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허토르테

🦁👟+약간의 🔗🎭

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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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남동생의 울음 폭탄 공격에 휴가 내내 시달렸다는 에나는 결국 장식장 위에 곱게 뉘였다. 십시일반 얇은 재킷이며 후드티, 망토까지 다 벗어다 이불처럼 깔고 남자들은 얼씬도 말란 말과 함께 포무와 밀리가 낑낑대며 정처없이 조는 에나를 겨우 그 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곱게’ 뉘였다는 건 순 거짓부렁이고 그 좁은 데서 반 바퀴 굴러 벽에 이마를 쾅 박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자네.”

“진짜 잘 잔다.”

쌕쌕 잠든 에나의 벌개진 이마를 꾹 찌르며 밀리는 속삭이듯 투덜거렸다.

“그냥 나한테 기대서 자도 되는데! 내가 에나만의 이불이 되어줄 수 있단 말이야.”

잠결에 흘리는 앓는 소리를 기민하게 잡아낸 미스타가 밀리를 잽싸게 뒤로 당겼다. 다 마신 우유잔을 뒤로 홱 던져 정확히 소파 뒤에 처넣은 렌은 킬킬 웃으며,

“네 탓이잖아. 어제 에나 얼굴에 낙서만 안 했어도 접근금지명령 받는 일은 없었을걸.”

맞는 말을 했다가 정말로 허벅지를 찰싹찰싹 얻어맞게 되었다. 작은 손이 꽤 매워 우는 시늉을 참을 도리는 없었다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롱도롱 잠든 에나의 눈 밑에는 밤잠 설쳐 생긴 다크서클과 밀리의 사랑이 담긴 펜 자국이 겹쳐 한층 더 딱한 그림자를 드리웠기에.

“낙서라니! 메이크업이었다고!”

“아퍼! 아프다니까?! 흐익! 나랑 자리 좀 바꿔줘, 슈!”

“둘이 사이 좋아 보인다.”

“안 좋아! 안 좋다고!”

결국 밀리는 부둥켜안고 자기 좋은 사람 랭크 최하위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누군들 상위에 들 수는 있겠냐는 것인데.

“껴안고 자기 좋은 사람이란 게 어떤 건데?”

“애인?”

싱글벙글 웃으며 끼어든 복스의 어깨를 포무가 요란하게 두들기며 ‘미쳤다 진짜’를 연발했지만, 다행히도 밀리가 렌을 쥐잡듯 잡을 때와 같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렌에게는 다행이 아닌 것 같지만 이미 넘어간 화제를 다시 걸고 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울적해진 진실의 추종자를 뒤로 한 채 밀리는 고민에 빠졌다.

“우리 중에서라면 아마도 루카?”

“왜? 걔가 너보다 머리 하나는 크지 않아?”

“어……왜냐고 묻는다면……그냥 이미지가 그래서……?”

얼버무리는 밀리를 보지도 않고서 아이크는 조용히 정곡을 찔렀다.

“밀리 너. 지금 강아지 생각하고 그런 거지.”

“……아닌데? 아니거든? 나, 난 고양이 키우거든?”

“강아지……큰 강아지 껴안고 자고 싶다, 진짜.”

고향에 키우던 개를 두고 온 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어졌다. 개를 좋아하든 고양이를 좋아하든 실제로 뭘 키우든 안 키우든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든 말든 간에 커다랗고 털이 복실복실하고 순한 눈을 빛내며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대형견을 생각하면 대부분은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라, 기숙사 무관하게 벽난로 근처에 둘러앉아 있던 5학년들은 다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한숨지었다. 실제로 루카는 개가 아닌 영장류라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알반도 폭신폭신할 것 같이 생겼어.”

“걔가?”

“왜? 좀 그런 이미지긴 하잖아.”

“남자가 보는 거랑 여자가 보는 거랑 좀 다른가?”

그렇다기보다는……하고 포무가 말끝을 흐렸다. 생긴 건 확실히 동그랗고 폭신해 보이지만 걔는 뭐랄까, 껴안고 있으면 연체동물처럼 쑥 빠져나갈 것 같달까. 웅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밀리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양이가 원래 좀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번에도 그 누구도 알반 또한 고양이가 아닌 이족보행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지적해주지 않았다. 조용히 있던 써니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고양이는 무척추동물일지도 모른다고 열변을 토하던 밀리만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어디 가?”

외쳐 묻는 슈를 잠시 돌아본 써니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진짜 그런지 확인하러.”

“……알반이 사람인지 고양이인지 확인하러 간다고?”

“아니, 껴안기 좋은지 아닌지 보려고.”

그러고서는 문을 박차고 나가 성큼성큼 금세 복도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모친께서 그러라고 다리 길게 낳아주신 것은 분명 아닐 텐데 써니라면 ‘우리 엄마는 이러라고 하셨어 너희가 뭘 아는데’라고 뻔뻔하게 우길 것 같아 부르지도 말리지도 못했다. 그럴 만한 의리도 없기는 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선배란 놈에게 기숙사 휴게실 한가운데서 숨 막히도록 껴안기는 불상사를 겪게 될 알반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자고로 미친 놈 상대하는 것보다는 멀쩡한 놈에게 원망 좀 듣고 마는 게 백 배 나은 법이라.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쟤 고백했대?”

아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포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복스를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냐’며 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슈는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렌을 불렀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느라 몸둘 바를 모르며 렌은 빽 소리쳤다.

“왜 날 봐?!”

그러나 동향 출신의 같은 기숙사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답을 알기는 알았다.

“안 했어. 걔는 자기 남동생 같은 거라던데?”

“에나가 그거 들으면 거품 물고 쓰러졌을 텐데.”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누나든 형이든 ‘같은 거’라는 말 쓰는 걸 법으로 금지해야 해.”

“잠깐만. 그러면 알반은 가만 있다가 갑자기 아무 사이도 아닌 선배란 새끼가 찾아와서 네가 폭신폭신한지 아닌지 확인하러 왔어, 염병을 떨며 껴안고 여기저기 만지작거리는 꼴을 다른 애들 앞에서 생중계하게 된 거 아니야?”

“오……알반이 그 자식 고소하면 증인으로 내가 나갈래. 평소에도 말로 다 못할 희롱과 농간을 일삼았다고 해야지.”

“……그건 알반이 더하면 더했지 반대는 아니지 않나 싶은데…….”

남의 연애사는 지난할수록 흥미로운 법이다. 친구의 중대사를 흥미 본위로 소비해도 되는지 따위 윤리적 질의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할 짓 다 하고 챙길 거 다 챙기는 놈들을 두고는 죄책감조차 들지 않고 말이지.

슈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며 설렁설렁 고개를 저었다. 형제가 쌍으로 인기가 좋다며 농담 반 진담 반 야유하는 포무에게 장난스레 반박한 것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원체 이 나이 대 사내놈들이란 게 다 그렇다. 남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슈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깔깔거리며 붙어 다니는 친구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가끔 마법약 숙제 생각하고, 가끔은 여동생과 싸워서 열차도 같이 안 탔던 거 생각하고, 그보다 좀 더 자주 학기 중에는 접속도 못 하는 게임 랭크 생각이나 하면서 살았다.

관심사가 다소 다른 차원에 가 있는 까닭에 연애니 뭐니 하는 일에는 골몰해본 적도 없다. 누군가 남의 부엉이 빌려 보내는 고백 편지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친구의 지지부진한 연애사나 구경하는 쪽이 훨씬 즐겁다고 하면 때때로 복스나 에나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기도 했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뭐 어쩌겠는가?

"알반은 몰라도 루카는 아니지. 걔하고 붙어서 자려고 하면 갑자기 장난쳐서 잠 다 깨게 될걸?"

호박 주스를 엎지른다든가, 이상한 소리를 내서 놀래킨다든가. 루카가 칠 만한 장난을 상상해 보자면 끝도 없었다. 밀리와 포무도 바로 동의하며 나란히 손뼉을 치고 까르르 웃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도 이상한 연기가 나는 장난감 비행기를 수도 없이 날려대는 루카에게 시달렸던 아이크는 보던 책까지 덮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다들 친구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알반은 뭐 다른 줄 알아? 걔도 만만치 않다고. 껴안고 있으면 일 분 안에 지팡이 쏙 빼내서 천문학 탑 위에 올려놓고 가져가 보라고 깐족거릴걸."

"걔넨 대체 뭐가 문제냐?"

"사람이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써니 넥타이 털리고 돌아온다에 아까 숨겨온 빵 건다."

"난 돌아오지도 않는다에 지난 주에 훔쳐온 버터맥주 걸래. 우릴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알반 기다렸다가 딴 데로 샐걸."

"아, 젠장! 빵 너 다 먹어라."

"결과를 기다려 볼 마음도 없는 거야?"

"뻔한 내기를 왜 해, 그러게."

"루카가 몇 분이나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로 걸 사람 없어?"

주섬주섬 빵을 꺼내던 렌은 밀리, 너 그거 내기 중독이야, 하고 혀를 찼다. 심지어 밀리는 '껴안고 자기 좋은 사람' 후보로 루카를 천거한 장본인이 아닌가. 양심에 털 난 태세변환 속도에 남들이 떠들든 말든 혼자 곱스톤 게임에 집중하던 미스타까지 끼어들어 그녀를 비난했다.

"야, 넌 적어도 10분 이상에 걸어야지. 루카 얘기한 건 너잖아."

"너희가 그러고도 베프야? 네가 이러는 걸 루카가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슬퍼하긴 개뿔이 슬퍼해. 걔도 양심이란 게 있으면 나랑 슈 앞에선 그런 소리 못하거든?"

소꿉친구 겸 롤링 페이퍼 지분 1위를 놓치지 않는 단짝으로서 미스타는 루카의 장난에 가장 자주 휘말리는 사람이기도 했고, 가장 크게 데인 사람이기도 했으며, 또 가장 많이 동참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난 몇 달만 따져도 방학 끝물 다이애건 앨리서부터 중간고사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폭풍에 휩쓸렸는지 구구절절 토로하는 목소리는 퍽 억울하게 들렸으나, 마지막에 열거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누구도 그를 동정해주지 않았다.

애먼 슈의 팔을 꼬옥 붙들고 앞뒤로 탈탈 털어 봐야 그 슈만 팔랑팔랑 흔들리지 다른 사람들 마음은 꼼짝도 않는다. 바로 지난 주에 그 미스타가 설치해 둔 똥폭탄 함정에 교감선생님 대신 걸려들어 샤워를 30분이나 했다는 포무가 싸늘하게 일축했다.

"세상에 내가 기대서 잘 사람이 너랑 루카 둘 뿐이라면, 루카가 내 새로 산 구두에 유통기한 30일 지난 우유를 엎는다 해도 걔 고를래. 너만 아니면 돼."

"야! 미안하다니까! 내가 그 정도야?!"

"워어, '그 정도'라니. 아무리 그래도 루카가 장난 한 번 치려고 썩은 우유를 고이 보관해둘 사람은 아니잖아."

그냥 똥폭탄 하나 더 사다가 네 가방에 몰래 넣어두는 거면 또 몰라. 비난인지 옹호인지 애매한 말을 주워섬기며 킬킬거리던 슈는 어깨에 꾹 내려앉는 악력에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내가 뭘 한다고?"

기척도 없이 다가와 멀뚱멀뚱 내려다 보는 익숙한 눈에 슈 자신이 맑게 비쳤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뜨끔해 망설이는 중에 미스타가 대신 외쳐주었다.

"어우, 야. 디멘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루카! 쟤네 너 가지고 내기한다."

"속지 마! 미스타도 끼어들려고 했어."

"내가 언제?"

"너 지갑 꺼내려고 하는 거 다 봤거든?"

다시 미스타와 밀리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틈을 타 루카는 그와 슈가 꼭 붙어있던 바닥 자리 옆에 끼어 앉았다.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커질 무렵의 사내놈들끼리 좁은 자리에 굳이 붙어 앉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었으나, 워낙 어릴 적부터 똘똘 뭉쳐 다니던 기억이 선명해 슈는 양 옆구리를 꿰찬 체온을 그러려니 내버려두었다.

장난감 빗자루를 타고 바닥에서 몇 인치나 겨우 동동 떠 돌아다니던 시절부터 쭉 이렇게 지냈으니까. 둘이 속닥거리다가 어딘가 냅다 달려나가 사고를 쳐놓고서는, 제풀에 놀라거나 울먹이며 돌아와 슈의 양 옆이나 뒤에 꼭 붙어 미주알고주알 되는 대로 떠들어대는 게 어쩔 때는 친누나나 친동생의 목소리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졌으니까. 뭐 가져왔어,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루카도 덩달아 그의 귀에만 대고 대답해주는 것마저도.

"레몬 머랭 파이랑 초콜릿 케이크 조금. 그리고 치킨이랑 감자튀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훔쳐왔지!"

"집요정들은 네가 배고프다고 우는 시늉하면서 달라고 하면 막 퍼주잖아. 그걸 또 굳이 훔쳐왔구나."

"그냥 받아 오면 재미없잖아."

씩 웃으며 루카가 망토를 벗어 던졌다. '조금'이라고 했는데 초콜릿 케이크는 포무가 두 팔을 벌려도 다 못 끌어안을 만큼 큰 것이 한 판 통째로 있었고, 파이도 다섯 조각이나 되었으며 튀김이 든 보따리는 금서처럼 묵직했다. 곱사등이처럼 등이 불룩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거나한 저녁식사를 하고도 돌아서면 바로 배고플 나이의 학생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달콤하고 짭짤한 야식에 달려들었다. 미스타와 밀리가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지르며 눈빛만으로 휴전 선언을 하고 그 난장판에 끼어드는 걸 보며 슈는 또 소리 내어 웃기만 했다. 적극적으로 손을 뻗을 만큼 배가 고프진 않고 조금 출출한 정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루카가 얇은 종이에 싸 온 초콜릿 케이크 조각을 내밀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게 진짜 특식이야. '조금' 가져온 거!"

열어 보니 단면에 두툼하게 발린 잼이 보였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잼을 찍어 맛보니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강하게 났다. 이런 케이크를 뭐라고 부르더라, 그 무슨 이름 있었는데……고민하다가 문득 옆을 보니 루카가 패트로누스라도 불러 대신 꼬리를 흔들게 할 것처럼 눈을 빛내며 얼굴을 바짝 붙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루카의 패트로누스는 강아지가 아니지만.

"고마워. 쟤네 네가 이거 나만 주는 것도 모른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다. 한 박자 늦은 감사인사를 루카는 씩 웃는 것으로 받아주었다. 서로의 식성, 이 시간이면 얼마나 출출할지, 치열한 간식 쟁탈전에 끼어들 생각이 있을지 없을지……새콤한 맛이 강한 간식을 굳이 루카에게 권할 이유는 없기에 슈는 곧 케이크를 크게 베어 물었고, 남는 손으로 미스타의 등을 툭툭 두드려 얻어낸 닭튀김 한 접시를 대신 건넸다.

심지어는 바글바글 떠들어대는 그 친구들조차도 둘이 뒤로 조금 빠져 대화하는 데 익숙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부드러운 닭고기를 전투적으로 씹어 반쯤 삼킨 루카가 웅얼거리듯 불평하는 소리는 그래서 슈 혼자서만 듣게 되었다.

"나 그럴 때 장난 안 쳐, 슈."

"응?"

"너희 아까 나 가지고 내기하던 거."

입 안 가득한 케이크를 다 꼭꼭 씹어 삼키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루카는 그새 치킨 한 조각을 더 해치웠다. 배를 채우기보다 맛을 느끼는 데 목적이 있는 까닭에 슈는 최대한 느리고 신중하게 혀와 이를 놀렸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혀끝에 은은하게만 남은 뒤에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네가 밀리의 강아지 인형이 되어줄 수 있다고?"

"꼭 밀리여야만 해? 누구든 나한테 기대서 자고 싶다고 하면, 난 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망부석이 되어줄 수 있다고. 장난 안 치고. 왜, 그런 거. 안아줄 수도 있고 머리도 쓰다듬어줄 수 있는데."

그리고 나 강아지 아니라니까. 덧붙이는 말을 무시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고등마법은 몇 명 모여 호기심에 연습해본 게 다라 루카의 패트로누스 역시 형체가 흐리고 불안정했다. 그는 분명 사자일 거라고 박박 우겨대는 중이지만 복스와 아이크는 큰 개일 거라고 일축했고, 미스타는 루카를 놀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으며, 슈는 정확히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진 단언할 수 없다는 파였으므로 결국 루카의 편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

입을 삐쭉 내밀던 루카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그래서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카네시로의 장남이 개를 불러내든 사자를 불러내든 용을 불러내든, 이 평화로운 시대에 고작 그런 빌미로 그의 지위나 미래가 빛 바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밀리를 비롯한 모두는 약간의 장난기와 짙은 애정을 담아 그를 커다란 강아지처럼 사랑스럽고 유쾌한 친구로 평생 아끼고 반길 텐데.

"그럼 나한텐 왜 그랬어?"

제법 다정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다. 말해놓고도 제풀에 놀라 슈는 두 눈을 몇 번인가 깜빡거리다가, 곧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훔쳤다. 입술에 묻어있던 개미 눈곱만큼의 초콜릿이 번졌다. 루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내가 뭘?"

"나한테는 장난쳤잖아. 크리스마스나 방학 중에도……."

크리스마스에 다같이 옷 바꿔입는 장난치다가 아이크의 힐을 신어보고 발목 삐끗했을 때는 기대서 서 있으라더니 괜히 발이나 걸어서 넘어질 뻔하게 만들었고. 방학 중에 퀴디치 월드컵 보러 갔을 때는 밤새 놀다 지쳐 옆에 앉아 졸았더니 어깨를 빌려주는 듯했다가 또 움직이는 벌레 모양 장난감이나 들이대서 뒤로 자빠지게 만들었고.

심지어 루카 자신이 꺼낸 장난감에 스스로도 놀라 펄쩍 뛰는 바람에 앞에 두었던 미스타의 커다란 물통을 냅다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키가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고 어찌나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는지, 지금도 생각하기만 하면 등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요컨대 슈의 추론은 다 실제로 벌어진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루카 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누가 기대서 잠들면 가만히 있어준다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편하게 재워줄 수 있다고? 그럼 나한테는 왜 그랬는데? 지는 뭐, 어릴 적부터 어디서 무슨 일 있으면 달려와서 이러쿵저러쿵 일러바치고 어른들에게 혼날 일 있으면 냉큼 옆구리에 붙고 사람을 이리 끌고 다니고 저리 끌고 다니고……

분명히 그랬으면서.

부쩍 몸이 자라고 눈높이가 달라지고,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변하고 관심사가 바뀌어 가면서도 그 체온과 거리낌없는 접촉만큼은 너무도 익숙해 놀라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으면서.

어렴풋이 느낀 불공평함은 정체와 범위가 다 모호했다. 정확히 누가 어떻게, 무엇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건지는 슈 스스로도 설명할 방법을 몰랐다. 아주 희미하게 억울한 건지 서러운 건지 모를 낯선 감정이 꿈틀거리는 것은 거의 눈치채지도 못했다. 할 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말을 고르는지 그저 당황했을 뿐인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는 루카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쓰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너는……그냥, 어. 너잖아."

슈는 슈니까. 이름만 집어넣어 되뇐 루카는 혼자서 뭐 그렇게도 납득이 잘 되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너니까 장난친 거야. 나도 잘 몰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 그냥 너니까 그런 건데……."

누가 들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라고 불평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그 무구한 표정과 미묘하게 쭈뼛대는 목소리가 전염이라도 된 양 슈의 입술도 꾹 다물린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알쏭달쏭 양가적인 감정이 초콜릿과 잼처럼 혀끝에 진득하게 매달렸다. 영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왠지 다 알 것만 같고, 화를 내야 하나 생각했다가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고.

특별 취급을 하는 건지 막 대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고, 그저 너니까 그렇다는 말마디는 마음에 못처럼 박혔다. 아니, 어쩌면 가벼운 바람이 모래를 쓸어내 드러난 시처럼 들렸는지도 모른다. 백사장의 잔잔한 파도와 고래잡이 배를 삼킨 해일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즐거워야 할지 노여워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전자를 선택하는 편이 백 배 낫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면 선택지를 고르는 게 온전히 슈 하나에게만 맡겨진 권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모든 망념을 꿀꺽, 단숨에 삼켜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랬다가는 영영 목구멍에 걸려 숨통을 꽉 틀어막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찐득한 덩어리가 불안인지 기대인지도 모르고 혀 위에서 오래도록 녹여 천천히 들이마셔야만 했다.

얼얼하도록 오랜 맛에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단맛인지 신맛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구석구석 온몸을 타고 돌아 영영 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도록.

"……아, 마실 게 없었네."

저만치에서 와르르 터져 나온 웃음과 비명이 내내 마주치고 있던 눈을 칼로 자르듯 떼어놓았다. 뭔가 먹다가 단단히 사레가 들린 렌의 등을 놀란 밀리가 찰싹찰싹 내리치는 중이었다.

조금 전과 굉장히 비슷한 소리가 나는데, 하고 슈는 오버랩되는 기억과 정체 모를 안도감에 고개를 돌리고 어설프게 웃어버렸다. 루카의 시선은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익숙한 손이 어깨를 쥐었는데,

"가지러 갈래?"

"어?"

"우리가 가져올게! 렌, 죽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슈는 영문도 까닭도 모르고 새삼스럽게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익히 아는 딱 그만큼의 체온이 옷과 살을 파고들 것처럼 강렬하게 닿았다.

루카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그러쥐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닌데 어쩐지 발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겨우 휘청거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데는 성공했으나 있는 힘껏 달리는 루카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장 숨이 차서 헐떡이면서도 잡힌 손을 뿌리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앞서 뛰어가는, 늘 손을 잡아채는, 먼저 닿아온 주제에 영 불공평한 소리를 일삼는, 너무도 익숙한, 이따금 낯설어지는 루카가,

"얼른! 새로 발견한 비밀통로 알려줄 테니까."

아주 잠깐 그를 돌아보고, 매끈한 뺨을 붉게 물들이며 웃었기 때문에.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겨우 기침을 멈춘 렌이 스르르 닫히는 기숙사 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너희 그거 알아? 루카 저 자식, 작년에도 올해도 같이 무도회 가자고 돌려 고백한 애들 하나도 눈치 못 채서 여전히 연애 경험 제로라는 거."

체념의 한숨을 길게 뱉은 복스는 휴게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다리를 꼬았다.

"친애하는 야미노 군도 마찬가지라네, 제군들. 내버려두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시대로 회귀해 호그와트 졸업하자마자 맞선이나 보러 가게 생겼어."

결국 몇 장 읽지도 못한 책을 뒤로 내던진 아이크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 책의 모서리가 정확히 복스의 미간에 떨어져 비명을 자아내거나 말거나 그런 건 알 바 아니란 듯이.

"저 둘이 우릴 속 터져 죽게 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 정말 경험이 없어서 지들 속도 모르는 거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줘서 참 고맙다, 얘들아."

"이대로 졸업할 때까지 우리만 답답해 죽는 거 아냐?"

"아까는 남의 연애 가지고 내기하는 거 재밌다며."

"그건 졸업 전엔 어쨌든 뭐라도 될 것 같은 애들이니까 그랬던 거고. 쟤넨 진짜 안 될 것 같고."

"어쩌라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해?"

"그랬다간 미스타가 우리 죽여서 금지된 숲에 묻어버릴걸?"

"내 슈한테 이상한 소리하면 산채로 묻어버린다, 진짜."

"사촌이란 건 거의 죽음을 먹는 자와 같은 존재구나……."

"겠냐?"

그리하여 미래 '재앙의 마녀'로 그 이름을 널리 날리게 될 밀리 파르페는 몹시 심각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기에 이른다.

"난 졸업하고도 2년쯤 더 걸린다에 30갈레온! 졸업 전에 걸 사람 없어?!"

"그니까 밀리 네가 문제라고, 네가!"

"누가 쟤 입 좀 막아라, 제발!"

"쟤 입방정이 재앙이지 뭐 다른 게 재앙이냐?!"

실로 그러했다. 먼 훗날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그 재앙의 편린이 요란한 소음으로 번져 죄 없는 에나 알루에트의 귓전에도 와장창 떨어졌으니. 잘 자다가 요란법석 난장판 시장통 현실로 끌려나온 에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혼미한 정신으로 벽과 개판을 번갈아 보다가,

"밀리 파르페 이 미친 기지배, 내기에 걸 30갈레온은 있고 내 얼굴에 쓸 화장품 살 돈은 없어서 지워지지도 않는 필기용 잉크 따윌 갖다 부었냐?!"

남의 화려한 미래나 연애사 따위는 중대사도 뭣도 아니게 만드는 진짜 재앙이 되어, 마침내 식물이 가득하고 아늑하기 짝이 없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기숙사 휴게실 한가운데 진정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며 강림했다.

후플푸프 20점 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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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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