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무쌍

산산조각

조비 & 호봉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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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지 못한 사람은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이기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면전에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이 세상에 못 갈 곳은 어디도 없는 것 같아서.

 

*

 

잠깐만, 기다려봐.

 

여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호봉은 돌연 조비의 손목을 잡아챘다. 조비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순순히 끌려 걸어왔다. 다만 기분만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을 무시하고 여관 입구를 지나쳐 한적한 뒤편까지 들어선 호봉은 벽에 등을 기댔다.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 한 대 물자 조비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음성이 오간다. 기분 푸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지. 술 한 병 담배 한 갑 들고 뒷골목을 헤매는 거야. 그러다가 싸움이라도 붙으면… 아니, 됐습니다. 당신한테 설명해 봐야 제 입만 아프죠. 조비는 제법 길게 떠들었지만 말을 맺고 나니 이전까지 기분이 나빴다는 걸 떠올리기라도 한 듯 입을 꽉 다물었다. 아니,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조비가 사총팔달을 착용한 건 어떻게 보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호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궐련이 가지런히 담긴 종이갑을 내밀었다. 조비는 고개를 돌렸고 호봉은 어깨를 으쓱였다.

위의 군사들은 대체로 검은 옷을 걸친다. 캄캄한 그림자 속에서 그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은 담벼락의 그늘 아래서 일순 불씨 하나가 거칠게 타오른다. 곧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간다. 호봉이 성냥불을 흔들어 끄면 두 사람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다. 희뿌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온다. 호봉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문 채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조비를 본다. 노란 눈이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는 동안 조비에게선 평소의 퉁명스러운 투덜거림 한 번 돌아오지 않았다. 허공을 쳐다보는 옆얼굴이 가느다란 달빛에 비쳐 보인다. 곧잘 일그러지고 하는 미간이 오늘도 구겨져 있었다. 기분은 어때? 그렇게 물으면 그가 대답이나 할까? 오늘, 위의 막사에서는 말소리는커녕 누구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이마를 지그시 짚는 조조의 표정은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어두울 게 뻔해서, 호봉은 나란히 선 군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죄를 지은 것처럼 서 있는 이들. 그중에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특히 굳은 얼굴을 한 천하제일의 충신. 그의 정신은 많이 망가졌지만, 그 전동작탁이 아니었더라도 분명 저렇게 화를 냈을 테다. 모처럼 반듯하게 두 손을 등 뒤에 모아 선 호봉은 입으로는 향후 방향을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 저놈은 왜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난 언제쯤 저 분노를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배 안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속이 간지러웠지만, 그때는 그게 기쁨인지 짜증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젠 알아. 그건 속쓰림이지. 기대와 어긋난 결과에 어린애처럼 화가 났던 거야. 조비는 걸핏하면 제 안의 열등감을 남에게 덧씌우고 그게 진실이라 믿는 놈이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말이 아주 틀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건데… 여태 기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무심코 잊었어. 호봉이 그런 생각에 잠긴 채 담배 한 대를 태우는 동안 조비는 우두커니 서서 그 불씨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평소라면 뭐라고 했을까. 몸에 안 좋다고 잔소리를 했을까. 아냐, 궐련 정도는 조조도 가끔 입에 댄다고 했으니. 그럼 쓸데없이 기다리게 한다면서 짜증을 냈을지도. 아니면 의외로 지금처럼 조용히 기다렸을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분명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장난을 쳤을 테지. 연기를 얼굴에 뱉었다가 기어이 멱살이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장난이라도 쳐보는 건데. 호봉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마지막 날숨을 길게 내쉬고 짤막해진 꽁초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리고 거의 다 죽은 불씨를 발끝으로 비벼 껐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발을 떼지 않은 채 호봉은 입을 열었다.

 

이기지 못한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지.

…….

오히려 어디로든 가야 하지. 지고도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시체나 진배없지…….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 조비는 미련 남은 침묵과 눈빛으로 마지못해 긍정하고, 그러면 호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그가 틀리고 내가 맞았기 때문에.

 

*

 

아니면 다 죽여버려도 좋지. 그게 우리의 방식이니까. 노골적인 말을 입에 올리면 조비는 호봉을 노려본다. 듣는 귀가 많은 탓이다. 호봉은 조비가 눈살을 찌푸릴 때면 기분이 좋다. 과장된 손짓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면 그의 시선은 못 미더운 기색을 남기고 떠나간다. 이윽고 두 사람은 멀지 않은 복도에서 헤어진다.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아도 좋다. 내일도 등을 맞대야 할 테니까. 그리고 내일모레도. 어쩌면 생과 사를 달리할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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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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