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전기양의 꿈 中

白夜 by 極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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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순간 사고회로가 현실감각에 제대로 따라붙지 않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청려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달랐다. 말간 얼굴로 언제나 은은하게 웃는 청려는 그 낯에 거슬릴만한 부분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안드로이드라는 실감이 들곤 했다. 반면 눈앞의 얼굴은 불쾌감을 담아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건…. 류건우의 안에서 퍼뜩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인간. 그리고 잠시 파업을 일으켰던 뇌가 조각난 퍼즐을 바삐 이어붙이자 어렵지 않게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청려를 만드는 데 쓰인 바이오맵의 제공자. 원본. 물어볼 것도 없이 두 눈만 달렸다면 뻔히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일진대 그에 수용이 늘 뒤따르는 것은 아닌 법이었다. 류건우는 마치 똑같이 생긴 사람 둘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가벼운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청려가 제 입으로 자신이 특별제작 개체라 말했다곤 하나 결국 그는 안드로이드이므로, 그 자신조차 모르는 같은 얼굴의 기기들이 더 존재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류건우는 안드로이드 업계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 특별제작이라는 게 VIP 상대로만 제공되었다던가 하는 의미일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류건우는 복수의 청려의 존재를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어쩌면 이곳 센트럴까지 오는 여정에서 청려가 믿음이니 하는 따위 이야기를 입에 담은 탓인지도 모른다. 류건우의 실제 신분은 행방불명자 혹은 도주 중인 흉악범일 뿐이었으며, 그 결백을 믿는 것은 제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류건우를 포함해도 세상에 셋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류건우가 혼란 속에서 가벼운 쇼크마저 일으킬 기세인 것은 아랑곳 않고, ‘청려와 똑같은 얼굴의 인간’은 가볍게 주무르듯 매만지던 제 손목을 들어 정제된 인공 태양빛 아래 이리저리 살폈다. 희고 마른 손목에 벌겋게 남은 손자국은 별로 희석되지 않은 듯했다. 첫 보아도 후에 제법 멍이 오르겠다 싶었다. 류건우 쪽으로는 눈길도 두지 않은 상대가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누구신지?”

가픈 숨이 완전히 가라앉았는지 그 물음은 처음의 것보다 훨씬 차분하게 들려 어쩐히 류건우를 기죽게 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해서….”

류건우는 완전히 납작 엎드린 기색으로 대답했다. 어찌되었건 이 상황은 그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그 자신의 착각으로 인한 불상사일뿐 아니라 제 위장 중인 신분,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셈인 청려에 대한 걱정까지 모두 섞여 초조했다.

“아, 착각.”

높낮이가 거세된 단조로운 지적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청려가 살살 놀리듯 긁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불쾌감이었다. 훨씬 여유롭고 거만하며, 이미 사실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움. 아마 착각일 테다. 그럼에도 본능적인 불쾌함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손을 내리고 류건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류건우는 새삼 똑같이 생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을 돌려버렸다.

“뭐랑 착각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당신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 라고 답할 수는 없기에 류건우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상대가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불쾌한 감시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볼까. 경보음 듣고 왜 도망쳤어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류건우는 제 멍청한 반사적 반응을 욕했다. 청려를 닮은 미색의 입꼬리가 좌우로 슬쩍 당겨올라갔다. 아무래도 상대는 저를 추적해온 게 맞는 듯했다. 그리고 류건우는 하필이면 그런 상대를 제 손으로 끌고온 모양이었다. 역시 운 하나는 끝내주게 나쁜 인생이었다. 아까 그 경보는 오류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지. 어느 방향으로 달아나야 하나. 쫓아오려나. 이런저런 가능성을 빠르게 검토하던 류건우는 상대를 슬쩍 가늠해보았다. 그새 퍼렇게 멍이 오르기 시작하는 손목, 청려와 꼭닮은 신체는 빈말로도 체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상대가 쫓아오더라도 떨쳐내거나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의 기민한 움직임을 느꼈는지 상대가 가만히 웃었다.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경보는 제가 울린 거예요. 당연히 센터에는 오작동이라고 말해뒀고, 덧붙여 저는 경찰도 군인도 아니고요.”

말끔한 얼굴부터 발끝까지를 한 번 훑은 류건우는 속으로만 동의했다. 청려를 처음 봤을 때 주고받았던 시답잖은 문답과 비슷한 것이었다. 전투형? 그렇게 보여요?

“그러면 그쪽은 누구십니까.”

여전히 긴장은 풀지 않은 물음이었다. 상대가 저를 체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것은 알았으나, 경보를 울린 것 또한 그였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의심을 풀 수 없었다.

아아, 홀로 뭔가를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인 상대가 제 가운 안쪽을 뒤적이더니 파란 끈이 돌돌 말린 아이디 카드를 꺼냈다. 카드 표면을 감싼 끈이 힘없이 툭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요즘 세상에 단말기를 두고서 굳이? 류건우의 눈썹이 의아함에 살짝 꿈틀거렸으나 상대는 아랑곳 않고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카드 표면에 박제된 얼굴과 그 아래의 이름이며 소속을 읽었다. 신재현, 센트럴 제2타워 인공지능관리소장.

“이상한 사람 아니죠?”

충분히 이상해 보였으나 그의 기준으로는 그저 신원 확인만 가능하면 그만인 모양이었다. 기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대 사회인공지능 망에 탑재되고 관리되는 개인 신원정보들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에 이상하지는 않았으나 류건우는 왠지 모를 떨떠름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싸늘하고 음침함이 깔린 기색은 간데없고 갑자기 의기양양하게 굴어온 탓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제 내 쪽이 물어볼 차례네요?”

신재현은 웃으며 부드럽게 재촉했다. 류건우는 어쩔 수 없이 찜찜함을 안은 채 제 단말기를 보이기 위해 다가섰다.

차례대로 3구와 2구를 통과해 중앙에 들어올 때도, 센트럴 타워에 들어갔을 때도 매번 신원 검사기에 태연히 박문대의 단말기를 이용해왔다. 그럼에도 신재현의 앞으로 제 단말기를 내밀어 신분증명을 띄우는 일이 어쩐지 긴장되었다. 그가 단순히 센서 달린 검열기기가 아니라 인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류건우는 여태 다른 사람에게 제 단말기를 보일 일도, 다른 사람의 것을 볼 일도 없었다. 간단한 조작 끝에 떠오른 화면 속에는 박문대의 사진과 이름이 출력되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신재현의 고개가 미묘하게 기울었다. 마치 청려를 떠오르게 하는 낯익은 동작에 멈칫한 것도 잠시, 띄워진 단말기의 신원 화면을 본 류건우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기계에다 하는 단순 확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모자까지 벗어던진 지금 두 눈이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화면 속 박문대의 얼굴과 류건우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누군가에게 단말을 보일 일이 전무했던 탓에 벌어진 방심의 결과였다. 류건우는 제 어이없는 실책을 믿을 수 없었다. 왜 외관을 꽁꽁 숨기며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던가. 제 신원 문제를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신재현은 제 단말기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플라스틱 사원증을 슬쩍 보여주며 읽은 것뿐이었다. 신재현이 단말기를 보여달라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류건우의 차례라고 넌지시 말했을 뿐이었다. 그 모호한 요구에 순순히 단말기를 내민 것은 류건우 자신이었다. 이쯤 되니 류건우의 안에서 잠재워졌던 의심이 다시 불쑥 고개를 처들었다. 이 정도로 교묘하게 구는데 정말로 저를 노리고 온 게 아니라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류건우는 간신히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고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박문대의 신원을 내민 낯선 얼굴이 탈옥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단말기를 탈취해 이용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범죄행위이기는 하나, 정치사범과 좀도둑은 그 대우와 처벌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신재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박문대의 신분증명 화면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듯 별다른 언동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 자신의 주장대로 신재현이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면 신분증명과 실제 인물이 불일치하는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인공지능과 그에 의한 정보 제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으니까. 신재현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사이, 류건우는 속으로 박문대가 제 조카이니 하는 황당한 변명을 내밀어 볼 생각까지 해보았다.

불편할 정도의 긴 침묵 끝에 신재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류건우의 귓가에 앗, 하는 짧은 탄성이 들렸다. 어쩐지 익숙한 그 목소리는 눈앞의 신재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류건우와 신재현의 고개가 동시에 옆으로 돌아가고, 안드로이드 하나와 인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청려가 놀란 소리를 내뱉은 것은 아마 바이오맵 제공자와 마주친 탓이리라. 류건우는 이 예기치 못한 만남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류건우는 순간적으로 청려가 달아나길 바랐다. 신재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면서도 그랬다. 아니, 은연 중에는 어렴풋이 알아챘기에 도망가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의 짧은 대화에 불과했으나 싸늘하고 종잡을 수 없는 위험함이 느껴지는 신재현이 청려를 평화롭게 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간 같이 지낸 터라 생각이 통하긴 한 것인지 입력된 본능인지, 혹은 안드로이드도 신재현의 위험성을 느끼고 만 것인지, 청려는 곧바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류건우는 저보다 훨씬 재빠른 안드로이드의 상황 판단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켜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신재현이 그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본 류건우는 씨발, 한 마디를 뱉고는 곧바로 둘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우스꽝스러운 추격극의 2차 막이 올랐다. 상식대로라면 도망치는 안드로이드를 인간 둘이서 따라잡는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안드로이드건 범죄자건 상관없이 달아나는 상대를 사냥하는 것은 전용 전투형 안드로이드거나 최소한 강화 신체나 슈트를 가진 보안부 요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달아나는 안드로이드는 신체능력이라곤 일반인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인간 둘은 연약한 사무직과 허약한 탈옥범.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처참한 꼴이었다.

그 나름 처절한 추격 끝에 신재현은 마침내 청려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류건우의 마음이 조급해지려는 차에 신재현은 심지어 청려를 붙잡기 위해 몸을 내던지기까지 했다! 몸을 날리는 행위까지 마다하지 않은 덕인지 신재현은 결국 안드로이드를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는 지체 없이 바닥에 높인 까만 뒤통수에 제 단말기를 들이밀었다. 망설임 없는 손가락이 몇 가지 조작을 채 끝내기 전, 가까스로 그들을 따라잡은 류건우 역시 몸을 날리다시피 해 그를 방해했다. 씨근대는 숨이 거칠었다.

“씨발, 뭔데…!”

“그쪽이 주인이에요? 아니잖아.”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이는 신재현은 싸늘하게 대꾸한 뒤 다시 단말기를 들이밀었으나 또다시 제지당했다. 그는 짜증이 역력한 눈으로 류건우를 노려보았다. 주인이냐고? 당연히 합법적으로 등록된 주인은 아니다. 심지어 원 주인의 행방이나 생사도 모른다. 청려는 말이 많았지만 제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았으므로 류건우는 그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8구 내 무너진 잔해에 파묻혀 있었으니 죽었겠거니. 그러면 소유자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로이드의 소유는 어떻게 따지는 걸까. 아니, 애초 류건우는 청려를 비롯해 어떤 안드로이드도 소지할 생각이 없었다. 청려는 그저 우연히 발견했고 제멋대로 따라온 것뿐이었으며 애매한 기간 동안 잠깐 같이 지낸 것에 불과했다. 그렇대도 영문도 모른 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냥 덜컥 넘기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그쪽 나랑 대화 중이었잖아? 왜 그러는 건지 이유나 좀 알자고…!”

잠시간 제법 선득한 눈을 빛내던 신재현은 짧은 한숨을 뱉더니 순순히 일어섰다. 어쩌면 상대가 순순히 물러날 인물이 아님을 짐작했기에 한 발 물러선 것일지도 몰랐다. 일어서며 긴장했던 근육이 풀리기라도 한듯 잠시 휘청인 신재현은 이내 반듯이 서서 숨을 고르듯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와 달리 바닥에 엎어진 채인 청려는 미동도 없는 상태였다. 흘끗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류건우를 향한 신재현의 시선이 제법 삐딱했다.

“안드로이드 걱정을 다 하네. 고철덩어리일 뿐인데.”

사실일진대 그런 식으로 말해선 누구에게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니, 잠시 생각해보아도 청려의 등장 이전까지는 조금 묘하긴 해도 반듯한 선을 지키던 남자가 갑자기 비아냥대듯 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를 남자는 무심한 시선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제 등신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상대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 해도, 지나치게 냉정한 시선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다소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가 말했듯 그저 고철덩어리를 보는 듯했다.

“방금 처음 본 사람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어서요.”

류건우는 괜스레 반발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AI를 제법 신뢰하나 봐요?”

AI를 믿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른 세상에서 신재현은 제법 괴상한 질문을 했다. 기껏해야 반AI 종교단체와 반정부 단체 정도만이 인간에게 축복을 안긴 신의 기술을 혐오하고 있을 테다. 지루한 4섹터에서 주워들은 바로는 그 반정부 단체조차 일부 기술은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 자연생활회귀를 지향하는 종교계와 달리 테러나 항의의사를 전달하려면 일단 폭탄이든 통신수단이든 뭔가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어쩌면 신재현은 신분증과 다른 얼굴을 한 류건우를 그런 반AI파 인간이라 짐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류건우는 AI에 대해 유감도 호감도 딱히 없었으나 굳이 나서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AI를 믿고 말고 논할 수나 있습니까, 요즘 세상에.”

“난 안 믿어요.”

류건우는 싸늘한 대답에 저도 모르게 청려에게서 시선을 떼고 신재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사람 아까 자기가 인공지능연구소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의아한 류건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재현은 무언가를 비웃듯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시선은 청려를 향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그가 눈앞의 존재를 거슬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살짝 가늘어졌던 눈이 두어번 깜빡이더니 이내 처음 보았던 은은한 미소가 덧씌워진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이유를 물었죠? 보면 알겠지만 전 이 안드로이드에 쓰인 바이오맵 제공자예요. 그리고….”

신재현의 눈길이 아래로 향하자 류건우의 시선도 덩달아 그를 따랐다. 여전히 미동 않는 작은 머리가 보였다.

“이건 불법으로 만들어진 거고.”

무감한 시선은 아까 전 AI에 대한 신뢰를 입에 담을 때만큼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 혐오의 연장선이 엿보였다.

“이제 답이 되었나요? 관리소장으로서 그냥 넘기면 안되는 사안이라는 것도 이해되셨겠고.”

제 할 말을 끝낸 신재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청려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움직이지 않는터라 억지로 제압하거나 서두 필요는 없어졌는지 근처에 얌전히 쭈그리고 앉으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도로 일으킨 것은 성큼 다가온 류건우였다.

“고작 불법 안드로이드 하나 회수하겠다고 소장이 직접 온다고?”

이미 멍이 든 손목을 잡힌 탓에 짧게 찌푸린 표정이 스쳤으나 이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약간의 당혹감과 그를 능가하는 분노였다.

“그것도 혼자?”

그 수상쩍음에 확신을 가지고 추궁하는 류건우를, 신재현은 똑바로 쳐다보며 비웃었다. 눌러참은 듯한 코웃음을 흘린 신재현은 결국 건조한 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류건우의 당황은 신경 쓰지 않고 혼자 미친 놈처럼 실컷 웃은 신재현이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내뱉었다.

“류건우 씨, 안 그렇게 생겨선 남 일에 관심이 많네요?”

충격으로 굳은 류건우의 손에서 제 손을 떨쳐낸 신재현이 덧붙였다. 류건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굳었다. 가장 처음 의심했던 사안이 역시 맞았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박문대가 아닌 류건우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따라온 신재현의 진짜 목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지껏 저를 대하는 태도나 신재현이 보이는 행동을 봐선 그 관심은 류건우가 아닌 청려에게 향한 것 같았으나, 상대가 워낙 수상쩍은 탓에 섣불리 확신하기 어려웠다. 또 언제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꿀지 모르는 일이었다. 류건우가 갖은 생각의 허용돌이에 허우적대는 사이 다시 청려에게 단말기를 갖다 댄 신재현은 아까 제지당했던 동작을 마저 시행하기 시작했다. 충격에 빠져 얌전해진 류건우의 작태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신재현이 조잘댔다.

“사실 센트럴 타워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분석을 좀 했어요. 원래부터 이 안드로이드를 찾고 있었는데 딱 오늘에서야 레이더에 걸렸지. 거긴 완전히 내 영역이나 마찬가지라 제정신이면 이걸 끌고 다시 내 앞에 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랑 같이 있길래 아무래도 조사를 좀 했죠.”

흰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제 단말기를 조작하고, 안드로이드의 뒷목을 까뒤집어 열었다.

“이래 봬도 제가 제법 높은 직급이라. 모르는 사람이 나 끌고 가는데 얌전히 따라갔겠어요? 물론 이렇게 격한 운동을 하게 될 줄은 몰라서 좀 힘들긴 하네요.”

인공지능연구소장이라 한 말이 무색하지 않게 얼핏 복잡함을 넘어 난잡하게까지 보이는 속을 헤집어 만지작거리는 행동이 능숙하고 익숙해보였다. 류건우는 뒤늦게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체 무슨 조작을 하길래 보통 사람은 건드릴 일도 없는 내부까지 열어 뒤지는 거지? 그러자 신재현은 마치 결백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슬며시 들어보였다. 그러면서 천천히 일어나 물러나는 동작이 제법 가증스러웠다. 류건우는 제가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따지듯 뭔가를 물으려던 차, 내내 죽은 듯 엎어져 미동도 않던 청려가 소리도 없이 스륵 다시 일어났다. 거칠게 제압당했던 탓에 인간이었더라면 얼굴이 제법 쓸리고 상처 입었겠지만 안드로이드의 강력한 인조 피부는 말끔했다. 류건우는 순간 걱정을 했다가, 드러난 말끔한 얼굴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청려를 발견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람인줄로만 알고 터지고 찢어져 엉망이 되었으리라 예상했던 다리, 그리고 그것이 흙먼지가 묻은 것 말고는 흠 하나 없이 말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장면. 신재현은 손수 벗겨진 청려의 재킷 후드를 다시 씌우더니 최대한 그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끔 꼼꼼히 매무새를 만졌다. 지나칠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 조임끈을 꽉 졸라맨 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신재현이 걸음을 옮기자 언제 도망치기라도 했냐는 듯 청려가 얌전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진 류건우는 청려를 지나쳐 신재현의 옆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뭘한 겁니까?”

“별거 아니에요. 입 좀 다물게 하고, 생각 좀 못하게 하고, 말 잘 듣게 하고.”

기껏 탑재된 강인공지능을 강제로 약인공지능으로 저하시킨 신재현은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입에 담았다. 대개 강인공지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들이 스스로의 기술력을 자랑스레 여기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폭력적이며 잔혹한 처사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그랬다. 인공지능연구소장이라는 그의 직함을 생각하면 더욱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복잡한 기분의 류건우는 신재현으로부터 두 발짝 간격을 두고 가만히 따라오고 있는 뒤쪽의 청려를 돌아보았다. 그는 반듯하면서도 어딘가 다소 멍한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걷고 있었다. 그나마도 푹 눌러쓴 옷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왜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네요.”

“그쪽이 내 이름을 아니까.”

아하. 신재현의 입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나직한 감탄사는 매번 소름이 끼쳤다. 딱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것은 그저 적재적소이기에 내뱉는다는 인상에 가까웠다. 무감한 시선의 너머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청려를 상대할 때보다 배는 고역이었다.

“신고 안 할게요. 내 관할도 아니고.”

“뭘 믿고요?”

제법 가시 돋친 대화를 나누면서도 약간 빠른 속도로 걷는 걸음은 늦추어질 기색이 없었다. 신재현이 향하는 방향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센트럴 타워 쪽이었다. 신재현의 말로는 아까 울렸던 것은 가짜 경보인 데다 이미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은근한 긴장감이 류건우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지껏 신재현이 말을 이래저래 숨기거나 입장을 뒤집은 것을 떠올려보면 사실 이 모든 것 자체가 하나의 함정이었고 센트럴 타워에 다다르자마자 붙잡혀 이송되리란 상상도 그리 과한 것은 아닌 셈이었다.

“지금 저한테는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까딱인 신재현의 고개는 제 두 발자국 뒤의 얌전한 안드로이드를 향했다. 싱긋 웃은 신재현이 류건우를 지나쳐 센트럴 타워 입구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들어설 차였다. 류건우는 반사적으로 그 어깨를 콱 붙잡아 세웠다.

“못 믿겠는데.”

실제로 류건우가 쓴 것이 누명이건 무엇이건, 적어도 그 이름은 테러범의 이름이었다. 제가 강경하게 나가면 신재현도 인간인 이상 약간은 주춤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원치도 않았으며 실제 해당되지도 않는 흉악범의 지위를–이런걸 지위라 할 수 있을까– 써먹을 생각은 없었으나 신재현의 상대로는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닐 듯싶었다. 예상대로 약간 머뭇댄 신재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발 물러나기로 했는지 어깨를 짚은 거친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럼 저거랑 같이 기다려요. 난 차 키만 가져올 생각이니까.”

아니, 네가 들어가서 경비라도 끌고 나오면 어쩌라고? 기가 막힌 류건우가 반문하기도 전에, 청려에게 간단한 조작-아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리라-을 한 신재현은 서둘러 센트럴 타워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류건우가 다시 저를 붙잡고 협박이라도 할까 싶어 서두르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류건우는 혀를 찼다. 이래서야 아까 경보에 놀라 도망쳐 나와 상황을 살피던 꼴과 다를 게 없었다. 류건우는 초조함에 까딱이는 제 발끝을 의식적으로 꾹 눌러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가만히 곁에 선 청려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낙낙한 옷으로 덮인 몸뚱이를 보았다. 아무리 진짜 같은 AI가 탑재된 안드로이드래도 호흡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당연히 청려 역시 숨 쉬지 않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 문득 저와 똑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신재현이 떠올랐다. 청려와 똑같은 얼굴이지만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이므로 그는 숨이 차기도 했고 멍이 들기도 했다. 여태 청려가 너무 인간다운 언행을 해와서 잠시 잊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인간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치고 인간답다 생각하기는 했으나, 안드로이드와도 인간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은 류건우로서는 애초에 틀린 평가였을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그리 따지면 결국 류건우는 여전히 사람과 교류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셈이었다. 왠지 모를 착잡함이 그의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또다시 경보가 울리거나 무장경비가 출동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긴 듯 짧은 듯 가늠할 수 없는 시간 후에 홀로 건물을 빠져나온 신재현은 오른손 검지에 걸린 차 키를 달랑거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마치 제 말이 맞죠?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처럼 웃는 모양이 꽤 재수 없게 느껴졌다. 다가와 다시 청려의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신재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류건우에게 의외의 제안이 떨어졌다.

“같이 갈래요? 나 혼자 간대도 어차피 막아설 것 같고….”

그리고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라는 양 시퍼렇게 물든 손목을 류건우의 눈앞에 들어 보인다.

“더 이상 붙잡히면 일에 지장갈 것 같아서.”

07.

타워 옆을 빙 돌아간 신재현은 수많은 차량이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류건우와 청려는 얌전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위치상 직원 주차장인 듯싶었다. 그중 검은 차량 하나에 다가간 신재현은 조수석 앞에 서더니 류건우 쪽을 향해 돌아보곤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마치 이곳이 그의 자리라고 지정하는 것처럼. 신재현이 단말기에 연동되는 차량용 전자키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키를 가지러 다녀왔을 때부터 내심 짐작한 것이었지만, 차량은 그다지 최신식의 물건은 아닌 듯했다. 트렁크 역시 그 손에 들린 키를 이용해 연 신재현은 그 앞에 서서 트렁크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옆에 가만히 멈춰 선 청려를 눈 가늘게 뜨고 가늠하듯 쳐다보는 걸 보아 트렁크 안에 청려를 어떻게 구겨넣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접어 넣을 생각을 하다니. 스릴러 무비가 따로 없을 장면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을 마구 험하게 다루는 범죄 현장으로 인식되어도 할 말이 없을 테다. 류건우는 팔뚝에 돋은 작은 소름을 슥슥 문질러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간 고민하던 신재현은 결국 빈 트렁크를 도로 닫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기함할 만한 그 최초의 결정을 번복한 것은 곁에서 뜨악한 기색을 내비치는 류건우나 사회적 시선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적정한 각이 나오지 않겠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트렁크에 넣기엔 좀 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류건우는 똑똑히 듣고 말았다.

전체 구역을 횡단하는 열차를 타면 몇 시간 안에 가장 먼 8구에서 센트럴 코앞의 2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재현은 직접 차를 몰고 거기까지 갈 생각인 듯했다. 그가 물리적인 차 키를 가지고 다루는 꼴을 보면 심지어 이 구식 차량은 완전자동운행모드가 탑재되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신재현과 단둘이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기나긴 드라이브를 해야 한단 소린가? 류건우는 생각만 해도 현기증 날 것 같은 상상에 긴 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뒷좌석에 타면 안되려나.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뒷좌석에는 신재현의 손에 의해 고철덩어리로 하락해버린 청려가 있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로이드와 나란히 앉기 vs.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과 나란히 앉기. 류건우가 세기의 난제에 헤매는 사이 신재현은 청려를 뒷좌석에 다소 과격하게 쑤셔넣은 뒤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류건우는 숨을 삼키며 애초 제게 배정되었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골목을 지나 곧장 큰 도로를 탄 신재현은 예상했던 것처럼 핸들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목적지 설정만 하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자동주행을 보장하는 시대에 직접 머나먼 길을 돌아갈 생각이었다. AI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라는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이 운전에 집중을 한다면 대화를 그리 많이 나워야 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쇄된 공간을 공유하는 유일한 인간끼리의 대화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신재현은 이따금 핸들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마치 무슨 말을 꺼낼까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간은 침묵이 이어졌다. 몇 번인가 핸들 위를 톡톡 가볍게 두드린 검지손가락이 다시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신재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2구.”

류건우는 즉각 답했다. 물론 이는 엄밀히 거짓말은 아니다. 그는 2구를 통해 센트럴로 들어왔으므로. 하지만 일부러 멍청하게 구는 이 대답이 거짓은 아닐지언정 신재현이 원한 대답은 아니었을 터였다.

“질문을 바꿀까…. 저건 어디에서 주웠어요?”

신재현은 알량한 답 회피에 넘어가주지 않고 곧장 방향을 바꾸었다.

“…….”

신재현은 입을 다문 류건우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웃었다. 류건우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안드로이드에는 당연히 위치추적 기능이 탑재되어 있겠지. 당장 신재현이 차를 세우고 몇 가지 조작만 하면 금세 류건우와 청려가 거쳐온 여정따윈 낱낱이 드러날 테다. 류건우는 그런 기능 조작에 조예가 없었으나 신재현이 청려를 조작하는 바를 보면 그는 직함대로 인공기술을 다루는 데 능한 듯싶었다. 질문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청려를 주운 곳으로 가려는 모양이지…. 류건우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제법 아득하게 느껴지는 지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과연 어떤 우연이 청려와 누군지 모를 그 주인을 행정구역 끝자락 8구까지 데려와 무너지는 건물에 매몰시킨 뒤 류건우로 하여금 청려를 발견하게 했단 말인가. 우연에 우연이 거듭하면 필연이 되는 법이었다. 어쩌면 8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약간 이상한 안드로이드 하나와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었을까. 다만 어떤 소년과 했던 약속은 영영 잊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변덕처럼 청려를 줍기로 했기에 류건우의 기억은 불완전하나마 되살아날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악몽에 시달리며 불안에 떨며 달아나려 할 때마다 다정한 손길을, 한 잔의 물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사실 류건우는 잠에서 막 깨어난 시점에는 청려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곤 했다. 약간의 한탄이 담긴 숨을 내뱉은 류건우는 결심했다. 신재현이 강경하게 나가기 전 먼저 선수를 치자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습니까.”

“말해봐요.”

신재현이 내놓은 것이 마냥 긍정의 답이 아님을 깨달았으나 별수 없었다. 제법 조심성을 기하는 게 약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실종자 신고를 하나 할 수 있을까요.”

“누구?”

“단말기가 없는 사람.”

“아….”

청려는 알 듯 모를 듯한 탄성을 뱉더니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류건우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들어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조용히 움직이는 차는 이내 2구로 빠지는 길목 이정표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신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지나쳤다. 조금 망설이는 척도 않는 행보에 우습지도 않았다. 아무리 뻔한 거짓말이라 해도 손톱만큼도 진실일 가능성은 고려할 필요도 없다 이거지. 쭉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신재현은 오른손은 여전히 핸들에 둔 채 왼손으로 고민하는 것처럼 제 입술 부근을 슥 문질렀다.

“개인 식별 단말기는 필수인 거 알죠? 미소지나 타인의 단말기를 소지하는 게 불법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그거 없이는 어디 나다니지도 못하니까.”

정석적인 답을 내놓는 신재현의 의도는 의중을 떠보는 듯했다. 그는 은근히 류건우가 법을 어기고 있음을 암시했다. 수배범에다가 현재 진행형으로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중인 주제에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를. 류건우는 중앙에서 외면당한 구석진 골목에서 만난 소년을 떠올렸다. 그 역시 맨 처음 박문대의 사정을 들었을 때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요즘에 단말기 없이 어딜 갈 수 있다고 그걸 두고 나간 채 실종이란 말인가. 여태껏 같은 구역 내에서 발견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이미… 죽었겠거니.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테다. 개인 식별 단말기는 수족과 같았고 신분의 증명이자 존재의 증명이었다. 기기가 식별하여 통과시키지 못하는 인간은 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서 존재하는 한 개인이라 할 수 없었다. 류건우의 현재 상황과 상관 없이 그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상식이자 뿌리 박힌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뒤집어준 것은 신재현의 입으로부터 나온 제 진짜 이름이었다. 신분증과 얼굴이 다르다면 보통 사람의 생각의 한계로는 시술이라도 받았느냐 물을 것이다. 기껏해야 비인가 시술을 받았거나, 시술 후 신분증 사진 갱신 신청을 잊은 덜떨어진 인간으로나 보지 그 진위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단 소리였다. 말마따나 사람들에게 AI가 제공하고 유지하는 정보망은 절대적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걸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그리 행동함으로써 증명하고 있는 쪽은 신재현이었다. 류건우의 지나친 경계심과 상관없이 모든 식별기를 문제 없이 통과해 센트럴의 심장부인 타워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사회가 기본적으로 류건우를—박문대의 신분을 가진 류건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따로 분석하고 부러 따라온 것은 신재현이 아니던가.

“제가 류건우인 건 어떻게 알아본 겁니까.”

“…….”

이번에는 신재현 쪽에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류건우는 작은 소음조차 나지 않는 고급 차량–구식으로 운행될지언정 그것은 비싼 차였고, 류건우는 그러한 차량을 클래식 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에도 불편한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곤란하다는 듯 미약하게 눈썹께를 일그러뜨렸다가 눈을 가늘게 뜬 신재현은 마치 무언가를 계산하거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었다. 류건우와 공격하듯 간보듯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신중함을 내비쳤다. 덕분에 류건우는 푹신한 시트 위에서도 목이 뻣뻣해 그다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내 긴장을 깨듯 신재현이 가볍게 웃었다.

“류건우 씨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진실을 하나 알려줄게요.”

신재현은 말하는 내용과 달리 가볍게 농담하듯 말을 이었다.

“단순한 기계 식별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장소에는 최첨단 감식기가 달려있어요. 그리고 그 너머에는 인간이 존재하기도 하죠. 센트럴 타워를 예시로 들어볼까요. 그곳은 특히 사각지대 없이 모든 곳이 24시간 촬영되고 모든 송출 영상은 인공지능 망을 거쳐 걸러내진 후 내게 도달하도록 되어 있어요. 타워가 내 구역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었죠?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걸 알아낼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어요.”

신재현은 싱긋 웃으며 무시무시한 발언에 마침표를 추가했다.

“이 사회는 강박적이고 철저한 감시 통제 사회에요.”

결국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파놉티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었다. 류건우는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기살기로 13구를 탈출했나 싶었더니 거기나 여기나 실상은 다를 바가 없단다. 하지만 신재현이 제게 이런 진실을 알려주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얘길 저한테 알려주는 이유는 뭡니까?”

어쩌면 이 길 끝에 진실을 알게 된 이를 묻어버리기 위한 한적한 공터가 나올지도 모르지. 류건우는 스스로 자조적인 농담을 생각했다. 신재현은 생각도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것처럼 류건우 쪽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다시 도로로 시선을 돌리고는 살짝 웃었다.

“우리 앞으로 꽤 긴 길을 같이 가야할 것 같으니까 조금 친해져보자는 의미였어요. 적절한 정보공유, 신뢰를 위해선 필수적인 거겠죠?”

류건우는 신재현의 발언이 정보공유라기보다 사회의 추악한 진실 폭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중앙의 최고 기술권력자 스스로가 저리 말하니, 이 정도는 일개 시민이 알게 되더라도 별 탈이 없나 보다 싶었다. 어쩌면 류건우의 수배범이라는 입장에선 이 정보가 공포스럽게 다가와야 하는 것일테니 그를 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들어설 때는 누군가의 작은 왕국에 침입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다만 중앙에서 이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있듯이, 이 건은 따지자면 제가 직권 남용을 한 셈이니까. 어쨌든 원하는 게… 단말기 미소지 실종자 신고라고 했죠? 음…. 신고만 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실종자를 찾고 싶은 건가요?”

신재현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질문했다. 류건우는 잠시 고민했다. 박문대에게 약속했던 것은 단말기 없이 사라진 그 어머니의 실종자 신고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 미온적인 행동으로 괜찮은 걸까.

“단말기 미소지 실종자 신고라는 건 알다시피 원래 불가능한 거라 진전될 가능성도 없다는 것만 말해둘게요. 참고로 현행법상 단말기 미소지와 타인의 단말기 소지는 불법 행위이므로 발각시 즉각 체포 및 구금됩니다.”

신재현은 태연히 법 조항 읊듯 덧붙였다. 즉 단말기를 두고 사라진 박문대의 어머니의 실종 신고를 해낸다는 것은 그를 불법행위자이자 도망자로 규정하고 쫓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었다.

“찾아달라고 하면, 찾을 수는 있는 겁니까?”

류건우는 뒷목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꽉 막힌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색범위에 따라 시간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가능하다고 말해두죠. 직권 남용이겠지만.”

신재현은 대수롭잖은 일이라는 양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류건우는 허탈한 웃음을 따라 내뱉었다.

“원하는 것도 얻어냈겠다…, 이제 말해봐요. 저걸 어디서 주웠는지.”

신재현은 잊지 않고 다시 그가 원했던 본 주제로 돌아왔다. 류건우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좌석에 몸을 푹 파묻곤 대답했다.

“8구.”

대답을 하면서도, 류건우는 신재현이 왜 청려뿐 아니라 그를 주운 곳까지 운운하며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입으로 직권남용이니 어쩌니 곤란한 티를 내면서도 결국 교환조건을 수락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신뢰와 친밀감 운운하며 원한 적도 없었던 이런저런 진실까지 들이밀었다. 신재현은 내비게이션으로 제8구까지의 길을 체크했다. 상당히 먼 길이라 아무래도 하루 안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아니면 정말로 쉴 새 없이 밤을 새워 달리거나. 하지만 자동 운행이 아닌 인간이 모는 차량으로 그러기는 어려울 터였다. 신재현은… 무슨 생각인 걸까. 그가 자동운행기능을 선호하지 않는 거라면 고속횡단열차를 타면 될 일이다. 청려를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걸림돌이라면 어딘가 커다란 수트케이스에라도 구겨넣어 열차 짐으로 실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는 당초 청려를 구겨다가 차 트렁크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으니 그 정도는 별로 어렵지도 않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신재현이 굳이 이 길을 돌아 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류건우와 함께.

류건우는 슬쩍 뒤쪽에 얌전히 앉은 청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마 처음 뒷좌석에 실렸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았다. 신재현의 손에 의해 고철덩어리로 강제로 전락해버린 채. 그러고보니 신재현과 마주한 뒤로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으나 청려와는 헤어진 뒤로 두 번 다시 말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다시는 대화를 나누지 못할 테다. 아마 신재현은 청려를 폐기하거나 회수할 생각인 듯했다. 그것을 위해 어째서 발견장소까지 굳이 청려를 끌고 가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언행이나 직함을 생각해보면 불법개체를 멋대로 활동하도록 묵인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 차 안에 잔잔한 침묵이 내려앉자 류건우는 창틀에 기댄 팔에 고개를 얹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청려는 시한부나 마찬가지, 아니 이미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류건우가 청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가정용 안드로이드이며 불법제조개체라는 것뿐이었다. 우연히 잠시간 류건우의 옆에서 지냈으며, 바이오맵의 제공자는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무려 센트럴 타워 소장인 신재현. 그리고 그런 탓인지 청려는 중앙으로 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음에도 류건우를 따라와주기는 했다. 이리 놓고 보니 보잘것없는, 인연이랄 것도 뭣도 없는 얄팍한 관계일뿐이었다. 처음부터 말했듯이 그저 우연에 불과했던. 하지만 류건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자신만이 아는 사실을 하나,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다정한 구석이 있는, 그러나 조금 이상한 안드로이드. 룸미러로 청려의 모습을 훔쳐볼수록 심란해지기만 했다. 류건우는 억지로 눈을 감아버렸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결국 모든 것은 류건우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한 일인지도 모르는 법이었다.

08.

몇 시간을 달렸을까, 류건우는 문득 눈을 뜨고 뻐근한 고개를 돌리고서야 제가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렇게 긴장감이 없을수가. 이대로 신재현이 차를 몰고 중앙으로 되돌아가 류건우를 보안부에 넘겼더라도 몰랐을 테다. 다시 눈을 떴더니 옆자리에 정신 나간 놈들밖에 없는 지옥 같은 그 파놉티콘 속 바글바글한 방 한 칸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며 남은 수마의 잔흔이 싹 가셨다. 한기를 느끼며 창밖을 보자 해가 어둑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계절이 어떻더라. 류건우가 깨어나 찌푸리며 창밖을 계속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신재현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오후 7시에요. 계절은 가을이니 해가 질 즈음이죠.”

“인공 태양 빛은 한 계절 안에서는 일정하게 움직이는 겁니까?”

바로 옆에 전문가가 있는 김에 류건우는 내심 궁금했던 적 있는 부분을 물어보았다. 먼 과거에 절멸했다는 자연적인 대기층을 대신해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대기는 언제나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자연적인 태양빛이 인공대기 안을 골고루 비출 수 없었기에 태양빛은 또다시 인공기술을 이용해 정제하여 골고루 살포된다. 대신 인류는 이제 지나치게 더운 여름과 지나치게 추운 겨울을 잃고 언제나 적절하게 기분 좋은 자연의 산물을 즐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인공적인 것으로 바뀔 때, 여전히 저 우주 먼 곳에 떠 있는 태양으로부터 와닿는 온기는 인류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연적인 것’의 대표였다. 그것이 인공적으로 정제되어 거의 온실 속 인공 조명빛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공 태양빛 조절은 신원년新元年 이전 대기 데이터에서 뽑아낸 평균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8구 출신인 류건우 씨라면 알고 있겠지만, 구역마다 조금 차이가 생기기는 하죠….”

류건우는 여전히 찌르는 더위를 느낄 수 있는 8구 날씨를 떠올렸다. 인공 대기는 지나치게 자연 대기를 닮았다. 잃어버린 대기를 성공적으로 구현해낸 인공 대기는 그렇기에 군데군데 옅어지거나 뭉쳐지기도 했다. 인공 대기는 끊임없이 관리를 필요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히 날씨는 통제를 벗어나 지나치게 더워지거나 추워지곤 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살기에 좀 더 고달파졌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기술은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천문학적인–정말로 범우주 시대가 되고부터는 이 비유가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비용이 들기 마련이었다. 동떨어지고 버려진 8구에 그 정도로 신경을 써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이 좀 깼으면 이제 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신재현은 제 피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코 근처 눈앞머리를 살살 문질러보였다. 순간 류건우는 신재현이 제게 운전대를 넘기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요즘 누가 직접 장시간 운전을 할 줄 안다고? 심지어 나는 수배범인데? 류건우가 숨기지 못한 당황스러움을 내비칠 때마다 어쩐지 즐거워보이는 신재현은 걱정말라 웃으며 핸들을 꺾어 큰 길에서 벗어났다.

신재현이 시동을 끈 것은 작은 건물 앞에 도착하고서였다. 류건우가 잠든 사이 미리 찾아두기라도 했는지 여기까지 오는 길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역시 하룻밤 묵고 가는 거였나…. 냅다 운전대를 잡으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결국 이렇게 된 것이 유감인지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신재현은 기지개를 켜곤 류건우가 내리자마자 차 문을 잠가버렸다. 청려는 차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 채였다. 두고 가는 건가? 류건우의 눈길이 머뭇대듯 뒷좌석 쪽으로 향한 것을 본 신재현이 소리없는 물음에 대답했다.

“굳이 가져 갈 필요는 없죠?”

완전 짐 취급이구만…. 약간의 씁쓸함을 눌러 삼킨 류건우는 조용히 신재현의 뒤를 따랐다.

대개의 작은 숙박소가 그렇듯 무인기기만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중앙의 화려한 고급 호텔은 지금도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것은 첨단기기보다 사람이 뛰어나서라기보다 과시에 가까웠다. 혹은 과거의 어떤 향수를 거기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방은 하나로 괜찮나요? 아니면 따로 잡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요.”

신재현은 기기 패널에서 방을 고르다가 류건우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방을 쓰는 데 동의한다면 신재현이 비용을 치르겠지만 따로 자겠다면 굳이 비용까지 치러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류건우는 당연히 신재현과 같은 방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곧바로 제 방은 따로 잡겠노라 말하려던 류건우가 순간 멈칫했다. 비용 문제에 생각이 이른 탓이었다. 류건우 본인은 돈이라곤 한 푼도 없는 신세였다. 가진 단말기 안에는 돈이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박문대의 것이므로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가령 그를 찾으러 중앙으로 다시 오기 위한 열차 비용 같은 경우를 제외하곤 쓰지 않겠다 굳게 다짐한 바 있었다.

“상관 없어….”

수치를 무릅쓰고 얼버무린 대답에 신재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대로 제 단말기로 결제를 마친 뒤 발급된 전자 키코드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류건우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도로변 한적한 숙소라 그런지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직접 결제한 게 아니니 비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상당히 싼 값임에 틀림 없었다. 흰 가운을 벗어 행거에 건 신재현은 곧바로 하나뿐인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혹시 배가 고픈가요? 주변에 별 거 없고 자판기밖에 없기는 한데.”

“그러는 그쪽은?”

“전 원래 끼니를 자주 거르는 편이어서요.”

“저도 딱히 챙기는 편은 아니라.”

아마 연구소장인 신재현이 끼니를 거르는 생활을 하는 것과 류건우 자신이 악몽과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것은 제법 다른 이야기일 테지만, 어쨌든 류건우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신재현과 마주보고 밥까지 먹어야 한다는 상상만 해도 벌써 소화불량이 올 것 같았다. 애초 그의 말에 따르면 주변에 변변한 음식점도 없는 듯하지만.

“역시 잘 맞네요, 우리.”

신재현은 그 불량습관의 공통점이 뭐가 좋다고 웃어보였다. 류건우는 황당스러움에 속으로만 무슨 개소리야…, 하고 반박하고 말았다.

“일찍부터 출발할 거니까 잘 쉬어두는 게 좋아요.”

신재현은 그리 말한 뒤 신발을 벗어던지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하나뿐인 침대나 갈아입을 옷조차 없는 상황 따윈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류건우는 작은 방 안을 필사적으로 둘러보았다. 그럴싸한 소파라도 하나 있다면 거기에 구겨져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작은 방 안에 대체 뭐가 더 있겠는가…. 몸을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곤 작은 1인용 카우치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기에서 잠들었다간 다음날 무시무시한 근육통에 시달릴 게 뻔했다. 고민하며 우뚝 서있는 류건우에게, 벌써 졸음이 약간 묻어나 느릿한 말투로 신재현이 덧붙였다.

“외출복으로 침대에 눕는 거 신경 안 쓸테니까 괜찮아요….”

“그런 게 무슨…, 아니.”

당황으로 말을 더듬은 류건우는 제때 따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몸을 홱 돌리고 베개에 고개를 묻은 신재현은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잠들어버렸다. 얼떨떨하게 신재현이 누운 반대쪽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은 류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따지고보면 굳이 고집을 부려 불편할 게 뻔한 카우치로 가겠다 우기는 것도 우스웠다. 더 이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져 그냥 침대 끄트머리에 딱 붙어 누웠다. 물론 몸을 뉘였다 해도 신재현처럼 금세 잠이 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경우 긴 운전을 했으니 더 피곤한 탓도 있을 테고, 류건우는 오는 길에 잠들었기 때문에 그럴 터였다.

그러고보니 큰맘 먹고 중앙으로 향했는데 결국 다시 중앙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박문대와는 만나보지도 못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꼬였을까. 류건우의 기억은 군데군데 고장나있으므로 신재현과 얽히지 않고 중앙에 남아있었다 해도 박문대를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했으리라 장담하긴 어려웠다. 심약해보였던 그 소년이 어쩌면 그새에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고…. 어두운 방 안에 가만히 누워있자니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을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생각 끝에 잠들더라도 결국 악몽을 꿀 게 뻔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악몽을 꾸더라도 저를 맞아줄 다정한 손길 따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일으키고 물을 건네주던 존재는 전원이 꺼진 채 저 아래 주차된 차 안에 있으니까…. 생각할수록 우울하기만 하군, 류건우는 억지로 생각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하며 뒤척였다.

무척이나 큰 소리가 났다. 류건우는 익숙한 악몽이라 짐작했다. 등 뒤를 파고들듯 바짝 쫓아오는 열기와 총성, 귀청을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와 아우성…. 잔뜩 찌푸리고 인상을 쓴 류건우를 누군가가 살살 부드럽게 흔들었다. 류건우 씨, 류건우 씨. 일어나요. 청려의 목소리였다. 류건우는 그다지 깊은 악몽도 아닌데 구태여 깨우는 청려의 속단에 짜증이 일었다. 피곤함이 컸기에 이대로 다시 잠들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다정한 손길은 또한 무정하기도 해서 류건우가 멋대로 꿈 속으로 빠져들도록 두지 않는 법이었다….

“류건우 씨!”

큰 소리에 류건우는 눈을 떴다. 헉, 숨을 들이키자 금세 등이 땀에 젖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깨를 힘주어 꽉 붙들고 귓가에 소리치고 있는 것은 청려가 아니었다.

“무슨 꿈을 꾸길래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요? 뭐, 그건 됐고 빨리 신발 신고 옷 챙겨요.”

“뭐? 아니, 지금이 몇 신데 갑자기 이렇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자 창 너머는 칠흑같이 어두운 상태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신재현이 일찍 출발할 거라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각을 말한 것은 아닐 테다. 신재현은 잠시간 기다렸다가–채 일 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류건우를 강제로 일으켜 벗어둔 신발에 두 발을 안착시키곤 너저분한 재킷을 가져와 그 팔에 꿰어버렸다. 류건우는 황망함 속에서 신재현이 잡아끄는 대로 힘없이 딸려갔다. 센트럴 타워 가짜 경보 건 때 달아났던 모양새와는 반대였다. 문득 신재현이 그때의 복수를 하나 싶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싱거운 생각은 신재현이 권총을 꺼내 쥐었을 때 싹 가시고 말았다.

“침입자가 있어요.”

류건우는 지금 그 말에 충격을 받아야 하는지 난데없이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총기에 충격을 받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죽고 싶진 않겠죠?”

그럼 정신 차려요, 신재현은 부드럽게 일갈했다. 제 뺨을 한 대 쳐서 흔들리는 정신을 붙드는 류건우의 행동을, 신재현은 와중에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재현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둘 다 애초에 가져온 짐은 없었으므로 챙길 것조차 없었다.

“잠깐만, 대체 누가 누굴 노리고 왔다는 건데? 중앙이야?”

“내가 중앙 사람이란 걸 잊은 건 아니죠?”

신재현은 그 끝없는 의심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신재현이 덧붙였다.

“사실, 중앙에서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죠, 센트럴 타워 소장이라는 건….”

순간 류건우의 머리가 여태 게으름을 피운 것을 보충하기라도 번뜩 한 가지 그럴듯한 추측을 내놓았다. 중앙의 중요인물이 지금 경호도 뭣도 없이 한밤중 도로 변두리에 있다. 반정부단체에게 있어선 절호의 기회임에 틀림 없으리라….

“그럼 나는 상관없잖아?! 차라리 나는 그쪽 따라가지 않는 게…!”

탕! 골을 울릴 정도의 소음이 지척에서 일었다. 류건우는 알아채지도 못한 나선형 계단의 사각지대 아래 앉아있던 누군가가 신재현의 손에서 발포된 총알에 의해 꿰뚫려 고꾸라졌다. 마치 류건우의 항의를 끊어내는 듯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신재현은 지체없이 시체를 타고 넘으며 태연히 류건우의 주장에 대답했다.

“글쎄, 저쪽에게 류건우 씨는 정부 주요 인사와 같이 있던 인물 아니면 수배범, 둘 중 하나일 텐데요. 내 생각에 둘 중 어느 쪽도 류건우 씨가 무사히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진 않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현실 지적이었다. 류건우는 제가 죽인 것도 아닌 몸뚱이를 지나치며 소름끼쳐했다. 약간 우습고 기묘하기도 했다. 샌님 같은 흰 가운의 사무직은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쏴 죽이고 수배범 목록에 올라있는 누구는 죽은 사람을 보는 것만 해도 진저리를 친다. 그 뒤로도 신재현의 손에 들린 권총에서 두 번이나 총성이 더 울리고 나서야 둘은 일층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류건우는 긴장감에 축축해진 등이 밤바람에 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려면 역시 차를 타야하나, 류건우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애석하게도 그들이 타고 온 차가 앞유리가 깨진 채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뒷좌석에는 아직 청려가 들어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신재현이 굳이 청려를 챙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 안드로이드는 이대로 불타 사라지는 걸까…. 류건우가 경악하는 사이 신재현은 다시 로비로 들어가더니 이내 손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날이 새빨간 색인 도끼는 매우 흉흉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그것이 한 손에는 권총을 든, 흰 가운을 입은 살인자의 손에 들려 있다면 더더욱이나. 대체 왜 도끼를 가져온건가 류건우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신재현은 제가 타고 온 차 뒷좌석 문짝을 거칠게 내려쳤다. 충격에 힘없이 찌그러진 구형 차량 문짝을 뜯어낸 신재현은 청려를 난폭하게 끄잡아 내렸다. 짐짝 취급하기에 이대로 불타게 두는 것으로 처리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철컥, 어디선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신재현은 홱 고개를 돌리더니 들고 있던 손도끼를 소리 난 방향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류건우는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재현은 머리에 도끼 박힌 채 바닥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시체가 방금 문을 열고 나왔던 차량의 뒷좌석을 열어 청려를 구겨넣었다. 그러곤 운전석에 올라탔다. 류건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차 문이 닫기자마자 액셀을 콱 힘주어 밟은 신재현에 의해 차량이 덜컹이며 빠른 속도로 도로로 올라섰다.

눈을 부릅뜬 채 숨을 몰아쉬던 류건우의 머릿속에서 지난 십여 분간 휘몰아쳤던 일들이 다시금 스쳐지나갔다.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들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익숙한 건데!?”

거친 운전으로 흔들리는 차 안에서 류건우는 참아왔던 무언가를 토해내듯 소리쳤다.

“중앙에서 기술자로 사는 건 꽤 거친 법이죠.”

신재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전혀 답이 되지 못하는 말은 농담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게 그 답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진짜 개소리….”

류건우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지껄였고, 신재현이 그게 재미있는지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제가 이르게 출발하게 될 거라고 말했죠?”

“그 농담 좀….”

류건우는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제 아픈 이마를 힘주어 문질렀다.

“밤 드라이브 하는 셈 쳐요.”

“퍽이나….”

예민함이 남아 제법 날카롭게 나간 대꾸에도 신재현은 별로 타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오히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네요. 익숙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굳이 존대할 필요 없어요. 편하게 말해요.”

“속도 좀 낮춰.”

비록 먼저 존대를 종용한 적은 없었다 해도 편하게 대하라 말하자마자 곧바로 요구를 내뱉는 모습에는 껄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었을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이란 의미였지만, 하지만 신재현이 누구던가. 그는 얌전히 액셀 페달을 꾹 누르던 발에 힘을 조금씩 풀었다. 정신 없이 치솟던 계기판 빨간 바늘이 천천히 가운데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류건우는 그제야 비로소 몸에 힘을 풀고 탈력감과 함께 좌석에 파묻혔다. 신재현은 뭔가 답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류건우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좀 낫네….”

기운 없는 그는 그저 대강 대꾸하고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시야의 차단으로 이 혼돈의 상황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신재현은 반말은 허용해도 도주는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 완전 구식 차량이에요. 아무래도 반정부단체에서 이용하는 거니까, 단말기와는 어떤 상호작용도 안 되고요….”

신재현의 설명에 그제야 류건우는 차량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 눈에는 신재현이 몰던 것과 크게 다른 점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기껏해야 이쪽이 훨씬 사용감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류건우 스스로가 최첨단 기기와 인연 없이 살아온 것과 관계 없이 그 역시 현대사회 소생의 인간이었기에 구식 기기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도청이나 기록 남을 걱정 없이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환경이란 뜻이죠.”

신재현의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편히 기댔던 자세를 엉거주춤하게 똑바로 일으켰다. 문득 신재현이 이 사회가 강박적인 감시 통제 사회라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중앙이 마음 먹는다면 이미 신재현의 차 안에서 나눈 대화만으로도 중대범법자로 현행 체포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가… 더 있다는 말인가?

“같이 대화할까요, 류건우 씨?”

약간 기대에 찼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는 눈길에, 류건우는 작은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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