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걷혔건만 웃지 않는 당신
더지칼 | 3막 고타쉬전 직후
※ 다크어지 스토리 스포일러
※ 다크어지가 '무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뭐랄까, 가슴에 벼락이 떨어졌어도 이보다 충격적이진 않을 것이다. 무스는 허옇게 질린 채 고개를 떨궜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가슴에 천불이 인다. 통제권을 벗어난 감정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방금 유유히 이 자리를 뜬 그이처럼 몸에 불을 두를 수 있었더라면, 다 태워버렸다면 좋았을 거라는 도가 지나친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최대 연관자가 떠난 이상, 순번은 그 다음 순서로 넘어오게 마련이다. 무스는 바닥에 처박힌 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동료들의 시선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뜨겁고 시리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 기분을 무스는 십분 이해했다. 올챙이가 박혀있는 쓸모없는 머릿속엔 똑같은 순간이 끝없이 재생되고, 무스는 비참함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서도 눈 앞의 두 사람을 이끌어야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그것을 억제하고 있었다.
무스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 넓은 홀에 멀쩡히 숨을 쉬고 있는 존재는 무스와 윌과 섀도하트, 셋 뿐이었다. 윌은 얼얼한 충격에 휩싸인 듯 입을 다물지 못했고, 섀도하트는 고타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둘 다 착잡함과 초조함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걸 보니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무언가가 무스의 내장을 배관처럼 통과해 목까지 치밀어올랐다.
울음.
저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준 고맙고도 소중한 이들 앞에서, 그런 무책임한 충동이 일었다. 기억을 잃기 전을 통틀어 생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무스는 제게 그런 것이 인다는 사실에 자못 놀랐다. 고작 연인과의 문제 때문에. 사랑이 잘 안 돼서, 이제 겨우 새 삶을 시작하려 했으나 전부 헛수고가 돼버렸기에, 억울하고 분해서, 연인이 홧김에 뱉은 말들이 비수처럼 박혀 죽을만큼 아팠으므로, 그런데 그는 대꾸할 겨를조차 주지않고 내게서 멀어져버렸기에·········.
남들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 때문에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기로 무스는 내심 맹세했었는데 말이다. 처음은 칼라크를 향한 마음을 깨달아버린 그 어느 미지의 순간에. 두번째는 칼라크 또한 무스를 향해 열정을 감추지 않았고, 그렇게 서로 마음을 평생 단 한 번씩만 증여하는 선물처럼 주고 받은 그날 그 순간에.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여관 이불에 둘러싸여 대화를 나눴고, 어제도 그러했고, 아마 오늘도 그럴 터였다. 이주 전 잠들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심지어 첫 입맞춤의 순간까지도, 네가 나의 어떤 말에 웃었는지, 또 어떤 말엔 시무룩해하고 어떤 말에는 그 동그란 눈이 더 커졌는지 난 빼곡히 기억하고, 네가 날 볼 때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지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몰아쉬어야만 하고, 피를 닦으며 말이 없어질 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느라 바쁘곤 했다. 그래서 불과 일주일 전에 내가 새로이 태어나자마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네 고백에 억장이 무너져버렸고, 끝까지 할 일을 하고 가겠다는 네 말을 난 무시할 심산이었어. 그저 이제 고타쉬를 죽이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좀 덜면 좋겠단 생각 뿐이었는데, 그런데······.
"너는 별을 보고, 모닥불에 손을 녹이고, 춤추고, 먹고, 밤새도록 떡치겠지!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
제 원수보다 더 처참하게 터져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것은 칼라크 같은 성인군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막연히 아는 것과 가슴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무스는 제가 부끄럽고 한심했다. 이런 때에 그런 감상에 빠진다는 사실 자체로 수치가 가중됐다. 연인의 분노와 슬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처사였다. 설마, 칼라크가 고타쉬의 시체를 짓밟고 피웅덩이에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던가? 아님 자신의 손을 잡고 동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피로 물든 융단을 걸어나가고, 드높은 요새의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하늘 너머로 나아가는 상상이라도 했던가? 복수만 하고나면 단단히 봉쇄돼있던 미래에의 문이 활짝 열리고, 캄캄한 복도에 불이 환히 들어오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래. 무스는 그것들을 기대했다.
무스는 어떻게든 리더로서의 체통을 지켜냈다. 금방 잃어버릴 것도 같았지만, 어떻게 해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화 낼 계제가 아니다. 지금 비통해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칼라크였다. 그저 그런 흐리멍덩한 이해만이 정신을 지탱해주었다.
"돌아가자. 얘들아."
제가 듣기에도 처참한 음성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피비린내와 화약과 위브의 냄새로 가득한 회랑에 덧없이 울려퍼졌다. 다행히 무스는 혼자가 아니었고, 곁에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있어 침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오고 가는 대화는 일체 없었지만, 가지런히 맞춰가는 그들의 보폭이 무스에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엘프송 간판이 보이자 윌과 섀도하트가 무스의 눈치를 살폈다. 무스는 대부분 진정이 돼 있었다. 항상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대노하는 연인 덕에 금세 이성을 되찾는 데는 도가 텄다. 원래는 감정의 동요가 그리 크지 않기도 하고. 여관 주인과 눈짓으로 인사하고 계단을 밟아올라가는데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욕지기를 무시하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으나 칼라크는 거기 없었다. 칼라크의 옆자리인 아스타리온에게 행방을 물었지만 금시초문이라는 투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들어오지도 않은 것이다. 무스의 맥박이 훌쩍 튀어올랐다. 관자놀이가 다 욱씬거렸다. 사색이 되어 뛰쳐나가려는 무스를 윌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칼라크에게 조금만 시간을 줘."
숨이 턱 막혔다. 오린이 죽고 형상변환자들의 위협은 느슨해졌다고 하나 절대자의 영향력은 막강하고 도시는 악의 손아귀에 놓인 그대로인데 그는 혼자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단 말인가? 무스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일단 끄덕였다. 윌의 의도를 헤아렸기 때문이고, 칼라크의 분노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무스는 제자리에 돌아가서, 그저 대기했다. 해가 질 때까지도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당장 뛰쳐나갈 기세로.
무스는 본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대악신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에겐 당연한 이치였다. 언제나 살의에 가득차 있었고 잔혹한 망상에 심취해있었으며 손은 피에 젖어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도 무스는 작금의 자신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온정에 겨워서, 당치도 않은 기대를 하고 희망에 부풀어있는 자신을. 칼라크를 처음 봤을 때, 어쩜 그리 사람이 좋을까 싶었다. 지옥에서 왔다지. 10년을 전쟁터에 있었고. 게다가 남에게 속아서, 강제로. 그건 비탄도, 감탄도 아니었다. 너는 어쩜 그리 순진할까. 어엿브고도 어리숙한 티플링. 하물며 동정조차 아니었다. 무스는 그를 업신여기기에 여념 없었다. 칼라크가 저지른 실수들은 온통 무스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굴리고 사람을 믿지 말았어야지. 바로 무스 자신처럼 말이다. 망실의 늪을 허우적거릴지라도 그 정도의 앞가림은 할 줄 알았다. 무스는 칼라크가 자신처럼 위장을 하고 있다는 오해를 한 적도 있었다. 사람 좋은 척하다 뒤통수를 후리려는 속셈일 테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인격이 실재할 리 없다는 믿음에서 파생한 오류였다.
하지만 추측이 사실이라면 동질감을 못 느낄 것도 없었다. 무스가 그렇게 남들을 배신할 작정이었으니. 악은 으레 악을 알아보는 법인데, 칼라크에겐 그런 기운이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머잖아 금세 착각임을 깨달았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잠자코 있어야지. 집사가 지껄이는 말들을 전부 이해하게 될 때까지. 내 충동이 어디서 왔는지 자각하기만 하면. 그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동료 놀음도, 사랑 운운도 전부 그 발판에 지나지 않았더랬다. 물론 이 사실은 그 아무도, 칼라크조차 모른다. 오로지 무스만이 알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조소가 절로 나올만큼 우스운 과거라고는 하나, 타인에게 발설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을 짓밟고 정점에 서리라는 야욕을 악한 것이라 치부하는 것은 속 없는 돼지들의 비약이다. 바알의 자손이자 충복이었던 과거의 무스는 그리 생각했었다. 마땅히 누릴 것을 누리는 것이 무에 나쁘단 말인가. 약육강식은 동물의 세계에서 그 시작이자 끝이 될진대. 살육과 파괴가 곧 선이며 절대적이다. 그것을 거역하고 나약하게 구는 자들은 제 존재조차 알리지 못하고 소리없이 아우성치다 구석에서 서서히 썩어죽거나, 짧은 명을 재촉해 이슬처럼 똑 떨어져나갈 운명이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가는 지옥만이 그들의 종착지일지어니.
그러니까 무스는 제 꾀에 당했다. 제가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 얼마나 강대한 악의 축이었는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그는 선에 패배했다. 그야말로 만악의 근원다운 처참한 말로다. 창창한 여생 가운데 하필 순식간에 떨어져버리는 모래시계 속 알갱이마냥 짧고 소박한 마음 하날 얻기 위해 나머지를 전부 내던져버리다니. 그 대가가 겨우 이거다. 연인이 죽어가고 있는데,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데 그런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비루한 신세.
'선'이 그를 잡고 뒤흔들기 시작할 무렵, 무스는 동정과 그리움과 쓸쓸함 같은 잡다한 정서를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죽여왔다. 그것들은 이제껏 무스가 느껴본 적도 없거니와 천하다며 낮잡았던 것들이었다. 양심과 죄를 깨우친다는 것은 그 예측 이상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 위선을 내려놓고 충동에 순응해 편해지리라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자신은 결국 악의 권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절망하다 기어이 아비의 손에 죽기 이전, 딱 한 번.
새로 태어난 뒤에도 인고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무 고뇌와 죄책감 없이 학살을 자행하고 피를 갈구하던 때가 다시 그리워진다면, 어찌해야 좋나? 이제 더는 충동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정신이 말끔해지자 드는 위화감에 그런 갈등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선이 주는 미학과 인정人情에 대한 자각은 살육에 미쳐있던 과거에는 없었던 목가적인 행복과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번민을 선사했으므로. 억겁의 죄책감과 회한과 절망과 두려움이 거대한 홍수처럼 쏟아지던 무참하리만치 달콤하며 짜릿한 회개의 날들. 그 감정의 홍수에 잠겨 죽는 것이 아홉 지옥의 모든 형벌을 받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면, 이렇게라도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달게 받겠노라고 지나친 오만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한 속내를 칼라크가 듣는다면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발더스 게이트에 입성하고 칼라크가 누누이 뱉는 얘기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른다'는. 아마 칼라크는 제 여생의 길이를 돌아보며 안타까움에 한 말이었겠지만, 그건 과언이 아니다. 뼈 아픈 진실이었다. 칼라크는 무스를 몰랐다. 무스가 칼라크의 문드러져가는 마음을 지금껏 몰랐던 것처럼.
죽고 못 사는 애인이니, 훗날 우리가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느니, 아무리 떠들어대봐야 미래는 요원했고 정해진 시한은 연장되지 않았다. 어쨌든 칼라크의 목숨은 칼라크의 것이었다. 아늑한 감정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순 없다. 무스가 제 여생 중 단 하루라도 그에게 떼어줄 수 없고, 그의 고통과 부담을 대신 짊어져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무스를 새로 태어나게 한 것은 칼라크와 그의 선함이었음에도. 칼라크는 언제까지고 쉬지도, 저물지도 않고 머리 위에 떠서 저를 비춰주는 저만의 태양이 아니었다. 그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작별을 두려워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주는 불안정한 애정에 매달려서 스스로에게 거짓을 읊조리기도 하는. 어디까지 어엿브고 어리숙한.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무스는 더더욱 참을 수 없어졌다.
칼라크는 해가 저물 무렵 귀환했다. 모두가 익히 아는 칼라크의 모습 그대로. 그러나 다들 극도로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윌이 머뭇거리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 둘씩 칼라크를 둘러쌌다. 여관 한복판에 위로의 장이 형성됐다. 칼라크는 괜히 그러지 말라고 털털하게 받았지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 참석했고, 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늘 그랬듯이. 꼭 초탈한 것처럼 보이는 그는 분명 한참을 소리 질렀을 것이다. 욕설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고, 무기를 휘둘렀을 것이다. 보이는 것들을 부수고, 훼손하고, 태웠을 것이다. 그 모든 설움, 분노와 같이.
자유 시간이 되자마자 무스는 칼라크를 찾았다. 칼라크는 예상보다 더 밝았다.
"우린 좆됐어. 내 몸엔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삼악신은 소드 코스트를 집어삼키려 들고, 우리 눈엔 아직도 올챙이가 꿈틀거리지. 하지만, 난 행복해!"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비정상적으로 느껴질만큼 밝은 반응이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너, 있고. 나, 있고. 우린 살아 숨쉬고 있어. 원한다면 웃을 수도 있어. 이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의 넌, 네가 무리를 해서 만든 가짜일까?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진짜일까? 무스는 맥이 탁 풀렸다.
연인은 항상 이토록 아무 노력 없이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무스는 항상 그것을 따랐지만 이번엔 예외였다. 칼라크는 이미 무스에게 유야무야,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게 내버려둘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그럼 됐어.'
그건 둘 사이에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분쟁이 있을 경우, 그러니까 모든 갖가지 상황에 어느때고 인용 가능한 만능 해법서 같은 문장이었다. 무스가 영창과 손짓 몇 번으로 수십 수백의 생명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듯이, 칼라크는 그 한마디로 이제까지 둘에게 있던 모든 사건들을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너무나도 쉽게. 그 간단한 문장의 권능이 무스에겐 어떤 주술보다 지대했다. 그 뻔한 레퍼토리에 무스는 몇 초 사이에 지옥과 지상을 오갔고, 온갖 골치 아픈 문제는 사과 한 알보다 작은 크기로 축소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대망의 그 문장이 나왔으니 무스는 드디어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흘 전, 오늘 아침 고타쉬를 치러 가겠다 결심한 이후 한 번도 맘 편히 짓지 못했던 웃음을. 단순히 연인이 행복하다고 말하며 웃고 있으므로. 진심으로 지금까지와 똑같이 흔쾌히 웃으며 행복하다고 대답해줄 용의가 없을 리 없다. 만약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순간 칼라크의 가슴에서 지옥 엔진이 빠져나가고, 펄펄 뛰는 살점으로 된 그의 원래 심장이 날아와 박힌다면 말이다.
연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지독한 회피성. 지나치게 큰 슬픔을 그보다 더 큰 억지로 덮으려는. 물론 무스도 알고 있다.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응이라는 것을. 무참한 현실을 바꿀 수가 없으니 택한 차선책일 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궁창에서 한 떨기 꽃을 피우고 악을 선으로 뒤바꿔버리는 것이 바로 칼라크라는 사람이었으니.
무스는 칼라크의 숭고한 뜻을 따라주고 싶었으나, 입은 전혀 다른 말을 뱉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에 처해있는데 행복할 순 없지."
"아, 내 사랑. 우린 우리가 만나기도 전부터 위험에 처해있었어. 우린 그런 사람들이야. 감정적이고, 무기를 막 휘두르고, 극적인 것엔 타고난 재능이 있는 개자식들."
무스는 울컥했다. 칼라크에겐 이제 이것 외에 달리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인정. 수용. 끝났다. 다 끝났건만, 무스는 뭘 잡고 놓아주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그 무엇이든 털고 일어나는 됨됨이에 감화 당해 여기까지 온 것이 누구인데. 하지만 그럴수록 미련은 더 끈끈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 자기. 날 그리워하면 좋겠지만, 너무 많이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네겐 평생이라는 선물이 있잖아. 그걸 음미해야지. 약속이다?"
다시금 고타쉬의 요새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그저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라 마음에 늘 담아두었던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오해를 풀고 싶었다. 꼭 풀어야만 했다. 넌 틀렸어. 네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난 물론 먹고, 마시고, 어쩌면 남과 떡을 치고 별을 볼 수도 있겠지. 어쩌면. 너와 했던, 하고 싶었던 그 모든 것들을, 나 혼자 남아서······. 사랑에 빠진 애송이들은 으레 상대방이 인생에서 사라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도 쉽게 빠지니까.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고. 다들 늦든 이르든 언젠가는 털고 일어나게 돼있어.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 너 때문에 새로 태어나리라 예상 못 했던 것처럼. 하지만, 감히 확신해.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할 거 다 하면서 제명에 살지 못할 거야. 난 깊은 상처를 입고, 폐인처럼 살아갈 거야. 회복을 할 수도 있겠지만, 너처럼 쉽겐 못 할 거야. 남겨진 죄책감에, 네가 일깨워준 그것에 죽도록 앓다 어느날 진짜로 죽어버리겠지. 네 말대로 살점을 구더기에게 뜯기고, 앙상한 해골로 남겠지. 아님 그보다 훨씬 일찍, 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일구어낸 것들을 생각하면, 뭘 어떻게 해도 호상일 거야. 게다가 한 번 이미 죽고 새로 태어났었으니까 두 번 죽는대도 놀랍진 않을 거야. 오히려 감사할 거야. 죽음보다 못한 삶을 끝내줬으니.
그 지난한 일장연설을 무스는 한마디로 갈무리했다. 억울함에 호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칼. 아베르누스에 갈 생각은 없어? 아주 잠시만. 영원히 있을 필요는 없어. 그냥, 고칠 방법을 찾기 전까지만······"
칼라크는 말허리를 잘랐다.
"그것도 생각해봤어. 진짜야. 하지만, 아주 순식간에 자리엘이 날 찾아내 다시 피의 전쟁에 던져놓을걸."
무스는 평생을 자부해왔던 자신의 지혜가 빛을 잃고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두뇌를 회전시켜본들 이런 일생일대의 순간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떤 그럴싸한 대안을 내놓고 핑계를 지어내도 그것들은 이미 전부 칼라크가 집어들었다 버린 것들일 터였다. 진작 의미를 잃은 채 텅빈 껍데기로서 나뒹굴고 있으리라. 황폐한 마음 속 쓰레기장을.
"더는 못 하겠어. 그렇게 됐다간 난 매일 죽기만을 바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떠나게 해줘. 증오하는 것들 말고."
무스에겐 이제 아무런 논박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끝을 지으려하는 칼라크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랑 같이 있어줄래? 때가 되면. 내가 떠날 때 말이야. 네가 곁에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심지어 죽는 것도."
갈팡질팡하던 무스는 연인의 초월적인 회복력 쪽으로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다른 여지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후회하고 원망할 것이다. 그건 아마 산 채로 살을 한 겹 한 겹 저미는 것처럼 괴로울 것이다.
"물론이지, 내 사랑. 물론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칼라크의 미련을 덜 수 있다면, 기꺼이.
"고마워. 자기. 너무 사랑해."
사랑하는 이가 하는 사랑한단 말에 차라리 귀를 잡아뜯고, 머리를 분지르고,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기만을 바랄 수 있을까?
칼라크는 이제 다 털고 마저 하던 일을 하자고 말했고, 무스는 그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건 차라리 순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칼라크가 먼저 침대에 들어가 이불 한 쪽을 들어올렸고, 무스가 그곳에 눕자 그 큰 공간이 꽉 찼다. 처음에는 갑갑하던 부피감도, 지나치게 높아보이기만 했던 열감도 이제는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익숙했다. 그런 자신의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경험을 하고,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끝없이 변태하는 것이란 게 원래 삶일 터였다. 성장일 터였다. 상실감을 딛고서. 다들 겪는 평범한 일생의 단락이라곤 하나, 아직은 그것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것을 원하고 회생한 것이 아니었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서 세상을 내다보듯 막막하기만 했다. 오늘 밤은 도저히 잘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칼라크의 숨소리는 벌써 무의식에 이르고 있었고, 무스는 그것이 야속했다. 연인의 감은 두 눈, 밑으로 쳐진 속눈썹, 뭉툭한 코 끝과 한쪽이 부러져버린 뿔과, 자신을 오롯이 감싸는 커다란 몸,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이 무스가 명상에 빠지는 순간 손 쓸 도리 없이 저 먼 곳으로 소실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힘껏 끌어안고, 그의 감촉을 온몸으로 기억하자니 그것은 더더욱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스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스는 명상에 들었다기보다는 사경에 이른 사람처럼 환각에 시달렸다. 그날 나타난 오만불손한 자태는, 고타쉬였다. 고타쉬는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하하하! 시인이 다 됐구나! 그 작작하던 여유도 곧 끝이 날 테지. 네가 저지른 일에 뼈저리게 후회한들 때는 이미 늦었다. 한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만을 바라보던 녀석들이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붙어 연가를 부르짖다 어떻게 일그러질는지 기대가 되는구나. 참으로 즐겁겠어."
허탈한 조소를 끝으로 고타쉬가 멀어지고, 뒤이어 오린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귓가에 서릿발처럼 내려앉았다.
"쯧쯔. 혈육이여, 가련하도다. 딱해서 눈물이 흐를 지경이야. 내 자리를 뺏고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독식한 걸로도 모자라 우리 모두를 배신하더니, 고작 보이는 꼴이 이래서야. 이러려고 아버지를 저버리고, 날 죽였느냐? 사랑이 널 구원했다고? 새 기회를 얻어 새롭게 살겠다고?! 아하하하!"
숨이 넘어갈 듯 이어지던 오린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어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새하얀 동공이 이쪽을 노려봤다.
"이래서야 저승에서의 유희도 안 되겠어! 한심한 것! 넌 네 피를 속일 수 없다. 혈육이여. 네가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비는 그 순간을 내 똑똑히 지켜보마."
무스는 개의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제 과거가 자신을 짓누른 적이 한 두번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 와 이런 것들을 마주하니 제 공포심이 체감 됐다. 무스는 칼라크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종전에 나눈 대화가 뜻하는 바를 가려냈다. 이 비극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고.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뒤늦게 말을 받았다. 무스는 이미 편을 골랐고, 후회는 없다.
이제 다만 무스는 제가 있는 한 칼라크가 사랑으로 다 이겨낼 수 있다 믿길 바란다. 설령 그것이 이 여정 끝에 착각으로 판명날 지라도. 사랑에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달콤한 착각에 빠져 가길 바란다. 그것이 혹 제단 위 양이 꾸는 꿈처럼 덧없고, 허황된 것일지라도. 이런 이가 빠진 그릇처럼 부실하고 초라한 사랑이라도 괜찮다면······. 그리고 자신이 충동에 패배하려 할 때마다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 강인함을 자신도 가지기만을. 알고서도 택한 어리석음을 감당하는 것은 남겨질 자신만으로 족하기에. 그것은 추악하지만 이보다 더 순결할 순 없을 무스의 밑바닥에서부터 긁어모은 한 톨의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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