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歌故
호봉 시가고 로그
詩 歌 故
사연이 담긴 시와 노래… 줄여서 시 가 고
어디 출신?
청주 시골
부모님은?
나도 몰라
죽었는가?
그랬겠지…
허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기주로 떠났지…
*
나 씨와 호봉은 술병과 잔을 사이에 둔 채 대면하여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낮 시장가를 돌아다닐 때에 슬그머니 접근한 나 씨가 동탁을 죽인 이야기를 해달라며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자기도 모르게 술을 사주면 말해주겠다고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건 산 것이지 거기에 특별한 영웅담이랄게 있던가? 특히나 제 업적이라는 것은 사실상 요행에 지나지 않았던가? 알면서도, 아이씨, 기분이다… 말해주마…! 그렇게 말한 건 공짜 술을 얻어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봉이 자리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연거푸 술을 들이켜고 음식을 입에 밀어넣는 동안 나 씨는 자신이 투자한 이 모든 술값이 행여나 수포로 돌아갈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봉은 나 씨에게 진실을 일찍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요리로 말하자면 생선살은 부드럽고 육고기는 쫄깃하며 냉채의 톡 쏘는 겨자 맛 뒤에 고량주를 왈칵 입 안에 털어 넣으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아무튼 대단히 맛있는 식사였으며… 한동안 그렇게 똥 마려운 개마냥 들썩거리는 나 씨를 앞에 두고 식사를 양껏 즐긴 호봉은 마침내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지.
나 씨가 잽싸게 수첩과 붓*을 꺼내들었다.
예, 예.
…동탁을 죽였단 말이지.
예에.
근데 정말 어쩌다 그랬단 말이지. 마지막 4판 30부짜리를 한 발 날리고 보니 동탁의 목이 툭 데구르르…
어쩌다가… 4… 판… 잠깐만, 만관도 아니고 4판 30부?
응.
…그리고요?
끝인데. 죽었잖아.
호봉이 떠드는 내용을 열심히 받아적던 나 씨의 필기 소리가 맥없이 끊겼다. 호봉은 나 씨가 할 말을 고르는 동안 술병을 탈탈 털어 마셨다. 나 씨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수첩을 노려만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극적인 상황은 없었소? 수세에 몰렸다든가,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든가…….
몰라. 난 화료했고, 동탁은 쓰러졌고, 사람들은 동탁의 시체에다 불을 붙이고 감자를 구워 먹었다. 끝.
나 씨가 이런 이야기를 기대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아니까 등쳐먹으려고 온 거다. 그리고 진짜로 할 말이 없는 걸 어떡해. 어깨를 으쓱인 호봉은 냉채를 한 입 더 집어 먹었다. 나 씨가 금방이라도 실망한 얼굴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속여온 사람들은 으레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까. 호봉의 계획은 나 씨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거짓말한 적은 없다며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 씨는 예상과 달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첩을 들여다보기만 할 뿐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다. 호봉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의 수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봉의 자리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붓끝으로 턱을 툭툭 건드리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나 씨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흐음.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 뭔가 더 있으면 좋겠는데.
이대로도 좋다? 근데 뭐가 더 있어야 한다고?
쌓아 올린다고 해야 할까, 이야기에는 ‘단계’가 필요한데 지금 작사 나리의 이야기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구려.
그의 모호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봉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나 씨가 수첩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중앙에 있는 ‘동탁’ 글자를 가리켰다.
조조의 장수가 동탁의 목을 쳤다, 이 알맹이는 좋소.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책을 써낼 수가 없다오. 사람들이 읽게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아하, 좀 과장이 필요하다는 소리군. 흐흐흐… 만관 세 번 보다 역만 한 번이 더 낫다 이거냐?
음… 사실, 그게 꼭 그렇지도 않소. 요지는 아무리 좋은 패여도 중구난방으로 놓았을 때보다 가지런히 정렬해 놓았을 때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라는 거요.
흥…….
아니면… 아예 아주 처음부터 이야기해주는 건 어떻소? 더하고 빼는 건 내 전문이니 내가 나중에 가감하리다.
과감한 제안이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호봉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 씨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저놈은 미끼를 던졌고, 내가 방금 막 그걸 물었다. 낚싯밥만 쏙 빼먹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밥도 적당히 얻어먹었겠다, 술 몇 병 더 얻어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씨와 빤히 눈을 마주치며 머리를 굴리던 호봉은 곧 못 이기듯 늘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생각을 좀 해보자고. 그런데 내가 술 없이는 영 옛날이야기가 안 나와서…….
그러자 나 씨가 곧장 손을 들어 주인장에게 술 두 병을 더 주문하였다. 과연, 전국을 떠돌았다더니 눈치도 수준급이로구나. 호봉은 히죽 웃으며 반쯤 찬 술잔을 성급히 입에 가져다 댔다. 이 잔을 빨리 비워야 또 새 병을 열 수 있을 테니까.
*
내 고향은 어떠했던가. 소금기 묻은 해변의 바람은 때로 오의 기계마저 녹슬게 했고 나는 녹슨 부품들을 발로 차 떼어내며 놀았다. 기계 말의 발굽조차 온전치 못할 외계의 것과는 동떨어진 곳. 볼품없는 천막을 걸어놓은 시장에서는 겉보기와 달리 미지의 기술 하나 없이 스스로 돌아가는 기계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나는 그것이 작동하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
우웨엑…….
야, 야. 날 새도록 달린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게워 내는 거야…….
뒷골목에 웅크려 구토하는 나 씨의 등을 건성으로 두드리며 호봉은 또 하품을 했다. 제법 마셔서 그런가 기분도 좋고 잠도 솔솔 왔다.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완전히 맨 몸일 시절이 생각나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그때는 보이지 않는 눈이래도 두 눈이 모두 있었고, 팔다리도 지금에 비하면 허수아비처럼 가벼웠었다.
오늘 내 이야기 재밌었지?
엎드려 있던 나 씨가 헉헉거리며 입가를 닦았다.
예, 예에. 이제 확실히 잘 쓸 수 있을 것 같… 우우욱.
그래, 그래. 수수료 5할 떼주기로 한 거 잊지 말고.
하아… 그보다도 이름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주시지… 아주 멋들어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소.
뭐, 창?
그래요… 다른 것도 아니고 장수들이 쓰는 무기니 단순명료하고 좋소. 그런 것도 독자를 매료시키는 장치 중 하나요…….
나 선생이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글 팔아 밥 먹는 글쟁이의 말이니 믿으셔도 좋소이다. 호봉은 생각한다. 사실 이름 같은 건 한 줄 정도만 남아도 좋은데. 사실은 조조의 장수 정도로만 남아도… 아니, 실은 그마저도 남지 않아도 좋다. 나 씨를 부축해 나오면서는 분위기에 취해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던 참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외계 기술 하나 없는 시골에서 출세해서 조조의 장수가 되었다는 것도 가산점이요. 그런 이야기라면 분명 많이들 좋아할 테니까…….
흐흐… 그래? 근데 엄밀히 말하면 출세가 아니라 상경이지. 그리고 장수는 부담스러워. 졸개인 편이 좋다고.
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읽…….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나 씨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기껏 큰돈 들여 먹은 비싼 술이니 음식이니 죄다 하나가 되어 뒷골목 바닥에 쏟아지는 걸 보면서 호봉은 다른 생각보다도, 정말이지 이 사람은 돈 아까운 줄을 모르는구나…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이었다.
*
후에 나 선생은 취중에 수첩을 잃어버린 건 물론이요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창’이 대관절 누구의 창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하게 되고… 호봉은 죽을 때까지도 제 이야기가 생판 남의 이름으로 잘못 쓰였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 오의 가공할 기술력으로 외계 기술 없이 만들어낸 자동으로 먹이 나오는 필.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볼펜이라고 부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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