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의 확답
타브칼
※ 발더스 게이트3 전체 스포일러
1.
어떤 사랑은 보호 본능 내지 부양 욕구로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된 사랑은 서로를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할 공산이 크다. 책임감에 빚지는 감정은 좋게 끝나는 경우가 드무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뛰어드는 게 바로 사랑이고, 용기라 한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건 큰 건을 빚진 채무자나 한 생명을 이 거친 세상에 태어나게 한 창조자가 차야 할 족쇄이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동료의 몫은 아니었다.
타브는 팀의 리더로서 많은 의무를 짊어졌다. 무리의 행로를 결정하고, 대열을 정비하고, 전술을 펼치고, 일원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하물며 날마다 영양 균형에 맞게 식단을 꾸리는 것조차 타브의 일이었다.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지만 그는 불평 한 번 한 적 없다. 리더라고 권위 의식을 부리지도 않았다. 선발 대원이 필요할 땐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다가 제 권한 밖이라 생각될 땐 빠르게 물러서서 뒤를 돌봤다.
칼라크는 감동했다. 그날 외나무다리에서 타브 일동을 믿고 따른 것이 천운이었다. 타브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전 생애를 통틀어! 비록 칼라크가 여태껏 인복이 지지리 없었단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동료들도 금세 그에게 마음을 내어준 것을 보면 칼라크의 안목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탄복할 만한 일이면서 모든 문제의 근간이기도 했다.
칼라크는 일종의 추리를 해야만 했다. 감정의 진의를. 절 향한 타브의 그것이 누구에게나 배분하는 친절함의 표식 한 조각인지, 아님 그 이상인지를. 사람의 감정과 거짓말을 파악하는 것보다 데몬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더 일찍 깨우친 칼라크였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표본이라곤 각박한 외곽 도시에서 좀 잘 살아보잡시고 만들었던 불량 서클 속의 치기어린 애정 뿐이었다. 어쩌면 그건 애정이라기보다 그냥 동종의 짐승끼리 합사시켜놓으면 알아서 붙어먹는, 일종의 번식욕이었지만······.
아무튼 타브는 자애로운 자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누구에게나. 타브가 특별 대우를 한다니, 그런 건 필시 환상일 거였다. 칼라크의 급박함과 간절함이 만들어낸.
일단 칼라크는 타브를 좋아했다. 부정의 여지가 없다. 칼라크는 자고로 극적인 것을 좋아했으니까. 가슴을 뜨끈하게 데우는 사연. 열정적인 사람.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선행의 연속. 그런 것들. 하지만 칼라크가 그렇다고 해서 타브도 그러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원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칼라크는 그 진리를 남들보다 일찍 깨우쳤고, 그래서 순진하게 믿고 싶은 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나서 평면적으로 바라보면, 타브가 구태여 칼라크에게만 남다른 의무감을 지닐 이유는 없었다. 몸에 시한 폭탄이 달려있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남들도 절박하긴 매한가지고, 말 못 할 사연을 갖고 있는 것을. 치명적인 뱀파이어 스폰, 정기적으로 재물을 먹어야하는 또다른 시한 폭탄, 자리엘의 오른팔과 계약한 변경의 칼날 겸 대공의 독자獨子, 어린 기스양키 전사, 유물을 운반하는 샤 신도라는 엄청난 대열 가운데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려면 뭐, 어떡해야 하나? 사실 나는 마인드 플레이어고 너희들은 세뇌 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라도 내세워야 하나?
하지만 그토록 가지가지 하는 동료들이라 도리어 눈에 띌지도 몰랐다. 그들에 비해 칼라크는 한층 다루기 쉬운 축에 속했으므로. 타브가 조금만 선행을 베풀기만하면 동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던 이는 제가 유일하지 않은가. 큰 불평 불만도 없이. 뼈다귀를 던지면 아무 의심 없이 꼬릴 흔들며 물어오기 바쁜 개처럼. 내거는 조건도, 의심도, 비밀도 많은 동료들에 비하면 확연히 수월했다. 칼라크는 자기가 타브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구제불능들만 모인 교실에서 홀로 교사의 말을 경청하는 단 하나의 모범생. 실제로 그랬단 건 아니고, 약간의 과장을 섞자면 말이다.
피해의식은 아니었다. 칼라크는 그 관심이 좋았다. 애정이 고팠다. 타인이 제게 주는 모든 긍정적인 암시를 못내 갈구해왔던 그는 이것저것 따질 여력이 없었다. 칼라크는 십 년동안 친구다운 친구 하나 없이 철저히 고립되어봤다. 무려 십 년을. 극심한 외로움에 너무 오래 노출된 나머지 혼동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뇌에는 올챙이가 기어다니지, 몸은 뜨거워 돌아가실 지경이지, 일은 갈수록 커져만가는데 감성에 눈을 돌릴 틈이 어딨겠는가. 그러나 제법 충동적으로 시작된 감정은 메마른 심지에 불을 붙이더니 빠르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타브가 자기를 보는 눈이 남다르다느니 지난번에 했던 말이 추파처럼 느껴진다느니, 어쩌면 자아도취에 가까운 오만과 착각이 칼라크에게는 너무 달콤했다. 지옥에 떨어져 본 이래 처음으로 분노와 슬픔이 아닌 애정에서 동력원을 얻은 거였다. 처음으로.
그 감격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때로는 단지 애정을 쏟는 것만으로 삶의 원동력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초치지 말길! 설령 그게 나 자신이더라도!
칼라크는 자신의 서투름이 일을 그르치지 않길 간구했다.
사람들의 눈은 거기서 거기인 지라, 기어이 이 울렁거림을 연정이라 확진했을 땐 이미 칼라크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들 만만치 않게 외롭고, 힘들고, 안정과 위안이 필요했다. 동료들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굴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극도로 불안하고 위태로우면 정신이 회까닥해서 없던 감정도 솟아난다던가. 불안과 설렘을 혼동해서 불상사를 야기한다고. 반평생이 넘도록 책 한 쪽 읽은 적이 없으니 분명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마 게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출처는 불명확하지만 인상에 깊이 남았다. 몹시 그럴싸한 얘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기야 뇌 속에는 기생충이 처박혀있지, 사방에서는 데빌이며 캠비온이며 구분 없이 달겨드는 와중에 어쨌든 나와 함께 맞서 싸워주는 아군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공통점이라곤 올챙이 뿐인 별종들끼리 힘을 합쳐 위험을 타개하고 서로를 지켜준다, 애정이 꽃 피기 딱 좋은 조건일 수밖에.
어떨 땐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긴장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상황이 이렇게 치달으니 정말 이 모임 자체가 좁아터진 초등학교 교실 안 같기도 했다. 중재할 어른조차 없는. 설마설마하는 얘기지만, 언젠가 이 안에서 치정 싸움이 인다면 퍽 재밌는 구경거리가 될 거였다. 물론 칼라크가 그 당사자가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고.
어쨌거나 자신 있었다. 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우뚝 설 자신이. 충분한 근거도 있었다. 외모, 성격, 파티 내 기여도, 어디 하나 충만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뻐기고 있노라면 치명적인 불리점 하나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엔진. 망할 엔진. 그놈의. 억울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칼라크는 은근한 방식으로 수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은근슬쩍 타브의 머리카락을 넘겨준다든지, 피를 닦아준다든지, 상처를 돌봐준다는 핑계로 바투 붙어 만진다든지. 다른 동료들처럼. 애시당초 단순한 접근조차 녹록치 않았다. 칼라크는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타협 보다가 홀랑 전소시킨 물건이, 생명이 몇 개던가. 그러니까 그게 터지기 전에 고백만이라도 얼른 해야지. 하지만 너무 서두르면 그가 싫어할 거야. 칼라크는 밤마다 홀로 붉으락 푸르락 했다.
칼라크는 이윽고 타브가 제게 짐을 맡기는 것조차 가슴이 떨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떤 형태이든 상관 없었다. 타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고블린들을 무찌르고 티플링들과 파티를 하기로 결정한 그날 밤 칼라크는 딱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동물의 왕국이 되겠구나. 다들 승리감에 도취된 탓인지, 술주정이 좀 문란한 건지 뭔지는 몰라도 야영지 전방에 야릇한 기류가 감도는 것이. 농후한 보라빛 안개, 서큐버스의 숨결처럼. 치정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날이 바로 오늘이리라, 그런 예감이 절로 드는 기이한 밤이었다. 어쨌든 이런 마당에 남들에게 기치를 빼앗길 순 없는 노릇이라 칼라크도 행동에 나섰다. 평소에는 은근히 하던 걸 기어이 직구로 꽂아넣고, 바짝 들이대긴 했다만 하면서도 아리송했다. 칼라크는 추파에 천부적인 재능도, 요령도 없었다. 그저 모든 걸 집어삼킬 화마 같은 열정 하나만 갖고 있었다.
마음이란 것이 노력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부담스러워서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칼라크는 줄곧 전전긍긍했다. 타브가 수많은 추파의 물결을 뒤로 하고 제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좋아. 이따 보자. 다들 잠들고 나서."
경황이 없었다. 어떡해? 난 아직 뜨거운데, 어떡해? 칼라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까딱하면 기절할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입을 벌렸다간 심장이 개구리처럼 튀어나갈 것 같았다. 기실 타브와 나눈 대화라고는 성교육 후 쉬는 시간의 대화처럼 유치한 것들 뿐이었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칼라크는 천막 밑에서 파랗게 달아오른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칼라크는 증명 받은 것이다. 타브의 그것은, 의무감이 아니란 것을.
의무감으로 섹스 얘길 귀에 대고 속삭이는 사이는 없으니까.
2.
"섹스를 이렇게 생각하는 부류가 진짜 있어?"
아스타리온이 코웃음을 쳤다. 신원불명의 지하실에서 외설 서적을 발견했을 때였다.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당장 책을 펼쳐봤던 그는 비산하는 먼지에 켈룩켈룩 기침을 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책을 비난하던 아스타리온은 관심을 보이는 칼라크에게 책을 넘겨주곤 금세 다른 것을 뒤지러 가버렸다. 칼라크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섀도하트와 함께 소설을 읽어내렸다. 두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진정한 결합을 이루는 성스러운 의식, 영혼과 영혼 사이의 진솔한 대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자연의 그 모습 그대로 솔직한 당신을······ 그런 화려한 미사여구를 단 묘사들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지극히 뻔한 통속 소설이었다. 문체가 다소 탐미적인. 살면서 맞닥뜨릴만한 철학적이고, 범우주적인 표현들이 거기에 전부 모여있었다. 학술서인지 소설인지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칼라크의 단전에 짜릿한 전류 같은 것이 내달렸다. 열이 훅 올랐다. 아마 얼굴도 조금 빨개졌을 터였다. 이미 빨갛지만, 조금 더.
"쯧. 섹스가 그냥 섹스지 뭐이리 말이 많아? 성스럽다느니, 결합이니 어쩌니. 유난은."
혀를 차는 아스타리온과 달리 칼라크는 동료들이 안 보는 틈을 타 책을 슬쩍 가방 안에 집어넣을까 했다. 이미 포화상태였으므로 관뒀지만. 그리고 아스타리온의 조소에 조용히 상처 받았다. 허공을 향한 그의 조롱이 궤적을 빙 둘러 칼라크에게 명중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칼라크는 동나이대에서 아주 희소한 부류일 거였다. 심지어 타브와 처음 거사를 치루고나서도 칼라크는 초심을 보전했다. 아스타리온이 경멸하던 모든 문장에 칼라크는 가슴 깊이 공감했다. 진정한 영혼과 육체의 결합, 오, 내가, 드디어, 타브와! 비로소 진정한 연인이 되다니! 배에 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 씨근거리며 어릴적 뒷골목에서 자주 들었던 외설적인 곡조들을 상기했다. 적나라하다못해 메스꺼운 것부터 윤색으로 점철된 것까지 전부 다 제 얘기 같았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누워있다. 마침내.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감성은 지옥에서 금단의 열매나 다름 없는 거였다. 함부로 넘봤다가는 죽음에 이르는. 이제 그걸 가졌으니 누릴 일만 남아 있었다.
숫제 어떤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듯한 성취감이 들었다. 한동안 혼자 몇 번이나 허벅지를 꼬집었는지 모른다. 전투 중에도 딴 생각을 했고, 밥을 먹을 때도 칠칠 맞게 흘렸다. 가슴은 허튼 기대로 부풀었고, 자꾸 지저분한 농담을 입에 올리게 됐다. 아무 일도 없는데 실없이 히죽거리고 이유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옥의 기억은 벌써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십 년에 달하는 고독을 단 몇 달만에 가뿐히 상쇄해버렸다.
동료들은 종종 불편한 헛기침 소리를 냈다. 뭐라 말도 안 했는데 스스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순전히 본인들이 불편해서겠지만. 타브는 그 점을 우려했는지 어느날 아예 동료들 앞에서 선언을 해버렸다. 공사 구분을 더 잘 하겠다는 거였다. 짓무른 토마토처럼 변하는 동료들의 안면을 칼라크는 보았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도록 할게. 그렇게 말하는 타브 옆에서 칼라크는 지나치게 쑥스러운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스레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사과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남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오롯이 쟁취해낸 애정이었으므로.
단지 칼라크는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무엇도, 누구도 태우지 않고 마음껏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이후로 하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려버린 칼라크였지만, 모처럼 손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청컨대, 이 무한한 열정을 무한한 대로 놔두기를. 이번에야말로 망치지 않기를. 타브가 제 열정을 망치지 않고, 칼라크가 이 사랑을 망치지 않기를.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빈곤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타브를 칼라크는 지키고 싶었다.
3.
타브는 따지자면 칼라크의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다. 매사에 초연하고 침착하다. 그렇지만 냉정한 사람은 아니다. 표현이 그럴 뿐. 칼라크가 원래 툭하면 들뜨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은 다 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인 것처럼, 타브는 너무 솔직한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타브가 이르기로는, 자신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 뿐이랬다. 좀 이기적인 면이 있어서 어릴적부터 틈만 나면 잔머리를 굴리면서 어떻게 수를 쓸 지만 궁리했다고. 칼라크는 타브의 표현을 좀 더 긍정적인 쪽으로 정정해주었다.
"자기, 그런 건 현명하다고 하는 거야. 상황을 잘 읽고, 처신에 능하다는 거지."
칼라크는 타브의 그런 면에서 매력을 느꼈다. 칼라크에겐 남의 눈치를 본다는 말과 섬세하다는 말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브는 그저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애시당초, 냉정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렇게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턱턱 도울 수 있겠는가? 어찌 난민들을 위해 기꺼이 고블린의 진지를 처들어가고, 한 세기에 걸친 저주를 해결하러 다니겠는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이었는데. 타브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칼라크는 생각했다. 원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은 법이니까.
소통에 있어서 둘의 역할은 명확하다. 칼라크는 말을 하고, 타브는 듣는다. 칼라크가 열마디를 뱉으면 타브는 가만히 듣다가 한마디로 조리 있게 정리해주었다. 말수가 많지 않은 만큼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 같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바가 다르기도 했지만, 받아들이는 정보의 총량 자체가 달랐다. 칼라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대대적으로 반응하면, 타브는 이것도 놓치지 말라고 제가 발견한 작고 숨겨진 것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식이었다. 물론 칼라크가 본 것도 진즉 본 상태였고. 칼라크가 나무를 보면 타브는 숲을 봤다. 반대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 그랬다. 둘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고 사기를 진작할 줄 아는 좋은 짝이 됐다.
그림자 땅의 유서 깊은 저주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줬다. 사실 그 전까지 이 설익은 감정은 참 대책이 없었다. 서로가 언제 마인드 플레이어로 변할 지도, 변심을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동료라는 것조차 표면상 내세운 어떤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싸한 외피 아래 이십사 시간 서로를 감시한다는 진심을 가까스로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차 이 흐릿하게 피어올라, 겨우 형성되려는 유대란 장막이 부지불식간에 찢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예열은 끝이 났고, 이제 타오르기만 하면 됐다. 칼라크는 변죽을 울린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가가서 와락 끌어안고 싶을 때 되레 후퇴를 한다든지, 타브가 키스를 바랄 때까지 부러 기다린다든지 하는. 숨통을 트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칼라크에겐 그것이 도리어 관계의 도약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갈등은 거기에서 시작됐다. 온도차. 좁힐 수 없는, 노력의 영역을 벗어난, 고정적인 간극에 관하여. 칼라크는 생각했다. 꼭 고양이와 연애를 하는 것 같아. 고롱고롱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일을 하러 떠나는 것이. 하지만 칼라크가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물으면 따사로운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어떤 핑계도 없이. 털털하고 진솔하게 마음을 털어놓다가도 그 이상은 안 되겠다며 금세 진심을 감춰버리는 것이. 그곳은 물론 칼라크가 더 들출 수 없는, 들춰서는 안 되는 타브만의 심연이라고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함묵 속에 남겨두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다. 칼라크는 그걸 존중하고도 싶었지만,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가끔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티 없이 깨끗한 결정에 불순물이 섞여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타브는 너무 커져 있었다. 칼라크가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타브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손 끝이 저렸고, 그의 몸에 난 흉터와 점을 더듬을 적마다 묵직한 탄식이 흘러나왔고, 손길이라도 닿으면 소름이 내달렸다. 내내 바글바글 끓고 있는 험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타브가 아니라도 칼라크는 애시당초 스스로의 통제에 있어 그 권력이 미미했고, 본인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이제까지는 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연유는 그로 인한 피해자가 자신 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소유한 적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 소유한다는 것의 무게와 쾌락은 정비례해서, 소유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를 달성하면 필경 다음 것을 원하게 된다는 것을. 타브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부족했다면 갈구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허기에 허덕이는 사람에겐 호화스러운 만찬보다는 어떻게든 아사를 면하는 것만이 우선일 테니.
갈망과 의존은 열쇠와 자물쇠처럼 한 짝으로 이루어진 개념이지만, 칼라크에겐 그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생소하고, 진귀하고, 매혹적이었다. 매일 보던 지긋지긋한 지옥의 풍경을 벗어나 처음으로 지상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꽃과 풀 내음을 맡았던 그 순간처럼. 칼라크가 보기에 그건 그저 재능이었다. 오로지 타고난 자들만이 그것을 구분하고,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본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오직, 진창에 구를 염려도 없고 모난 데도 없이 잘 가꾸어진 동그란 틀 안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그들을 질투했다. 그리고 동경했다. 삶은 모순의 연속이라, 그런 너절한 감정이 때로는 생의 자양분이 됐다. 칼라크는 살아감에 있어 하나쯤 그런 대상을 삼지 않으면 안 됐다. 바드들의 선정적인 노랫말이나 과장된 서사시에 유구하게 동한 것도 그 때문일 터다.
오히려 지옥에 있을 때가 훨씬 굳건했을 지도 몰랐다. 당연하다. 그곳에서 칼라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리엘의 번견. 악마들의 대변인. 마귀의 숙적. 오로지 베고 찌르고 태워버리는 전쟁 기계였다. 지옥에서와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칼라크는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당장 가슴에 살덩어리 심장 대신 지옥산 깡통을 달고 있는 까닭에······.
지상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비로소 지옥에서의 삶을 인정하게 만들어줬다. 안정된 사람이 주는 안정된 애정 앞에 지옥의 천불마저 그 열기를 잃었고, 절망은 추락했다. 칼라크는 타브가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아무리 지난하고 험난한 길일 지라도.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라면. 그곳이 설령 내장과 살점으로 이루어진 마인드 플레이어의 수조라고 해도, 급기야는 역겨운 데빌의 집이라고 해도.
그 무적에 준하는 만용을 나래 삼아 비행할 적에 칼라크는 문득 공포와 평안은 동일선상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어느덧 칼라크는 잠시라도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면 허전했고, 남들의 이목이 닿지 않으면 금방 무료해졌다. 하물며 야영지에 잠깐 남겨지거나, 제가 없는 데서 일행의 중대사를 결정하면 소외감을 느꼈다. 마치 저와 타브를 혼연일체라 여기기라도 하는 모양으로. 잘못 든 버릇이 점점 더 세를 불렸다. 그 탓에 불필요한 부정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도리어 자신과 싸우는 날이 늘었다. 그러면서 이런 부패한 속내를 드러냈다 미움을 살까 괜한 기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타브와의 충돌을 최소화하려다 을을 자처한 적도 빈번했다. 칼라크는 타브의 언동에 일희일비하면서 타브가 무심코 흘린 그 어떤 것이라도 밑바닥까지 긁어모았다. 자유를 그렇게 갈망했으면서, 또다른 구속에 스스로를 몰아넣은 격이다.
칼라크는 사랑을 하는 것만으로 충만해진다는 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제력은 웃자란 열매처럼 나날이 약해졌으되 갈망은 나날이 번성했다. 자립심은 크게 깎여나갔고, 대신 사사로운 불안과 갈등이 팽배했다. 허나 그마저 칼라크에겐 너무나도 배부른 고민이었다. 당장 일 초 앞도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하늘엔 무지개가 걸려있고 들판엔 양떼가 뛰노는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그 실정에 대한 자각이 내적 갈등을 모조리 먹어치워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라크는 다만 인내의 보루를 짓기로 했다. 제 안에 있는 이것들이 타브에게 닿지 않도록. 안 그래도 짊어질 게 많은 타브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부담까지 지우고 싶지 않았다.
시기를 한참 놓친 욕망은 그토록 불온하고도 순수하게, 탁한 광택을 발했다.
4.
그러니까 나는 실로 행운아다. 근 십 년 동안이나 행운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건만 먹고 살만해지자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만 한 사람에게 그런 천운이 여러 번이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특히나 외곽 도시의 불량아 출신에게는. 어쩐지 너무 순탄하다 했다. 때는 고룡 다리에서 스틸 워치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그것'들은 칼라크를 다른 생명들과 달리 취급했다. 분명 칼라크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교한 기술력으로 점철된 그것들은 그렇게 말했다.
"스틸 워치 주조소에 보고해야 한다. 네 엔진은 매우 구식이다. 너는 해체되어 부품이 재활용되어야 한다."
발더스 게이트에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철석같은 믿음이 꺾이고 칼라크는 좌절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본래 기쁨에 날뜀이 마땅했건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엔진 상태에 온 신경이 쏠리는 날이 부쩍 늘었다. 터질 듯한 몸 상태에 비하면 올챙이 따위는 차라리 사소하게 치부됐다. 칼라크는 관성적으로 길을 걷고, 말하고, 춤을 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하부 도시를 배회하던 도중 어떤 간판을 발견했다. '노래하는 류트', 고타쉬 밑에서 일하던 시절 돈이 들어오는 날이면 빠짐 없이 향했던 곳이다. 이제는 전처럼 거창하고 세련되지도 않은 그 작은 식당의 존재가 고향에 온 이래 첫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칼라크는 타브와의 데이트를 계획했다. 아마, 생애 최초의. 최후가 될 지도 모르는.
식당 위에 딸린 여관은 엘프송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었지만, 연인 두 사람이 오붓하게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한적한 변두리에 위치해 남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었으며 경관도 퍽 마음에 들었다. 하부 도시의 미감은 그리 좋지 않다. 아니. 단언컨대, 흉하다. 제아무리 어둠 속에 열심히 숨은들 악취는 가릴 수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모조리 애틋했다.
창 밖의 황황하던 등불은 소강되고, 하루종일 이어지던 도시의 소란과 웅성거림은 빠르게 잦아들며 사위가 적요로 물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칼라크의 심장은 조바심을 쳤다. 타브의 앞에서 이토록 솔직한 날이 또 있었던가. 차라리 처음 서로를 만졌던 첫날 밤이 덜 떨릴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흥분과 기대에 그저 허우적거릴 수 있었던 어린 날들. 괜한 일에 상처 받지 않고, 섭섭지 않고 모든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던, 새파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런 날들. 엔진 걱정 따위로 밤을 지새우지 않던. 공기는 평소보다 훨씬 농후하고 끈적거렸다. 군데군데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관방에 웃풍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칼라크에게 가족이란 것이 있을 때부터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유서 깊은 곳이었으니까.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뱃속 나비의 날갯짓이 점차 커져서 칼라크는 조만간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원인이 뭔진 몰랐다. 급기야 칼라크는 타브가 하룻밤의 채비를 마치고 제게 오는 그 짧은 간극까지도 초조해했다. 눈을 깜빡했다간 타브가 달아나있을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현기증을 호소하는 칼라크에게로 타브가 걸어왔다. 타브의 입술이 제 것에 닿는 찰나 칼라크는 그 무수한 상념이 다 날아가는 기적을 맛봤다. 그 뒤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요한 탐닉이 이어졌다. 숫제 사활을 걸었다. 이게 뭐라고, 섹스는 섹스일 뿐이지, 결합이니 뭐니, 아스타리온이 혀를 끌끌 차던 기억이 돌연 떠올랐다. 칼라크는 이제 그런 견해에 지레 심장이 철렁하지도 않았다. 언제까지고 처음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야, 익숙해졌는데. 잘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칼라크에겐 그것이 전부였다. 허락된 것이 너무 적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안 된다. 품에 넣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타브를 품고, 끌어안고, 만져야만 했다. 마음이 너무 급박한 탓에 그것이 타브에게도 티가 날까 조마조마 했다. 타브의 몸 위로 제 것을 포개고, 무수히 입을 맞추고, 하염없이 사랑을 나누다가도 수시로 심장에 격통이 엄습했다. 이러다 곧 멎어버릴 만큼. 사람들은 세상에 올 때를 모르듯이, 갈 때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칼라크는 제 수명을 알 수 있었다. 몽당 연필처럼 실시간으로 깎여져나가는 생명줄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마치 데롱데롱 좌우로 움직이는 시계추처럼 늘 아슬아슬하고 잡아두기 힘든 것이었는데, 칼라크는 그것조차 익숙했다. 다만 이번엔 그 세기가 달랐다. 깡통의 과부하가 내장으로 다 전해졌다. 지상에 올라온 이래 최대로. 칼라크는 엔진의 비명을 다 들었지만 무시했다.
절정을 맞이하고 또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어딘가 거대한 천공이 생겨서, 그 사이로 줄줄이 새어나가고 있는 것처럼. 과도한 쾌락은 거의 통각에 속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아직 불충분했다. 칼라크는 쉽사리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끝'이라니, 그건 말도 안 돼. 이 밤을 보내고, 이 여관방을 나가고 나면 그 너머에 다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죽음과 혼돈 뿐인. 칼라크는 끝을 부정하는 셈으로 타브를 꽉 쥐었다. 거세게. 더 할 나위 없이. 탈진에 이를 때까지. 아예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머릿속이 새하얘질 때까지. 아무 사고의 여백도 만들 수 없도록. 꽉 맞물린 퍼즐 조각처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마지막 정사 후 타브는 반사적으로 칼라크의 품에 깊이 파고 들었다.
실컷 타브를 안아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타브가 닿는 순간 생각이 다 날아갔다고 해도 찰나일 따름이었다. 밑 빠진 독처럼 공허한 마음 속에 하해와 같은 무력감과 피로감, 자괴감이 골고루 밀려들었다. 온통 부정적인 것들만이. 박동이 너무 빨랐다. 정확히는 박동도 아니고 그저 이 앞에 해체밖에 기다리지 않는 고철덩어리가 켜켜이 쌓인 먼지를 내뿜으며 굴러가는 둔탁한 소음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그런 걸 감명 깊게, 지긋이 들어주는 타브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칼라크는 생각했다. 가만 보면 그랬다. 불길에 활활 타오르는데 괜찮다고 말하는 정신 나간 티플링과 사랑을 할 생각을 하다니. 타브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타브는 그걸로도 모자라 네 심장을 고쳐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엘프송의 근사한 여관방이 눈물 바다가 됐다. 타브를 본 역사가 길다고 할 순 없지만, 매사에 침착한 그가 체통 다 내려놓고 울다니 그건 분명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타브는. 그러니 그만 칼라크가 그 눈물을 보고 기뻐해버렸잖은가.
5.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공공의 목표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한바탕 개인적인 사유로 난리를 피우고나서 어디로 돌아가야할지 망설이지 않아도 됐으니까. 어쨌거나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칼라크는 불필요한 감상에 빠질 여력도 없었다. 불안은 전염성이 높아서, 드러내는 순간 포자처럼 순식간에 퍼져오를 터였다.
세간에 떠돌던 해묵은 의문은 급속도로 부풀어올라 이제는 완전히 무르익었고, 곧 폭발만이 임박해있었다. 더는 이 세상도 버틸 수 없겠다 판단한 셈이렷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터였다. 일행이 사수해내기만 하면.
요 몇 달 사이 벌어진 일이 평생에 걸친 것보다 더 많았으나 실상 칼라크는 제자리였다. 레이젤처럼 블라키스를 배반하고 혁명대의 고삐를 쥐지 않았으며, 섀도하트처럼 신을 등지지도 않았다. 아스타리온처럼 대담히 승천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윌처럼 데빌과의 계약에서 자유가 된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게일처럼 더 큰 야욕에 불씨를 지핀 것조차 아니었다. 반대로 할신처럼 세기에 걸친 부채를 청산하고 무거운 직위를 내려놓은 것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자리엘에게 쫓기는 탈영병, 지상에 머무르다간 몸이 폭발해 끔찍하게 죽을 신세. 이를 타개할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하나하나 곱씹을수록 처지가 생각보다 더 끔찍했는데, 그래도 괜찮았다.
칼라크는 그저 칼라크일 따름이다. 아직도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지만. 삼악신이니 엘더 브레인이니, 마인드 플레이어 군단이니···. 누구는 아직도 자리엘의 번견이라 비난하는데 누구는 악마 살해자라 부르며 추앙을 해대고. 칼라크는 세상의 존명을 거머쥐었다는 사명감과 심장 대신 나앉은 고철덩어리의 중압감에 이중으로 짓눌리는 꼴이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런대로 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폐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완벽히 해낼테니. 그것은 지옥에서 했던 것처럼 죽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했던 일이 아니었다. 더는 고독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너는 결국 끝까지 외로움이 다였다는 거구나? 고작 그게 가장 중요하구나.
남들은 더 큰 야망을 갖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부러워했으면서······,
심지어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수렁에도 흔쾌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타브가 함께 있어준다고 했으니까, 그거면 족했다.
저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이 굴러간다는 건 참 폭력적일만치 부조리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칼라크는 미련을 덜 수 있었다. 제 사람들은 계속 살아서 이 땅을 일구고, 가꿔나간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 뭐가 됐든 허사가 아닐 테니까. 칼라크는 사랑하고, 사랑 받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영혼의 결핍은 다 없던 일이 되고, 일말의 쓰라림조차 달디 달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