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성벽에도 태양은 뜬다.

https://www.youtube.com/watch?v=sElE_BfQ67s

다 말라비틀어진 꽃에 햇빛이 비춘들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해는 떴다.

 태양 같은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어린날의 스승과 읽었던 제왕학 책들과 충직하던 신하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뾰족한 첨탑 위로 걸린 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떨쳐지지 않은 채 메아리처럼 울렸다.

 부디 태양같은 군주가 되시옵기를. 고귀하신 분 앞에 이 땅의 영광 있으라! 광명과 축복을!

 그건 왕국의 즉위식에서 의레적으로 읊는 전통적인 문구였다. 갓 즉위한 어린 왕 앞에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드넓은 왕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 그 화려한 옥좌 앞에서 기사들은 무릎을 꿇은 채 검을 쥐는 손을 심장 언저리에 가져다 댔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나 작위가 없는 귀족들은 양 손을 엇갈려 쇄골 부근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으며, 기사의 예법을 따르기 너무 나이가 든 귀족들은 왼손을 등 뒤로 감추고 오른손을 배에 댄 채 허리를 굽혔다.

 어린 왕은 제게 고개 숙여 합창하는 신하들을 보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다 망해가는 이 땅 위에 태양이 무슨 소용이람.

 태양 같은 군주가 되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마주한 눈동자가 단단한 열의로 빛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전하께서는 저희의 마지막 희망이시니까요.

 제 또래나 되었을 법한 앳된 가주는 그렇게 속삭였다. 아슬아슬하게 머리에서 흘러내릴 정도로 큰 왕관을 쓴 어린 왕과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망토를 두른 어린 공작.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저 이 상황 그 자체가 우스웠다. 망해가는 나라를 마지막으로 지탱하고 선 두 기둥이 고작 스물도 안 된 꼬맹이 둘이라는 사실이. 어린 왕은 제 충직한 신하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친히 말해주었다.

 우습구나. 소공작.

 이 땅 위에 무슨 희망이 더 남아 있을까.

 아니, 애초에 희망이 무슨 의미가 있지?

 어린 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희망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이미 모두 사라 없어진 것을.

 그런 말을 듣고도 표정에 한 치 흔들림 없이 왕을 보던 로렌스 가의 가주는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황송합니다.

 소인이 부족한 탓에 미처 전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되었다. 손을 내저어 어린 가주를 물러나게 하던 왕은 알고 있었을까. 그 순간, 그 말을 속삭인 순간 가주의 머리속에서 어떤 계산이 이루어졌는지. 어떤 실망이 찾아들었는지, 어떤 가정이 스쳐 지나갔는지. 어떤 미래를 상상했는지. 그리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하지만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들이 어째서 태양 같은 군주가 되기를 종용했는지를 알고 있다.

 왕세녀 시절 교육을 맡아 주었던 늙은 후작은 다정스런 어조로 설명하곤 했다. 만민에게 차별없이 가닿는 것은 다름아닌 햇빛이지요. 그런 통치를 하셔야 합니다, 왕세녀 저하. 한때 이 나라를 호령하던 재상이었던 후작은 타국의 인사로부터 철혈이니 호랑이니 하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인사였으나 어린 왕세녀에게만은 꼭 제 친손녀라도 되는 것마냥 다정하게 굴었다. 왕세녀에게도 은퇴한 재상은 꼭 그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가정교사를 맡아 하루에 절반도 넘게 더 보는 탓에, 왕세녀에겐 무뚝뚝한 아비였던 왕보다도 더 친근한 존재였을지 모른다. 후작은 왕세녀를 앉혀 놓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조금씩 가르쳤고, 영특했던 어린 왕세녀는 스펀지처럼 야금야금 그것을 흡수했다. 그랬으니 왕세녀가 무엇보다 백성을 가장 사랑하던 재상의 가치관을 물려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선정의 포부를 품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태양 같은 군주가 되어 햇빛과도 같은 사랑을 베풀겠노라 그리 다짐했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어린 날의 언젠가 즈음에는. 하지만 그렇기에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어린애답지 않은 염세적인 태도로 그런 말은 어느 자연물에나 가져다 붙여도 되는 것 아니냐며 물었던 말에도 늙은 후작은 다정히 일러주었다. 그래서 자연이 이토록 위대한 것 아니겠나요. 모든 것이 군주의 귀감이 되잖습니까. 언제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미덕을 보이는 것이 자연이지요. 하지만 그해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과 지독한 더위가 이 땅 위를 휩쓸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며 죽어나갔다. 비명소리에도 부패한 왕은 꼼짝하지 않고 사치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 왕세녀는 혼자 읊조렸다. 거짓말.

 군주도 자연도 중용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던 그 해에 후작마저 건강의 악화로 죽었기 때문에, 왕세녀는 더 이상 무언가를 물어볼 곳 마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뇌까렸다. 거짓말쟁이.

 그 후로 태양 같은 군주라는 말은 믿지 않게 되었다.

 새벽이 가기가 무섭게 떠오른 해는 사방에 밝은 빛을 뿌렸다. 가장 햇빛따위 필요 없을 이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이의 발치까지. 하늘을 무언가 곧게 날아오는 것을 본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손을 뻗었다. 흔들림 없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든 것은 전서구용 매였다. 부드럽게 깃털을 쓰다듬어 주자 매는 한 번 무뚝뚝하게 울었다. 매에 발목에 매달려 있던 양피지의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오늘 내로 수도가 뚫리겠구나.

 그것은 망국 최후의 왕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직감이었다. 양피지를 불태우고 테라스로 돌아온 왕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궁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아침을 맞아 일하는 소리로 분주하고 시끌벅적해야 할 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도 국왕 직속 호위부대와 몸종 아이 둘뿐, 모두가 도망간 듯 했다. 턱을 고쳐 죄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호위부대라는 호칭조차 무색한 그 부대에는 고작 기사 셋이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애초에 승산이 있을 리 없는 싸움이다.

 국왕은 몸종에게 손짓해 단단히 일렀다.

 혁명군이 몰려오면 외성과 내성의 문을 열어두렴.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몸종이 눈을 댕그랗게 떴지만 왕은 더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다시 돌릴 뿐이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막 방을 나가려는 몸종에게 말을 하나 더 툭 던진다.

 탁자 위에 있는 게 너희 것이니 알아서 챙겨. 그리고 어디로든 떠나도 좋아.

 탁자 위에 있는 건 다섯 개의 돈자루였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국왕은 최후의 순간까지 이 궁전을 지키고 서려는 것이다.

 버려진 궁전에서.

 혼자.

 왕의 명령에 따라 충성스럽던 기사 셋과 몸종 둘이 떠나자 정말로 궁전은 쥐새끼 한마리 없이 고요한 곳이 되었다. 광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왕은 마지막으로 화려한 정식 예복을 차려 입고,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옥좌에 앉아 홀로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기이할 정도로 짙게 내리깔린 침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쁘지 않은 결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왕은 궁금하다는 듯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말을 걸어 물었다. 역사는 나를 뭐라고 기록할까?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한 왕에게 남은 것은 고작 그 정도의 의문이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걸칠 쯤 되어서야 외성을 넘어 혁명군이 올라왔다. 왕은 직감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활짝 열린 내성의 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온 그들을 보며, 왕은, 더 이상 자신의 백성이 아닌 이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의 수장만 올라오라.

 마지막 예우였을까.  순순히 그 말을 따르고 옥좌 앞에서 국왕과 독대한 그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오랜만이지? 국왕 전하.

 그의 어린 가주였다.


 로렌스 가의 소공작이 가출했다는 소문이 한동안 도성에 돌던 때가 있었다.

 왕은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소공작의 아비였던 로렌스 공작은 '소공작은 실종되었다'라는 공식 입장을 내걸고 공작가의 사병들을 동원해 소공작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눈치가 있는 귀족들이라면 모두 그것이 거짓이고 사실 소공작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나라 최고의 가문에서 저렇게 찾아다니는데 금방 나타나겠지 생각한 것도 맞았다. 그 사이 사라진 장녀를 대신해 임시로 소공작위에 오른 것은 차녀, 정확히는 소공작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새 소공작은 어린 시절엔 가문에서 외면받았으나 청소년기를 거치며 제법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라 했다. 왕은 새 소공작이 자신과 독대해 처음으로 인사를 하던 때도 기억한다. 

 그대의 언니와 많이 닮았군.

 새 소공작을 보자마자 왕이 입에 담은 말이었다. 소공작이 영 알 수 없는 태도로 미적지근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쌍둥이니까 그렇겠지요.

 그렇겠지.

 왕은 물끄러미 식어가는 찻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대 언니의 이름이,

 …예.

 네메시스, 였던가.

 그리고 눈앞에 선 동생인 새 소공작의 이름은 엘피스라고 했다. 복수와 희망이라니. 후자면 몰라도 전자는 썩 귀애하는 딸에게 붙여줄 만한 이름은 아닌데. 로렌스 공작이 장녀에게 많은 신경을 쏟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낸 왕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찻잔을 살짝 밀어 치웠다. 영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구석이 거슬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출한 소공작은 몇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로렌스 공작이 죽고, 새 소공작이 공작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로렌스 공작이 될 때까지. 새 공작은 공작위에 오르자마자 사병을 동원해 제 언니를 찾던 것을 중지시키고 선언했다. 로렌스의 정보력으로 이 왕국 구석구석을 다 뒤졌으나 그럼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죽거나 왕국 바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국법에 따라 실종된 지 몇 년이 흐른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치부되었고 이제 소공작도 공녀도 그 무엇도 아닌 이름 없는 실종자-네메시스 로렌스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왕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어린 가주는 이제 죽은 사람이다.

 왕세녀 시절, 갓 즉위한 시절 나눴던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유월이면 옅은 분홍색의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피고, 선명한 연녹색의 잔디가 푸르게 자라나고, 군데군데 제비꽃이나 히스 꽃이 고개를 들이민 왕궁의 정원에서 보내던 시간들. 늦봄과 초여름 그 사이 애매한 시간에 불어오던 한들거리는 바람과 새파란 하늘 아래 춤추듯이 물결치던 머리칼, 어디선가 훅 끼쳐오던 달콤한 향기. 좀처럼 웃지 않던 이가 보여주는 희미한 미소 같은 것들을. 작은 연회장 구석에서 물 흐르듯 연주하는 하프시코드의 아름다운 음색과 함께 앉아 들여다보던 책의 빛바랜 종이 색과 검은 잉크로 쓰인 깨알같은 글귀들과 도서관의 케케묵은 먼지 향기, 창틀에 놓아둔 화분에서 만발한 제라늄 꽃과 달빛 아래에서 손을 붙잡고 맨발로 추던 춤 같은 것들. 햇살 아래 느긋한 한낮과도 같던 평온한 시간들이 이젠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소공작이 공작위를 계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에는 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린날 가출했던 네메시스 로렌스가 불온한 조직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그 주된 골자였다. 젊은 공작은 그 소문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며 '언니는 죽었으며 죽은 나의 언니가 반역자라는 것은 로렌스에 대한 모욕이다. 강경히 대처하겠다'라고 경고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반역죄는 삼대를 멸할 중죄였다.

 다만 누구는 이 소문에 대해 단순히 흥미거리로 받아들였을 테고, 누구는 로렌스의 명예를 떨어뜨릴 좋은 기회로 봤을 테지만 누구에게는 그저 어둠 속 빛줄기와도 같은 숨통 트이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결국 모두에게 소문에 불과한 진위 없는 허깨비같은 말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한지 오 개월 후 갑작스럽게 남쪽에 어느 항구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혁명과 반란을 가르는 도구가 성공의 여부라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왕은 알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대다수의 귀족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왕국에 더 이상 미래는 없었다. 선왕이 망칠 대로 망쳐 놓은 이 땅은 애초에 어떻게 손을 써서 해결을 볼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백성들은 매일같이 고통에 신음하며 허덕거리고 있었고 아무런 권위도 없는 옥좌를 붙들고 선 왕에게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혁명군이 들고 일어나 파죽지세로 수도까지 몰려올 때까지, 왕과 귀족들은 모두 올 것이 왔다는 태도를 하고 있었다.

 몇은 끝까지 왕을 위해 충성을 바치며 버티다가 죽었다. 몇은 침묵하며 저택에 은거하고 선택을 피했다. 몇은 벌써 혁명군과 접촉해 발빠르게 대처했다. 왕은 말없이 왕궁에서 혁명군을 기다렸다. 수도에서 반짝 돌고 사라졌던 소문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희망을 품고서.

 혁명군이 올라오면 왕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는다. 반군에게 왕의 목이란 무엇보다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하고 있었다. 옛 권력자의 목을 내려치고 그것을 성벽 밖에 걸어둠으로서 권력의 교체와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을 알리는 풍습은 전통적으로 모든 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도 왕은 순순히 목을 내주고자 왕궁에 남았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준 몸종은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그러나 왕은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어린 가주를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왕이 아닌 이는 눈을 떴다.

 그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분명히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남은 것은 훌쩍 커버린 그의 어린 가주였다. 그러나 새파랗게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독특한 눈동자와 아름답다 여겼던 그 모습만은 여전했다. 이제 여한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했다. 그 뒤 찾아오는 것은 분명히 죽음일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왕궁에 비하면 소박하긴 하지만 꽤 잘 꾸며진 귀족의 침실이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구비된 침실의 모습에 잠시 혼란스러운 듯 왕이 아닌-아무것도 아닌 이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일까. 설마 혁명이 실패하고 내가 살아 남은 건가. 아니면 누군가 날 빼돌려 살려 주었나.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마지막 순간 자신과 마주한 것은 한 명 뿐….

 아, 이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무것도 아닌 이가 반쯤 몸을 일으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상황을 납득한 탓이다.

 "정신이 들었나 보네."

 그제야 아무것도 아닌 이는 고개를 들어 방의 나머지 부분을 바라보았고, 침대 맞은편에 놓여진 안락의자에 앉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어린 가주였다. 아니, 이젠 어리지도 않고 가주도 아니니 그저 네메시스 로렌스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네메시스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이가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어 물었다.

 "어째서 날 살렸어?"

 "재미있는 것을 묻네."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침대로 다가온 네메시스가 그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또, 의미 없는 것을 묻기도 하고."

 네메시스가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로 그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상체를 설핏 굽혔다. 푸른 머리칼이 커튼처럼 드리워지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훅, 어린 시절과 또 다르게 고혹적인 향이 코끝을 스쳤다. 비틀어진 입매와 휘어진 눈가에서 묻어 나오는 것은 그 어떤 오만과….

 소유욕, 이었나? 아무것도 아닌 이가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멍청하지 않아." 붙잡았던 턱을 단번에 놓아주며 네메시스 로렌스가 다시 허리를 세웠다.

 "원하는 것이 두 개고 충분히 두 개 다 쟁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하나만 가져가는 것은 바보짓이지. 그렇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섬광같은 깨달음이 아무것도 아닌 이의 머리속에 내리꽂혔다. 그런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어떤 환희에 가까웠다. 끝끝내 그도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환희.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희. 그리고 모든 것을 완벽히 깨달았다는 것에 대한 환희까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마주한 채로, 이번에는 아무것도 아닌 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메시스 로렌스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선택했다….

 "좋아, 아주 훌륭해. 꽤 설렜어."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물론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머, 설렜다니 영광이야." 

 "왕국은 어떻게 되었지?"

 "글쎄, 신경쓸 필요 없어. 이젠 당신의 것이 아니니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네메시스 로렌스가 다시 눈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었다. 멀뚱히 그것을 내려보다,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은 아무것도 아닌 이가 웃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당신과 함께 살아가면 되나?"

 "자기는 똑똑해서 좋아. 바로 그거야."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붙잡은 손. 네메시스 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정의를 위해서 이 왕국을 쟁취하기로 했어. 그리고 내 욕심을 위해서 자기를 쟁취하려고 했지. 그러니 이것만큼은 비난해도 좋아. 내가 자기를 선택한 건 온전히 나의 욕심이니까."

 "내가 왜 그러겠어."

 아무것도 아닌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아주 완벽해. 꽤나 과격한 프러포즈 정도로 받아들일게. 두 개 다 성취할 능력이 있는데 하나만 가져오는 건 바보라고 말한 건 너니까, 비난하지 않아."

 "그렇다면 충분해. 과격한 프러포즈라니. 영광인데." 

 네메시스 로렌스가 키득인다. 몸을 일으켜 앉은 아무것도 아닌 이가 네메시스 로렌스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그럼 우선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지. 지금까지 쓰던 것 말고 말야. 새로운 이름."

 "그래, 자기는 더 이상 이 나라의 왕이 아니니까."

 "주다홍이 좋겠어."

 "주다홍. 나는 좋아. 마음에 들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이에서 주다홍이 된 이가 다시금 눈을 깜박였다. 창 밖에서는 어렴풋 동이 터오고 있었다. 태양이 뜬다. 붉은 태양빛이 이번엔 가장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의 발치를 서서히 비추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국왕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이도 아닌 그저 주다홍은 편안한 얼굴을 하고, 기댔던 몸을 다시 고쳐 기대며 그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주다홍으로서의 삶도, 썩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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