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상황대처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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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녹차 by 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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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코 경, 우리 돌발 상황 발생 시 행동 강령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보죠."

그렇게 운을 뗐을 때, 왕정마법사 야미노는 두 팔 가득 음식 재료를 안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늙은 호박과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가지 두 개만 해도 확실히 중량 초과였다. '전투 상황 발생 시 행동 강령' 같은 말보다는 아무래도 '식량 부족 사태를 피하기 위한 자체 조달 방책이고 나발이고 나 좀 도와줘'가 더 어울리지 않나?

"말씀하시죠, 야미노 공."

그렇게 대꾸하더라도, 제3기사단 단장 브리스코 역시 한 손에는 국자 한 손에는 소금 통을 들고 있어 긴장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출신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번갈아 식사 당번을 맡으니 메뉴가 다양한 것 하나는 좋았다. 이런 평가나 내릴 분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요리가 취미인 기사단장은 여행 중이라 해서 식단이 지나치게 단출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실제로 목가적인 모닥불과 수프가 보글보글 끓는 자그마한 솥 뒤에는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통돼지 바비큐가 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빙글빙글 감내하는 중이다. 사실 이런 일정이라도 잡히지 않으면 일 년 열두 달을 연구동에 틀어박혀 지내는 야미노에겐 왕성에서 지낼 때보다 더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역시 이런 기대나 할 타이밍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까 산적 무리와 마주쳤을 때 말입니다. 다소 지나친 처분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지나치다니요?"

"열 놈 중 한 놈만 살려두고 나머지를 몰살시킨 뒤, 팔다리가 부러진 녀석을 인질 겸 길잡이 삼아 본거지를 소탕하러 가신 것 말입니다."

바닥에 펼쳐둔 망토 위에 야채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야미노가 차분히 부연했다. 브리스코 역시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어 국자를 내려놓았다.

"잠시만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특별히 그런……방식을 즐겨서 그렇게 처리한 게 아닙니다. 그놈들은 단순히 푼돈이나 뜯는 산적이 아니라 대규모 인신매매 혐의로 수배령이 내려진 흉악범이란 말입니다. 기사단의 정식 작전이었어도 생포할 필요 없이 즉결처분하라고 명령했을 겁니다."

오며가며 왕성에서 종종 묵례나 나눈 것이 전부인 젊은 기사단장이 자기변호에 열심인 모습은 썩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야미노는 학생들을 대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이 더 이어지지 못하도록 한 손을 들었다. 왕성 소속 중에서는 가장 험한 작전에 많이 차출되기로 유명한 제3기사단의 무자비한 손속을 직접 보게 된 것도 충격이긴 했으나, 그가 지적하려던 바는 처분 자체가 아니었으므로.

"그게 아닙니다. 문제는, 경이 본거지를 소탕하겠다며 단신으로 나섰다는 거예요."

브리스코는 소금 통까지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양 눈을 불규칙적으로 찡그리는 모습도 어쩐지 연구동의 수습생들과 비슷해 보였다.

"문제가 됩니까? 전하의 경호와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는 제 책임입니다."

"저 역시 동행인이니까요? 돌파하기 전에 이야기 정도는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야미노 공의 역할은 전하를 수행하고 협의에 참관인으로 출석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넓게 보면 '수행'에는 일행을 돕는 것도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준비할 시간을 조금만 주셨다면 경이 무리하시는 것보다 훨씬 쉽게 처리할 수도 있었어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고 생각에 잠기길 몇 초, 젊은 기사단장은 다시 단호한 얼굴이 되어 눈을 맞춰 온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빛나는 경력을 자랑하는 엘리트 기사다운 분위기를 풍기며.

"왕정마법사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만, 공의 조력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못 믿으시는군요?"

야미노는 그다지 불쾌한 눈치는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순순히 수긍한 것은 실제로 그의 연구 분야가 저주 자체보다는 해주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일족이 저주의 대가로 전 대륙에 위명과 악명이 모두 높다거나 그 후계자로서 일생을 왕족과 국가에 봉공해야 한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타인을 해치는 대신 부정한 힘을 역으로 풀어내는 데만 집중하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었으니 억울하거나 불쾌할 이유가 없다.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쳐도 경의 방식은 너무 비효율적이었어요."

하지만 궁금해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브리스코는 더없이 섬세하게 조형된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이며 입매는 표정 없이 심드렁하게 굴 때마다 놀랍도록 냉담해 지곤 했는데, 야미노는 어째서인지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아도 그에게 상대를 업신여기는 마음이나 적의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마주칠 때마다 꼬박꼬박 정중하게 인사하던 기사를 좋게 보려는 경향 탓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논박하면서도 딱히 악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의견은 의견이고 일은 일이니까.

"어떤 부분이 비효율적이었습니까?"

"글쎄요. 별 가치 없는 인질 하나 붙들고 산적 소굴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간 것부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려면 여태 산을 타고 있어야 했을 겁니다. 잘 닦인 길과 사람 들여보내라고 만들어둔 문이 있는데 마다할 이유라도?"

"부적과 약 좀 챙겨드린다고 했는데 점심 전에 처리하고 싶다며 칼 한 자루만 달랑 들고 가신 것도."

"그 칼이 원래 기사의 목숨줄입니다."

"브리스코 단장은 연구동에서 만들어 보낸 무기며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주는 고객으로 소문이 자자한데요, 우리 사이에서도."

"음, 그 칼과 연구동에서 온 여러 위험물질이 제 목숨줄입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인질은 일회용 방패로 써먹어 버리고 곧장 다수의 적과 정면으로 대결하길 선택한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였나요?"

인질에 그다지 큰 가치는 없을 거라고 야미노 자신도 말하기는 했다. 무수한 소탕 작전을 지휘해 본 브리스코가 그 정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대충 비슷한 까닭이리라 짐작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보다는?"

"그렇게 해야 정정당당한 싸움이 되지 않습니까?"

"……?"

브리스코는 농담도 절대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진지한 낯짝으로 설파했다. 야미노가 '이 자식은 대체 뭘까' 같은 생각이나 하는 줄은 상상도 못 하거나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몰래 산을 타고 돌아가 뒷구멍으로 잠입하거나 인질을 가지고 협상 따윌 하거나. 뭐 그런 거 좀 비겁하지 않습니까?"

"그……보통은 그런 걸 계획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제3기사단에서는 보통 제가 계획입니다."

"그건 또 몰랐던 사실이네요, 브리스코 경."

"예. 신 앞에 공증된 제 이름이 바로 계획 브리스코라서."

"이 새낀 진짜 뭐지?"

마지막 말마디는 야미노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라, 빳빳한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서 뻔뻔한 소릴 잔뜩 지껄이는 브리스코를 이 새끼 저 새끼 불러대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이 참다못해 중얼거린 것임을 여기 밝힌다.

그의 기사와 마법사가 살벌하게 설전을 벌이는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노심초사 눈치만 살피던 왕자는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긴장감도 사라진다'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되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위안 삼으려고 세게 껴안고 있던 수호수까지 툭 떨어뜨린 렌은 왕자의 위엄인지 무엇인지를 되찾기 위해 나름 눈에 힘을 주고 외쳤다.

"둘 다 잊고 있나 본데 여기서 결정권자는 나야. 싸우지 말고 내 말 들어! 써니, 너는 도와준다고 할 때 얌전히 같이 가고. 슈는 되도록 위험한 일엔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왕자가 여태 할 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문무 양면에서 보필해 온 기사와 마법사를 모두 잘 알기에, 따로 두었다면 충분한 합의와 명령을 통해 각각을 충분히 통솔할 수 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애초에 그게 되니까 왕자씩이나 되는 위인이 달랑 수행인 둘만 거느리고 긴 여행을 떠나올 수 있던 게 아닌가?

브리스코와 야미노가 사적으로 접점이 전무해 아주 예의 차리는 사이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깜부기불을 가운데 두고 셋이 앉아 산적 소굴에서 털어온 술이나 한 잔씩 하면서 허심탄회 인생 이야기라도 해 보라고 했을 텐데……잘 모르는 사이인 것은 둘째치고 이제 보니 공적 영역에서도 지향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지나치게 달라서 무려 왕자가 눈에 힘 빡 주고 혼내는데도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경이 총책임자이고 명령권자인 기사단에서라면 통용되는 이야기겠지만, 지금은 저희 셋뿐입니다. 저도 어떤 의미로든 전하를 보필할 정도는 된다 평가받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요. 셋이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계획이나 기본적인 행동 양식을 정해둔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엄밀히 말해 이 구성에서도 보안과 전투의 총책임자 또는 결정권자는 접니다. 제 임무는 전하와 야미노 공을 멀쩡히, 가능하다면 왕성에서 방금 걸어 나온 사람들 같은 상태로 위성도시까지 모시는 것이지 두 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게 아니니까요. 돌발 상황에서는 되도록 제 결정을 따라주시는 편이 모두에게 이롭습니다."

"나 그냥 집에 갈까?"

위대하신 아버지 폐하, 어쩌자고 계승권자인 누님도 아니고 제게 이런 고집불통들을 붙여주셨나요. 왕자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수호수를 도로 안아 들었다. 데구르르 앞으로 굴러가 풀 바닥에 몸을 비비던 짐승은 강아지처럼 얌전히 안겨 있다가도 곧잘 짤막한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낑낑거리고는 했다. 렌이 중얼중얼 푸념하든가 말든가 제 알 바는 아니라는 의미인 것도 같았다.

"내가 왜 저 둘을 데려왔을까? 렌베이더즈, 어떻게 생각해? 쟤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잖아. 왕자가 여기 있는데 자기들끼리 싸워도 되는 거야? 왜 고개를 흔들어. 싸우는 게 아니야? 조용하지만 살벌하다고! 듣는 내가 무섭다고! 아니, 풀 그만 먹고! 야! 내려가지 마! 안 돼! 렌베이더즈, 먹지 마! 뱉어! 네가 어딜 봐서 왕가의 위대한 수호수야, 그냥 말 더럽게 안 듣는 강아지지!"

온몸을 비틀어 왕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수호수는 야무지게 달려가 무언가에 답삭 매달렸다. 길어지는 하소연이 여간 지루했던 게 아닌 양 배애, 혀를 빼무는 모습이 네 살짜리 어린애와 다를 게 없어 렌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게 진짜 어딜 봐서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고 세 번 목숨을 구명해 준다는 전설의 수호수야. 그냥 말 더럽게 안 듣는 강아지고 골칫덩이 어린애지!

도망친 짐승이 도로 잡초나 뜯어먹기 전에 잡으려고 몸을 날리다시피 한 렌은 곧 그 짤뚱한 두 팔이 껴안고 있는 것이 익숙한 가죽 부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다시 모노클을 착용한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미는 야미노 옆에는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렌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드는 브리스코도 있었다.

"너희 안 싸워?"

수호수가 코웃음쳤다.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싸우다니요?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우리가 왜 싸워? 심심하면 수호수 괴롭히지 말고 와서 수프나 보고 있어. 왕자라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될 거란 착각은 되도록 빨리 버려라, 너."

도리어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작태에 왕자의 턱이 땅에 떨어졌다. 말씨는 조근조근해도 렌이 느끼기에는 분명 살벌한 말다툼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런 적은 애초에 없었다는 양 산뜻한 낯짝들을 높이 쳐들고서 평화롭기 짝이 없는 대화나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화다. 호박을 어느 정도로 잘라야 빨리 익힐 수 있을지, 통돼지구이는 먹고 남으면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지나치게 빠른 전개를 쉬이 수용하지 못하는 왕자를 향해 수호수는 '거 봐라 내가 뭐랬냐' 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렌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물었다.

"아니……아니, 진짜 억울해 미치겠네. 나만 사이에 껴서 등 터지는 새우로 만들어놓고선……그래서 돌발 상황 대처 강령 어쩌고는 어떻게 된 건데?!"

셋째 왕자의 충직한 심복인 기사와 마법사는 동시에 대답했다. 오늘 날씨처럼 평온하고 부드러운 낮은 목소리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산적이 또 나타나면 그때 같이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만?"

"나 너희 진짜 싫어. 누님이 즉위하시는 대로 너희 둘 다 잘라버릴 거야."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전하 네 뿔이나 안 잘리게 조심하시지."

거의 완성된 수프의 고소한 냄새가 온 산에 퍼져나갔다. 산적도 때려잡고 곰도 때려잡고 왕자의 이성도 때려잡은 어떤 여행자들 덕분에 산에는 겁 많은 소동물들만 남은 셈이 되어, 아무리 맛있는 냄새가 널리 풍긴다 해도 세 사람의 완벽한 점심을 방해할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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