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사라진 넋은 어디로 가는가

타브칼 | 기만이라 해도 좋으니

꾹뀨 by 꾹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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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더스 게이트3 칼라크맨스 ㅇㄹㅅㄷ 엔딩 중대 스포일러

※ 후일담 업데이트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칼라크는, ···그러니까 나의 '연인'은 사람들의 사후를 몹시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노움들에게 제대로 된 장례가 필요하다며 기도를 올리고, 그림자 저주가 내린 땅에서 무덤을 발견하고는 이런 곳에서도 망자들이 대우를 받는다며 안도하던 것이 바로 그라는 사람이었다. 갈 곳 잃은 난민들의 고초에 공감하고 사회적 의무를 등한시하는 호족들에게 분노하며 대의에 앞장서는 의인, 그의 이름은 칼라크 클리프게이트였다.

칼라크는 지옥에 절대 돌아가지 않겠노라 울부짖었다. 두 번 다시.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억지를 부려 지옥에 가게 됐을 때도 그랬다. "내가 살 것 같단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할 것만 하고 나가자."

아무리 지난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시체보다는 산 자의 삶을 택하겠다는 사람에게 차라리 죽음을 고려하게끔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의 고통일까?

"이렇겐 아니야. 이건 불공평해. 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렇게 말하던 너는, 정말 거기 있는 걸까?

*

전란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뒤바꿔버렸다. 엘더브레인과 카서스의 왕관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며 그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올챙이도 두통과 함께 말끔히 사라지고 모처럼 오롯이 홀로 남겨졌음에도 그 자유를 만끽할 새가 없었다. 끝이야. 교차하는 시선이 가리키는 바는 모두 같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태풍의 눈을 빠져나오자 쑥대밭이 된 도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언제 다시 만회하고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대대에 걸쳐 어렵게 쌓아올린 문명은 산산이 붕괴되었고 도시 사회를 이끌어나가던 명사들은 대거 실종되거나 사망해버린,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사태였다. 공권력은 흙바닥에 처박혔고, 시민들의 질서는 혼돈으로 뒤덮였다. 거대한 악을 뿌리 뽑은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공석을 노린 제2, 제3의 악들이 일인자가 되겠다며 활개를 쳤다. 원래도 발더스 게이트는 아슬아슬하게 그 이름과 껍데기만 유지하고 있던 마경이었다. 헌데 그 연약한 골자들이 붕괴해버렸으니, 그 안에 든 악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은 필연일 따름이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제가 거하는 도시의 부패도를 익히 아는 발더인들로서도 개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대공 레이븐가드는 그의 외아들에게 직위를 승계하여 함께 도시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남겨진 자들의 지원과 노고 덕분에, 도시는 더디게나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분명 인력으로는 포용할 수 없을 것 같던 대재앙이었을지라도.

엘더브레인이 소멸한지도 벌써 반 년이 더 지났다. 건물들은 깔끔한 모습으로 새롭게 재건되었고, 사람들은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다시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새 생명이 태어났고, 눈물의 강을 헤엄치던 이들은 그곳을 빠져나갈 밧줄을 엮었다. 을씨년스럽고 황폐한 길거리는 다시금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시에 희망이란 새싹이 트고 있었다.

타브는 번화가의 정경을 내다보고 있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한편, 시장에서는 상인들이 장사에 열을 올리거나 여전히 공사가 한창인 평화로운 오후다.

-신참.

그때 뇌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든다. 그리고 배후에 이색적인 기척이 서서히 다가온다. 솔직히 그는 기척이 거의 없어서 먼저 알려오지 않으면 그와의 거리가 얼마큼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말소리를 낸들 뇌에 주입하는 것이므로 효과는 없지만, 그는 항상 타브가 놀라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는 항상 식사를 마친 뒤에는 조금 소극적으로 군다. 일리시드라면 공통적으로 나는 마늘 냄새에 회색질의 독특한 냄새가 약간 배어있다. 그는 최대한 식사의 흔적을 지우고 오지만 원체 본연의 체취가 진하다보니 다 감춰지지는 않는다.

타브는 슬그머니 돌아다본다. 그는 아스트랄 차원에서 처음 '태어났던' 그날에 비하면 많이 성장했다. 갓난 아기처럼 쪼글쪼글하던 뒷머리는 단단해졌고, 성체에 비하면 턱없이 짧던 네 가닥 촉수는 이제 허리까지 왔다. 움푹 파여들어간 안와 속에 자리한 까만 동공은 부쩍 그윽해졌다.

올챙이를 취하기 직전, 칼라크는 자기가 촉수로 뒤덮인 얼굴을 갖게 되어도 한 잔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자연스레 무산됐다. 그는 이제 음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는 맛을 잃었다. 알코올이 더는 제게 전과 같은 흥미를 유발하지 않으며 탄산의 톡 쏘는 느낌도 전혀 짜릿하지 않단다. 오히려 불쾌하기 짝이 없어서 칼라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타브가 네가 미안해 할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음에도.

음식도 동일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던 데일랜드의 치즈도, 데이트에서 골랐던 로테 갈비도, 원래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발더식 해산물 스튜도 전부 다 똑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먹을 수는 있지만 영양분을 보충할 수 없고 기호도 충족할 수 없으니 마치 사람에게 멀쩡한 음식을 두고 양피지를 씹어먹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음악 취향도 사뭇 달라졌다. 모험이 한창이던 과거, 타브는 틈틈이 지친 동료들을 달래려 류트를 치곤 했었다. 동료들의 취향은 제각기 천차만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칼라크는 가장 박자가 빠르고 쉴 새 없이 내달리는 음악을 좋아했다. '신참, 그거 틀어줘!' 칼라크가 삐죽삐죽한 이를 드러내며 그렇게 소리치면 타브는 그에 맞는 신청곡을 연주했고, 그 선율에 맞춰 칼라크는 현란한 발재간을 선보이곤 했더랬다. 하루종일 등에 군장을 몇 개나 달고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던 그가 지금은 서정적이고 잔잔한 민요를 선호한다. 그래서 타브도 천천히 현을 퉁긴다. 풍류를 즐길 줄 알게 됐구나, 타브가 하는 말에 칼라크는 살풋 웃기도 했다. 예전의 타브는 칼라크의 고단함을 덜 수 있다면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진대도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젠 연달아 쳐도 그때처럼 손가락이 아프지 않다. 해서 관점을 바꿨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그 파동의 시작과 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섬세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어서 좋다고.

아예 없어진 것도 있다. 아무데나 옷을 벗어서 널브러뜨려놓거나 편식을 하거나 코를 요란하게 골며 자는 습관 같은 것들. 종적도 없이. 예전에는 바닥에 산재한 그의 옷가지로 행방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고, 음식에서 고기만 너무 빨리 없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해야만 했고, 그가 얼마큼 깊게 잠들었는지 혹은 들지 못했는지를 소리로 가늠할 수 있었는데······. 언젠가 반드시 연인의 그런 타성을 고쳐주리라 벼르고 있었던 타브지만 막상 사라지니 아쉽고 쓸쓸하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법이다. 게다가 함께 대화를 나눌 때 타브가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를 쓰면 칼라크는 그게 뭐냐고 묻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되레 타브가 칼라크에게 반문해야 한다. 간혹 타브보다 더 위브에 해박해보일 때도 있다. 소서러인 타브의 천부적인 지식조차 초월하는 질문을 한다든지, 타브가 가볍게 던진 말에 심오하고 철학적인 대답을 해온다든지. 특유의 거친 생활에서 터득한 실용적인 지혜와 아픔에서 우러나온 공감능력 대신 철학적 이해력과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식견이 깊어진 식이었다. 육체의 치명적인 결함조차 사라진 그는 인격마저 달라졌다. 생존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만큼 훨씬 너그럽고 인자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직 어색한 감이 있다. 칼라크에게 최대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처리한 악인을 내어준 직후의 것 말이다. 황제에 대한 것들 중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일은 한가득이지만, 이 건에 대해서만은 말을 얹을 처지가 못 됐다.

칼라크는 한 달만의 식사에 만족한 눈치다. 눈에 생기가 돌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타브는 종종 '맛이 어떠냐'고 묻고는 하지만, 칼라크는 쉽사리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회피하거나 뭉뚱그린다. 일리시드가 아닌 이상 그 맛을 전해들어봐야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딱히 유익한 대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산책하지 않겠어?

칼라크의 말에 타브는 끄덕인다. 칼라크에게 '예전의 칼라크'로 보이게 하는 형상변환 마법을 걸어준다. 정확히는 그런 기능이 있는 아이템을 장비하는 것이다. 외출할 때마다 절대 빠트려서는 안 되는 필수 관례다. 칼라크는 타브에게 항상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타브는 미소 지으며 마법이 잘 걸렸는지 확인한다. 처음엔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했지만, 이젠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의 감사와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예의란 것을 깨우쳤으므로.

둘은 여관 근처의 강둑을 따라 걷는다. 모험 중에 혼천의를 발견할 때마다 '발은 페이룬에 붙어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일축하던 칼라크는 요새 부쩍 페이룬 밖의 사정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타브는 오멜룸이 그랬듯 탐구열도 하나의 증후가 아닐까 어림짐작했는데, 그것이 몇 주 전 사실로 드러났다.

칼라크는 모험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유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타브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자유롭게 다니면 되잖아. 황제와 오멜룸을 생각해. 자기가 원한다면 다 할 수 있어."

타브는 그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저 자신도 꺾여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크게 기합을 넣었다. 칼라크는 타브가 난처해질지도 모르지만, 타브가 없다면 여정을 떠나는 의미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타브는 그러니만큼 자신이 24시간 붙어있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제 추후의 사정을 이것저것 따지느니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것은 타브의 몫이 됐다. 현재의 칼라크는 일의 합리성과 전후 상황을 충분히 따져보고 계획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산이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뒤로 물러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타브의 주장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갔고, 다음주면 둘은 최초로 페이룬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내일 아침이 발더스 게이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둘은 원없이 이곳을 눈에 담기로 했다.

지금 칼라크의 모습은 '예전의 칼라크'라기보다는 타브의 기억 속 티플링 칼라크의 모습이다. 마법이 정말이지 모든 것을 재현해주지는 못하므로 이전에 그를 눈 여겨 보았던 자라면 약간의 차이점을 눈치 챌 지도 모른다. 당장 타브가 그랬으니까. 장난스러운 주근깨의 밀도와 뿔의 말림 정도의 근소한 차이지만 말이다. 형상 변환 마법에 걸린 칼라크를 볼 때마다 타브는 '그릇'은 그릇일 뿐이라던 칼라크의 말을 만지작거린다. 타브가 묘한 안정감과 그리움을 느끼는 '그릇'은 이제 칼라크의 본모가 아니다. 가짜다. 한데 아직도 칼라크는 묘하게 자신을 숨기려 한다. 같이 있을 땐 반드시 '걸어'다닌다든지, 일리시드에게만 통용되는 용어나 감각을 사람인 타브도 알기 쉽게 풀어쓴다든지, 뇌를 먹는 장면을 절대 보이지 않으려한다든지······.

가장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 공중을 횡단하는 칼라크를 타브는 생각한다. 길이 나있는 대로 둘러갈 필요 없이 단숨에 저 먼 다리 위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타브의 머리 꼭대기 위를, 파란 창공을, 물 위를 새처럼 부유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타브의 상념을 칼라크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신참. 아주 기대 돼. 너와 함께 할 여정이. 근래 들어 가장 완벽한 상태로 떠날 수 있겠어. 좋은 징조야.

그의 사고를 정제와 꾸밈 없이 고스란히 전달하는 텔레파시는 음감이 균일해서, 이따금 무감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브는 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미약하거나 냉랭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사그라들지 않고 닿아도 다치지 않는 차분한 열정도 있다는 것을.

칼라크의 우아하고 고요한 전율이 타브에게 전해져온다. 그의 기쁨은 꼭 물비늘 같다. 이제 타브의 머릿속에는 올챙이가 없으므로 타브는 일방적으로 육성을 사용해야 한다. 제 삼자에게는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터다.

"나도. 조금만 더 돌다 들어가자. 마법 상점 구경 좀 할까? 네가 좋아할 만한 책들이 있을지도 몰라."

-좋아.

*

"이게 내 최후라면, 적어도 세상을 구하고 죽은 씹새끼로 기억될 수 있게 해 줘."

그는 멀거나 가까운 혈통 어딘가 악마가 섞여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온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 몸 바쳐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다니, 과연 그것은 발더스 게이트의 외곽도시에서 온 티플링에게는 흔히 허락되지 않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상처 투성이의 낡아빠진 육신에는 약간의 가망조차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상태에서······.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 누가 선뜻 일리시드로 살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평생이다.

평생, 자아가 소멸된 채로, 자기가 기생한 숙주가 바로 저 자신이라고 믿으면서, 촉수를 단 기괴한 모습으로, 지성체의 뇌를 먹으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생을 뻔히 알고도 기꺼이 자원한 칼라크는 영웅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영웅이 지닌 불굴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설령 그의 연인일지라도.

무책임한, 쓸모 없는 연인.

외견은 상관 없었다. 끌어안으면 어떤 삭풍이나 피해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던 든든한 등, 웃으면 드러나는 흰 송곳니, 턱에 난 점, 그리고 전신에 즐비한 흉터와 부러진 뿔과 재가 되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만져야만 했던 몸······ 그런 것들을 못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난 칼라크가 살길 바랐다. 그가 어떤 형태로든 이승에, 지상에 남아 내 곁에 함께 있기를 염원했다. 다만 예전의 그와 딴판인 면모를 마주하면 난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내 앞에서 보인 변화, 아니, 변이의 과정이라고는 올챙이를 삼킨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그런 그의 전신에 있던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뒤틀리고 촉수가 돋아나는 것 뿐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어떤 돌풍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두고 '저도 몰랐던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내 안의 나를 찾았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했지만 나로서는 따라잡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칼라크만 훌쩍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달할 수 없는 지평 너머에서 미증유의 눈을 하고 내려다보고있는 것만 같았다. 대화와 소통을 거듭하다보면 그런 찢어질 듯한 괴리감은 사라질 것 같았지만, 도리어 심각해졌다.

난 위더스의 한마디를 잊은 적이 없다. 위더스는 분명 칼라크를 똑똑히 알아봤다. "외면은 바뀌었을지 모르나, 내면의 그는 내가 아는 이일지니."

그가 듣는 귀 좋으라고 거짓을 고할 리 없다. 한갓 필멸자들을 삼악신으로 만든 위대한 제르갈이 영혼 하나를 잘못 봤을 리도 없다. 모험의 초입, 마인드 플레이어의 영혼 유무에 대해 단단히 언질을 준 것은 바로 그가 아닌가.

하나 그러기엔 너무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가까이서 동고동락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주장은 세를 불렸다.

칼라크는 떠났다.

내가 알았던, 사랑했던 그는 사라졌다.

인도 가장자리를 따라 걷던, 방정 맞다고 지적을 들으면 더 신나게 발을 놀리던, 그를 만지면 새파랗게 타오르던, 그 심장 불빛에서 희로애락과 욕망이 다 드러나던, 욕을 밥 먹듯이 뱉던, 음식 냄새를 맡으면 정신이 산만해지던, 지난한 전투 뒤에는 쇠 꼬챙이에 꽂힌 대형 소시지와 맥주를 먹으면서 춤을 추던 칼라크. 류트를 켜기 시작하면 어느새 다가와 곁을 훈훈하게 데우던 온기, 동료들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 제 일처럼 분노하고 슬퍼하던 여린 마음과 작은 것들을 보면 망가트릴까 두려워 멀리서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구르던·········.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진실은 그저 진실일 뿐이다. 그것은 어떤 악의를 지녀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대로 존재할 뿐. 물론 선의에 관해서도 동일한 얘기다.

다만 새로 태어난 칼라크의 주의가 닿지 않는 곳에서, 주로 나조차 외면했던 무의식 속에서 나는 수 천 갈래로 분열했다. 이제 더는 올챙이 따윈 없고, 세상을 구원해냈음에도 몇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쯤엔 위더스의 말조차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의 주장 중 어느 쪽을 믿어야할지 혼란만 가중됐다.

-"마인드 플레이어에게 영혼은 있는가?"

-"내면의 그는 내가 아는 이일지니."

그저, 나는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단정 지었음에도. 내 회한과 미련의 찌꺼기가 꿈이란 이름으로 나타났고, 난 그에 한껏 놀아났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아직도 매달리는 타브,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위안하는 타브, 저에겐 그럴지 몰라도 칼라크에겐 아니었을 거라고 화를 내는 타브, 하지만 칼라크도 원했다고 더 길길이 날뛰는 타브, 칼라크가 원한다 해도 조금 더 고민해볼 순 없었냐고 따져 묻는 타브, 그렇다면 달리 뭐가 있었겠냐고 항의하는 타브·········.

우는 소리를 했다가, 고성을 내질렀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분노의 단추가 눌린 것처럼 벌떡 일어나 울분을 토했다가 했다. 만화경으로 바라본 세상처럼 무수한 경우의 수가 거기 산재했다. 하루도 빠짐 없이 겪은 일인데도 매번 처음 같아서, 지금까지 살며 축적해온 어떤 경험과 지식도 날 구제해줄 수 없었다.

그때 너를 말렸더라면, 네게 올챙이를 넘기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내가 먹었더라면?······ 난 극단까지 치달았다가 다시 냉정해졌다.

이렇게 가다간 난 영영 과거에 매여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네가 무엇보다 면하고 싶었던 경우의 수에 수렴하겠지. 심지어 너는 이렇게 내 곁에 살아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기만적인 형태로······ 이걸 너라 부를 수 있을까?

너는, 너는 거기에 있는 거야? 난 그걸 칼라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다만 망설이는 날 봤다간,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게 될 터였다.

"이봐. 자기야. 이제 와서 뭘. 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폭탄이었어. 그럴거면 애시당초 날 그 팔라딘 놈들에게 넘겨버렸어야지. 나만큼 부적합한 애인도 없을걸. 가슴 속엔 따뜻한 심장 대신 고철덩어리가 폭발을 향해 일 분 일 초 째깍거리고 있고, 피부에는 불길이 일잖아. 그래서 난 널 마음껏 안아줄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너는 그런 사람을 사랑한 거야. 그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다음부턴 조심하게 될 지도 모르지."

난 그래서 의문을 쏘아붙이는 짓을 관두었다.

지금의 '그'가 칼라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상은, 칼라크의 뜻을 이어가는 이상은, 그와의 동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여생을, 나와 함께하는 일상을 살아갈수만 있다면······.

"마인드 플레이어는 영혼이 없다네. 그들은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니 각별히 유념하게나. 트라우마, 결점, 그리움, 절박함 같은 것들 말일세. 본질은 조종과 세뇌에 있음이라."

설령 그것이 진실과 상충되더라도 말이다.

*

앞으로 최소 일 년은 이 풍경을 보지 못할 터다. 둘은 선미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테두리부터 서서히 뿌연 안개 속에 사로잡힌 듯 멀어져가는 고향 풍경을 바라봤다. 둘은 일견 독백으로 보이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칼. 솔직히, 난 우리 고향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도 그럴 게 요 한 세기만 해도 별 일이 다 있었잖아. 내가 자헤이라였으면 발더스 게이트 따위 다신 거들떠도 안 보고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거야."

-오?

"그런데, 이 망할 고향에서 그대로 살고 계시지. 양자들을 들이고, 하퍼즈를 양성하면서. 나 같으면 두려워서 엄두도 못 냈을 일이야. 난 사실, 상실이 두려워서 소중한 걸 만들기 꺼렸었거든.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으셨지. 우리가 사고를 그렇게 치고 다니는데도 한숨과 훈계 몇 번에 다 용서해주셨어. 정말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따로 있나 봐. 아마 태어날 때부터 신들에게 점지를 받았을걸. 배꼽에 새겨져있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영웅'이라고."

생각으로 낮게 웃던 칼라크는 반문한다. -하지만, 너도 영웅이야. 자기.

"···그렇긴 해. 우리가 함께 이룩해낸 소중한 평화니까,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자헤이라처럼 재앙이 다시 벌어졌을 때 기꺼이 뛰어들 수 있겠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난 자신이 없어. 아마 꼬리를 말고 도망칠 지도 모르지. 애시당초 세상을 구하려고 길을 떠난 게 아니었고, 많은 우연이 겹쳐서 그런 결과를 자아낸 거니까."

-하지만 그 단 '한 번'이 중요한 거야. 계기는 중요치 않아. 실제로 엘더 브레인이 최종 진화를 마쳤을 때, 도망치던 사람들 사이를 역주행해서 탑 위를 올라간 건 우리였으니까. 용기는 아예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친듯이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뇌리를 관통하는 칼라크의 대답이 타브를 그 자리에 제동시킨다. 그래, 이런 순간들이 익숙한 그리움에 타브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타브를 사무치게 한다. 손을 꼭 잡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울먹이던, 이러려고 지옥에서 10년을 굴렀던 게 아니라고 화를 내던, 숙적을 죽였다고 해서 뭐가 남느냐고, 자신도 곧 이렇게 될 운명이라고 목 놓아 울던 너······.

나와 작별하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 알았더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라던 너.

하지만, 네가 있다면 죽음조차 불사하리라 말하던 너.

타브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가만히 있자, 무슨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칼라크가 타브의 손을 잡는다.

-나도, 솔직히 우리의 도시를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겉보기에는 확실히 그렇잖아. 우린 하수구에도 여러 번 들락날락했으니까 더더욱 그렇게 고평가할 순 없지. 다만, 관념적인 아름다움인 거지.

타브는 그제야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다.

-어쨌든 우리 고향이잖아.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우리 부모님이 묻혀 있는···, 그리고 아마 우리가 생애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될 곳.

그 말이 타브의 정념이 맺혀있는 장소 한가운데를 고요히 허문다. 더는 폭력적이지도, 격렬하지도 않게. 고아하고 근사하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타브는 곁에 '남은' 그가 한 말대로, 사라진 그가 간 곳이 어디든 나쁘지 않은 곳이리라 확신한다. 솔직히 멋대로 욕심을 부리자면 발더스 게이트보다는 더 좋은 곳이었으면 한다. 영웅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너무나도 고결한 나머지 타브가 사후에서까지 닿을 수 없는 곳이라 해도. 청렴하고 순결한 영혼들만이 가는 무구한 세상에서 마음껏 뛰놀기를. 그 누구보다 갈망했던 자유를 누리며.

머리가 몽롱하다.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설렘인지 종잡을 수 없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또 어떤 위험과 우연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서 타브는 붕 뜨는 마음을 내리누르기 위해 칼라크의 손을 더 꽉 잡는다. 원래대로라면 훨씬 호들갑을 떨었을 칼라크는 조용히 타브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타브는 그에게 몸을 맡긴다.

"이제 우리 사이에 나쁜 일은 없는 거지?"

그렇게 묻던 네게 기꺼이 '그렇다'고 거짓을 고하던 흰 아침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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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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