崩壞日日
정연우 최현 유소리 차세오 정샛별 | 약 17000자
놀랍도록 평화로운 날이었다.
입을 비죽거리며 휴대폰 화면을 꾹꾹 누르다가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반짝이는 액정 위로는 매정하기 그지없는 오빠의 메세지가 떠 있었다. 우리 막내 오늘은 혼자 와~열여덟이나 먹었으면서 무슨. 쩝, 하고 입맛을 몇 번 다시다가 터덜터덜 걸어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저만 야자 없이 일찍 조퇴라 정류장은 한산했다. 노선 상관 없이, 여기서 파란색 버스를 타면 무조건 연우의 동네까지는 전부 간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툭툭 발끝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찼다. 몇 분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버스가 금방 왔다. 버스 번호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파란색이다. 다만 앞에 임시 운행이라고 써붙어 있는 것이 찜찜했기 때문에, 연우는 버스 카드를 찍다 말고 아저씨, 이거 □동까지 가는 거 맞죠? 하고 말을 붙였다. 기사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그제야 카드를 찍었다. 빈자리는 군데군데 있었다. 개중 볕이 잘 드는 창가를 골랐다. 막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으려는 찰나였다.
“어, 연우?”
불쑥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검은 긴 생머리, 싱긋 휘어지는 예쁘장한 눈웃음. 연우가 돌연 반색하며 그대로 이어폰을 집어넣었다.
“화윤아!”
눈 앞에 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애는 연우가 새학기 초부터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을 내던 반 친구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긴 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웃는 얼굴이 예뻐서였다는데, 하필 화윤이 반장이었던 터라 여러모로 바빠 특별히 시간을 더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다. 연우가 냉큼 뭔가 있지도 않는 옆좌석을 치우는 시늉을 하며 탕탕 좌석을 두드렸다. 앉으라는 표시였다.
“집에 가는 길이야?”
“응? 아하하, 나 조퇴……화윤이 너는? 야자 안 했어?”
꾀병으로 쨌다는 말은 입 안으로 숨긴다.
“나는 병원. 시내에서 내리려고. 연우 이 방향으로 가는구나, 나도 이쪽인데 연우랑 버스에서 마주친 건 처음 같아서.”
“아아. 나, 원래 오빠가 늘 태워주거든. 근데 오늘은 바쁘대서.”
방금 전까지 몽글몽글 마음 안에서 조금 피어난 듯 했던 데리러 오지 않은 오빠를 향한 원망과 투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눈 녹듯 사라졌다. 그곳을 대신 채운 것은 감사다. 연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붙였다.
“화윤이 넌 학원 같은 건 안 다녀?”
“응? 응, 그냥 야자만. 연우 너는?”
“공부에 열중하는 타입이 아니라.”
머리만 긁적이고 말았다. 원래 이런 걸로 부끄러워 하는 성격도 아니지만 잘 보이고 싶던 친구 앞에서 이러고 있자니 부끄럽다. 옆에서 화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손뼉을 짝, 치면서 한가로운 소리나 했다.
“맞다, 사진 찍는다고 했지? 대학도 예체능 쪽으로 가는 거야?”
그러고는 싶은데, 예고 가고 싶었는데! 근데 엄마랑 아빠랑 오빠가 엄청 반대해서…….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대충 그런 말들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쾅!
인식하기도 전에 천지가 뒤집혔다. 아찔하게 공중에 붕 뜬 감각. 그리고…….
유소리가 UGN 일본 지부장 키리타니 유고의 협조 공문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약 일주일 전쯤의 일이다. 정갈하게 한국어로 번역된 공문을 받자마자, 단박에 지부에 남아있던 발로르 신드롬의 에이전트와 손을 잡고 공간을 넘었다. 1초도 안 되어 도착한 일본지부에선 그를 곧바로 키리타니 유고의 집무실 앞까지 안내했다. 그 안에서 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키리타니 유고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 지부장님.”
몇 달 전 일본 활동이 있어 국내에서 좀 두문불출 할 것 같다고 통보하고 간 차세오가, 키리타니 유고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주섬주섬 일어나 고개를 꾸벅였다. 소리가 얼떨떨한 얼굴로 세오를 반겼다.
“일본 활동 있다더니……바쁘지 않아요?”
“예, 어제 끝났습니다. 본래라면 귀국했었을텐데 키리타니 지부장님의 연락을 받아서요.”
세오는 본업을 아이돌로 두고 있는 UGN의 에이전트다. 전투면 전투, 추적이면 추적, 못하는 게 없는 실력 괜찮은 오버드지만 유일한 흠이 있다면 지나치게 본업 일정이 바쁘다는 점이었다. 본인은 각성 이후로 그다지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좋다고는 하지만, 소리 입장에서는 과로로 리저렉트 하고 일어나면 문제 없다는 소리를 중얼대는 인간이 둘로 늘어나는 게 그닥 내키진 않았다. 의도적으로 세오에게 나가는 임무를 줄인 것은 그걸 배려해서다. 아마 일본 활동이 막 끝났다고 했으니 잠시 동안은 얼마 안 되는 본업 휴식기일 테지만, 그 타이밍에 귀신같이 불러내고야 마는 것이 UGN이라는 곳이다. 과연, 키리타니 유고의 얼굴에도 약간의 미안함이 드러나 있긴 했다.
소리가 쇼파 맞은편에 앉기 무섭게, 키리타니 유고가 서류철 하나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들으셨겠지만, 저희 쪽에서 추적하던 FH 에이전트가 한국으로 넘어간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만만찮은 자이니 모쪼록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무슨 계획을 품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에이전트라서요.”
서류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다. 인적사항. 카스카 쿄지. 통칭 “디아볼로스”. 그 옆으로 간단한 프로필과 UGN이 조사한 내역이 붙어 있다. 프로필에 붙은 사진에서,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이 소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귓가로는 키리타니 유고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자의 이름은 ‘디아볼로스’. UGN과의 교전은 다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처치한 적은 없습니다. 생포나 회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일 년 반 전쯤으로 파악되나, 저희도 최근 알아차린 사항이라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과연, 교전 기록만 봐도 녹록치 않은 오버드임이 드러난다. 소리는 서류철을 접고 키리타니 유고를 응시했다. 단정한 어조로 뱉어진 말들은 전부 한치의 흔들림 없는 정갈한 한국어다. 이 사람에게 유창한 한국어쯤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제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남자다. 고작 이 창창한 나이에,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란 대체 뭘까. 선하지만 거대한 책임감일까. 일본지부 내에서는 키리타니 유고의 수면시간이 거의 하나의 단위처럼 통칭되고 있다고들 들었다. 두 시간? 두 시간 반? 그렇게 살면서도, 이이는 면목 없다는 말을 한다.
“차세오 군은 몇 번 일본에서 파견 임무를 받았던지라, ‘디아볼로스’와의 교전 경험이 있습니다.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해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말이 이어지자 세오가 창백한 낯으로 한 번 더 가볍게 목례했다. 소리는 한숨을 삼켰다. 여기나 저기나 죄다 과로하는 사람들 뿐이다. 서류철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묻는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왜 한국일까요?”
“그 점은 저희도 의문입니다.”
한국은 FH가 활동하기 좋은 국가가 아니다. CCTV가 거리마다 거미줄처럼 깔려 있고, 정부의 주민등록은 촘촘하다. 국가의 협조를 받는 UGN에서도 흔적을 지우고 활동하기 쉽지 않은 판에, 펄스 하츠, 그것도 외국인 에이전트가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쉬울 리 없다. 그것을 감안하고 한국까지 넘어오는 이유가 뭘까. 그 목적이 뭘까.
소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났다. 파란의 예감이 들었다.
소리가 ‘디아볼로스’의 소식을 들은 것은 며칠 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서였다.
얼마 전 한국으로 귀국한 나이트폴 소속 에이전트 정샛별에게, 국내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FH 에이전트이자 졈인 ‘슈라 바라’의 조사를 부탁했었는데 그곳에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한껏 당겨 찍은 사진은 흐릿하긴 하지만 누가 봐도 ‘디아볼로스’였다. 확인차 세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을 때도 확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지금…….
“보고 마칩니다. 조금 더 추적하면 아지트까지는 추적 가능할 것 같아요. 쫓아가 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근거지는 알아두는 쪽이 좋겠죠. 최대한 교전 없이 다녀오도록 하세요.]
전화기 너머로 소리 특유의 빠르고 정확한 어조가 들려왔다. 정샛별이 휴대폰 화면을 끄고 코트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탁 트인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푸르렀다.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코트 자락이 제멋대로 펄럭이며 나부겼다. FH의 아지트일지도 모르는 곳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확인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그 정도로 경험 없는 에이전트도 아니다. 손끝을 옥상 바닥에 대고, 눈을 감고 집중한다. 공기의 흐름이 세밀하게 손끝을 스쳤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1초가 100시간처럼 흘렀다. 아주 천천히. 또는 아주 느리게. 곤두세운 신경 끝에, 인기척과 온기가 함께 잡히는 순간.
감각 가운데 무언가 걸렸다.
레니게이드 반응.
여기다.
운이 좋았다. 이 근처의 폐건물과 공사장을 전부 뒤질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마주하다니. 샛별은 옥상의 물탱크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가 훌쩍 뛰어내렸다. 건물 안에서 잡히는 것은 두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하나는 ‘슈라 바라’. 추정하건대 다른 하나는, 소리가 ‘디아볼로스’라고 부르던 그 남자일 것이다. 먼지가 묻은 코트 자락을 한 번 툭, 털어내고 한 손으로 벽을 짚어 옥상의 철책을 넘었다. 두어 번의 도약만에 인기척이 느겨지던 층 바로 윗층 창틀에 안정적으로 선다.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계획은…진행…거겠지?”
‘디아볼로스’가 분명한 중년 남성의 음성.
“…론이죠. 차질 없이 곧 시행될…니다.'”
그것보단 조금 젊은 것이 분명한 남성─‘슈라 바라’의 목소리.
‘계획?’
계획이라고?
귀를 한 번 더 쫑긋거린 샛별이 괜히 한 번 숨을 삼키며 창문 쪽 벽에 붙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특기다. 기척을 싹 죽이고 없애는 것도 특기다. 숨을 참고, 창틀을 발판 삼아 도움닫기를 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동그랗게 몸을 굽혀 한 번 허공에서 빙글 돌았다. 그대로 아래층 창문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쿠당탕! 바닥을 한 번 구르며 착지한다. 공기의 흐름을 통제해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길 잘했다 싶었다. 낙법을 알긴 아는데, 낡고 지친 대학원생은 이제 몸을 쓰는 것엔 서툴렀다.
예전에 사무실로 쓰였던 공간인지, 구석에 먼지 쌓인 파티션과 사무실용 책상 따위가 몰려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온기를 통해 감지한 대로, 슈라 바라와 디아볼로스는 파티션 너머에 서 있었다. 언뜻언뜻 파티션 너머로는 두 사람의 뒷통수가 보였다. 기척을 감추긴 했지만 괜한 마음에, 기둥 뒤로 숨어 숨을 죽였다. 시야 안에 두 사람이 가물가물하게 들어올 듯 말 듯 했다. 아까에 비해 훨씬 말소리는 명확했다.
“여기까지 와서 허탕이면 곤란하니 말이지.”
“순조롭게 진행될 테니 걱정 마시죠. UGN 측에서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고……아니, 잠깐.”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잇던 ‘슈라 바라’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쥐새끼가 있네?”
쾅! 그 순간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천장에서 우수수 돌조각이 떨어졌다. 폭발의 진원지는 유유자적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인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샛별이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상황을 재 본다. 2:1. 쪽수부터 일단 글렀다.
“이 무렵 같은데,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다가도 안 느껴지는 것 같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동시에, 슈라 바라의 발치에 쌓여 있던 금빛 모래가 우수수 떠오른다. 순식간에 십여 개가 넘게 만들어진 모래의 창이 일제히 주위를 향했다. 뭐, 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흥얼거리는 어조 뒤로 계산을 마쳤다. 튀자. 지부장님도 교전 없이 처리하라고 하셨다. 유독 창 밖 하늘이 푸르렀다. 이리로 오라는 것처럼.
샛별이 바람처럼 재빠르게 창문 너머로 뛰어넘길 시도한 것이 정확히 그 시점이었고, 슈라 바라가 만들어낸 모래창이 일제히 주위를 향해 내쏘아진 것도 똑같은 순간이었다. 허공을 도약한 순간, 모래창 하나가 어깨를 스친 것 정도는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내리며 샛별은 핸드폰을 찾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외우다시피 한 소리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샛별이 FH의 아지트를 발견한 바로 그 날은, UGN 칠드런인 최현이 새로운 현장 임무를 받은 날이기도 했다. 새로 내려온 임무는 FH 에이전트로 의심되는 고등학생이 있으니 예의주시하라는 내용이었다. 받은 날로부터 며칠 내내 꾸준히 그를 추적해왔지만, 사실상 큰 소득은 없었다. 현이 추적을 맡은 학생, 은래는 조금 반항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몹시 평범한 그 나이대 남자 고등학생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 보였던 것이다.
학교, 집, 학원, PC방, 학교, 집, 학원……평범하기 그지없는 반복되는 일상은 지켜보는 이까지 지루하게 만들었다. 현이 방금 사온 편의점 커피의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빨아들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떤 소득이 있는 행위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임무는 임무다. 지루헤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도 현은 시선으로 성실하게 은래의 하교길을 쫓았다. 며칠째 똑같다. 별 소득이 없다고 보고하고 모든 것을 끝낼까 싶다가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또 조금만 기다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망설이게 된다. 하품을 삼키며 다 마신 커피컵의 쓰레기를 공중에 내던졌다. 컵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훌쩍, 허공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쓰레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녹아들기라도 한 듯 컵은 온데간데 찾을 길이 없다. 그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기척이 사라졌다.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훑어보면서도, 머리로는 기척이 끊긴 마지막 지점과 거기서 갈 수 있는 각종 경로를 추정되는 신드롬별로 계산한다. 발끝에서 피어오른 검은 그림자는 땅을 적시고 적셔 빠르게 퍼져나가, 익숙한 기척을 찾아내려 시도한다.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수식들이 스쳐 지나가고, 모든 가능성을 합산해 가장 확률이 높은 경로를 선별했다. 그림자를 타고 미끄러지듯 빠르게 튀어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기척이 잡힌다. 건물 둘을 통째로 넘었군. 오버드가 아니면 보일 수 없는 신기다. 현은 은래에 대한 평가를 평범함에서 수상쩍음으로 순식간에 격상시켰다.
잡힐 듯 하던 기척은 사라졌다가, 다시 자신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뒤를 성실하게 쫓았다. 내내 꼭 그런 식으로 추격이 이루어졌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예 따돌리는 것이 아닌, 이건 꼭……. 영민한 두뇌가 지나치게 추격이 쉽지만 잡히지는 않는 이 상황에 의구심을 품는다. 마치, 기척이 사라질듯 말듯 반복하는 것이 쫓아오길 유도하는 것 같았다.
함정일까.
현이 잠시 표정 없이 상황을 재 보았다. 리스크와 보상에 관해서도.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배웠다.
빠르게 거리를 좁힌다. 타깃이 시야 안에 들어올 정도까지.
그러나 그 순간.
다시 거짓말처럼 표적이 사라졌다.
역시나 함정이었군. 현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동시에 제법 즐거워지기도 했다. 적어도 지루하게 똑같은 일상만 쫓던 요 머칠보다는, 당연히 이쪽이 더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괜찮은 소득도 건지긴 했고, 뭐, 나름대로 보고할 거리도…….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감각을 최고조로 돋운다. 지각의 범위가 급속도로 확장된다. 두뇌의 수많은 연산회로들이, 가능성을 셈하기 위해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 지각 끄트머리에 무언가 걸렸다.
아, 이것은.
‘워딩’이다.
이 방향, 이 속도, 레니게이드의 감각, 확산……. 머리속에 펼쳐진 지도가 한곳에 쿡, 새빨간 핀을 찍었다. 계산 결과는 금방 나왔다. 워딩이 펼쳐진 중심은 이곳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쯤 떨어진 어느 인적 드문 도로였다. 다른 곳으로 유인해 놓으려는 속셈이었나? 이를 악문 채 이동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늦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FH의 에이전트가 어떤 식으로 활개를 칠지는, 상상이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상상이 잘 되어서 더 문제였다.
최대한 빠르게 워딩의 중심지에 발을 들인 현이 얼굴을 구겼다.
완전히 전복된 버스, 깨져나간 유리창과 찌그러진 겉면, 피어오르는 연기, 매캐한 냄새와 도로를 적시는…….
이미 한 발 늦었군.
그럴 때가 아니다. 일단 사고를 막지 못했으니 생존자라도 구조해야 한다. 황급히 버스 근처로 다가가며 생존자 여부를 파악하려는데, 불쑥 연기를 헤치고 누군가 걸어나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연기가 일렁거릴 때마다 언뜻언뜻 그 너머로 그림자의 주인이 보였다. 현은 순간적으로, 멍하니 넋을 놓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뜨려 아래로 묶은 갈색 머리. 작은 키. 품 안에는 사람 하나를 안고 있음에도, 비틀거리지만 무사히 걸어온다. 이런 처참한 사고에서 사지 멀쩡할 수 있는 건 오버드밖에 없다. 정신을 차린 현이 경계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누구야?”
“…….”
“코드네임은?”
그러나 연기가 온전히 걷히자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 더 앳된 소녀였다. 기껏해야 현 자신의 또래쯤 됐을까. 일그러진 얼굴엔 새까만 검댕이 조금 묻어 있고, 입고 있는 옷은 쓸리고 터지고 그을렸지만 정작 외상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비틀비틀 걸어오던 소녀가 흐린 정신을 간신히 붙잡는 중인지, 얼굴을 찡그렸다가 겨우 드문드문 답했다.
“그러는 넌 누구, 아니……코드네임은, 대체 또, 무슨 말……”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깨달았다. 설마 이 사람, 방금 각성한…….
그러나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물어볼 겨를은 없었다. 소녀가 가물가물하던 의식의 끈을 결국 놓고 만 모양인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그 자리에 쓰러졌던 것이다. 현은 황급히 소녀를 받쳐 안으며 휴대폰을 꺼내들어 지부로 연결되는 단축번호를 꾹 눌렀다.
“…쯧, 너무 늦은 건가.”
그리고 그 자리 위로, 아무도 듣지 못한 음성 하나가 맴돌 뿐이었다.
연우가 눈을 뜬 것은 병실에서였다. 막 버스 전복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이 구조된 학생을 발견했으며, 오버드로 판정되었다는 연락을 듣고 급히 방문한 소리가 병실 문을 두드린 것과 거의 동일한 타이밍이었다. 말짱하게 다친 구석 하나 없는 연우가 병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눈을 깜빡거린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소리는 익숙한 태도로 먼저 명함을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연우 학생.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지휘자’ 유소리라고 합니다.”
“네, 네……? 정연우예요.”
눈을 깜빡이며 맹하게 대답한 정연우가 몇 번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명함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우아한 버건디색의 흘림체가 코팅된 채로, 명함 위에서 번쩍인다. 유니버설 가디언즈 네트워크. 경기지부 지부장 유소리. 당연하게도, 처음 듣는 단체명이다. 그런 당혹감을 알아차린 듯 소리가 살짝 웃으며 손짓했다.
“모르는 게 당연해요. 민간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단체니까요. 아, 이쪽은 연우 학생을 발견한 우리 지부 칠드런. 인사해요.”
유니버설 가디언즈 네트워크는 뭐고, 지부는 또 뭐고, 칠드런은 또 뭔지 물어보기도 전에 시선이 이번엔 소리가 손짓한 대로 쏠렸다. 최초발견자라는 명목 하에 끌려온 현이 뚱한 낯으로 침대 머리맡 벽에 기대 서 있다가 기본적인 예의를 차리기 위해 고개만 대충 꾸벅였다. 연우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간다. 시야 안에 들어온 훌쩍 키가 큰 창백한 낯의 소년은, 어쩐지 구석의 그림자 진 공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방금 소리가 설명해준 바가 한 번 더 되감기 재생된다. 이쪽은 연우 씨를 발견한…….
“그럼 네가 나 구해 준 거야?! 고마워!”
눈을 반짝이며 덥썩, 손을 낚아챈다.
“아니, 그건…….”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게 없는 사람인가? 현의 얼굴 위로 대뜸 그런 당혹감이 먼저 스쳤다. 당신을 구한 건 내가 이나라 당신 스스로라고, 그렇게 설명하려던 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세한 것은 전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그냥 떨떠름하게 손을 빼어내며 냉정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제가 구한 게 아닌데요.”
둘 사이에 서 있던 소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현은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뭔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다만 싸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우려한 소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연우가 먼저 현의 묘한 표정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놓은 것이다. 반응이 뭐 그러냐는 무안함, 내지는 화보다도 경쾌한 어조의 진심 어린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혹시 기분 나빴어?”
“…아뇨, 됐어요. 괜찮아요.”
사실 어느 쪽이냐 하면, 초면에 훅 퍼스널 스페이스를 치고 들어온 것 치고도 불쾌감이 하나 없었다. 순수한 호의와 고마움으로 가득 찬 낯 때문이었을까. 현이 몰래 잡혔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놓길 반복하는 사이, 소리의 매끄러운 어조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우선 연우 학생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저희 책임이었어요. 조금 더 빨리 움직여서 그들을 막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한 번 더 사과하는 소리를, 현이 묘한 표정으로 본다. 세오와 키리타니 유고를 두고 지나치게 과로한다고 말하는 유소리지만, 사실 본인의 생활도 만만찮다. 하루에 네 시간은 채워서 자나, 지부장실에 가면 산더미같이 쌓인 커피만 현을 반기는 일이 잦은데도 그랬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딸을 위한 시간을 별도로 내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다. 그랬기 때문에 현에게는, 소리가 나서서 사과하는 지금의 이 상황이 제법 기이하고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스스로를 채찍질중인 사람도 언제나 소리 자신이기에 타자가 말을 얹을 수 없을 뿐이다.
“네? ‘그들’이요?”
다행스럽게도 연우는 조금 더 다른 쪽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 펄스 하츠, 통칭 FH라고 불리는 테러리스트 집단이죠. 그리고 그들을 막는 게 저희 유니버설 가디언즈 네트워크─통칭 UGN의 주된 임무랍니다. 이번 버스 전복 사고도, FH의 인물이 일으킨 일로 판명되었어요.”
“왜…아니, 대체 어째서요?”
멍한 얼굴로 되묻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먼저 던질 법한, 아주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소리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새로 각성한 오버드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땐 늘 이런 것들이 제일 문제다.
“그걸 설명하자면 많이 길지만……동시에 한 번은 꼭 설명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네요.”
그러더니 손뼉을 짝, 하고 한 번 친다.
“자! 정연우 학생. 혹시 쓰러지기 전에 기억나는 거 있나요? 그때 본인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힘을 쓰진 않았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왜 묻는 거냐고……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경쾌한 어조에 반사적으로 연우는 기억을 되짚고 말았다.
아, 그래.
…불.
손끝에서 불이 나왔었지. 꼭 수족처럼 의지대로 손쉽게 움직이는 불꽃이.
그러나 이것은 남에게 이야기하기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차라리 목숨이 급박한 상황에서 환각을 봤다던가, 쓰러져 정신을 잃은 사이에 꿈을 꿨다던가 하는 쪽이 더 신빙성 있다. 이게 뭐야, 어벤져스? 뮤턴트? 초능력자? 이런 생각이 머리를 제멋대로 들쑥날쑥 헤집었다. 그럼에도 대뜸 고개를 저어 보이지 않고 머뭇거린 까닭은, 당장 지금이라도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불꽃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만 같은……그런 감각과 근거없는 확신 때문이었다. 연우가 머뭇거리자, 소리의 입가에 띄워진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네? 그치만, 그치만 이런 건……”
연우가 한 번 더 머뭇거렸다. 그 앞에 대고 소리가 가볍게 손을 내민다.
“제 능력을 보여줄게요. 괜찮다면 손을 잡아요.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연우가 조심스레 소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병실이었던 일상적 배경이 깡그리 사자리고 그 자리를 쨍한 햇빛과 푸른 하늘, 붉은 모래의 사막 풍경 따위가 채운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열기도, 건조한 공기의 감각도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환각이 아닌 것만 같다. 저 멀리 모래 언덕 너머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소리가 옆에서 말을 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이 세계는 사실 ‘레니게이드’라고 불리는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있어요. 저희 UGN에서 추정하기로는 약 세계 인구의 80%가 감염되어 있다고 해요.”
“…바이러스요?!”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을 잠복 상태로 살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평화롭게 말이에요. 레니게이드 바이러스는 보통 큰 외부적 충격에 의해 발현되는데, 사실 그마저도 발현 확률이 낮아요. 그러나 그 낮은 확률을 뚫고 발현한다면 몸의 신체 단위로 재구성과 변형이 일어나──이렇게 된답니다.”
소리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연우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는 찰나, 휙 배경이 바뀌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골목이었다. 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엉켜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따라 타는 듯한 흰빛이 너울거리며 상대를 무자비하게 양단하고, 누군가는 반쯤 알 수 없는 짐승의 것으로 수화한 팔을 휘두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발밑으로 실낱같은 핏줄기가 그물을 이뤄 스물스물 번져나가고 있었다. 저 뒤에서는,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선다.
“우리는 이걸, ‘각성’이라고 불러요.”
“…각성…..”
홀린 듯 그 말을 받아 연우가 중얼거렸다.
“레니게이드 바이러스는 인간을 유전자 단위부터 근본적으로 바꿔놓았고, 레니게이드가 발현된 인간들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을 쓰게 됐어요. 그리고 그들을 두고, 우리는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오버드’라고 명명했죠.”
거기까지 말한 소리가 쥐고 있던 연우의 손을 놓았다. 거짓말처럼 주위를 채웠던 현상이 싹 사라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연우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의 그 병실 그대로다.
“우리 UGN은 인류와 오버드의 공존을 위해 설립됐어요. 이에 반해, 오버드의 힘을 사용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를 교란시키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길 원하는 자들도 따로 모여들었고요. 그들이 바로 FH라고 불리는 집단이에요. 이번 버스 전복 테러도, 그 일환이라고 파악됐고요.”
특유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어조로 설명을 마친 소리가 미소짓는다.
“더 궁금한 점 있나요?”
잠시 침묵한 연우는, 느닷없이 쏟아져 들어온 비현실적 정보에 멍한 얼굴로 눈만 꿈뻑였다.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오버드, 초능력, UGN, FH──낯선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버스 전복 사고.
생각이 거기까지 가 닿은 연우가 황급히 물었다.
“저, 그, 화윤이는요? 그리고 버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연우 학생과 같이 있던 여학생이라면 멀쩡해요. 연우 학생이 보호해준 덕이에요. UGN 산하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마쳤고,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아 귀가 조치했습니다. 기억에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질 예정이지만─.”
선뜻 말을 이어 나가던 소리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간다.
“일단 살아남았다는 건 큰 일이죠. 버스 전복 사고의 경우 총 탑승 인원 11명, 연우 학생과 동승인을 제외한 전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어요. 서류상 처리 및 매스컴에는 두 사람을 제외한 9명 탑승, 전원 사망으로 발표될 예정이고요.”
전원 사망.
실감이 나지 않는 숫자와 단어에, 연우가 잠시 입을 벌렸다. 무어라 차마 말을 하지 못해, 입을 벙긋거리길 반복한다. 훅 치고 들어온 감각이 지나치게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이 전부 죽었다고? 한순간에? 버스를 타고 있었을 뿐인데, 분명히 살아 움직이던, 같이 버스를 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흘러들어온 소식치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한동안 입을 열었다가 닫기만을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구태여 말을 더 얹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러니까, 그럼….”
내가 조금만 더 잘 했으면, 조금만 더 빨리 각성했으면. 조금만 더 능숙하게 힘을 다뤘으면.
그 사람들까지 구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다음으로 스친 것은 부채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자책하지 말아요. 연우 학생은 피해자고, 살아남은 데다 친구를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을 했어요.”
연우의 얼굴에 스친 죄책감을 본 소리가, 재빠르게 알아챈 듯 딱 잘랐다.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 흘러나오는 어조는 단호하지만 다정하다.
“어른으로서는, 오히려 정말 잘해줬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곤 미미하게 웃는다. 그 광경을 지켜본 현은, 말없이 잠시간의 기이함을 느낀다. 더없이 선량한 사람들만이 죄책감을 느끼는 세상이란 얼마나 부조리한지 생각하고야 만다. 병실에는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연우의 얼굴 낯빛은 희게 질려 있지만,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과연, 현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종류의 인간이자…….
‘현아!’
평생을 그리워하던 햇살과 닮은 종류의 인간이다.
‘누나 왔어!’
이것은 비극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낯익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자책, 감상 따위에 젖은 연우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시선을 돌렸음에도 시야 안에는 잔상처럼 불길이 야금야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첫인상에다 대고는 그런 태그를 붙였다.
눈부신 사람.
소리는 제법 바쁜 모양인지, 연우에게 UGN 영입 제안을 남겨놓고 빠르게 병실을 떴다. 덕분에 오버드 사회에서는 갓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없는 연우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는 역할은 현의 몫이 됐다. 20년 전 비행기가 추락해서……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가 겨우 끝날 무렵, 의사가 잠시 방문해 몸에는 이상이 없으니 바로 퇴원해도 좋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한테도 아무 말 못했고, 집에 가는 게 너무 늦어져 버렸네. 연우가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현은 묘한 표정을 한 채로 바라봤다.
가족, 일상.
잃어버린 지 지나치게 오래되어 이젠 완전히 낯설어진 단어들이었다.
“우, 너무해! 나 빼고 저녁 먹었으니까 알아서 먹고 들어오라잖……엥? 왜?”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넣으며, 투정을 부리던 연우가 시선을 눈치채고 멀뚱히 고개를 기울였다. 노이만 특유의 빠른 두뇌는 감상에 젖어 불유쾌한 옛 기억을 끄집어내면서도 아무 위화감 없이 미소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따위의 대답을 하자, 연우는 금방 방긋방긋 웃으며 현의 손을 붙잡아 이끌며 제안했다.
“그럼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거절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이성은 더 엮이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는데, 감성이 먼저 이끌렸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야 만 것은 대충 그래서다. 연우는 친구들과 자주 가는 떡볶이 집이 있다며, 현을 곧잘 이끌었다. 가는 사이에는 지나치게 시답잖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오갔다. 껄끄러워 죽겠는데 이상하게 기꺼웠다. 스스로도 감정을 규정할 수가 없었다.
“그 코드웰 박사라는 사람은 왜 UGN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FH가 된 거야?”
“아직까지는 밝혀진 바 없어요. 알려진 것도 별로 없는 인물이고.”
“코드네임은 꼭 있어야 돼?”
“상관없긴 한데, 본명이 더 유명한 몇몇 에이전트들도 있고……. 그렇지만 본명을 썼다가 적들에게 정체와 일상이 들통나는 일들이 왕왕 있어서요. 가족이나 친구들을 지키고 싶다면.”
“코드네임은 누가 지어?”
“자기가 짓기도 하고, 지어 주기도 하고.”
“현이 넌 신드롬에 노이만도 갖고 있다고 그랬지? 그럼 공부도 무지 잘하겠네~!”
“그건 제 입으로 말하기 조금 그렇지만……네.”
“수학도 잘해?”
“뭐, 그럭저럭요.”
“와, 대박! 난 수학 완전 못해!”
조잘대는 목소리나 온기가 별로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맵고 달착지근한 허름한 분식집의 떡볶이와 치즈김밥의 맛도, 나오면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사실 현이 연우를 데려다 준 것이다.) 편의점에서 연우가 졸라 하나씩 사 먹은 아이스크림의 인공적 단맛도. UGN 칠드런으로 살아온 현에게는 낯설고 오랜만인 일상들이었다. 지금껏 결여되었다가 십 년만에 되찾은 일상들이었다. 피부 위를 타고 오르는 감각들이 지나치게 평화로워, 이상하리만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음, 버스를 바로 타고 싶진 않은데.”
그럴 만도 했다. 몇 시간 전에 버스 전복 사고가 있었으니까. 현이 제법 풀어진 태도로 웃으며 대답했다.
“연우씨는 뛰어가면 버스보다 빠를 걸요?”
“내가? 왜?”
“토끼니까.”
연우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키마이라거든.”
“토끼 키마이라죠. 아무튼, 오버드니까.”
“그래, 뭐어.”
연우가 기지개를 켰다. 갈림길 앞이었다. 집으로 향하려다 말고, 현을 향해 불쑥 묻는다.
“내가 UGN에 들어가면, 우리 동료인 거야? 같은 지부?”
“그렇겠죠. 들어올 건가요?”
물어보는 어조는 거의 마음을 정한 투였다. 사실 이 사람이라면, UGN에 들어오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할 것 같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현의 되물음에 연우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소리에게 연락하는 것은 이제 제 몫일까. 머리속으로 잠깐 계산한 현이, 이번에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림길 아래 가로등이 그 손을 비춘다.
“그럼, 이제 나름은……동료네요.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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