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타입

커미션 8

아이돌 나페스

1.

 

아, 이거 꿈이구나. L은 생각했다. 사실 근거는 항상 그랬듯이 날카로운 L의 직감,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L은 제 직감을 지나치게 믿었다. 누군가는 자만이라 하더라도 L의 직감은 그를 항상 옳은 길로 이끌어주었으니까. 사실 직감대로 행동한 뒤, 어떻게든 해내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L은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직감으로 이곳이 꿈속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눈에 밟혔다. 가장 먼저, 몸이 가벼웠다. 최근 L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지나친 피로가 몸에 차곡차곡 누적된 탓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L의 몸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뿐했다.

L은 자기의 손바닥을 내려보다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왼손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쯤에 생채기가 났던 것 같은데. 몸의 상처를 정확한 위치보단 ‘이쯤인가’ 정도로 기억할 정도로 상처엔 둔한 L이었지만, 제 손이 이상하게 깨끗하단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몸도 그럴까? 갑자기 든 생각에 자신의 맨살을 보려 옷을 들어 올리다가, L은 자기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요즘 입는 옷보단 과거의 L이 입었던 옷에 가까웠다. 품이 넉넉한 후드티와 청바지. 고향 집 옷장에 처박아뒀는데, 왜 내가 이걸 입고 있을까.

후드티 밑에 아무것도 받쳐입지 않아서 바로 살이 드러났다. 그냥 평범한, 배가 있었다. 오히려 이상했다. 상처 자국들이 있었어야만 했다. L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성의할 정도로 간단한 방이었다. 흰 벽에, 흰 이불이 준비된 침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이 모순된 공간에서 L은 벗어나고 싶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요즘 부쩍 살이 내린 볼을 꼬집었지만, 아프기만 할 뿐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다시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건 더 이상 꿈의 영역이 아니었다. L은 멍하니 아무것도 없이 매끈해서 소름 돋는 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재빠르게 오고 갔다.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추상적인 의문부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빠르게 돌아가는 L의 머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문이 있었나? 순간 멍해졌음에도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시선이 멈춘 곳엔….

 

“지금 뭐 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M이었다. 뒤통수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L은 그녀를 잠깐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와, 여기다 날 집어넣은 게 누군지 몰라도 이게 가장 이상한데? L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슬슬 이 짓궂은 장난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2.

 

“오빠, 왜 그래? 땀이 되게 많이 났어.”

 

M은 고개를 숙여 L을 살펴보았다. L의 뺨에 손을 얹는 동작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행해졌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L은 하마터면 이 낯선 M의 손길에 뺨을 기댈 뻔했다. 살에서 나는 향기마저 기억과 똑같은 M의 눈은 걱정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낯선 사람이 아닌,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마저 소름 끼쳐서 L은 뻣뻣하게 굳었다. 자신의 소매로 L이 흘린 식은땀을 닦아주려 하는 M에게서, L은 몸을 뒤로 빼서 벗어났다.

 

“…야, 너 누구야.”

“무슨 소리야, 그게. 꿈이라도 꿨어?”

 

웃음을 얕게 터뜨리면서, M은 L의 턱을 엄지로 가볍게 잡아 고정하고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땀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L은 M을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본능이 이건 진짜 M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는데도 감히 M의 얼굴을 하고, M의 향기가 나는 무언가에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너 가짜잖아.”

“오늘 왜 그래, 진짜.”

 

M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L을 살폈다. 반면 L의 목은 M을 본 뒤부터 계속 빳빳하게 한 방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빠, 표정 좀 풀어. 그렇게 말하면서 매섭게 올라간 L의 눈꼬리 끝을 살살 문지르는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도 익숙한 그것이라 L은 더더욱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럼, 여긴 어딘데.”

“여기?”

 

‘1+1은?‘ 따위의 황당할 정도로 쉬운 질문을 받은 것처럼, M은 피식 웃었다. M의 태도 덕분에 L은 지금 자신이 반찬 투정을 하는 어린애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M의 엄지가 한 번 훑고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날이 선 눈꼬리는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M은 주위를 잠깐 둘러보다 말했다.

 

“여기 우리 집이잖아.”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는 ’우리‘라는 단어의 정의까지 M은 친절하게도 해주었다. 우리, 라는 단어를 말하며 M의 손가락은 순영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3.

 

“왜 갑자기 말이 없어?”

“…거짓말 그만 해.”

“뭐가 거짓말이야. 우리 같이 이 집 구했잖아. 같이 꾸미고, 같이 살고.”

 

봐, 하고 M이 가리킨 손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까 전까진‘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방 안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방 안이 풍성하게 채워져 있었다. M이 가리킨 것은 침대맡 작은 서랍장이었고, 그 위에는 M과 L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액자에 곱게 끼워져 있었다. 얼굴을 맞댄 사진, 같이 팩을 하는 사진, M이 찍은 L, L이 찍고 못 찍었다고 혼난 M…. 분명 기억 속 그때 그 사진들이어서, L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런 둘만의 공간. 자신이 바랐던 미래의 단편과 흡사하긴 했다. 모든 일이 다 잘 끝나서, 평온한 아침을 맞는 거. 그리고 아침 속에 M이 있는 것.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어디선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생긴 창문 유리창을 넘어 들려오는 아득한 소리였다.

L의 화가 잔뜩 치밀어오른 것과 M이 L을 안은 것은, 거의 동시에 가까웠다.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L은 아무리 그래도 M의 얼굴을 한 이 것에게 힘을 쓸 순 없어서, 최대한 적은 힘으로 밀쳐내는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강한 힘으로, ’M‘이 L의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평화로운 새소리에, 불안한 감정들이 눈빛을 통해 오갔다.

 

“작작해.”

“우린 지금 바깥일은 이제 잊기로 했고, 같이 행복하게 살기로 했어.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 나보다 오빠가 원하던 거야.”

 

드디어, L은 있는 힘껏 ’M‘을 밀쳐냈다. 어느새 다시 텅 비어버린 방 위에 ’M‘의 몸이 무너졌다. 바깥일은 잊었다는 단순한 말 한마디 덕에 아까 전까진 M의 얼굴을 한 무언가라고 느꼈던 것이, 이젠 M의 ’가면‘을 썼을 뿐인 무언가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M은 ’바깥일‘을 외면하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자기와 비슷한 온도로 뜨거운 M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자신과 사랑의 도피나 할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L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야, 그리고 M 손 따뜻하거든.”

 

눈앞의 모든 것이 갑자기 녹아내렸다. 어지러움이 훅 끼쳐와서, L은 눈을 더 부릅떴다.

 

4.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L은 다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여전히 M이 있었다. 심지어 자기를 아까처럼 꼭 안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살결에 닿는 피부가 너무 따뜻해서, 그래서 꼭 데일 것만 같아서, L은 자기도 모르게 안심하고는 M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 가짜에게 나던 향기에 어렴풋이 녹슨 쇠의 냄새가 더해져서 코끝에 묻어났다. 그렇지만, 지금이 더 편안한 기분임은 틀림없었다.

 

“…L?”

“이제 말 놓으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렸어?”

 

으응, 하고 말끝을 늘이면서 L은 M의 품에서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로봇들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부서진 채로 주변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 불꽃놀이처럼 이곳저곳 튀는 스파크에, L은 저도 모르게 팔로 M의 머리를 감쌌다. 저 멀리서 P가 길을 뚫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말이 ’뚫고 있다‘지, 그냥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몸을 들이박는 것에 불과했지만.

 

“진짜 괜찮아? …걱정했어.”

“미안, 나 기억이 안 나네.”

“말도 마. 갑자기 사라지고, 겨우 찾았더니 세뇌당했고….”

“미안해.”

 

히, 하고 L은 웃어 보였다. 미간을 좁히던 M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L은 M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잡아끌어서 자기 뺨에 댔다. 차가운 몸이 녹을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바뀐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둘은 여전히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의미하지만 처절한 반항을 하고 있었고, 둘만의 집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지금 뺨에서 느껴지는 따스함만 있다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고, L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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