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야나/아카렌지] AU 초단편

마얔 AU

  • 애들 이름: 걍... 걍 받아들이십시오.

  • 아니면 이름만 일본식인 이세계라고 받아들이십시오...

  • 원작처럼 재액이 강해진 후 소환된 현자(not 아키라) 시점

  • 외관은 3년 후 상정 북법 아카야와 동법→서법 야나기 /아카야는 몇 백 살 쯤 살고 이래저래 일을 겪으면서 제법 어른스러워졌습니다

  • 아카야의 폭주(데빌화)는 수백 년 전 시라이시의 도움으로 고쳐진 듯 보였으나... 재액의 상처로 인해 재발했다는 설정

설산 여기저기를 들쑤시던 키리하라 씨는 중저음의 짧은 주문이 울림과 동시에 고꾸라졌다. 엎어졌다기보다는 꼭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려 바닥을 기게 된 것처럼 보였다. 실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의 다른 마법사들은 내 뒤편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뒤에 선 이가 입을 열었다.

―아카야, 또 사고를 쳤구나.

뒤돌아 보니 키가 큰 남자가 땅으로 내려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르마를 타서 멋을 낸 듯한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단정하게 생긴 남자였다. 키리하라 씨를 손쉽게 제압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에게서는 강한 마법사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압도감은 없었다. 다만 얼굴을 제외한 그 어느 곳도 노출하지 않은 차림새에서 은근한 고집 같은 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품에서 붉은 끈이 달린 책갈피를 꺼냈다. 내 가슴팍 앞으로 내밀었기에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미안하다. 새 현자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해서. 그건 부적이다.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녀석의 마력에 반응할 거다.

그는 통성명도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키리하라 씨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책갈피는 구석에 작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곳 문자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게 그의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해볼 따름이었다. 책갈피의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야나기. 그게 그의 이름이라는 듯했다. 그에 대한 다른 설명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바로 키리하라 씨의 스승 비슷한 존재라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스승이기도 하고, 보호자이기도 하고, 주인(여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가 서쪽의 마법사라는 얘기를 듣고는 굳이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이기도 하다고.

야나기 씨는 키리하라 씨의 옆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키리하라 씨의 안색을 살피더니, 바닥에 늘어져 있던 팔을 붙잡아 제 어깨에 걸친 후 그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키리하라 씨는 순순히 그에게 기댔지만, 그 상황을 썩 내켜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기사 저항 한 번 못하고 다른 마법사에게 제압당한 것이니 북쪽의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할 리가 없었을 터였다.  야나기 씨는 한 팔로 키리하라 씨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반대쪽 팔은 어깨에 둘러둔 키리하라 씨의 팔을 붙잡은 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헌데 가까이서 보니, 키리하라 씨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굴욕이나 패배에 대한 분노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마치 잘못한 일이 있어서 부모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좀 더 귀엽게 표현하자면, 그래. 마치 사고 친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표정이었다. 그는 야나기 씨와도, 우리와도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머리를 야나기 씨의 어깨에 묻은 채,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있었다. 당사자인 두 명은 물론 다른 마법사들도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키리하라 씨가 날뛸 때마다 이런 식으로 해결해 왔던 걸까. 야나기 씨가 키리하라 씨의 보호자라는 말이 어쩐지 이해가 갔다.

야나기 씨가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현자. 이 녀석을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겠나? 재액과의 전투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당분간이라면 어느 정도인가요?

―자기 하기에 달렸지.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년… 행여 기간이 길어지더라도 전투가 있는 날엔 돌려보낼 거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온 마법사들은 책임자는 나라는 듯, 내가 바라볼 때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힘내란 듯이 방긋 웃어주기만 했다. (물론 애초에 내게 물어본 것이었지만)하는 수 없이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에게는 인간 외적인 존재가 뿜는 무시무시함은 없었지만, 큰 키와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가 주는 긴장감이 있었다. 나는 잠시 기가 죽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가, 이내 다시 용기를 내 그에게 답했다.

―어… 그, 그건 곤…

―란할 것 같아요. 라고 넌 말하겠지. 이유는?

그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하려던 말의 뒷부분을 말했다. 제대로 선수를 쳐진 느낌에 생각해둔 말들이 머리에서 흐려졌다.

―그, 그러니까. 지난 번 재액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법관에서 의뢰를 받고 있는데요… 키리하라 씨 같이 강한 인력이 빠지면 예정된 일들에 차질이 생긴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흠.

야나기 씨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서 있었고, 그의 눈매에서 어쩐지 서늘함(인간적인 영역의)을 느끼는 바람에 자연히 내 시선은 상대적으로 내 시야에 가까이 있는 키리하라 씨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도저도 못한 채 야나기 씨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야나기 씨를 따라가고 싶은 건지, 이곳에 남고 싶은 건지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에게 말했다.

―두 분이 같이 있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야나기 씨도 마법관에서 지내는 건… 어떠세요? 빈 방이 좀 있어서…

―나는 현자의 마법사로 소환된 몸도 아니다만.

―그렇긴 한데, 괜찮지 않을까요…?

―현자. 그건 네가 나에게 어떠한 의무나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음에도 그 말은 어딘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키리하라 씨를 제압하기 위해 주문을 외던 때와 같은, 단호함이 있었다.

―야나기 씨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도…

―그러면 몇 가지 조건을 붙였으면 좋겠군. 

내가 답하니 야나기 씨는 한 손을 들어 핑거스냅을 치듯 손가락을 튕겼다.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경쾌한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불쑥 눈 앞에 나타난 두루마리에 눈을 크게 떴다. 두루마리는 길게 펼쳐져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았으니 정확히 따지자면 그렇게 보일 뿐인 마력 덩어리인 듯싶었다.

―첫째, 이 아이가 임무나 의뢰에 참가하는 여부는 그날의 상태를 보고 내가 결정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동행할 수도 있다. 훈육에 있어서는 간섭하지 말 것.

야나기 씨의 목소리에 맞춰 그가 말한 내용이 두루마리에도 글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둘째, 내 방은 이 애의 바로 옆 방으로. 배치 상 곤란하다면 같은 방도 관계 없어. 공간이야 마법으로 해결 가능하니까. 차후 방 재배치가 있더라도 이 조항은 유지되어야 한다. 셋째, 내 방은 사전 연락 없이 절대 들어오지 말 것. 이거면 충분하다. 다만 이 조항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난 언제든 이 애를 데리고 돌아갈 수 있다. 오늘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시점이라면 말이야. 괜찮겠지?

정갈한 글씨가 얹히니 두루마리는 꼭 계약서와 같이 보였고, 내 손에는 어느새 깃펜이 들려 있었다. 사인이라도 하라는 것 같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종이에 코를 박은 채 심오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야나기 씨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현자와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서 배려가 부족했군. 다른 마법사들에게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받도록 해.

내용과 계약서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듣고 난 후에야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도통 읽을 수 없는 글씨 옆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신기한 한편,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다. 야나기 씨가 다시 손짓을 하자 계약서는 두루마리 형태로 말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키리하라 씨의 폭주가 해결되면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건 아니지만… 얼른 해결되면 좋겠네요. 키리하라 씨,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되게 힘들어 하셨거든요.

야나기 씨는 아아, 하며 긍정의 답을 했다. 그러면서 키리하라 씨의 어깨를 토닥였는데, 그 일련의 행위에서 줄곧 무표정하던 그의 표정이 제법 풀어진 것 같이 보였다.

―현자, 아카야의 다음 의뢰는 언제지?

―음… 모레에 있는 건 중앙에서 가기로 했으니까... 나흘에서 닷새 쯤 남았네요.

―그러면 짐도 챙길 겸, 사흘 정도만 내가 데리고 있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하겠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키리하라 씨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아까보다는 진정된 표정으로,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흘 정도라면…

야나기 씨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키리하라 씨를 빗자루에 태웠다. 건장한 남자 둘인데다가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키리하라 씨 덕분에 공간이 썩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둘 모두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ㅤ야나기의 등을 끌어 안고 함께 날고 있는 것은 또 얼마만인지. 키리하라는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오랜 과업에서 잠시 벗어난 것만 같았다. 그나 다른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던 그 시절 같은 감각. 잠시나마 가슴의 문신이 사라진 듯한 느낌. 상쾌하다는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발 밑의 풍경에서 눈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조금 더 가서, 해안으로 내려가면 그의 탑이 나오리라.

―널 이렇게나 아껴주는 현자가 와서 다행이구나, 아카야.

―예에…, 저는 일 안 할 수 있는 기회라 내심 좋았는데. 헤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좋든 싫든 현자의 마법사인 몸인데. 야나기의 말에 키리하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녀석 꽤 맘에 들어요. 끽해야 20살 남짓인 주제에 영감들처럼 굴어. 키리하라는 야나기의 허리를 둘러싼 팔에 좀 더 힘을 주고, 그의 뒤에 붙었다.

―못 본 새에 더 마력이 강해진 것 같은데, 네가 뭘 하든 막지는 않겠지만 겐이치로나 세이이치에게 들키지 않을 선으로 하려무나.

이어지는 잔소리에 키리하라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야나기의 어깨에 좀 더 기대었다. 빗자루가 나아감에 따라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게 다만 기분 좋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릴 때마다 익숙한 향이 함께 다가와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게 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약간은.

야나기 씨 집에 가는 건 몇 년 만이죠? 34년 9개월 27일. 돌아가면 상태부터 다시 확인해 보자. 야나기는 고개를 돌려 키리하라를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머리카락 아래로, 아직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에 야나기 자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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