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etite mort
1강. 쾌락의 불가능
쾌락은 단독적이다. 이는 주관적이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불가하느냐, 그것은 소통이다. 소통은 언어를 통해 가능하고 쾌락의 언어는 바로 욕망이다.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어휘가 다르다면 소통이 불가하다. 화자와 청자의 언어가 달라도 마찬가지로 소통이 불가하다. 들으려하지 않고, 말하려 하지 않아도 소통이 불가하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해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에 듣지 않는 자에게 욕망하고, 그것을 통해 쾌락을 얻는 것 또한 가능하다. 대답하지 않는 몸에 계속해 말을 거는 행위로서 쾌락은 충족된다.
2강. 동물<인간<신
언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행동의 대상은 무엇인가? 화자와 청자의 위계는 주체와 객체의 그것과 같다. 욕망하는 자는 작품을 매개로 쾌락이라는 성취를 이뤄낸다. 그렇다면 욕망당하는 객체는 인간에서 사물의 위계로 시선이 닿는 순간 강등된다. 신 밑의 인간. 인간 밑의 동물. 세상의 옴파로스에 해당하는 인간을 옛 그리스 철학에선 도덕적 행위로 초월해 신이 된 영웅이나, 에피쿠로스적 탐닉으로 동물이 된 죄인의 구도로 설명했다. 그러나 바티유 철학에선 필연적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을 초월, 그에 소비되는 것을 동물화로 보았다.
3강. 금기가 초래한 위반, 신성
사물이 된 인간의 앞에서 느끼는 신성, 그것이 바로 에로티즘이다. 사디즘과 카니발리즘, 그로테스크로 표방되는 이른바 '동물성'을 마주할 때 인간은 인간성을 초월해 신성을 느낀다. 그 신성의 쾌락은 1차원적인 육체적 유희가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초월의 감각을 말한다. 타인을 동물화하거나 도발적인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욕구는 금기로부터 기인한다. 금기는 반드시 위반을 초래한다. 과격함을 올바르게 해소하는 유일한 창구는 창작 활동이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며, 선뜻 자신을 연소하는 행위이다. 욕망의 크기가 개인의 크기를 결정할테니, 부디 과격하게 욕망하라.
4강. 스스로 해보기
죽음을 모르고 쾌감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니 쾌감의 순간 죽음은 부재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함으로 죽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을 느껴라. 그 권능과 공포를 초월하는 우월함이 신성이다. 그러니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을 목격한 자는 그것을 경험하기도 쉽다. 잠같은 죽음에 빠지는 것과 몰아 넣는 것은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니 잠든 이에게 '즐겁냐' 묻을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부활이 예정된 죽음을 경험하는 것으로 선을 넘었다. 그 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으며 감히 그 쾌감을 방해하지 말자. 스스로 죽음을 극복하기를 기다리며, 주관적인 쾌락을 탐구하라. 쾌락은 완벽하게 단독적이다.
Gustav Klimt, Danae, 1907.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당신의 말을 들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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