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
박제가 되어버린 근친을 아시오?
나는 그저 당신의 옆에 내가 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콤했다.
❥ ❥ ❥
3층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면 눈이 마주치는 갓 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한 목련꽃, 화려한 봄 드레스를 꺼내와 얼룩진 곳을 세탁하고 튿어진 곳을 수선하고 리본과 레이스와 보석을 새로 다는 사용인들의 바쁜 손길, 수도의 타운하우스로 떠나는 짐을 싸기 위해 바쁘게 오가는 하인들. 아네트에게 있어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표상됐다. 초봄이 오면 그들 자매는 영지에 아버지를 둔 채로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기 위해 수도의 타운하우스로 먼 길을 떠난다. 마차에는 봄 시즌동안 입을 드레스를 잔뜩 싣고, 뒤에는 손끝이 야무진 시녀들을 함께 태운 채로.
그들 자매의—더 정확하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아무튼 이네스의—어머니가 병사한 이래로 디아만테 가家는 사교계 변방에 유리되어 있었다. 나이 어린 두 딸밖에 남지 않아 더 이상 파티를 열지도, 다과회에 영애나 부인들을 초대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걸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딸들이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무섭게 자신은 홀로 영지에 머무른 채 두 딸들을 달랑 수도의 타운하우스로 내던졌다. 이네스가 채 사춘기가 다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고, 소녀들은 멋진 드레스를 찾으려면 어느 부띠끄에 가야 하며, 유행하는 화장품 종류는 무엇이고, 구닥다리 취급 받는 악세사리 장식은 어떻게 생겼으며, 비공개로 진행되는 사교계 고위층들만 초대받는다는 살롱에 초대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의지할 것은 서로밖에 없는 초봄. 이네스는 그 나이 또래 소녀답지 않은 야무진 태도로 자매에게 이러저러한 사교계 에티켓을 알려 줄 가정교사를 수소문했고 동생과 자신의 드레스를 마련했으며 최신 유행하는 형태로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말아 올려 줄 시녀를 들였고 악세사리 보는 눈을 익혔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남의 부채 너머로 훑어보는 시선, 가린 입가 너머 숨겨진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조금 더 머리가 크고 완전히 사춘기라고 부를 시절에서 벗어난 이네스는 차츰차츰 사교 시즌에도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는 빈도를 줄였다. 이네스의 관심은 차츰차츰 국경을—개중에서도 영지의 경계를 맞댄 북방의 사절들, 외교 관계자, 물류가 흐르는 흐름, 재계의 큰 손이라고 불릴 만한 상단의 주인들, 각종 1차 산업과 제조업, 그리고 군수업으로 넘어갔다. 딸밖에 없는 디아만테 가에서는 데릴사위를 들이는 대신 이례적으로 큰딸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었다. 그것이 이네스보다 단 몇 살이 어린 여동생이 갓 사교계에 데뷔할 무렵이었다. 점차 사교계에 발길을 끊는 언니 대신 여러 세력가의 부인들이 연 파티, 비공개로 운영되는 살롱, 다과회 따위를 휩쓸고 다닌 것은 어린 아네트였다. 그 즈음 아네트에게 그런 별칭이 붙었다.
—디아만테 가家의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멸칭 같기도 하고, 별명 같기도 하고. 판단하기 아리송한 호칭으로 아네트는 불려왔다. 마땅한 적장자이자 장녀인 언니가 있는 이상 언제고 두 번째에 불과할 뿐이라는 멸칭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언니가 레이디답지 않은 태도로 온갖 곳을 쏘다니는 대신 마땅히 퍼스트 레이디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칭송의 의미로 붙은 것일지도 모르겠고.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나 세컨드 레이디는 디아만테 아네트를 통칭하는 호칭으로 그렇게 자리잡았다.
“이번 시즌 동안은 화가들을 만나볼까 해요.”
“화가라.”
예술가들을 찾아내고 후원하는 것은 지금껏 이네스가 해오던 일이었다. 내심 아네트는 언니가 어느 부인, 어느 영애, 누구의 정부를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술가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사교활동을 처리해 버리는 쪽을 편하게 여기고 있다고 짐작했다. 뭐,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술가를 찾아내고 후원을 맺는 것은 보통은 안주인이 하는 일이다. 온전히 그 역할을 내달라고 하면 그의 다정하기 그지없는 언니는 이번에도 얼마든지 내어 줄 것이 뻔했다.
“네에, 후원할 만한 인물을 찾으면 더 좋고요.”
“너도 예술가들과 좋은 연을 맺을 수 있다면 좋겠지. 그래, 수도에 올라가는 대로 괜찮은 화가나 미술품 중개상들을 소개시켜 줄게.”
덜컹이며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종이 두루마리를 눈으로 훑으며 무언가 일을 처리하고 있던 이네스가 잠깐 느릿느릿 두루마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시선을 맞췄다. 새파란 눈동자 안에는 그 어떤 속내를 숨긴 의도도 들어있지 않아 읽기 쉽다. 이네스가 생각하는 것은 대개는 두 가지다. 가문의 이득, 또는 제 동생의 안위. 이러한 어휘들은 결국 이네스의 가족이라는 하나의 어휘로 귀결된다. 정말이지, 그런 것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선명해서 좋다. 그 점이 사랑스럽다.
언니와 가족으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요, 언니.”
그 말을 내어 놓는 대신, 아네트는 들뜬 듯한 목소리를 하고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저, 그렇게 해서 타운하우스의 연회장 벽에 큰 그림을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초상화도 걸고요.”
“초상화는 그렸잖니? 제작년에.”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물 흐르듯 의아하게 이어지는 이네스의 목소리를 뚝 끊었다.
“하지만 타운하우스에는 없는걸요.”
제작년에 영지로 유명하다는 화가 하나를 불러서 아버지와 함께 가족 셋이 모여 있는 초상화를 하나 그렸다. 그 초상화는 지금쯤 가계도와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용 방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때 개별 초상화를 하나씩 그렸고, 그게 아버지의 응접실에 걸려 있으며, 그것은 딱히 아버지가 자신을 귀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딸들을 귀애하는 아버지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란 사실까지 아네트는 전부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조심스레 일어나, 마주 보고 있던 제 언니의 옆자리에 답싹 달라붙어 앉더니 팔을 쥐고 속삭였다.
“타운하우스는 저희 둘만이 지내는 집이잖아요. 정말로 저희 단 둘만 있는 집이에요….”
말꼬리가 조심스럽게 축 늘어졌다. 아네트는 제 언니가 약한 구석을 알았다. 너무나도 잘 알았다.
“가족이잖아요.”
“…….”
“저, 언니랑 사이좋은 자매라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걸요.”
이네스는 말없이 두루마리를 들어올리며 시선을 가렸다. 언니의 팔목을 끌어안고 기대고 있던 아네트는, 암묵의 허락을 읽었다. 늘 이런 식이다. 다정하기도 하지. 그 새파란 눈동자 안에는 까짓거 초상화가 뭐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속내가 훤해서.
“……그럼 내키는 대로 해.”
“제 기쁨이에요.”
기꺼웠다.
❥ ❥ ❥
아네트는 일전에 이미 두 사람의 전신 그림을 길게 둘 자리를 봐두었다. 액자 속에 넣은 그림이 아니라, 건물의 벽에 새겨넣는 벽화를 둘 생각이었다. 액자를 내리는 방식으로는 결코 치워버릴 수 없도록. 방을 물감으로 죄 덧칠해버리거나 저택을 무너뜨리는 대공사가 아닌 이상 지워지지 않도록. 지금은 벽 위로 레이스를 단 커튼을 하나 달고, 금틀과 오팔로 장식한 거울과 풍경화 한 점이 걸려 있는 응접실 벽은 거울과 풍경화를 떼어내고 나면 새하얀 벽에 불과했다. 양팔을 쭉 뻗은 채로 세면 총 두 번을 가야 할 길이. 아네트는 화가를 수배해 그 안에다 실물 사이즈의 제 언니와 저를 그려넣을 작정이었다. 자매의 사이좋은 우애를 과시하고, 이 저택에 제 언니와 자신을 결코 파내지 못할 수단으로 새겨넣을 방법. 돌로 된 벽 위에 목탄으로 스케치를 하고 물감으로 덧칠을 한 다음 마감으로 다시 보호재를 발라 결코 긁어낼 수 없도록. 그 상상은 생각만 해도 혀 끝이 아릴 만큼 달콤하고도 또 만족스러웠다.
이네스는 오히려 사교활동을 동생에게 일임할 수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는 듯 자신이 주기적으로 만나오던 예술가들, 각종 모임, 거래를 해오던 예술품 거래상 따위의 관계를 죄 아네트에게 넘기고 아버지가 넘긴 수도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산더미같은 일들에 집중했다. 그 사이 아네트는 심혈을 기울여 소개받은 화가들 가운데 고르고 골라 화가를 하나 선정했다. 아네트의 취향이라기엔 이네스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선정에 가까웠다. 디아만테 가家와 연을 이미 맺고 있을 정도라면 실력은 어차피 더 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조금 더 아꼈던가 마음에 들어했다던가 하는 말이 들려오는 화가로 정했던 탓이다. 그해 봄, 이네스는 유일하게 단 하나의 티 파티에 얼굴을 내밀었다. 아네트가 타운하우스에서 연 티 파티였다.
“아네트 영애께서 요즘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지요?”
“견문을 넓히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 무렵 이미 수도에는 아네트가 화가들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지 오래였다. 대답하는 이네스의 어조는 여상하고 또 무심했다. 그 다음으로 흘러나올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탓이다.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일임하셨으니, 이네스 영애는 언니로서 조금 걱정이 되시겠어요.”
이네스의 곁에 앉아 있던 영애는 살짝, 이네스의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이네스의 반대쪽 옆에 앉아 있어야 할 파티의 주최자는 케이크를 확인하기 위해—더 정확히는 케이크에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 콩포트가 제대로 올라갔는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나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사실까지는 몰랐다—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당사자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건넬 수 있는 종류의 말이란 대개는 뻔하다. 이네스는 나오려는 웃음을 찻잔을 들어올려 감췄다. 한 모금, 딱 이네스의 취향에 맞게 우려진 다즐링.
애초에 그것은 분명히 혓바닥 아래 감춘 칼날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것이 뭐가 중요했겠는가? 그런 칼날로는 자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수도의 호사가들은 몰랐다.
“아직 어린 동생에게 짐을 점점 많이 물려주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하네요.”
애초부터 디아만테 가문 내의 차기 권력구도는 수도의 호사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공작이 사생아가 분명한 아네트를 굳이굳이 성 안으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들에 대한 소문은 수도를 한 차례 뒤흔들었다. 사생아를 인정한다는 건 자신의 치부를 인정한다는 행위이므로 수치에 가까웠다. 대개는 그 정도의 수치를 감안할 만큼 공작이 정부를 사랑했거나 사생아인 딸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 딸이 공작가의 핵심을 쥘 만큼 단숨에 차기 권력자로 도약할 거라고 예상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른다. 성벽 안으로 들여진 아네트가 공작 영애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똑같은 색의 푸른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어린 이네스가 뻗은 손 탓임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떠들 수 있었을 것이다.
❥ ❥ ❥
벽화에 그려지는 동안 입고 있을 드레스를 고른 것도 아네트였다. 자매는 꼭 닮은 디자인의 드레스를 나란히 입었다. 사이가 참 좋으시군요, 드레스도 맞춰 입고요. 어색한 공기를 깨기 위해 화가가 내뱉은 말에 아네트는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 제 언니의 팔을 답삭 끌어안았다. 저는 언니를 아주, 아주 좋아하거든요. 짐짓 두 배로 어색해진 공기가 흐르려는 찰나 드물게 이네스가 침묵을 깼다. 이 애가, 언니가 하려는 거면 전부 같은 걸 하려고 드네요. 난처한 듯 웃는 낯은 단정했다. 아네트는 화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웃는 제 언니의 낯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좋았다. 가끔, 아니, 사실 꽤 자주.
아주 소중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얼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습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가장 아끼는 것은 혓바닥 아래 꽁꽁 감추고 감추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숨기는 버릇은 그들 자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이미 다 커서 데뷔탕트까지 무사히 치른 동생이 밤마다 홀로 자기 무섭다는 핑계를 대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찾아오는 것을 순순히 받아주면서도, 밖에서는 차갑고 냉정한 낯을 유지하는 것도. 당장이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하게 쥐지 않고서야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얌전한 척 거짓된 낯을 뒤집어 쓰고 웃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래, 그들 자매가 가장 깊숙한 영역에서부터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가장 옳을 터다.
그리고 동시에 자매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어느날의 이네스가, 찻잔 안을 티스푼으로 휘젓다 말고 한숨같이 내뱉은 말처럼. 핏줄은 못 속이는구나.
아네트는 그래서 핏줄이라는 단어가 기꺼웠다. 결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된 기분이 드는 동시에, 제 언니와 아주 깊숙한 곳까지 닮아있음을 증거하는 단어라서. 삶을 공유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단어라서. 곱씹을수록 단물이 배어나듯 달착지근한 어휘.
“저희, 닮았지요?”
불쑥 채근하듯 묻는 말에, 화가는 당황한 듯 ‘아, 네? 네, 네네.’하고 어설프게 대답하고야 만다.
❥ ❥ ❥
“그러고보니, 아네트. 들었니? 수도의 호사가들이 너를 세컨드 레이디라고 부른다는구나.”
흰 비단 장갑을 낀 손이 섬세하게 아네트의 뺨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묻어서 떼어내 주려고 하는 행동이라기엔, 지나치게 순간적으로 가볍게 그리고 부드럽게 문지르고 떨어져 나가는 손이었다. 아네트는 무심코 손을 올려, 언니가 문지르고 지나간 곳의 뺨 위에 다시 얹었다. 예뻐해 주신 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이네스는 어느덧 한 번 사뿐 몸을 돌려 정원의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빙글 몸을 돌리는 순간 페티코트로 잔뜩 부풀린 드레스 자락이 한 번 붕, 공중에 뜬다. 아, 이런. 그래도 이왕 예뻐해 주실 거라면 언니의 맨손인 쪽이 더 기뻤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은 착실하게 언니가 던진 말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움직인다.
“네에,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어요. 제 앞에서도 그렇게 직접 호칭하더군요. 혹시, 불쾌하세요?”
언니가 불쾌하셨다면 당장─거기까지 말하려던 아네트는 느릿느릿 말을 멈췄다. 앞서나가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렇게 결정을 내린다. 질문에서 뚝 끊어진 문장은 남이 듣기엔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이네스는 잠시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던 장미 덤불의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아니, 아니야. 네가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혹시 네가 싫다면 그 호칭은 쓰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테니 말이야.”
순수한 감상을 물어본 거란다. 그렇게 말한 이네스는 아네트의 손 위에 똑, 꺾인 장미 한 송이를 얹었다. 사뿐, 내려앉은 장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닮았구나. 초상화를 그릴 때 들고 가렴.”
그건───.
대번에 대답하려던 아네트가 잠깐 뜸을 들인다.
“그건?”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오히려 기뻐요.”
중의적인 대답이었다.
“드디어 가문의 일원이라 밖에서도 인정받은 기분인걸요.”
사실은.
그것보다 더 내키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으레 가주의 여인을 퍼스트 레이디라고 칭하듯이.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야 할 저의 언니가 가주 노릇을 하자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 세컨드 레이디라고 부르고 있는 거니까. 그건 마치, 어떻게 보면 이 가문에 우리 둘이 단 둘만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딱히 그런 지위에 욕심을 낸 적은 없으나,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배우자와 같은 어휘로 우리 둘을 묶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점이 가장 기쁘다고. 당장은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단어를 듣고 있자면 달콤한 꿈을 꾸게 된다. 가문을 쥔 제 언니의 곁에서 언젠가 꼭 맞는 짝이 되어 머무를 날을. 굳이 다른 단어가 수식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자매라는 이름으로 충분하도록 머무를 날들을. 그렇게 내내 함께할 날들을. 그 언젠가 올 미래를.
“……그러니, 기쁘지 않을 리가요.”
그러므로 일단은, 웃는다. 웃기로 한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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