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연인의 심장에는 지옥이 산다

타브칼|바드 타브X칼라크

꾹뀨 by 꾹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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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딩 이후이나, 후일담 업데이트 전에 쓰였음을 감안해도 날조가 상당합니다.

이 소리를 무어라 표현함이 좋을까? 일단은 '엔진'인데, 그러니까 철로 만들어진 이동수단들을 기능케하는 바로 그 엔진 말이다. 혹시 그게 사람의 육신에 붙어있다면 어떤 소리가 날지 상상이 가능한가? 나는 매일 밤 그 소리를 귀를 대고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듣지만, 그 어디서도 이런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므로 이것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남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엔진 소리라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기 작동 소리를 많이들 연상하며, 그렇다면 '부릉부릉' 정도의 보편적인 의성어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많이들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벼운 소리가 아닌데, 내가 아쉬운 듯 그러면 잠시 후 돌아온다는 말이,

"풀무를 작동 시킬 때는 아니야?"

"아님 혹시, 번개 마법을 쏠 때라든가?"

"데빌들이 화염을 뿜을 때 내는 그건 아닌가? 사실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봐, 이봐. 다들 틀렸어. 아냐. 아니라고. 그런 단순하고 밋밋한, 흔한 소리가 아니야! 훨씬 특별하고 매력적이라고! 게다가 그만의 리듬감도 있단 말야! 난 직업상 소리에, 자세히는 음감과 박자에 민감한 편이므로 더욱 길길이 날 뛸 수밖에 없고, 이제 이쯤 이르러서는 다들 기함하거나 화를 내며 내게서 멀어진다.

"알아서 해!"

"알 게 뭐야!"

"그깟 엔진 소리가 뭐 대수라고!"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이 사람들아! 항변하는 내 목소리에도 그들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까 내게 던졌던 금화를 되돌려 받고 싶다고, 바드의 명줄을 끊는 가위질이나 마찬가지인 환불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사랑하는 이를 닮아 강철보다 단단한 심장을 가졌으므로 세간의 비난과 비평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리를 옮겨서 이번에는 좀 덜 팔불출 티를 내야겠구먼. 나는 내 목숨과도 같은 류트와 금전 상자를 잘 챙겨 다음 목적지를 생각한다.

가타부타 논하느니 한 번 들어보면 다들 알텐데, 들려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아니, 아쉽지 않다. 전혀 아쉽지 않다. 이건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거니까. 암, 그렇고 말고.

하지만, 오늘 이대로 집에 갈 순 없겠어. 마음의 곳간이 만석일지언정, 아내에게 고깃국을 먹일 수 없다면 그야말로 배우자 실격인 것이다.

하여 나는 자리를 옮겨 다시금 류트 줄을 퉁긴다. 딩가딩가, 들어보게나. 거기 가는 아가씨, 팔목에 찬 그 보석 이름 내 익히 아오. 아니, 아니, 그걸 내놓으란 게 아니라, 잠깐만 들어주겠소? 혹시 지옥에 가본 적이 있소? ······그래. 가겠다 이거지? 오! 거기 내 앞을 빠르게 지나치는 신사분! 내 노래 한 번 들어보시오, ······아이고, 또 가네. 그대들 융털까지 삐쭉 서게 할 이야기를 내가 잘 아는데! 맘 같아선 우리집 침대맡에서 마누라한테만 들려주고픈 모험담을 큰 맘먹고 귀빈들께 공개하오. 내가 말이야. 누군지 아시오? 바로 이 도시를 구한 그자요! 고블린들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본 적이 있소? 난 거기서 바로 이렇게 류트 한 대만 들고 있었소. 한 세기를 그림자에 물들어있던 땅을 구원해낸 적이 있소? 난 늘 류트만 들고 있었지. 바알의 신전에 들어가본 적은 있으려나 몰라. 난 역시 류트와 함께였소. 게다가, 그 다음엔, 놀라서 쓰러지지나 마시오. 지옥에도 가본 적이 있어. 하늘에서는 화염불이 쏟아지고 대지에는 다가가기만 해도 온 몸이 녹아내릴 듯한 용암이 개천처럼 흐르고 있었지. 캠비온과 어깨동무 해본 적이 있소? 임프 날개가 어찌 생겼는진 아시오? 놀의 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녀본 적은? 아고, 말도 마시오. 급할 땐 그것들이라도 씹어먹어야하나, 내 존엄성을 떨구고서라도 살아남아야하나 고뇌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오. 하나 살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소?

연주는 점차 고조되고, 뒤로 자빠질 듯 몸을 젖혔다 돌아오는데 저 멀리서 친애하는 피스트 경비대원이 인파를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창 무르익고 있었는데. 노래에 양념을 쳤기로서니, 그렇다고 신고를 하나···. 경비대원들은 나를 익히 알지만, 뻔한 사기를 쳐 시민들 금품을 공갈하려는 음유시인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어쩔 수 없었다고 멋쩍게 말한다. 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대충 자리를 갈무리하기 시작한다.

으레 예술가라 함은 입에 강아지 풀이나 물고 내리 뜬구름이나 잡는 족속들이라 낮잡는 여론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나 그러한 재단은 누가 한단 말인가? 예술에 손톱조차 담궈본 적 없는 자들만 그런 말을 지껄여댈 것이다. 실제 예술가의 삶은 보다시피 전혀 녹록지 않다. 로그의 민첩성, 팔라딘의 근면함, 위저드의 지혜, 몽크의 강인한 신체를 전부 다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 바로 이 망할 바드라는 직업이거늘. 아이고, 나도 모르게 욕을 해버렸구먼. 배우자를 닮아가서 말이다.

하여튼 이 타고난 순발력 덕에 동전 한 닢 흘리지 않은 것은 좋다만, 입에 풀칠 할 만큼은 모였나? 에계. 상자를 보니 나오는 한숨이 차라리 상자 속 내용물보다 더 묵직할 것 같았다. 난 소태만큼 짜디짠 민심에 혀를 끌끌 차며 벌써부터 오늘 저녁 밥상을 고민한다. 짝다리를 바닥에 탁, 탁, 북처럼 두들기면서.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이대로, 업종을 바꾸지 않고 내가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학에서 배운 것들은 먹고 사는 데 별 도움도 안되고, 등록금만 낭비해서는······. 이제라도 육체를 단련해서 칼처럼 도끼질을 해볼까? 속상함에 눈을 감자 그것이 곧 내 미래인 것만 같아서 그냥 다시 눈을 뜬다. 다시 상자를 본다. 다시 에계, 하고 혀를 찬다. 뭘 기대한 겐가? 침울해하는 내 머릿속에 칼의 얼굴이 한줄기 빛처럼 드리운다. 티 없이 맑은 웃음. 평생 아무 고생도 겪지 않은 것처럼. 활짝 드러나는 송곳니.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지 않았더라면, 난 그 비극적인 과거사를 전혀 믿을 수 없었을텐데. 호박석 같은 그이의 눈을 떠올리며 난 헛된 걱정에 빠지느니 오늘은 고기를 또 어떻게 요리할지만 생각하기로 한다.

고기를 네 도막이나 사서 두 도막은 요리하고, 나머지 두 도막은 그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피가 뚝뚝 흐르는 채 상에 올려놓고 난 기다린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이는 또 오는 길에 누굴 돕다 어디에 머무르는지 늦는다. 무릇 한 사람에게 연인이란 한 번에 하나씩만 있어야 한다는 지고지순한 연애관을 가진 나의 배우자는 그 동시에 아무나 믿고 아무나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를 겸한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박애주의자와 인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잡상인에게 붙잡혀 쓸모도 없는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나지 않는 것만으로 난 기립박수를 쳐야한다. 웬 협잡꾼의 감언이설에 사로잡혀 수상한 물약을 대량 구매하려 했다든가, 하자 있는 가구를 정가에 사려는 꼴을 목도하지 않는 것만으로 평온한 한 주를 보냈다고 기뻐 날뛰어야 한다. 그가 코흘리개 아이가 아닌, 데빌보다 사악한 인간에게 속아 10년동안 지옥에서 강제 복역도 해보고 형상변환자에게 당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겨도 본 어엿한 어른이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가끔은 잔인한 말이 내 목젖을 간질인다. '여보. 차라리 바람을 펴! 딴 사람을 만나!'

그저 그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싶다. 말이 씨가 될 가능성조차 없는 일이므로 할 수 있는 발상이지만.

나도 그이와 똑같은 연애관을 가졌다. 예컨대, 어느날 그의 몸에 수십, 수백 명의 첩을 거느린 어떤 고대 엘프의 혼이 깃든다고 해보자. 그가 나 혼자로는 만족할 수가 없으니 제3자, 4자라도 관계에 끌어들이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노발대발할 것이다. 오래된 류트와 성치 않은 몸뚱이 하나만 믿고 마인드 플레이어와 엘더 브레인 앞에 섰던 광기를 다시 보여주리라. 세치 혀 놀림만으로 평생을 연명해온 광대의 끈기와 추잡함이 얼마큼인지 알게하리라. 언젠가 칼이 한번쯤 엘프에게 육신을 빼앗기길 벼르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선뜻 바람을 운운하지 않는 이유는, 어찌 그런 소릴 하냐고 사색이 될 그를 알기 때문이다.

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야만 전사이면서도 고양이 발바닥보다 말랑한 마음씨를 가진 그이를 사랑한 대가를 이렇게 톡톡히 치르고 있다. "나는 제발, 네가 너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됐음 좋겠어. 칼라크. 그 이타심 좀 버리고!" 얼마 전엔 내가 분연히 이런 말을 하자 칼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든 적도 있다. "으응~? 무슨 말이야, 자기.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또 어딨다고? 수많은 연적들의 마음을 처참히 짓밟으면서까지 자길 독차지한 이기주의자가 바로 나잖아. 칼라크."

그럴 때마다 난 생각한다. 바드가 되야할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그럼 우린 돈방석에 앉았을 텐데, 하고.

그는 내 삿된 마음과 허튼 생각의 구원자처럼 나타난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내 몸만한 짐가방을 등에 걸머진 채로, 머리라도 찧을까봐 폭신한 헝겊을 몇 장이고 겹쳐놓은 문간을 익숙하게 수그려들어온다. 한달음에 그를 안으면 그는 날 번쩍 들고 제자리에서 네 바퀴를 돈다. 연한 현기증에 사로잡혀있는 내 얼굴에 키스 세례를 하고 짐을 내려놓는다. 허기에 눈썹이 축 쳐진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든 채 난 그 짐을 풀어 검사한다. 사생활 침해를 하려는 건 아니라 일일이 뒤져보진 않고 겉만 살핀다. 만물상이 펼쳐져 있으면 불합격, 그렇지 않으면 합격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합격이다. 오늘은. 말인 즉슨, 내일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단 얘기다. 노파를 도운 보상으로 받았다는 치즈 한 덩이와, 저글링 놀이용 나무 큐브 밑에 어떤 이상한 물품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몇 번이고 발칵 뒤집혀봤으면 그도 이젠 어련히 알아들었겠거니 하며 넘어간다.

칼라크와 달리 나는 화염도 바다도 밤하늘도, 그 어떤 것도 대변하기 어려운 애매한 빛깔의 피부를 지녔으며, 아무 각 없이 둥글기만 한 귀를 달았고, 고기 한 도막을 먹으려면 30분을 꼬박 고아야만 씹을 수 있는 뭉툭한 치아를 가진데다, 잡내를 없애겠다고 최소 세 가지 향신료를 곁들여야만 하는 귀찮은 식성을 지닌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난 시시때때로 동반자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별도의 손질도, 물이나 불도, 잔반 처리에 고심할 필요도 없는 강인한 턱뼈와 포괄적인 식성을······.

이쪽이 숟가락으로 희멀건 스튜 다섯 입을 떠먹을 때 이미 제 얼굴만한 돼지 갈비를 손 하나만으로 뼈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 칼을 보며 난 숟가락질을 잊는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것이 이런 걸까. 뼈와 살을 가볍게 분리하는 완력에 난 수시로 넋을 놓는다. 식사를 마치고나면 칼은 입과 손에 묻은 잔해를 손수건으로 벅벅 닦으며 오늘도 잘 먹었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눌러 앉힌다. 아직 제 입에 피비린내가 남아있다며 내 뺨 위 허공에 키스하고는 내 손에 낡은 류트를 쥐어준다. 뒷정리는 그가 다 할테니 나는 노래나 부르라는 뜻이다. 난 앉은 자리에서 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연달아 열창하고, 칼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설거지를 한다. 내 곡조에 맞춰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있다보면 시간이 냇물처럼 흘러간다.

한창 모험을 할 적에 칼은 지나가는 말로 제가 음치라고 밝힌 바 있었는데, 난 바로 그런 면에서 그의 정직성에 한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욕조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음정은 널을 뛰고, 박자는 자유자재이며, 가사는 처음부터 정해져있지도 않은 듯한 대단한 노래를 들려준다. 그때마다 난 직업적 피로도가 한 번에 날아가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의 노래는 예술에 정형이란 없고,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참된 교훈을 준다. 뭐, 그래도 성량만은 어느 누구도 트집 잡지 못할 것이다. 트롤이 오면 모를까···.

그는 어쩔 땐 물에 들어갈 생각에 들떠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전라로 춤을 추기도 한다. 난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내 얼굴을 손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손 틈 새로 전부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이때 그가 날 끌어당긴다. 그는 날 와락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세계수처럼 우뚝 선, 단단하고, 따뜻하고, 커다랗고, 우둘투둘한 몸이 날 날개처럼 감싼다. 흉터가 하도 많아 없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든 그의 몸을 볼 때마다 속상함이 밀려들지만 난 내색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보다 흥분이 더 크기도 하고. 그는 아직도 입에 키스 할 순 없겠다며 내 목에 얼굴을 파묻고 쪽쪽거리고, 손으로는 은근슬쩍 내 단추를 풀어내린다. 한치의 무른 면도 없는 빳빳한 손이 옷 속을 파고들고 살을 어루만진다. 못 말려, 못 말려. 난 짐짓 그러면서도 칼을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럼 우리는 금세 목욕물에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상태가 되어 있다.

청결해진 뒤엔 노래를 만들거나 연습한다. 칼은 그런 내 뒤에 소리 없이 다가와(제 딴엔 발소리를 죽이는데, 그래도 여전히 크다) 날 번쩍 들고는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한다. "방금 씻었는데 땀을 흘리려고?" 내가 그를 놀리면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날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린다. "앉아!!" 그는 까랑까랑한 발성을 자랑하며 날 본다. 가만보면 그는 가끔 날 운동기구처럼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뺄 마음은 없는지라 그의 등에 앉아 류트를 연주한다. 그는 흔들림 없는 좋은 놀이 의자가 되어준다.

이토록 우리의 저녁 여가 시간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뭐, 보는 이에 따라 독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명색이 대륙을 구해낸 영웅이 입에 풀칠할 걱정에 빠져 있는 게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늘 화려한 모험담보다 훨씬 선명한 형태로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는 법이다. 예컨대 이번 달 수도비 청구서, 일주일 전 칼과의 기념일을 축하차 방문한 홍당무 인어공주 영수증,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낫겠다는 소리와 함께 돌아온 내 악기 수리비 청구서, 칼의 대장간 이용내역서 같은 형태로. 물론 엘더브레인을 무찌른 직후 꾸준히 보상 얘기도 나왔고, 여러 단체나 개인에서 우리의 살림살이가 비약적으로 개선될만큼의 손길이 쇄도하기도 했다. 우리의 이름으로 된 동상도 몇 개 세워졌고, 훈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공치사와 박살난 도시의 수복은 양극단을 달리는 문제라서, 난 눈꼬리에 피 섞인 물방울을 매단 채 그 성원을 줄줄이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 대응에는 정의로운 칼라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아니, 정확힌 칼라크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냥 내가 지레 그의 눈치를 보며 결정한 것 뿐이다.

모든 휘황찬란한 제안을 뿌리치고 도시 복원과 봉사에만 신경 쓴지 2주가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보상을 전부 내쳤다는 내 얘기에 그는 금시초문이란 얼굴을 했고, 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 했다. "어어···, 난 보상을 받는 거엔 별 이의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뿔을 긁적거리는 모습이 눈 앞을 동동 떠다녀 며칠 밤을 설쳤는지 모른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내 얼굴을 본 그가, "하지만 다들 어려운 시기잖아? 그걸 감안한 신참의 선택은 아주 탁월하다고 봐!" 그렇게 덧붙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는 나와 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동료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와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딱 하루만 다 쓰러져가는 주점에서 다함께 파티를 하고(그마저도 레이젤은 참석하지 못했다), 각자의 자리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올챙이가 만든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었지만, 아예 영웅 대접도 받지 못한 동료도 몇 명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그런 너무 막연한 약속 뿐이다.

솔직히 우리가 '더' 누릴 수 있었던 것들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땅을 치며 후회하지는 않는다. 우린 이미 이 도시를 건설한 자의 말로를 알고, 비코니아의 최후가 어땠는지 기억한다. 자헤이라, 민스크와는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영웅'이란 직함의 명과 암, 실과 득, 그리고 미칠듯한 중압감에 대해 배웠다. 명성이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전부 제 처사에 따라 달라진다는 중요한 교훈 또한. ······그래도, 돈 짤랑거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해지는 건 여전하지만, 어쨌든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이틀 전 칼과 함께 열심히 즈려밟은 빨래가 드디어 다 말랐다. 보송보송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우리는 한참을 떠든다. 칼은 깨끗한 이불 냄새를 맡으면 어릴적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빨래를 업으로 삼으셨던 까닭이다. 덕분에 나도 이젠 빨래 할 때마다 그의 가족 생각이 난다. 그나저나 보통 우리가 부부다운 일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즈음인데···, 주에 하루, 이틀 꼴로. (마음 같아선 매일 하고 싶지만 생활에 지장이 가므로 이렇게 타협을 봤다) 오늘은 그의 가족 이야기도 나왔고 하니 경건한 마음으로 대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난 베갯머리에서 슬슬 몸을 낮춰 내려가며 베개보다 익숙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나의 이마 삼분지 일과 뺨 반쪽과 턱 일부가 그의 가슴 불빛으로 빨갛게 물든다.

내가 얼마나 소리에 민감한지 아는가? 바드에게 소리란 생명이다. 그런 나의 하루 끝을 장식하는 것은 늘 이 '소리'이므로, 난 탐구를 중단할 수 없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대도 상관 없다. 그저 평생에 걸쳐 지속하리라. 내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난 무조건적으로 그이의 심장 박동을 채집한다. 그렇게 하면 내 어둠은 박멸되고, 소란은 잠재워지고, 혼란은 가라앉고, 오로지 평화와 온유가 깃든다. 쿵, 쿵, 지옥이 굴러가는 위협적이고도 음산한 소리에, 난 이루 말 할 수 없는 온기를 느낀다.

실은 평화와 온유 외에 다른 것도 있다. 이따금 나는 분노한다. 내 육肉 안에 탈로스가 깃든 것처럼, 폭풍같이. 평범한 티플링 아이 심장에 그런 걸 박아넣다니, 감히 발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짓거리야. 마음 같아서는 그놈들을, 널 그렇게 만든 놈들을 찢어발겨버리고 싶어!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그는 짐짓 놀란다. 그런 척인지, 정말로 놀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으니까. 입가에 손을 올리고는 감동하기도 하고, 나를 찬미하기도 한다. 가끔은 그렇게 툴툴대기도 한다. 자기 말이 좀 거치네? 나보곤 바르고 고운 언어를 쓰라고 하면서.

난 그가 무슨 반응을 하든 내 결의를 굽히지 않는다. 뭐라든, 내가 너의 몫까지 다 해서 널 향한 불의에 분노할게.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때론 그 분노와 슬픔에 압도 당해 날 잊고 말지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우리가 위대하지는 않고 어쩌면 생각보다 더 초라할지라도, 그 괴리에 되레 괴로울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택한 미래가 자기가 듣고 자란 전설처럼, 노래 가사 한 줄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지라도, 내가 과도하게 감상적인 날이 있고 네가 과도하게 거친 날이 있더라도, 내가 다소 움츠러들고 너는 조금 비참해지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린 뭐든지 함께하기로 했잖아. 심음에 맞춰 나는 수줍은 고백처럼 중얼거린다. "칼라크. 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우리 사이에 이제 와서 부끄러워 감출 말은 없고, 적기를 노리며 미뤄두는 마음 따윈 없다. 있잖아, 타브. 나는 솔직한 게 좋아. 부끄럽다고 할 말을 못 하다간 영영 못 하게 될 수도 있거든. 난 그러기 싫어. 하고 싶으면 다 할 거야. 원없이, 내 마음을 너에게 다 말 할 거야. 우리가 세상을 구하고 평범하게 한끼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그가 뱉은 말이 내 심장을 화살처럼 관통해버렸으므로. 난 내 말에 조응하듯 느리게 점멸하는 엔진 불빛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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