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방랑자는 정착의 꿈을 꾸는가

위저드 타브X칼라크 | 엔딩 날조

꾹뀨 by 꾹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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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편을 먼저 발견한 것은 칼라크였다. 집에 도착하면 앞만 보고 문을 열어젖히기 바쁜 그가 우편함을 먼저 확인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들어오기 전 우편함 좀 확인해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안 듣더니만 처음으로 자진해서 가져오다니, 타브는 의외라 여겼다. 뭐 그래봤자 요술 잡화점 회원들한테 정기적으로 뿌리는 할인권이나 홍당무 인어공주 청구서 같은 거겠지. 타브는 대수롭잖게 생각했지만 칼라크의 반응을 보니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그가 이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호들갑을 피우는 칼라크에게 타브는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신참! 이것 봐!"

그것은 할인권도, 청구서도 아니었다. 청첩장이었다. 일전의 모험 도중 알게 된 티플링 부부가 결혼을 한단다.

"어라. 이 둘 결혼한 거 아니었어?"

"여기저기 피난 다니느라 바빠서 식은 나중에 안정이 되고나면 올린다곤 했는데, 드디어 하나봐."

"오···. 언제 그런 얘길 했었대?"

"저번에. 음. 고블린네 털고나서 했던 파티에서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 최후의 빛에서였던가···"

"난 못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잘 됐네."

"그러게. 다행이다. 자리를 잡았나봐!"

칼라크는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 내용을 알고나니 타브는 칼라크가 왜 그토록 들떴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이런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지, 너는. 청첩장을 받아들고 내용을 읽어내려가는데 타브의 뒤편에서 칼라크가 옷장을 뒤적거렸다. 이럴 때 입을만한 옷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민하는 칼라크에게 타브가 이참에 정장을 하나 맞출 것을 제안했다. 일순 혹했던 칼라크는 곧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며 망설였다.

"뭐 어때서 그래? 하나 맞추자. 한 번 맞춰두면 두고두고 입을 거야."

"···이런 의례에 불려갈 일이 별로 없는데, 맞춤 제작은 비싸잖아."

"에이. 명색이 페이룬을 구한 영웅이시잖아. 결혼식이나 회의장에 갑옷만 입고 다닐 거야?"

"흠···. 멋진데? 예사롭지 않고, 톡톡 튀잖아."

타브는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페이스메이커로 가자. 아저씨 목숨 구해준 거 아직도 유효할걸."

"그럴 의도로 구해준 건 아니지만··· 그렇긴 하겠네."

타브의 설득이 먹혔다. 솔직히 먹히지 않은 날을 찾기가 더 힘들었으니 금세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칼라크는 한 번 결론이 지어지자 당장 튀어나갈 기세였다. 워워, 진정 좀 해. 타브는 맹수를 다루는 사육사처럼 능숙하게 칼라크를 말렸다. 타브는 귀가하자마자 칼라크의 소란 원인을 알아내느라 먹지도, 씻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칼라크는 그제야 오늘 스튜를 끓여놨는데 혹시 모르니 한 입 맛을 봐달라고 요청했다. 타브는 조심스럽게 그에 응했다. 맛을 본 타브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둘 중 하나만 골라줘."

"나쁘지 않은 건··· 나쁘지 않다는 건데."

"자기. 난 명확한 게 좋아."

"어··· 먹을만 해."

"에이씨. 그럼 또 불합격이야?"

"난 불합격이라고 한 적 없어."

"그럼? 합격이야?"

그렇게나 빤히 화색이 되면 아무리 솔직한 성격이라도 하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어진다. 타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합격."

"앗싸!"

칼라크는 국자를 들고 폴짝폴짝 뛰었다. 자기, 그렇게 하다간 우리의 힘들게 얻은 집이 언젠가 천장에 구멍이 뚫리거나 바닥이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타브는 그런 진심에서 우러나온 농을 던지려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욕실에 들어갔다.

'식', '주'를 해결했으니 이제 '의'만 남았다. 쇠 뿔도 단 김에 빼라고, 둘은 그길로 페이스메이커 부티크에 향했다. 부티크의 주인 피가로는 여전히 두 사람을 기억했다. 어휴, 어떻게 잊겠습니까. 유명인사가 다 되셨더군요. 근황은 신문에서 잘 전해듣고 있습니다. 칼라크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타브는 전시된 옷들을 살피느라 바빴다. 타브는 제 잠자고 있던 속물 기질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느꼈다.

"실은, 새 시즌을 준비 중인데요. 혹시 시착해보시겠습니까? 영웅의 특권이랍니다."

고개만큼이나 세차게 흔들리는 칼라크의 꼬리를 보며 타브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둘은 감춰진 뒷공간으로 들어갔고, 살면서 볼 수 있는 옷가지의 종류를 전부 다 목도했다. 칼라크의 눈이 핑글핑글 도는데도 불구하고 타브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수시로 하품을 했다. 물론 그 노란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타브는 칼라크의 성원에 의해 세 벌까진 입어봤지만, 그 다음 네 벌째를 권유 받은 순간 자긴 필요 없을 것 같다며 뒤로 뺐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쇼핑기는 칼라크의 패션쇼가 되었다. 가게에 진입한지 한 시간만에야 타브가 바랐던 광경이 펼쳐졌다. 칼라크는 살면서 이렇게 많이 옷을 갈아입어본 적 없다고 말하며 소파에 푹 퍼졌다. 타브는 그에 동감하며 칼라크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칼라크는 타브의 머리에 제 것을 얹고 비비적거렸다. 제 뺨에 닿는 머리칼의 감촉과 특유의 향취를 느끼며 타브는 눈을 감았다.

칼라크가 넌지시 건넸다. "자기. 그래도 나 너무 행복해. 나 너무 기뻐! 더 입어보고 싶어."

"······5분만···."

"응. 알았어."

칼라크는 타브를 따라 눈을 감고 병든 닭처럼 골골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솔직히 타브는 손가락 하나 끄떡하고싶지 않았지만 3분도 안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전 끝!"

"벌써?"

"응."

그렇게 대답하면서 타브는 운동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시전자에게도 육체 단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여러 선배 위저드들의 말을 흘려듣던 과거가 후회되는 요즈음이다. 모험이 한창일 땐 어떻게 그런 불편한 데서 자고 그 거리를 돌아다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으니 당연한 이치지. 타브는 혼자 의문하고 혼자 수긍했다.

올챙이 사태 이전부터 타브는 위저드로서 이곳저곳 공적인 자리에 쏘다닐 일이 많았다. 그래서 주에 두 세번 정도 학회가 잡히면 제각기 중복되지 않을만큼의 로브가 있었고, 구태여 더 많은 구매는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같이 왔는데 자기 것만 고를 순 없다는 칼라크의 성화에 못 이겨 로브를 두 벌이나 더 장만하게 됐다. 그러는 칼라크도 타브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정장 세트를 세 벌이나 샀다. 부티크는 정장과 드레스는 물론 잠옷과 속옷까지 포괄적으로 취급했다. 모험 중엔 이래저래 신경쓸 것이 많아 다 둘러보지 못했던 터라 이렇게 규모가 큰지 몰랐다. 칼라크는 가게를 속속들이 다 확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고, 타브는 제가 아이를 끌고 서커스에 온 건지 애인과 옷을 사러 온 건지 헷갈렸다. 타브는 금세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순간 속옷 구역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지나칠 재간이 없었다. 이제는 타브가 칼라크를 질질 끌고 다녔다.

결국 나올 때는 각자 쇼핑백을 네 개나 들고 있었다. 모험 이래 첫 방문이었건만, 타브와 칼라크는 일반 손님에서 단숨에 VVIP로 올라섰다. 타브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재산을 떠올리며 내심 탄식했다.

타브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칼라크가 말했다. "우리 이제 세 달은 쫄쫄 굶어야되는 거 아냐···?" 그리곤 곰곰이 생각하더니 흔쾌히 뱉었다. "음, 아니야.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되지 뭐!"

"···자기의 낙천성에 항상 감동해···."

"음?"

"도시를 구한 보람이 있어."

"그러게. 비록 한동안은 졸라매야겠지만, 마음만은 풍족해!"

"그것 좀 그만 일깨워줄래···?"

타브는 만면에 웃음꽃이 개화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록 칼라크가 그 멋들어진 차림새와 상반되는 방정맞은 태도를 보였더라도 말이다. 으악, 우억, 불편해 죽겠어! 칼라크는 연신 타조처럼 퍼덕거리고, 몸을 뒤챘다. 그러다 타브가 옷 매무새를 만져주려 다가가니 이번엔 또 목석이 됐다. 거금을 쓴 보람이 있다며 웃는 타브를 칼라크는 뾰루퉁한 얼굴로 쳐다봤다. 하지만 타브의 칭찬 세례에 금세 얼굴 근육을 풀었다. 단순히 옷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칼라크는 진심으로 걱정 중이었다.

"내가 이러고 두 시간 이상을 얌전히 있을 수 있을까···?"

"그럼, 그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기, 말에 신빙성이 하나도 없다."

타브의 주의력은 이미 다른 곳에 가있었다. 칼라크의 걱정은 식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잔재했지만, 본식이 시작될 무렵 눈 녹듯 사라졌다. 축가 연주는 알피라가 맡았고, 주례는 제블로어가 맡았으며 축사는 롤란과 칼, 리아 남매였고, 들러리는 티플링 아이들이었다. 구면으로만 이루어진 식은 전통적이기보다 친근하고 유쾌한 분위기였다. 도중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달하는 시간에서는 잠시 엄숙해지기도 했는데, 그 순간 타브는 시선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칼라크의 눈이 그렁그렁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명과 분위기의 절묘한 합작이라 생각하며 넘겨버렸다. 칼라크는 누구보다 큰 소리로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부부가 직접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음식은 전채 요리부터 후식까지 완벽한 맛을 자랑했다. 예식 요리에 냉소적인 타브조차 호평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칼라크는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비웠다. 타브는 그가 몇 번 더 보충을 해먹으리라 예측했지만, 칼라크는 자기 말고도 입이 많다며 욕심을 접었다. 이런 건 돈 주고 먹어야 해! 칼라크는 호언장담했다. 타브는 조용히 동의했다.

식이 끝나고 해산할 무렵이 되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드디어 집에 가겠구나, 타브는 내심 기뻐했다. 결혼식은 따뜻하고 보기 좋았으나, 사람들의 이목이 지나치게 이쪽으로 집중되는 바람에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용케 그 큰 몸을 전부 뒤덮는 갑갑한 옷을 입고도 어디 한구석 터뜨리지 않고, 춤추지 않고 잘 버텨준 칼라크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칼라크는 자기를 애 취급 하는 거냐고 눈썹을 삐죽거렸다가 이내 수긍했다.

"그러게.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네."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타브는 평소의 그와 조금 달라보인단 생각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옷의 역할이 클 것이다. 서로의 잘 차려입은 모습이 봐도 봐도 생소했다. '피가 덜 묻은 튜닉을 입고 레스토랑에서 만나.' 그렇게 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첫 데이트의 기억이 최소 삼 년은 지난 것처럼 요원했다. 그때는 거친 여정의 한복판이고, 마음이 급박했던 터라 이렇게 느긋하게 즐길 수만은 없었다. 돌이켜보니 지금 이 평범한 일상이 어찌나 고결하고 값진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됐다. 타브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정식으로 결합된 부부를 향한 축하의 물결은 식이 종료된 뒤에도 이어졌다. 남아서 벡스와 다니스에게 따로 말을 전하려는 무리와 모인 김에 서로 안부를 나누는 무리로 크게 나뉘어 사위가 수선했다. 타브는 칼라크가 전자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이럴 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궁리했지만, 의외로 칼라크는 바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타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사이에 끼었다가 부부에게 폐만 끼칠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둘은 경황이 없어보였다. 칼라크와 타브는 다음에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베이커리나 들르자고 말을 나누면서 바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타브가 데꾼한 눈을 문지르며 걷는데, 그 곁의 약간 더 높은 위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진짜로, 감동적이었어."

"엥?"

타브가 그쪽을 올려다보자 부쩍 묽어진 칼라크의 눈시울이 보였다. 타브는 의아했다. 아까 봤던 게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직접 발로 뛰어 결합시켜준 거나 다름 없는 두 사람이었으니 제 일처럼 감격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원래 타브는 이런 의식에 그다지 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너무 냉혈한인 건지 생각하는데 칼라크가 울먹이는 투로 말했다.

"어떡해.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 아까 벡스가 다니스한테 편지 읽어줄 때··· 나 울 뻔 했어."

칼라크는 진심이었다. 타브는 약간 당황했지만 동시에 흥미로웠다. 저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졌다. 이미 상황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로 틀려먹었지만.

"그 부분 있잖아. 특히. '나는 쿠키를 굽고, 넌 차를 끓여오고, 네 플룻 연주에 맞춰서 난 콧노래를 부르고, 그런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상이 내겐 너무나도 소중해. 가끔은 꿈이 아닐까 생각할만큼. 너무 행복해서 불안해. 지난 기념일에 네가 내게 준 꽃이 언젠가 시들어버릴까 맘 졸이고, 내가 굽는 쿠키 맛이 예전같지 않아지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는, 그런 역시 별 것 아닌 고민들이지만 말이야.'······"

타브는 조용히 경청했다. 칼라크는 그새 식의 내용을 전부 암기한 것처럼 달달 욌다. 타브는 행여 칼라크가 그와 흡사한 것을 평소 바라왔던 터라 에둘러 요구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직구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화법을 사용할 리 없음을 알고서라도, 공연히 양심이 아팠다.

"그리고, 그리고! 다니스가 벡스를 끌어안고 막 빙글빙글 돌았잖아. 거기서 막 우리 모습이 겹쳐보이면서···"

타브는 움찔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칼라크의 음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입이 되는 거야. 우리도 예전에 그런 적 있었잖아. 갑자기 내가 벅차올라서 널 보자마자 끌어안고 막 돌았던 거."

"맞아. 난 화장실에 갔다 온 것 뿐이었는데, 갑자기 네가 날 들어올려서 놀랐어. 물론! 너무 좋았어. 행복했어."

"막, 그러고나서 알피라가 노래를 부르는데··· 와, 근데 알피라 노래가 더 늘었더라! 진짜 연습 많이 했나봐. 그러고보니까 전하는 거 깜빡했네. 그때 준 류트 아직도 우리 집에 잘 있다고······."

칼라크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감상을 한없이 늘어놓았다. 타브는 이따금 연인의 정렬 없이 조각조각 낭자하는 사고의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다. 칼라크는 이제 더 나아가 벡스와 다니스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들의 미래 계획마저 대신 설립 중이었다.

"뭔가 저 둘이라면 이미 애 계획도 있을 거 같지. 애들을 딸랑딸랑 달고 다니는 모습이 잘 어울려. 맛있는 쿠키를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신참, 있잖아. 난 어릴 때 꿈이 민스파이였어. 왜냐면 우리 엄마가 그걸 끝장나게 잘 만들었거든. 두 판을 만들면 내가 반 이상 다 먹어버려서······"

타브는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거기까지 뻗어가는 것을 보니 '우린 왜 그렇게 안 하냐'는 섭섭함의 표시는 확실히 아닌 모양이라 한시름 놓았다. 한편으로는 칼라크의 입에서 그런 주제가 거론되는 것이 생경했다. 허무맹랑한 꿈을 입에 올리길 좋아할 것 같은 그는 의외로 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냉소주의자인 타브보다 더더욱.

왜, 연애점을 봤을 때나 '노래하는 류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의 모습 같은 것을 보면······.

"10년 후, 50년 후 우리가 어떻게 될 지 상상해봐! 그냥 그렇다고 가정을 해보잔 거야. 왜 그리 심각해?"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타브는 가슴이 갑갑해지곤 한다. 의도적으로 묻어놓았던 기억이다. 그때 겪은 것 중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것이라곤 둘만 남겨질 때마다 수시로 나누었던 입맞춤과 반강제로 먹었던 자블리다의 풍미 같은 것이지 결코 '만약에' 놀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10년 후 연인의 미래를 점 치는데, 그 선택지에 '죽어있겠지'가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이 정답이었을 때의 절망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말은 타브의 사전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만큼 갈가리 찢겨나간 당시 칼라크의 심경을. 다 지나야만이 비로소 웃을 수 있다. 일이 안 좋게 끝났다면 어찌 됐을지 그런 가정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어디까지 말하고 있었지? 아. 벡스랑 다니스였지. 아무튼 그 둘이 잘 살았음 좋겠어. 이럴 줄 알았음 걔네한테 직접 전달하고 오는 건데···. 너무 정신이 없어보여서 말을 못 걸었네. 그래도 눈도장은 찍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칼라크의 미래 언급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제 그의 입에서 흘러드는 '미래'에는 마치 초원에 팔을 베고 누워 눈으로 이어보는 별자리 같은 아득함도, 가능성이 영 퍼센트에 수렴하리란 암울한 단정도 없었다. 남의 것을 관조하며 대리 만족에 그칠 것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손에 거머쥐고, 휘두르고 싶은 방향으로 휘두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권리였다.

타브가 불쑥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

"엉?"

"말은 그 둘 얘기지만, 결국 자기가 하고 싶단 거잖아. 아니야?"

"···오, 오호호."

칼라크는 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입을 가렸다. 타브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타브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그런 걸 계획하고 있다면 말이야. 나도 거기에 끼워준다면 크나큰 영광일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네."

"당연하지!"

타브의 말이 끝을 맺기 무섭게 칼라크가 버럭 소리쳤다. "네가 거기서 빠질 수 있는 곳은 없어. 알다시피 내 과거, 현재, 미래, 전부 다 네가 있거든. 널 만난 후로는, 내 모든 청사진에 네가 빠짐없이 등장해. 솔직히 나보다 네 존재감이 더 크다? 어쩔 땐 그 거대함에 숨이 막힐 정도로."

타브는 잠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부쩍 거칠어진 칼라크의 숨소리가 고요 속에 퍼졌다. 칼라크는 무심코 앞장 섰다가 다시 뒷걸음쳐 타브의 곁으로 돌아왔다.

"왜 멈췄어? 자기."

"어······. 내가, 더 노력해볼게."

"뭘?"

"···아니야."

타브는 도리질치며 칼라크의 손을 잡았다. 뾰족한 손톱이 잠시 살갗에 톡 닿았다가 이내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안쪽으로 잘 숨어들었다. 익숙한 감촉을 통해 타브는 소름을 갈무리했다. 그건 태생적인 한계였다. 타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칼라크의 타고난 애정과 표현법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타브가 말했다. "그러고보니까, 저번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

"뭐가?"

"피츠네에 갔을 때 말이야. 가족이 둘 이상인 걸 좀 부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피츠'는 발더스 게이트에서 무기고를 운영하는 칼라크의 친구로, 임신 중이었다.

"그날 몇 시간 사이에 피츠 배를 몇 번이나 만지고, 귀를 갖다댔는지 기억 안 나? 나도 중간부턴 세는 걸 포기했어."

"뭐 그런 걸 세고 그래! 그냥 신기해서 그랬지. 나랑 진짜진짜 어릴 때, 코흘리개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야. 아직도 걔랑 흙 묻히고 놀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작은 몸에 새 생명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니까 참을 수가 없더란 말이지."

"몇 달 남았다고 했지?"

"아마 이제··· 두 달 정도밖에 안 남았을걸? 걔네 집에 들른지 한 달? 그쯤 됐으니까. 아닌가? 한 달 반?··· 모르겠어."

칼라크는 타브와 잡은 반대쪽의 남는 손을 꼽아보다 포기해버렸다. 이런 것도 기억 못 하는 그가 타브와의 기념일은 어떻게 기억하는지 가끔은 신기했다. 하지만 기실 타브도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고, 어림은 흐지부지 되었다.

"뭐, 때 되면 알아서 편지 하겠지! 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겠지. 잠깐, 말 돌리지 마. 내 말은, 자기도 그걸 원해? 피츠네나 벡스네처럼··· 가정을 꾸리는 거 말이야."

"······으으음."

칼라크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솔직히, 내가 넘볼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왜?"

"그냥, 내 상황이 그렇잖아. 예전엔 내 사시사철 불타오르는 몸뚱이 땜에 그랬고, 지금은···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지금도 완전히 안정적이진 않으니까."

"왜?!"

"···자기 화났어?··· 아니, 그야, '가정'을 꾸린다는 게 그냥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달라,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어. 벡스네도 마음은 이미 10년을 함께한 부부 그 이상이었지만, 여러 상황이 겹쳐서 아주 뒤늦게서야 정식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돈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그 외에 절차도 밟아야하고, 필요한 게 너무 많은 거 있지. 예를 들어 배우자의 신용도 같은 거? 아. 이건 자기를 말하는 게 아니야. 나에 관한 거지. 난··· 그냥, 약속할만한 게 없겠다 싶었어."

"하지만, 우린 지금도 몇 달이나 같이 살고 있잖아. 난 자기를 믿어. 예나 지금이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뢰가 가는 사람은 자기가 유일했어. 내 인생을 통틀어서!"

"아. 그건 그렇지. 근데 그건 똑똑하고 똑부러지는 자기가 있어서고, 난 아직도 지상 일에 적응하느라 어안이 벙벙한 걸. 요즘 사람들이 뭘 입고 돌아다니는지, 무슨 음식을 먹고 살고, 애들은 어떻게 노는지 하루하루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구. 난 10년이나 뒤처졌잖아. 있지. 오늘도 새롭게 느낀 게 있다? 바로바로, 남들은 어떻게 이런 꽉 끼고 답답하고 숨 막히는 옷을 입고 몇 시간동안 앉아서 박수만 칠 수 있을까 하는 거야! 춤추고 싶어서 혼났어! 어쩔 땐 펑펑 울고 싶었고! 하지만 주인공은 내가 아니잖아. 그치? 하나뿐인 두 사람의 날을 내가 망칠 순 없잖아! 으윽. 이렇게 남들 속도에 하루하루 맞추느라 바쁜 내가 어떻게 미래까지 약속할 수 있겠어? 보장도 없으면서! ······그런, 마음이었지. 이제껏."

칼라크는 종내 타브의 눈치를 보며 말 끝을 흐렸다. 타브의 화를 돋우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타브는 생각에 침잠했다. 그 몇 달동안,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 없이 칼라크의 곁에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타브는 돌연 칼라크와 맞잡은 손을 풀고 칼라크의 옷 매무새를 흩뜨러트렸다. 뭐하는 거냐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목 끝까지 차올라있던 옷깃을 접고, 거추장스러운 프릴을 떼버렸다. 팔의 부피 때문에 올라가지 않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바득바득 걷어올렸다.

"그러다 옷 터지겠어! 비싼 건데!"

칼라크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칼라크는 순식간에 호족에서 부랑아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불편하면, 말을 하지 그랬어!"

"ㅇ, 왜, 왜왜, 왜?!"

너무 놀라 말을 저는 칼라크의 손을 타브가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미안해! ···내가, 네 고충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내 생각만 했어. 난 그냥··· 네가 그런 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기뻤어. 넌 좀처럼 정착이니 가정이니 그런 얘길 안 했었잖아. 근데 이제 편해진 것 같아서··· 그래서 마냥 좋았는데······. 그래서 지금 조금 부끄러워. 근데 이걸 당사자 앞에서 말로 해버렸으니 더욱더 부끄러워질 일만 남았네."

타브는 상기된 얼굴을 부채질 했고, 칼라크는 말을 잃은 채 타브 손에 끌려오듯 걸었다.

문득 칼라크가 중얼거렸다. "···자기. 혹시, 나랑 결혼하고 싶어?"

타브는 이상한 감탄사를 흘렸다가, 칼라크의 얼굴이 진지한 것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도, 자기랑 같은 마음이야."

그건 타브에겐 꽤 도발적이었으나 칼라크에겐 아무 효력도 없는 한마디였다. 칼라크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타브를 바라보기만 했다. 타브는 직설적인 칼라크에게 이와 같은 행동이 얼마나 재수없을지 비춰보다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의지가 된다니 기쁜 말이지만, 나도 자기와 똑같아. 난 자기 같은 사람을 다신 만나지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힘껏 붙잡아야된다는 걸 알아. 그러려면 되도록 지금 이렇게 평화를 되찾은 시점에, 냉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야겠지. 남들 다 보는 눈 앞에서 '완전히' 네가 내 거고, 내가 네 거라는 서약을 맺어서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게 좋겠지. 우리가 처음 자기 직전에 했던 그것처럼······. 음. 솔직히 지금도 알 사람들은 충분히 다 알지만, 가끔은 그걸로도 부족하지 않나 싶어. 내가 좀 떵떵거려야 직성이 풀리거든. 내 허영심 알잖아. 하지만, 앞날은 불안정해. 자신이 없어. 내가 남들한테 추대 받을 정도로 대단한 위인인가 하는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할 때도 있고, 그 이상이라고 욕심을 부릴 때도 있고, 그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날도 있어. 혼자 이래. 이렇게 변덕이 심하고, 체력도 후달리는데 어떻게 자기를 두 눈 감는 그 날까지 감당할 수 있겠어? 이렇게 강하고 자유로운 자기가, 일정한 법칙과 규율이 없으면 불안한 나를······"

"오. 자기야."

칼라크가 끼어드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타브는 원래 제 말이 끊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엔 차라리 살았다는 안도감이 우선시 됐다.

"그거 꽤··· 청혼으로 들리는데."

그 말을 듣기 직전까지는.

타브는 입을 닫았다. 두 사람에게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칼라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있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줄래?"

"음?"

그건 퍽 의외의 대답이었고, 그래서 타브는 이런 데서 학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칼라크는 안절부절 못 했다.

"···조금만, 내가 자리를 제대로 잡아서, 떳떳한 한 명의 발더인으로 자기 옆에 나란히 설 수 있을 때까지······ 우악, 나 이런 거 존나 못 한다! 어떡해? 발전이 없냐, 정말!"

그걸 나한테 물어도 난 몰라, 타브의 이성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본능은 심호흡과 함께 그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 부끄러. 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벌써 이런 걸 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어! 그냥 언젠가는, 내가 임프를 무찌르는 방법보다 발더인들은 어떤 농담엔 웃고 어떤 농담엔 정색하는지 구분하는 방법을 더 잘 알게 되면, 그때 가서 진지하게 고민할 작정이었는데······. 네가 선수쳤어. 자기야."

"···칼라크. 심지어 난 결혼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냉소주의자였어. 내 주변에는 좋은 사례가 없었거든."

"응. 알고 있었어.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으셨을까?"

"그냥,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네 행복이 그거라면, 무조건 따르고 싶어!"

두 사람은 숫제 소리를 질렀다. 타브는 이런 상황에 내성이 없어서, 칼라크는 흥분해서 소리가 커졌다. 타브는 손깍지에 힘이 바짝 실리는 것을 감지했다. 약간은 아팠지만, 참을만 했다. 이상한 쾌감이 일었다.

"그럼, 그럼 난···! '그게 내 행복이야!' 라고 섣불리 응답하진 않을래.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거든. 하지만, 곧 따라잡을 거야. 나 진짜 노력할 거야! 힘낼게!"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 한 치의 양보 없는 응원과 다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한 쪽이 건투를 빌면 다른 한 쪽이 건투를 빌고, 자기가 더 노력하겠다는 식이었다. 우로보로스의 그것처럼 한량 없을 것만 같던 그것은 타브가 먼저 이성을 되찾음으로써 끝이 났다.

칼라크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던 솔직한 말이 무색하게도, 며칠 후 손수 제작한 계획표를 내밀었다. 타브는 그의 행동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도 이래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막상 열람을 시작하니 그 고민은 이것을 어디서부터 현실성 있게 수정해야할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곧 하나로 귀결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타브는 일일이 제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고 마음가는 대로 순수하게 대응하는 칼라크의 태도를 동경했다. 타브는 좋게 말해 영리하고, 나쁘게 말하면 영악했다. 게다가 그런 성질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덕목으로 평가 받는 환경 속에서만 쭉 지내왔으므로 그 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랑스러웠다면 모를까. 물론 지금도 그 관점은 공고하지만, 솔직히 이따금 자신과 정반대되는 칼라크의 성질이 흡사 물에 쏟아진 기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제 타브는 제가 칼라크의 돛단배에 승선한 객이라 여긴다. 잔바람에도 사정없이 뒤흔들리고 좌초할 위기에 수없이 가로막히지만 낭만 하나로 버티는, 그리고 그 사실이 삶의 미학이 되는. 그가 어디로 자신을 끌고 가서, 어떤 기상천외한 행동을 보일지 그저 두고 보기로 했다. 남풍을 타든, 북풍을 타든지간에. 심지어 이제는 배가 부서지면 헤엄을 치면 된다는 생각 없는 결론이 도출됐으므로.

······그렇지만, 미래 계획에 자꾸 촉수와 데빌의 계약서가 등장하는 것은 한 번쯤 손을 봐야지. 연이은 학회에서 돌아가는 길, 발더란의 석상을 올려다보며 타브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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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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