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다시 만나요

COC 시나리오 Last Thursdayism 스포일러 주의

https://www.youtube.com/watch?v=D9ZrgleyX0g

0.

잃어버린 삶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1.

 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이제 일어났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날아든다. 쏘아붙이는 기세가 제법 사나웠지만 잠을 깨우긴 역부족이다. 휴고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손을 뻗어 탁자를 더듬자 안경이 잡힌다. 되는 대로 안경을 쓰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고쳐 앉았다. 후드득 무언가 몸에서 떨어진다. 확인해 보니 두꺼운 담요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정신이 영 몽롱했다. 잠이 덜 깼나, 술이 덜 깼나 생각하기가 무섭게 짜증스러움을 잔뜩 담아 뾰족한 어조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대체 얼마나 마시고 잔 거야? 잘 거면 침대나 기어들어가던가, 그것도 남의 집 카우치에 처박혀서 진짜…진상도 가지가지야. 형 술병 쌓아둔 거 내가 다 치운 건 알아?"

 "아, 그럼 어쩌라고…침대에서 잤으면 또 침대 뺏었다고 지랄할 거면서…."

 잔소리인지 타박인지에 가까운 무언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멍한 머리로 생각한다. 분명히 저녁 여덟 시도 안 된 시간부터 마트에서 오만 술을 죄다 쓸어다가 봉지에 넣고 덜렁거리며 에이드리언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 갔을 때까지만 해도 죄책감이란 게 있었는데. 왜 아침에 저 새끼의 짜증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눈 녹듯 사그라드는 걸까? 휴고가 마른세수를 하다 말고 거치적거리는 안경을 다시 짜증스레 벗어던졌다.

 "애초에 남의 집에 왜 자꾸 쳐들어오는데?"

 아, 솔직히 그건 좀 용서해 줘라. 집에 못 들어가겠어서 그래…. 

 "형? 형?"

 차마 말하려던 것을 죄다 뱉어내지도 못한 채로 휴고는 다시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숙취 때문이었을지, 그저 도피하고 싶었던 것뿐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겨우 붙들고 있던 흐릿한 정신 끄트머리를 놓쳐버렸을 뿐이었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에 빠져들면….

2.

 …휴고.

3.

 그저, 너를 꿈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4.

 "정신 좀 차려봐. 요즘 하는 거 술 마시거나 자는 것밖에 없는 거 알아?"

 앤드리아가 식탁 앞에 앉아있는 휴고의 어깨를 툭 치더니 의자를 빼 맞은편에 앉았다. 요새 드물게 볼 수 있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휴고 헤이우드'가 신경질적으로 제 손을 들어 머리칼을 흩뜨린다.

 "제발 다들 신경 좀 끄, 아…. 씨발, 모르겠다…."

 "다들 너 걱정해. 그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적어도 술이라도 그만 마셔봐."

 요 며칠 내내 죽어라고 위스키만 부어졌던 투명한 크리스털 잔 안에 찬물을 가득 담아 밀어주며 앤드리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도 약은 안 하잖아. 그러니까 좀 그러려니 해…."

 "그걸 말이라고 해?"

 "몰라, 씨발. 약이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내가…."

 "그러지 좀 말고, 제발."

 앤드리아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잠깐 눈썹을 들어올렸다. 사실 정정하자면 휴고 헤이우드는 별로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무튼 술에 취하지도, 잠에 취하지도 않고 깨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나마 제정신인 것으로 쳐도 좋을 것이다. 멍하니 잔이 올라온 식탁을 바라보던 휴고가 불현듯 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가, 그 위에 고개를 처박고 다시 끅끅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안타깝다는 낯을 하고 바라보던 앤드리아가 낮게 흘러나오려던 한숨을 삼킨다.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는데,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 좀. 누나까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누나."

 그제야 고개를 들어올린 휴고가 냅다 쏘아붙인다. 질린다는 어조였다. 앤드리아가 물끄러미 휴고와 눈을 마주했다.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 은회색 눈동자엔, 그렁그렁하니 물기가 가득 고여있었다. 입술을 이로 짓이긴 휴고가 거칠게 소매를 빼서 눈물을 닦아냈다.

 "누나, 잘 들어, 걘 내 삶의 절반이었어. 아니, 씨발. 절반은 무슨, 내 좆같은 인생의 거의 전부였다고. 나는, 씨발 기억하지도 못할 존나 오래 전부터 함께해 온 삶이, 그냥, 내 삶이…통째로 사라졌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나는, 그냥 그래봤자 좆같은 껍데기야. 이젠 아무것도 안 남았어, 다 사라져서…. 걔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공허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눈물은 가슴을 스치지도 못하고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건 아마, 이제 더 이상 가슴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탓일 것이다. 담을 것이 없이 텅 비어 쪼그라든 심장. 그리고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삶. 이제 어쩌면 좋지? 휴고가 퍼뜩, 대답 없는 질문을 허공에 혼자 던졌다.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알고 있었다. 앤드리아가 망설이다가 한 번 더 휴고를 불렀다.  

 "…휴고."

 "아마 내가 쓰레기였나봐."

 휴고가 불쑥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눈이 엄청 많이 왔어, 누나. 추웠고. 그래서 고장났던 걸지도 몰라. 그래선 안 됐던 건데. 아냐, 씨발…. 오히려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냥, 나는…그래, 그게 더 잘 된 거겠지. 결국은, 다 알게 됐으니까. 그렇게 끝났으니까. 근데 내가 좀, 쓰레기 새끼였어서…. 잘못된 선택이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선 안 됐던 건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거였을까?"

 두서없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오로라가 되게 예뻤는데."

 어느 순간, 휴고 헤이우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이 덧없는 낯으로 힘없이 웃었다.

 "좀, 욕심내선 안 될 걸 욕심냈나봐."

5.

 근데 인간은 누구나 그런 거잖아.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그랬을 거라고, 씨발….

6. 

 꿈에서 네가 웃었다.

 같이 있어줄게.

 왜냐고 묻고 싶었다. 돌려보내야 하는데, 널 위해서라면 이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어선 안 되는데. 나는 끝까지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여서.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래서 차마 먼저 떠나라고, 이만 끝내자고 등을 떠밀 수 없었다.

7.

 내가 돌아가고 나면 너는 어떻게 살 거야?

 글쎄, 그냥…그래. 그냥, 뭐 그렇게 살겠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 것과 달리 애초부터 휴고는 죽을 작정이었다. 애초에 카일라의 장례를 치른 직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기이한 '악마 같은 어떤 것'이 나타나 제안을 하기 전까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돌려줄까? 네 소중한 사람. 조롱하듯 웃으며 건넸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 앞에서 휴고는 처음으로, 자존심 같은 건 전부 내려놓고 빌다싶이 울었다. 뭐든 하겠다고. 

 그걸로도 정말 괜찮은 거였을까. 

 그저 내가 행복하자고. 나 하나 살겠다고 너를 두 번이나 불행에 빠뜨리는게 잘 하는 짓이었을까? 이젠 알 수조차 없었다. 돌아가기 직전에 물어볼걸. 그래도 괜찮았던 거냐고. 네 용서해준다는 말이라도 듣고 너를 보냈으면 좀 더 나았을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겉으로만 포장된 괜찮다는 말을 들어 봤자, 그걸로 위안 삼아 봤자 아무것도 될 리 없다고.

8.

 왜냐하면, 그런 삶이 괜찮을 리 없잖아.

 백 번의 죽음을 반복해야 했던 삶이, 절멸하는 세상이.

9. 

 근데 있잖아, 나는 좀 괜찮았나봐.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죽어가더라도, 너와 손을 맞잡고 있으면.

 멀쩡한 세상 속에서 너 혼자만 없는 것보단 나았을지도 몰라.

 나는 네가 없는 세상을 견디지 못해서, 그래서…. 

10.

 "아마도, 좀 그랬나봐."

 차가운 비석 앞에서 휴고가 고해하듯 말했다. 나는 존나 이기적인 새끼여서, 너는 괴로웠을지 모르겠는데…. 아니, 아마 그랬겠지. 그런데 나는 그것마저 좋았나봐. 그 어떤 괴로운 세계라도 네가 없는 세계만큼은 못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가는 세상을 택할 수 있었는데.

 아마 너는 아니었겠지. 

 가끔 생각하게 됐다. 많은 것을 잃은 삶을 다시 재건할 수 있을까. 토대를 다지고, 벽을 세워올려 단단히 다질 수 있을까. 뼈대를 잃어버린 채로도 괜찮을까. 멀쩡히 의연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의 거의 모든 것들을 상실한 채로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람들을 만나고, 할 일을 하고, 텅 비어버린 내 뼈대를 다시 찾아서 채워넣을 수 있게 될까. 

 

11.

 아마도, 괜찮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소중한 것들을 만들게 될 지도 모른다. 텅 비어버린 구멍도 아물어 새 살로 채워질 터다.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겠지.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보고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찬바람에 조금 가슴이 아리더라도,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모든 것들에 익숙해지고 나면. 털어내고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처는 영원하지 않고, 흔적만 남기고 떠나가기 마련이니까.

 흔적은 조금 아려도, 어느 순간 잊을 수 있을 만큼 옅어지는 날이 올 테니까.

12.

 너는 아마 그리고 그런 삶을 반기겠지?

 그렇게 살아가라고, 행복해지라고 내 등을 떠밀까?

13.

 그런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가 없는 미래를 그리게 될 날이 두려웠다. 네가 없는 하루에 익숙해질 나날들이 두려웠다.
 나를 발전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해도 좋아.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며 안주하길 선택한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봐도 좋아. 휴고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다. 그건 아마 나를 깎아내린다기 보단, 꽤나 정확한 묘사에 가깝겠지. 그러니까 그 말을 들어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그런 인간이 맞았으니까. 아픔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상처를 떨쳐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겁쟁이라 그저 고통을 감내하기를 선택하고 만. 그리고 그 고통마저 너무 아파서, 이젠 그만 죽어버리고 싶어진.

 그래서, 휴고 헤이우드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었다.

14.

 가끔 묻고 싶었다. 원망하지 않냐고.

 아마 그 질문을 한 의도 가장 아래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식이 짙게 깔려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휴고 헤이우드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돌아가서 바로 목숨이라도 끊을 작정이었다. 그래도 물어봤던 건 마지막 희망이었을지, 확인사살이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이었을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원하는 대답은 사실, 정해져 있었다. 나를 원망해 줘. 편하게 모든 걸 끝장낼 수 있게.

 대답만 듣고 나면 모든 것을 그만 끝낼게.

15. 

 그런데 너는, 나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더니.

16.

 끝까지 함께 있어 줄게.

17.

 왜?

 어째서 그런 말을 했어?

18.

 가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대답을 들려줄 그 '카일라 스트레인'은 곁은 물론 이 세계 자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고 헤이우드는 궁금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해준 거야? 나를 죽을 수도 없게. 그만 살아갈 수 있게. 왜 살아갈 자격도 없는 나에게,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거야? 가끔은 이게 더한 고통 같아서, 오히려 목숨을 끊는 것이 더한 구원이자 축복으로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는데. 어째서 나한테 그런 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고 헤이우드는 나아가려 했다. 원망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으니까.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절멸하는 세계에서, 백 번의 죽음을 함께하고 백 번의 멸망을 봤으니까.

19.

 눈을 감으면 아직도 화려한 오로라의 색채가 흐드러진 광경이 선명했다.

 그 아래에서 휴고는,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전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삶을 이어가기로 결정한 이상 이젠 대답을 들어 봤자 의미 없는 질문들이었으니까.

 다만, 대신 할 말이 하나 있었다. 물어볼 것 말고. 하고 싶은 말이.

20.

 있잖아, 카일라.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한 걸음도 비틀거리며 겨우 내딛을 뿐이야. 

 아마, 앞에서 내 손을 잡아 이끌어줄 네가 없어서 그런가봐.

 그러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0.

 손을 잡아주려 네가 다시 오면, 그때는 금요일에 다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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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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