문제가 없었으나 앞으로도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확실하게 속을 까본다면 더는 이 불미한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속을 깔 수 없는 이규혁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순간, 신승연은 눈을 덮어버리는 분노에 손을 움찔거렸다. 빠득 갈리는 어금니가 그의 진노를 짐작게 했다. 모든 걸 알고 제게 엿을 먹이는 저것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다만 문장만을 재현했을 따름이지만, 상황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신승연에게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엔 빛이 없었다. 입만이 익히 움직여본 대로, 신승연이 아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협박장. 네가 쓴 거 아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상황 판단 똑바로 하고 입 여는 게 좋을 거야. 너.’
‘저는 정말 몰라요, PD님. 처음 보는 편지예요…….’
답지 않은 수작질과 예상하지 못한 채 얻어맞은 얼얼한 뒤통수에 신승연은 격노했고, 그 앞에서 이규혁은 영문 모를 노여움에 어쩔 줄 몰라 눈을 크게 뜬 채 당황했다. 대답은 모르겠어요, 제가 아니에요, 그뿐이었다. 그가 정녕 결백하다면 그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이제는 신승연도 이규혁이 이런 수를 쓸 자가 아니라는 걸 아나, 그때는 알지 못했기에 카드를 드러낸 건 명백하게 신승연의 실책이었다. 유쾌하다고 반어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은 다행히 차츰 가셨다. 범인이 누구든 다음에 놓일 수에 집중하여 쳐부수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탓에 이규혁은 의심 가운데 가장 두꺼운 장막을 머리 위에 씌운 채로 신승연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신승연에게도 골치 아픈 시절이었다. 신승연이 아무리 수 싸움에 능해도 움직이지도 않고 다음 수를 내놓지도 않는 상대를 그다음 수에 준비한 올가미로 옭아맬 순 없었다. 상대는 의심만으론 목을 치기 아까운, 더 살찌울 구석이 남아있는 사냥감이었다. 아니면 사냥감의 털을 둘러 위장한 사냥꾼인가?
다행히 마지막에는 벗을 길 요원하던 베일을 신승연이 직접 걷어 주긴 했다. 그날이 마지막에 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신승연의 문제는 아니었다. 고로,
“저는 정말 몰라요. PD님.”
“이 새끼가…….”
그날의 기억을 새삼 환기하는 그가 그때의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그때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여기 없고 지금 이곳에 있는 건 그때와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없는 껍데기 같은…… 알 수 없는 껍데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신승연은 다시 한번 횡단보도에서 느낀 불쾌감을 느끼고, 전과는 다른 강도로 훅 끼쳐오는 그것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역시 그 악취는 저것이 풍기고 있던 게 맞았다. 그러나 확신을 담아 턱을 조금 들어 올리는 순간 속이 역하여 신승연은 하마터면 고개를 떨어뜨릴 뻔 한다.
“이제 와 원하는 게 있을 리 없잖아요. 원한다고 가질 수도 없고.”
욕지기는 금세 가셨으나 타는 것 같은 목구멍 너머로 침을 넘기기는 어려워졌다. 신승연은 눈앞의 저것이 이규혁이 아니더라도 이규혁의 거죽을 뒤집어쓴 저것 앞에 솔직한 감상을 내놓지 못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므로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구역질 나는 자식.”
입꼬리를 조금 올려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 저것은 확신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이제 와 원하는 게 있을 리 없다. 원한다고 해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 틀린 말은 없었다. 신승연은 그날 진실을 말했다.
베리드 스타즈 시즌 4의 우승자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이규혁이었다. 민주영과 치른 결승전 무대는 생방송으로 중계되었고, 시청률은 자사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의 기록을 부수며 최고치를 찍었다. 1등에게만 주어지는 상금, 부상, 데뷔 기회 등을 독식한 이규혁은 심사위원과 관객과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더불어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밀쳐내야 했던 경쟁자들의 축하까지 받으며 역대 시즌을 통틀어서도 가장 뛰어난 우승자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TOP 5 무대의 경연곡부터 결승에서 부른 마지막 곡까지 그의 노래는 대중과 평론가 양측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음원으로 발매되었다. 이전에도 중간 평가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그였지만, 이 시기의 무대는 이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달랐다. 매회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내는 모습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활동할 사람이 벌써 모든 걸 내어놓는 것 같다고, 너무 일찍 밑천을 드러내는 게 아니냐는 평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은밀하게 흘러나왔다. TOP 5로 순위를 마감한 서혜성이 가볍게 툴툴대는 인터뷰가 방송을 탔을 때 다소 과격한 그의 표현을 비판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동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러다 죽겠어. 우리는 저기에 휩쓸려서 죽고 말이야. 봐, 난 벌써 죽었잖아?’
그러나 지나치게 높아진 기대로 다음 무대는 버겁지 않겠냐는 걱정은 마지막까지 이전을 상회하는 무대를 거듭 해내는 이규혁으로 인해 무색해졌다. 심사위원들은 나날이 극찬했고 대중은 만족했으며 팬들의 반응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 나쁠 게 없던 신승연은 이후로 이규혁을 따로 불러 지시하지 않았다. 죽은 이병희와 이미지를 엮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인 선곡을 지정해왔으나 이제는 이병희보다 그의 자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더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고, 그런 그는 더 완벽하게 신승연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그즈음 신승연은 더는 이규혁으로 골치를 썩이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제 어미보다는 낫다 이거지.’ 착각임을 깨달은 건 결승 무대가 끝난 이튿날이었다.
그날 신승연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었고, ‘아주 똑 닮아서는!’ 고함과 함께 내던진 장세일의 태블릿 PC는 박살이 났다. 그거론 분을 다 삭이지 못해 신승연은 몇 개의 물건을 더 집어 던졌고, 이들은 모두 속수무책으로 망가져 일반 쓰레기 봉지 안에 수거되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신승연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태를 모를 수 없는 스탭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고 잰걸음으로 그의 곁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신승연은 이들 중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들 따위가 감히 그의 문제가 될 순 없기 때문이었다. 해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변수의 값을 알았으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히 내게 이따위 엿을 먹여? 이 개 같은 자식이…….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그게 뭐든 네 뜻대로 될 줄 아냐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론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의 붉은 빛이 베란다 전면의 유리창을 통해 폭력적으로 거실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감히, 감히, 신승연은 감히 밀려오는 종말의 빛을 밀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밀려오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스치고 가는 두통이 신승연의 귓가에 입을 대고 떠들던 만취한 사장의 목소리를 역재생했다. 두통이 인다. 그는 그날 낮에 절에 다녀왔다고 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뭐만 하면 힘들다, 저쩐다. 견디지도 못하고 픽픽 쓰러져 우는소리, 죽는소리 늘어놓는다고.’ 다시 두통이 인다. ‘그놈도 그래! 다 가진 놈이 무어 그리 힘들다고, 젊은 놈이 말이야. 나자빠져 가지고…….’ 다시 두통이, 머리가, 이는 분명히 숙취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알코올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누구에게서? 그날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누가?
이튿날 이규혁을 발견한 건 연락이 되지 않아 그의 자택을 찾아간 스탭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이규혁은 거실에 있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술은 마시지 못해도 회식 자리를 지나치게 빼지도 않던 그가 그날은 모든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이유를 그의 우승 소감에서 찾은 스탭들은 집에 돌아가는 그를 구태여 잡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언급하다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규혁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소리 없이 뺨이 흥건하게 젖도록 울기만 하는 모습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무대를 빛냈다는 평을 받은 민주영, 먼저 탈락했으나 축하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선 오인하, 한도윤, 서혜성 등 TOP 5 멤버들이 그를 둘러싸고 위로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러니 오늘은 집에 돌아가 푹 자고 싶다는 그를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래. 대신 내일 아침에 만나기야. 꼭. 알았지?’ 마지막까지 무대에 함께 선 민주영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낸 그는 이튿날 아침 부재중 전화 기록을 수 건이나 남겼으나 그중 통화는 단 한 건도 이뤄지지 못했다. 조사 결과 이규혁은 귀가 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결행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스탭이 그를 발견한 건 사망한 지 수 시간은 지난 후였다. 낡은 카디건이 발치에 허물처럼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스탭은 사표를 제출했고, 곧 수리되었다.
일대 소란이 벌어진 건 당연지사였다. 최근 들어 부쩍 가라앉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는 스탭과 출연진, 휴학하기 전에도 그러했다는 대학 동기의 증언이 진료 기록은 없으나 그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조심스럽게 힘을 실었다. TOP 5부터 결승까지 유난히 깊고 정제된 감정을 노래하는 선곡이 많았음을 지적하는 분석가도 있었다. 곡의 의미에 과하게 몰입하는 바람에 증상이 악화한 게 아니냐는 분석은 혹독한 비판을 받고 삭제되었다. 나비가 되어 우화할 수도 있었던 고치의 배를 갈라 쏟아버린 건 우리 모두라는 자성의 글은 또 누가 썼더라. 이 모든 논란과 미증유의 난리 속에서 신경질 섞인 웃음을 터뜨린 신승연은 이규혁의 선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었으나, 신승연이 살아있는 지금 그 사실에 주목하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의 진정한 내막은 신승연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장세일의 수첩이 공개된 후에 밝혀질 것이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신승연이 살아있는 한 그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그때까지는 실은 그가 오래전에 죽었음을 아는 자는 세상에 없다. 마지막 무대에 사람들이 보낸 갈채와 환호, 표가 실은 부조였음을 아는 자는 신승연밖에 없다. 고인을 기리는 특별 방송을 기획하며 지난 촬영 영상을 확인하던 신승연은 물결치는 현수막에서 조의의 해일을 연상했다. 그가 진작 절망에 잠겨 죽었으며 사인은 익사, 장례는 수장이었음이 밝혀지는 날은 신승연이 살아있는 한 요원하다.
“이제는 알아요. 저도.”
“아는 애가 그래? 무슨 자신감이야, 너. 무슨 꿍꿍이냐고. 규혁아, 네가 이렇게 나와서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아나 본데, 다 착각이고 헛수고야. 네 어미 땐 이런 좆 같은 일이 없었던 줄 알아? 하다 하다 모자가 쌍으로…….”
그날 이규혁은 탈수가 염려될 정도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손으로 입을 막아 소리를 참았다. 그런데도 밖으로 새 나오는 꺽꺽대는 울음에 소리에…… 신승연은 그 앞에 서서 조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메이크업은 다시 한다고 해도 저러다 다음 일정에 차질이라도 빚으면 곤란했다. 새삼 딱하다거나 꼴이 애처롭다는 감상은 없었다. 답답할 뿐. 결국 신승연은 혹여 그가 무대를 완전히 말아먹는 사고를 친다고 해도 지나치게 몰입한 탓으로 포장될 수 있도록, 가려질 수 있도록 경연곡을 조정하고 연출을 수정했다. ‘규혁아,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손을 써야겠니. 정말 번거롭게 구는구나, 끝까지.’ 선곡의 의도는 그게 다였다. 음모론자들이 수군거리는 큰 그림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신승연이 이규혁을 마지막으로 불러냈을 때 그는 신승연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PD님.’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 그는 신승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이규혁은 신승연에게 달려왔다. 손에는 어떤 자료를 한 움큼 쥔 채였고, 그의 뒤엔 사색이 된 장세일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신승연의 눈에 장세일이 끌어안은 메신저 백의 지퍼가 망가진 게 보였다. 가장 처음 든 감정은 황당함일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는 저걸 다 들고 다녔던 거야?’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골이 당길 지경이었지만 지금 당장 장세일을 나무랄 순 없었다. ‘PD님, 이거, 이거 말인데요…….’ 다시 보면 이규혁의 얼굴도 장세일과 다를 바 없이 황망했고 종이를 쥔 손은 벌벌 떨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급하게 마시고 내쉬길 반복하는데,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걸 가만두고 볼 신승연이 아니었다. ‘자리를 옮기지. 분장실에 먼저 가 있어.’ 아무리 흥분하고 긴장한 상태라도 상대가 이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대하면 기세는 수그러진다. 완벽히 진정하진 못해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리를 다소 절며 천천히 자리를 떠났고, 그사이 신승연이 뿜는 싸늘한 냉기에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복도엔 안절부절못하는 장세일만이 신승연의 눈치를 살피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다행히? 장세일에게 들일 시간은 많지 않았다.
‘쟤만 봤어?’
‘네, 네?’
‘쟤만 봤냐고. 네 가방에 들어 있는 거.’
‘네, 네……. 규혁이 형만, 주변엔 아무도…….’
신승연은 장세일에게 넌 이따가 보자는 말 같은 걸 남기는 대신 곧장 분장실로 발을 옮겼다. 분장실에는 이규혁 혼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신승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아, 모순적이게도 신승연은 그 순간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인 문제의 해를 계산할 수 있었다. 미지는 없느니만 못하여 오랫동안 신승연의 속을 긁어 놓은 그였으나, 해를 구하기 위한 단서를 제시하는 저 얼굴을 보라. 형편없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신승연은 마침내 제 손에 온전히 들어온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 통제권. 분장실에 들어선 남자는 제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을 알지 못했다. 제가 곧 요리될 줄도 모르고 퍼덕이는 지느러미의 움직임이 난잡하다.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 아가미를 내려다보는 눈에 어떤 감정이 담겼는지 벌써 탁하게 흐려진 생선 눈깔은 읽어내지 못한다. 그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 애쓰며 상황을 설명했다. 무대를 점검하던 장세일의 가방이 어딘가에 걸려서, 빼내는 걸 도와주다가 가방이 열리고 내용물이 쏟아졌단다. 그 이상 구구절절한 사연은 들을 필요가 없기에 신승연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PD님……?’
‘이규혁…… 규혁아.’
이제 와 원하는 게 있어?
원한다고 가질 수는 있고?
‘어떻게……. 어떻게 그런…….’
베리드 스타즈. 여기 선 걸 후회했던 적 많아도 떠나지 못하고 취한 건 결국 너였다. 증오도 사랑도 어느 쪽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떠돈 건 너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가십으로 끌려 나와 난도질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진작 돌아갔어야지. 나오지 말았어야지. 안이하게 생각한 건 너였다. 어머니를 죽인 것도 결국,
‘감당할 수 있겠어?’
특별 방송을 위해 함께 무대에 섰던 이들의 인터뷰를 땄다. 가끔 먼 곳을 보던 옆얼굴, 단정한 얼굴에 올려진 쓸쓸한 눈의 정갈한 느낌을 좋아했다고 인터뷰한 사람이 있었다. 한도윤이었나. 그가 말하고자 한 느낌이 무엇인지 신승연도 알았다. 그가 표현한 것과 정확히 같은 눈으로 저를 보는 이규혁이 저기 서 있다. 그는 분명 이규혁이다. 그는 분명 이규혁일까. 그러자 세 번째로, 처음엔 발을 덮었던 이질감이, 두 번째엔 신승연의 허리까지 차오르다가 이제는 이만 눈치채라고, 이 모든 게 이상하지 않으냐고 어깨를 밀치며 가슴을 압박한다. 그제야 신승연은 모든 걸 깨닫는다. 아. 씨발. 젠장. 빌어먹을. 제기랄. 이제야 깨닫는 자신에게 퍼붓는 욕설의 수위는 점차 높아지고, 가슴께까지 차오른 어둠의 수위도 이와 같다.
이규혁은 웃지 않았다. 영정 속 고인은 웃지 않았다. 지금은 낮이 아니다. 어제는 눈이 오지 않았다. 49재는 작년에 끝났다. 신승연은 어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규혁은 그날 무너지고 오열했다. 이렇게 감히 신승연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다른 때였으면, 다른 상황이었으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는 한 신승연은 프로였고, 통제는 그의 장기였으며 이는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해당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제 앞에 서 있는 기분 나쁜 이규혁은 이규혁이 아니다. 이규혁의 탈을 집어쓴 누군가의 무의식이 신승연에게 묻는다. 흐린 얼굴로, 축 늘어진 눈매로. 그러나 발음은 흘림 없이 또박또박하게.
“PD님. 왜 이런 꿈을 꾸세요?”
왜 이런 저를 상상하세요? 이렇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싶으셨나요? PD님처럼 한 수 한 수 원하는 전개로 판을 이끄는 사람을 기대하셨나요? 아니라서 불쾌하셨나요. 이제 와 원하는 게 있으셨나요. 원하면 가지실 수 있으신가요. 말씀처럼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셨나 봐요. 모자가 다 죽어버리는 게 PD님께도 흔한 일은 아니었나 봐요. 왜 이런 꿈을 꾸세요. PD님. 왜 이제야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는 이런 꿈을 꾸시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닥쳐 봐, 좀……. 골 아프니까.”
따발총처럼 쏴대는 모습을 보니 더는 숨길 의지도 없어 뵈는데, 저게 어떻게 저의 무의식 중 하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던 신승연이 말꼬리를 흐렸다. 꿈이란 걸 자각한 순간부터 신승연의 몸에는 현실의 감각이 가파른 각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냉기와 딱딱한 촉감도 그중 하나나,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의 원인은 짐작할 수 없었다. 허상의 통각으로 치부하기엔 고통의 강도가 이를 악물 만큼 지나치게 과도하다. 눈앞의 저것이 이규혁이 아니라는 걸 알면 굳이 체면 차려 버틸 필요도 없기에, 신승연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엎드렸다. 무릎을 꿇은 모습에 이제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이규혁이 잠긴 목으로 입을 열어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조금 알 것도 같아요.”
신승연은 그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녕 자신의 무의식이라면, 무의식이든 뭐든 제가 속으로 한 생각도 알아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신승연은 소리 없이 입속으로 그를 쏘아붙였다. 고통이 커서 입을 열 수 없는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뭘 알겠다는 거야. 진작 뒈진 새끼가 말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에서 통제권을 되찾는 방법은 원인을 자신으로 돌리는 것이니까요.”
“뭐……?”
이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고개만 위로 든 신승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끝끝내 웃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렸다. 이규혁! 야, 이규혁……! 신승연은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으나 귀에는 자신이 지른 어떤 소리도 닿지 못했다. 현실의 감각으로 넘어간 청각이 담아내는 건 윙윙 울리는 알 수 없는 공백뿐. 신승연은 갑자기 손에 쥔 모든 것을 놓친 것 같은 막막하고 처절한 기분에 세차게 몸을 떨었다. 고함을 쳤다. 당장 이리로 오지 못해! 이규혁! 그러나 오늘 단 한 순간도 신승연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던 그는 여전히 자신과 그의 간격을 지킬 뿐이었다. 거기서 더 멀어지진 않지만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그저 사라진다.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허무하게 흩어지는 인사.
“안녕히 계세요. PD님.”
신승연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손의 통증. 그 뒤는 머리. 마지막은 다리였다. 신승연은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신승연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여자는 울고 있었고, 이를 악물고 있었고, 양손엔 커다란 콘크리트 파편을 다시 한번 머리 위로 들어 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자신은 기절했던 것일까? 머리를 맞고? 이대로 죽는가? 이대로?
<신승연 PD, 베리드 스타즈 시즌 5 총괄 PD로 돌아오다>
<‘논란은 흥행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승연 강판은 불가>
PD님, ……언니가 절 구하고 저기 파묻혔어요. 금방 올게요.
이 새끼, 네 동생 복수하려는 거지! 그 자식 자살해서 여기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기사의 헤드라인이, 그들이 나눴던 대화가 신승연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신승연이 의식을 잃은 건 찰나였다. 그들이 나눴던 대화가 핏줄기 되어 흘러내리는 데 필요한 시간도 그 정도였다. 그 뒤론 영원이, 종말이, 공백이 되어 그를 기다린다. 저것이.
“난…… 그것도 모르고.”
안녕하세요. PD님. 안녕히 계세요. PD님.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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