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After loss

白夜 by 極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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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도 글 재업(그에 따른 완결 시점 설정과의 차이 有)

언젠가 죽게 될 거라면 그 방법 정도는 고르고 싶다. 천천히, 그래서 두렵지 않게. 말끔하게, 그래서 추하지 않게. 신재현은 제가 생각하는 대상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바람에는 몇 번인가 실패와 추락이 뒤섞인 경험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탓이기도 했을까? 모를 일이다. 거기까지는, 정말로 신재현 본인조차 확답할 수 없는 부분이라 어디에도 입밖으로 내뱉은 바가 없었다. 다만 신재현은 제 그룹이 아주 천천히, 추하지 않은 꼴로 내려오길 간절히 바랐다.

신재현이 꿈꾸었던 가장 완만한 하락 곡선. 그 계획은 한 번 좌절되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는 그 자신조차 그에 대해 단념한 듯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단지 잊거나 잠시 묻어둔 것이었으리라. 결국 다른 방향으로 주도적 실행을 하기에 이르렀던 탓이었다.

박문대는 포털 가득 띄워진 비슷비슷한 제목의 기사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한 주제를 가지고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을 각종 커뮤니티와 SNS 등지를 잠시 상상해보았다.

근처에 와 앉은 신재현이 여상한 어조로 말을 붙여왔다.

“본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기사만 보려고요?”

고개를 들면 생긋 웃는 화제의 장본인이 있다. 말 그대로 제 살을 깎아 가장 화려하게 만든 브이틱을 제 손으로 안락사 시킨 사람. 박문대의 손 안에서 속보, VTIC 해체 선언 따위 글자를 희게 내뿜던 휴대전화 액정이 버튼 하나로 딸깍, 까맣게 죽었다.

죽기 전 반짝 생기가 돈다는 말처럼 근래 신인 마냥 미친 열정을 쏟아낸 브이틱은 넌지시 예고했던 바 대로 해당 시즌을 끝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관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왈가왈부 떠드는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으나, 박문대는 뭇 대중의 반응까지는 구태여 상상해보지 않았다. 신재현이 기틀을 잡고 레티에서 꼼꼼히 손보아 올려보냈을 입장문은 아마 크게 흠 잡을 데가 없으리라.

VTIC의, 청려의, 신재현의 은퇴. 처음부터 아득바득 높다란 저 위 목표로써 붙잡고 늘어지긴 했으나 영원히 눈 앞을 살랑이며 자리를 떠나줄 것 같지가 않았는데 어느샌가 이런 날도 오고 만다. 하지만 박문대는 청려가 은퇴를 위해 이토록 막판 스퍼트를 올렸음을 알고 있다. 으레들 말하길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모두가 박수칠 때 내려오라지 않는가. (물론 이 염원은 제발 추하게 늙어서 사회면에서 네 이름 다시 보게 하지 말아달라는 팬들의 피 토하는 염원이긴 하지만) 브이틱의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가 언제이느냐에 대해선 평이 갈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그러했다. 대중이 쏟아내는 아쉬움과 눈물과 아우성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명실상부 정상에 선 이들이었다.

“기분은 어때.”

배려인가? 슬쩍 웃은 신재현이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대답한다.

“모르겠네요. 처음이라.”

“은퇴는 원래 한 번뿐이야. 다시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럴 일은 없겠죠.”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박문대는 자연히 아직 잔상처럼 어른거리는 포털 사이트의 대문짝만한 기사 제목들을 떠올렸다. 불 꺼진 휴대전화 화면을 괜히 엄지로 한 번 쓸어올리자 화면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가 이내 다시 꺼졌다. 박문대는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로 아예 은퇴하게?”

브이틱의 나머지 멤버들은 브이틱이라는 이름은 내려두었으나 그들에게 뜻깊은 의미를 지닌 예명은 간직한 채 연예계에 남는다는 입장이었다. 청려가 그토록 틀어막았던 개인활동은 그 자신의 솔로를 기점으로 조금씩 제한이 풀리기는 했으나 결국 그룹으로서의 생을 끝낸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동하는 셈이었다. 물론 아마 청려를 제외하고는 저들끼리 유닛을 짜 음반 활동을 하기도 할 테다. 그때마다 청려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은 꾸준히 나오리라.

“햇수로만 치면 아이돌 생활만 오십 년은 했을 거예요. 이 정도면 좀 쉬어도 괜찮지 않나?”

박문대는 청려가 총 몇 번의 태엽을 되감았는지, 그 바늘이 정확히 몇 바퀴나 돌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대강 몇 번 흘리듯 말한 바로 미루어 몇십 년은 아이돌만 했겠거니. 그리고 짐작은 사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콩이랑 같이 시간 보내고 싶고. 아무리 그래도 활동 중에는 신경 써주지 못한 일이 많잖아요.”

신재현의 손은 부드럽게 밀색 털을 쓰다듬다가, 일순 장난기라도 어린 것처럼 헝클어뜨렸다가 이내 다시 가다듬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했다. 털 결이 반대로 쓸리건 말건 종일 주인과 지내게 된 게 기쁜지 콩은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좋다며 앉아 있다. 이전에 좀 더 성격이 뾰족할 때는 박문대가 처음 무심코 털을 잘못 쓸었을 때 홱하니 고개를 돌리며 흰 눈을 홉떴는데. 웃음을 참지 못하는 신재현을 앞에 두고, 박문대는 콩이 좋아하는 간식을 바쳐 겨우 그 마음을 돌렸더랬다. 무던한 듯하면서도 까탈스러운 면에 있어서는 또 까다로웠고, 그런가 하면 이내 다시 손이며 뺨을 마구 핥아오며 치댔다. 반려동물들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저 인간 까다로운 면은 닮지 말아야 할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까슬하고 축축하고 뜨끈한 혓바닥의 감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생각한다. 박문대가 잠시 콩의 변덕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때, 신재현이 불쑥 말을 이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잖아요. 동물들은 특히나 눈이 더 크고 맑아서 그런지, 콩이랑 눈을 마주치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무슨 뜻이야?”

콩의 털을 쓰다듬다 말고 뺨을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그 고개를 살짝 받쳐 든 신재현은 제 눈과 콩의 눈을 마주했다. 까맣고 반질한 눈동자에 기묘한 표정의 신재현이 비친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속삭이듯 중얼거리고는 다가가자 자연스레 눈을 감는 콩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내린다. 제법 익숙한지 눈을 살포시 감았다 뜬 콩의 표정이 기분 좋아 보였다. 몇 번 더 살살 매만져주자 낮잠이라도 자려는듯 웅크리고 눕는다. 박문대는 콩을 재울 듯 토닥이는 신재현의 손길을 보며 잠시 방금 전 발언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말로 눈을 보고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저와 신재현 사이의 많은 낭비되고 소모된 시간과 감정이 단축될 수 있었지 않을까. 개의 크고 까만 눈에 비치는 것은 그저 자기 모습일 뿐일 테니, 아마 신재현이 느끼는 건 단지 스스로의 속에 들어앉아 있는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아주 잠깐 망설인 박문대는 그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정한다.

자리에서 일어서 박문대 쪽으로 온 신재현은 외출을 제안하고, 박문대는 따라 일어서면서 자연스레 방석에 누운 콩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전 같으면 둘의 외출은 높은 확률로 넘치는 체력의 콩을 데리고 나가는 산책이었다. 휴가 기간에 단단히 벼르고 박문대와 신재현이 시간을 나누어 번갈아 가며 산책을 시켜도 도무지 소진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였던 콩은 제법 나이가 든 후로는 이전만큼 산책에 목을 매지는 않게 되었다. 여전히 제 주인이 빨간색 하네스를 손에 들면 탐스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기는 하지만, 콩은 시원한 저녁이 아니면 나가길 꺼려하게 되었다. 처음 신재현은 다소 허망한 목소리로 콩에게 애원 아닌 애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콩아, 해가 지면 나비도 없을 텐데…, 하고. 지칠 줄 모르는 콩의 체력을 감당키 어렵다는 호소를 한 게 언제냐는 듯 답잖은 애달픔이 드러나는 애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은 채 그 모습을 관망했던 기억이 있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새벽에, 피곤한 팔다리를 늘어뜨리며 저녁 늦게 개 목줄에 질질 끌려다니던 기억도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바깥 산책로는 여전히 잘 다듬어져 보기에 좋았다. 아직 해가 밝게 떠 있어 자연광 아래의 풀과 꽃은 선명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고 노란 나비 하나가 근처를 팔랑이며 스치자 반사적으로 시선이 그를 좇았다. 문득 지금의 나른한 낮잠을 더 사랑하게 된 콩도 나비를 보면 벌떡 일어나 쫓고 싶어 할까, 그런 실없는 의문이 들었다. 신재현도 비슷한 것을 떠올렸는지, 곁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콩이 같이 나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그렇죠?”

“지금은 졸리다는데 어쩔 수 없지.”

“혹시 기억나요? 전에 나비 때문에 콩이 놓친 적 있는데….”

기억하다마다. 아마 박문대는 그 날 일을 잊을 수 없을 테다.

활달한 콩은 한 번은 산책로 근처를 팔락이는 나비를 좇느라 총알같이 튀어 나간 덕에 신재현이 손에서 리드줄을 놓치게 만든 적이 있었다. 팔랑팔랑 나비처럼 흔들리며 멀어지는 빨간 줄과 그 뒤를 반사적으로 미친 듯이 뒤따라 뛰는 신재현과 한 발 늦게 둘을 따라 뛰는 박문대는 누가 보았다면 꽤 우스운 볼거리였으리라. 당황스러움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애초에 달리는 개를 인간이 따라잡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쫓아 뛰어도 점점 멀어지는 듯한 콩이 말 그대로 콩알만 한 크기가 되어 사라지기 전에, 박문대는 불현듯 지나가면서 본 자투리 지식을 떠올려냈다.

제자리에 멈춰서서, 그는 다급히 신재현을 불렀다. 선배님, 잠깐! 벅찬 호흡으로는 간신히 쥐어짠 듯한 소리만이 튀어나왔다. 짧게 호흡을 고른 박문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패닉 상태인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상대에게 큰 소리로 내뱉고 말았다. 신재현! 우뚝 멈춘 그나저나 둘 다 전력으로 무대를 뛴 것마냥 헐떡이고 있었고, 박문대는 저를 돌아본 신재현에게 숨을 삼키며 까딱 고갯짓을 했다. 이리 와. 신재현은 불안한듯 다시 콩이 뛰어간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고, 그 시선을 강제로 붙들어두듯 박문대는 다시 그를 재촉했다. 뛰어서, 나한테 오라고. 뭔가를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인 신재현은 잠시간 머뭇대기는 했으나 결국 박문대에게 왔다. 그리고 박문대의 계산처럼, 저를 좇던 주인이 사라지자 콩은 다시 주인을 쫓아 되돌아왔다. 마냥 즐거워 보이는 콩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주저앉은 신재현의 어깨가 아직도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다만 그는 안도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콩의 이름을 불렀다. 힘찬 콩의 대답 같은 짖음에 긴장이 풀린 것은 박문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신재현이 박문대의 말을 믿지 않고 끝내 뒤돌아 뛰어갔다면 뭐어, 그래도 아마 콩을 잃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다. 다만 체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내고 신경줄을 태워 가며 단지 내를 샅샅이 뒤지는 수고로움이 추가되었겠지. 하지만, 그때 신재현은 박문대를 믿었다. 소리쳐부른 이름에 돌아본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 순간의 황망한 눈길은 저보다 키도 큰 성인 남성을 어린 미아처럼 보이게 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내 말에 멈추어 선 신재현. 내 말 한 마디에 몸을 돌려 내게 뛰어온 신재현. 순간적인 장면들의 조합은 착각을 일으키기엔 충분한 구성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이르리라는 섬광 같은 깨달음은 느릿하게 확신으로 이어졌다.

단단히 붙잡고 있던 리드줄을 순간적으로 돌진하는 힘에 의해 놓친 신재현은 편치만은 않은 표정으로 손목을 주물렀고, 결국 산책을 마무리하고 나란히 병원까지 갔다. 직접 운전대를 쥔 박문대를 조수석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이 또렷했다. 딱히 무슨 말을 건네려는 것 같지는 않아 내버려 둔 차 안은 침묵 뿐이었고, 소염진통제를 받아서 돌아오는 길엔 약국에서 파스도 하나 사 들려보냈다. 하얀 압박붕대를 고정시킨 오른손은 바닥을 향해 떨구어둔 채, 어색하게 왼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신재현. 발치에서 속 좋게 헤실대며 꼬리를 흔드는 인절미 덩어리 하나. 그 집의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작은 소리를 내며 잠긴 순간, 박문대의 뇌리를 스친 깨달음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태연자약하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계속해서 생길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에라도 손이 아프니 콩의 산책을 도와달라 부를지도 모르고, 그 후에는 또 그냥 보내기 미안하다며 같이 밥을 먹을지도. 그러고 박문대가 매달리는 콩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쓰다듬으며 은근슬쩍 거실 소파에 눌러앉을지도, 그리고 신재현 역시 기꺼운듯 슬그머니 옆을 차지하고 앉을지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처럼 떨어지는 물처럼, 관계는 이어지고 진전되어 갈 테다. 그렇게 이르러, 이를테면, 연인이라는 명명에 다다를 때까지. 아마도 손목의 붕대가 풀리고 반도 쓰지 못한 파스가 집 안 약상자 어딘가에 처박힐 무렵에는 이미 그런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나란히 추억에 잠겼던 둘의 걸음 앞은 어느새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그와 꼭 맞게 상념에서 깨어난 기분은 약간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햇볕이 따스하게 빛나는 길목, 앞으로 벗어나지도 되돌아서지도 않은 애매한 지점에서 신재현은 입을 열었다.

“당분간 콩이랑 여행을 다닐까 해요.”

“여행?”

“못 해준 게 너무 많고, 느긋하게 둘이서 시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박문대는 가만히 신재현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본대도 키 차이는 그리 많이 나지 않아 빛에 의해 그 멀끔한 면면이 지워질 정도는 아니었다. 희게 빛나는 얼굴은 제가 아끼는 반려견과의 계획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희미한 곡선을 머금고 있었다. 박문대는 잠깐 제 스케줄을 떠올려보았다가, 신재현이 ‘둘이서’라고 말한 것을 깨달았다. 멋대로 짜서 통보한 여행 계획에 어울려달라며 떼를 쓰는 골칫거리 연인보다야 낫다지만, 제아무리 현역 박문대의 스케줄이 여전히 바쁘다지만, 언질조차 없는 통보는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성과 합리성이 도파민에 의해 말랑해지는 순간이었다.

“나한테는 그걸 이제서야 말하는 거고?”

걱정했던 것만큼 뾰족하게 나가지는 않은 말은 다만 불퉁하게 삐친 것처럼 들렸다.

“음… 미안해요. 그래도 내 은퇴 계획은 제일 먼저 알려줬는데?”

그 은퇴 계획도 지금처럼 대뜸 뜬금없이 통보되었지 아마. 박문대는 브이틱 컴백 전 어느 밤, 침대 위에서 은퇴 계획을 전해 들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일이다. 불과 두어 달 전이었으니까. 조정은 다 된 거냐 물었더니 내일부터 할 거라는 대답에 기가 막혀하니, 그래도 후배님이 제일 먼저 알게 된 거예요, 그런 말을 했더랬다.

“어디 가는지 정돈 연락해.”

“사진도 보낼게요.”

야외에서 찍게 될 텐데, 콩이 털 색이 밝아서 사진이 잘 안 나오면 어쩌지. 그렇게 덧붙인 신재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박문대를 응시했다. 뭐라 지적할 기운도 빠지게 할 정도로 대놓고 치는 눈웃음에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휴대전화로 찍게 될 테니, 간단하게 기본 어플로 손볼 수 있는 설정 몇 개를 보여주곤 시범 삼아 탐스럽게 가꾸어진 꽃덤불과 자연광 아래 신재현을 서게 했다. 미소에는 특화된 직업인지라, 카메라 렌즈를 앞에 두자 자연스럽게 몸에 밴 그린 듯한 웃음이 그려진다. ‘청려’의 아름다운 사진을 찍은 박문대는 누가 보아도 완벽한 사진을 얻었음에도 어딘가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좀 더 자연스럽게 웃어 보라든가, 아니면 아예 웃지 말라든가 따위 주문을 넣어도 신재현은 그 모든 요구를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처리해낼 테지. 카메라 앞에 오래 선 후유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순간 신재현과 박문대의 시야를 대신하는 렌즈 사이를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유유자적 끼어들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콩과 나비에 대한 추억을 곱씹은 탓인지, 신재현의 고개가 무심코 나비가 사라진 쪽으로 기울어졌다. 박문대는 본능적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이게 진짜 촬영 현장이었다면 신재현의 시선은 결코 렌즈를 벗어나지 않았을 테다. 청려의 완벽히 그려진 듯한 미소는 사라졌으나 동그랗게 뜬 눈과 입술에 희미하게 걸린 호선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순간 돌아간 고개와 나비가 몰고 온 바람에 살짝 흩어진 머리칼, 옆에서 비쳐드는 햇빛에 희게 돋은 신재현의 목선 따위가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 있다. 비로소 만족감이 차올랐다.

신재현이 조용히 반려견과 단 둘만의 여행을 떠난 뒤에도 박문대는 무심코 빈 집으로 향하다 돌아선 일을 몇 번이나 겪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인지, 신재현 없이 보내는 첫 주말에는 그 집 비밀번호를 눌러 어둡고 싸늘한 현관과 그 너머 거실을 눈에 담고서야 아차 하고 깨달았다. 곧바로 뒤돌아 나가려다 머뭇대며 결국 들어선 집은 낮임에도 안이 제법 어둑하고 서늘했다. 터덜터덜 걸어가 콩이 자주 앉던 연두색 방석 근처를 보았다. 장난감까지는 모두 챙겨가지 않았는지 방석 위에는 공이 하나 놓여있었다. 공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리자니 저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지자마자 득달같이 공을 던져달라 조르던 콩의 부산스런 몸짓이 떠오르고 만 탓에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한 번 공을 던지고 콩이 부리나케 달려간 사이, 신재현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더랬다. 각오해야 할 텐데…. 그리고 박문대는 꼼짝없이 팔뚝이 아플 때까지 정성껏 공을 서른 번은 던져야 했다. 심지어 그 후엔 프리스비까지 물고 오는 것을 기겁하며 바라보자 즐겁게 지켜보던 신재현이 콩을 부드럽게 저지하는 것으로, 박문대는 겨우 강아지 공쏘기 기계 신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물론 전부 콩이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정신없이 일하며 신재현과 만나는 것조차 녹록지 않았 시간들을 거치자 어리고 힘찼던 강아지는 더 이상 박문대의 팔이 아플 만큼 그를 조르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공을 아끼던 콩은 늘 잠을 자는 방석 위에 공을 올려두지 않으면 불만을 표하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공 없이 여행지에서 잘 자려나, 그런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공을 다시 온기 없는 방석 위에 내려둔 박문대는 그런 실없는 연락으로 서두를 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콩을 끔찍이 아끼는 신재현은 반려인 아니랄까봐 박문대가 콩에게 빠져들수록 제가 더 뿌듯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곤 했다. 어지간한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제법 장기간이 될 여행을 떠난 연인에게 처음 보내는 안부가 개에 관한 것이라면, 신재현은 짓궂게도 그 부분을 걸고 넘어질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스스로가 실제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라 해도, 오직 박문대의 짧은 찌푸림과 해명을 얻어내기 위해서.

고민하는 사이 휴대전화가 가볍게 진동했다. 신재현으로부터 온 메시지의 미리보기 창은 사진이 첨부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억새풀 숲 사이에 해맑게 웃으며 앉은 콩의 모습이 화면 가득 들어찼다. 천진한 웃음은 보는 이에게도 저절로 따라 미소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한 줄의 추가 메시지는 설명이었다.

[콩고물 속 콩이.]

비슷한 색의 억새 사이 밀색 털뭉치는 꼭 그 설명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아직 낮인 터라 햇빛이 제법 뚜렷할 텐데도 딱히 모난 데 없이 사진을 찍은 걸 보니 단기 특강이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박문대는 제가 웃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채, 답신을 보냈다.

[콩이 공 없이 자도 괜찮겠어?]

[아… 깜빡했어요. 어쩌지, 콩이한테 혼나겠다.]

박문대는 흰 눈을 뜬 콩이 쩔쩔매는 신재현을 외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말은 그리 해도 콩은 신재현이 저를 아끼는 것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신재현을 사랑했다.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상호 간의 애정이 선명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콩은 잠시 삐친 척을 하다 이내 신재현을 용서할 테다. 박문대와 달리 어쩌면 간식을 바치는 일 없이도.

[후배님은 지금 혹시 우리 집에 와있나요?]

어떻게…. 짧은 의아함은 근처의 방석과 공에 의해 금세 풀렸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알겠지. 연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그 흔적을 더듬고 외롭기라도 한 것마냥 구는 건 아무래도 조금 쑥스러웠다. 특히나 곧바로 그 상대에게 들켜버렸다면 더욱이. 그러나 신재현은 다른 이유를 내놓았다.

[일부러 오진 않았을 테고, 습관이겠죠? 후배님 회식 후에도 여기로 온 적 있잖아요.]

박문대는 제 귀소본능이 약간 잘못된 경로로 저를 안내한 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빈 거실에서 조그맣게 침음을 흘렸다. 그 다음 날 침대 바로 옆자리에서 기쁜 듯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던 신재현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지. 이성보다 본능이, 몸이 기억하는 대로 행동했다니 실제 신재현과 사귀며 뻔질나게 집을 드나드는 사이였 것과는 별개로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러 온 걸 수도 있잖아. 네 생각 나서.]

툭 내뱉은 말은 수습하기엔 진심이었고 그대로 두기엔 날 것이었다. 화끈거리는 것 같은 귓바퀴를 괜스레 한 번 매만진 박문대는 금방 도착하던 앞선 답신과 달리 잠시간 반응이 없는 메신저 창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3분이나 지나서야 도착한 답은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콩이 컨디션이 좋아서 사진 많이 찍었는데. 다 보내도 되나요?]

저도 쑥스러운 모양이지…. 직전까지 발간 기운을 머금었던 제 귓불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박문대는 순순히 동의했다.

[앞으로도 찍으면 계속 보내.]

곧이어 열 장이 넘는 사진이 연달아 도착했다. 이전에는 바깥에서 사진을 찍으면 쏘다니는 잔상만 남기곤 했던 콩은 모델마냥 얌전히 앉거나 서거나 한 모습이었다. 주인 닮아선지 찍는 사진마다 렌즈를 응시한 채 웃고 있다. 그리고 금방 찍은 것인지 다른 것들보다 한 차례 늦게 사진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콩의 털에 뺨 한쪽을 거의 파묻다시피 한 신재현이 콩과 함께 셀카 구도로 찍은 사진이었다. 나란히 렌즈를, 그 너머의 박문대를 응시하는 두 쌍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그 사진을 가장 먼저 저장했다.

이후로도 몇 번인가 박문대는 신재현의 빈 집에 찾아갔고, 불규칙하지만 꾸준히 도착하는 사진들을 그 집 소파에서 받은 적도 있었다. 박문대가 빈 집에 홀로 오는 것을 눈치챈 듯한 신재현은 딱히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니, 그냥 그 좋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신재현도 쑥스러움에 말을 꺼낼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박문대가 여행을 떠난 둘의 빈 자리를 보며 아쉬워하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정 많고 북슬북슬한 개와 함께 하는 여행은 누군들 부럽지 않을 리가 있나. 근래 바쁜 스케줄에 치인 박문대는 그저 둘의 느긋한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사진에는 그 안온한 평화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온색의 색감을 가진 사진을 조금씩 받아 모을 때마다 박문대 안의 휴가를 향한 열망도 조금씩 덩치를 불려 나갔다.

신재현은 박문대가 홀로 빈 집에서 청승을 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첫날 마주한 싸늘함에 당황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내 그는 빈 공간에서 일종의 아늑함을 느꼈다. 고요하고 서늘한 집안은 이미 신재현의 고질병이 된 데 이어 박문대까지 스멀스멀 침범 중인 불규칙한 불면증을 누르는 데 효과적이었다. 조용하고 어딘가 쓸쓸하지만 또 그 점이 평안을 주는 기묘함. 주인은 자리를 비웠으나 여전히 사람 흔적이 남은 공간. 허물어진 폐허가 주는 묘한 안정감과 비슷한 것이 그곳에 있었다. 혹은 어쩌면… 단지 이곳이 신재현의 집이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 뻔뻔스러운 생각을, 멋대로 주인 없는 침대에 누워 곱씹어보기도 했다.

데뷔 직전이나 신인 시절에야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벌떡벌떡 일어났고 새벽부터 종일 스케줄을 뛰어도 어떻게든 버텼다지만, 나이를 스물의 앞에서보다 뒤에서부터 거꾸로 헤아리는 게 빠른 시기가 도래하고부터는 모든 게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저도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은 주제에 신재현은 불면증 선배의 포지션이라도 취한 양 충고를 했다. 규칙적인 생활하면서 잘 관리해야 해요. 자기 전에 청색광은 멀리 하고…. 물론 한창일 남자 둘이 술 한 잔을 곁들여 침대에 뛰어든 이상 규칙적 취침시간은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되곤 했다. 그럼에도 평소 눕는 시간을 한참이나 지난 새벽 한 시가 되어도, 술을 마신 탓에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단지 옆에 체온이 존재한다는 위안에 기대어 금세 잠들 수가 있었다. 참 우습게도 사람이란 그랬다. 신재현은 노곤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참 신기하지, 난 언제나 사람들이 왜 연애를 하는지, 섹스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알 것도 같은 게. 말끝을 흐린 채 금세 잠들어버린 신재현과 맨 어깨가 맞닿은 채, 박문대 역시 혼곤한 뇌로 그의 말을 잠시 헤아렸다. 사람들이 왜 온기에 매달리는지, 그게 단지 한 줌의 허상뿐이래도, 영원의 보장이 없더라도….

지친 몸을 소파에 뉘이자 금세 가물거리며 잠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이 집에서는 이렇게나 잘 잠드는 걸 보면 수면제를 처방해준 의사가 반색할 지경일 테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은 박문대는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오후니까 슬슬 사진이 올지도, 혹은 내일이나 모레에 올지도. 그리고 그의 무의식적인 바람이나 기원이 통하기라도 한 것인지 햇빛에 쨍하게 빛나는 노란 해바라기 밭의 콩의 사진이 도착했다. 제법 그윽하게 분위기를 잡아 꽃에 코를 들이밀 줄도 아는 재주 많은 개의 옆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박문대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진은 한 장밖에 오지 않았으나 이미 눈을 감은 박문대는 그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완전한 휴식기 직전 빠듯하게 잡아둔 스케줄에 속으로는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완벽한 사회성 가득한 얼굴을 내건 박문대는 마지막 라디오 수록 일정을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라디오국 근처에서 먼저 저를 아는 체 하는 면면을 마주쳤다. 이쪽에서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잽싸게 먼저 과장되게 손인사를 한 채율은 성큼 박문대에게 다가왔다. 그는 기본적으로 박문대에게 살가운 편이기는 했으나 신재현이 이 멤버들 하는 양을 그냥 지켜보는 듯 보여도 은근히 선을 통제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아마 더 이상 그들을 막아 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다. 신재현의 은퇴 이후 딱히 사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었던지라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문대 씨 오랜만이네요! 라디오 스케줄 가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 선배님은 끝나셨나요?”

“네, 그런데 요즘… 스케줄이 많이 바쁜가 봐요.”

단순한 인사에서 끝나지 않을 모양인 대화에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의아함은 잘 덮은 채, 박문대는 순순히 그 말에 동의했다. 적당히 대답한 뒤에 왜 그러시냐 되묻자 연차가 무색하게 당황한 티를 그다지 잘 숨기지 못한 채 덧붙인다.

“별로 마주친 일이 없지 않나 싶어서요! 활동반경도 비슷하고, 지금처럼 라디오 스케줄도 비슷한 시기에 잡혀 있었는데….”

다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예의처럼 다른 멤버들에 대한 안부를 물은 것을 끝으로 자리를 뜬 채율의 뒤에서, 박문대는 그 뒷모습을 잠시간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처음 브이틱에 대한 이미지가 단순 업계 선배이자 미래의 경쟁자에서 밑바닥으로 추락한 이유는 오로지 신재현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는 그냥 잘난 선배, 그리고 앞길에 방해되는 실력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멤버 개개인도 낙관적이고 열정적이고 실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 신재현이 고르고 골라 정성껏 키워낸 인선이니 어련하겠냐마는, 그 탓인지 다소 눈치가 없다는 치명적 오점이 있기는 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귀한 화초란 거겠지. 어색해 죽겠다는 티를 숨기지도 못하면서 말을 붙이고 친한 척을 하던 과거 모습과 우연히 마주친 체를 하던 방금 전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이전에도 그랬으나 그들이 쩔쩔매면서도 시도하려 애쓰는 일의 사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는 법이었다. 신재현. 그가 넌지시 박문대를 도와주라 긔뜸했기에, 그가 박문대를 신경 쓰고 아끼는 듯한 티를 냈기에, 신재현에게 맹목적인 그들은 당연하게도 그 행보에 맞추기 위해 애쓰곤 했다. 이후에는 자체적으로 친밀감을 쌓았는지 어색함은 다소 소강된 듯했으나…. 여하튼 박문대에겐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알아봐 주어야 할 의무는 없었으나 마냥 재밌는 상황 관망하듯 구는 신재현에게 핀잔을 주기는 했다. 그리고 신재현은 그저 ‘우리 애들 참 귀엽죠?’ 그런 대답이 되지 못하는 답만 내뱉을 뿐이었고.

요는 채율이 굳굳이 박문대의 스케줄에 대해 관심을 표한 이유가 아무래도 신재현 탓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문대는 도출된 예상이 이해 가질 않았다. 직접 물으면 될 것을 사람 캐내는 일 잘 하지도 못하는 이를 시켜서, 굳이? 여담이지만 박문대도 신재현도 서로 서프라이즈니 이벤트니 하는 것들에 의무감을 가지는 편이 아니었으며, 자연스레 물 흐르듯 진전된 관계에서는 언제가 기념일인지 따위를 정확히 계산해내기도 곤란했다. 그러니 집에 갔더니 풍선 다발과 향초가 그득했다는 식의 생뚱맞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다. 애초 그런 짓을 벌인다면 통통 튀는 풍선에 흥분한 콩이 뛰어다니는 것을 제지하는 게 우선이 될 테고. 게다가 박문대가 귀가를 신재현의 집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주 찾아가기는 했지만,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는 이따금 들렀고 그마저 근래에는 뜸했다. 맞아, 제법 뜸했지…….

여기까지 생각한 박문대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 휴대전화 메신저를 확인했다. 신재현으로부터는 벌써 일주일 전 연락을 끝으로 아직 별다른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며칠간 바빠 인지하지 못했으나 이전에도 사진 간격은 닷새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며칠 더 있다가 연락이 없으면 확인해볼까. 머릿속 대략 이틀 뒤쯤의 일정표에 신재현에게 연락하기 항목을 추가한 박문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틀 뒤 신재현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짧은 한마디였다.

[헤어질까요.]

사진도 무엇도 없이, 이후로도 어떤 설명도 맥락도 없이. 통보도 아니고 떠보는 것도 아닌 모호한 중간의 메시지는 그가 정말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답을 보내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또 잠시 멈추었다. 고작 다섯 글자의 딱딱한 메시지에서 들리는 신재현의 목소리 역시 딱딱하게 굳어 무감정 뿐인 물음처럼 여겨졌다. 잠시 찌푸려진 미간을 엄지로 문지른 박문대는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었다. 신재현의 집으로 곧장 향하기 위해서.

막상 문 앞에 도착하고서야 아직 집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으나 어떠한 예감이 박문대를 여기까지 이끌었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잠금장치 키패드로 뻗었다. 만약 여전히 빈 집이라면, 그러면 전처럼 빈 소파에 앉아 빈 연두색 방석과 공을 보며 신재현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열린 문 너머는 여전히 싸늘했고 불이 꺼진 채였으나 빈 공간은 아니었다. 거실에 앉은 신재현은 TV도 켜지 않은 주제에 그 언저리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척 보아도 청승맞은 꼴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박문대는 천천히 발을 옮기며 신재현을 살폈다. 그가 온 것을 인지는 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유지하던 신재현이 예기치 못하게 불쑥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집에 왔단 말은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는 실제로 알고 온 것이 아니기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이별의 제안을 담은 메시지에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맞았으니까.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입을 연 박문대의 시선이 익숙한 방석이 위치한 곳으로 스윽 움직였을 때, 그는 말 그대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내내 얌전히 한 자리에 위치해 있던 방석과 공이 간데없이 사라졌다. 순간 너른 집이 더 휑하니 느껴지는 이유와 우중충한 분위기의 신재현에 대한 이해가 한 번에 뒷덜미를 꿰뚫고 지나갔다.

“콩이는?”

짧디짧은 말 한 마디를 뱉는 데에 무척이나 껄끄럽게 느껴졌다. 신재현은 말없이 제 옆에 나란히 둔 탓에 채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하얀 도자기 단지를 꺼내 무릎 위로 올렸다. 순간 말문을 잃은 박문대는 그저 천천히 신재현과 유골단지의 근처로 다가갔다. 흘긋 쳐다본 눈은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으나 다만 약간 멍하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내린 박문대는 하얀 손 안의 더 하얀 도자기 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반려동물들에게 으레 그렇게들 하듯 콩의 이름 앞에도 신재현과 같은 성씨가 붙어 있었다. 202X.11.27 ~ 203X.10.15, 궁서체로 프린트된 날짜를 물끄러미 보자니 신재현이 제법 여상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듯이 말했다.

“혹시 기억해요? 예전, 연초 시상식 때 콩이를 데려왔다고 문자 보냈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즈음의 일인 것은 기억했다. 그 이후로 지겹도록 박문대의 메신저에는 꼬질했던 인절미 한 덩이가 점점 자라 혈색 돌며 행복해지는 과정이 제법 소상하게 쌓여왔으므로 지금도 메신저 가장 위를 본다면 그즈음부터 시작된 사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다. 박문대는 조그맣게 고개만 끄덕였고, 그 미온적 대답을 보았는지 말았는지는 불확실한 채로 신재현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보호소에 들어온 지는 한두 달쯤 되었다고 들었거든요. 보통 그렇듯이 그런 곳에 있는 아이들은 정확한 생일이 없는 일이 많아요. 그냥 거기 들어온 날이 생일이 되지….”

신재현의 흰 손끝이 도자기 위 검은 글자를 가볍게 문지르듯 매만졌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듯 얌전히 내려앉은 속눈썹은 아주 잠시 잘게 떨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슬프잖아. 그래서 내 생일로 정해줬어요.”

신재현은 콩의 생일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므로, 그 자신의 생일마다 콩의 생일을 더 성대하게 축하하는 것을 보며 박문대는 그저 생일이 같은 사실에 어떠한 끌림을 느꼈나 보다 짐작했을 뿐이었다. 곁에 앉은 신재현의 입술로부터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름 잘해주려고 노력했는데, 별로 오래 살지 못한 것 같네. 차라리 여행을 안 갔으면 좀 더….”

신재현의 가늘어진 눈 위로는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얹혀 그 물기어린 안광을 가렸다. 박문대는 신재현이 보냈던 십수 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해맑게, 즐겁게 웃고 있던 리트리버의 사진은 박문대와 신재현 사이의 메신저 기록에도, 박문대의 휴대전화 사진첩 안에도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눈에 행복에 겨운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의 장면들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겪은 이들은 누구나 불가능한 가정들을 주워섬기곤 한다. 고작 한 시간을 힘겹게 더 사느니 사랑하는 가족의 곁에서 눈을 감는 것이 낫다는 말들. 그럼에도 그를 고작 한 시간 더 살게 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말들. 몇 가지의 필연적인 죽음을 겪은 것은 박문대도 신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박문대는 감히 신재현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콩이 엄청 행복해 보였어. 너랑 같이 있는 걸 제일 좋아하잖아.”

박문대는 본의아니게 신재현과 콩의 마지막 작별여행이 되어버린 여정에 제가 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박문대 역시 콩에게 정이 많이 들었고, 콩도 박문대에게 무척이나 살갑게 굴었다. 신재현이 아무런 말도 없이 콩의 장례를 치르고 박문대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은 것에 서운함이 없다면 거짓일 테다. 그럼에도 콩에게 있어 박문대와 신재현의 위치는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기에. 적게는 간식 몇 개분의 양만큼, 그리고 아마도 그 이상으로. 제법 긴 시간 근처에서 둘을 지켜본 박문대는 콩이 지난 몇 주간 신재현과 단 둘뿐인 시간을 보내 무척이나 행복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좋아했지…. 나보다 무릎도 안 좋으면서 막 뛰어다니고.”

신재현은 거기까지 간신히 대꾸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 한 마디에서 불현듯 박문대는 네모난 프레임에 갇힌 정적인 모습 너머로 펄쩍펄쩍 코스모스며 억새 사이를 뛰어다녔 콩의 활기찬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낼 수 있었다. 멍! 귓가에도 여전히 콩의 반가운 부름이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문득 제 눈두덩이가 달아오르는 것을 눈치챈 박문대는 조용히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렸다가, 비로소 그 높이가 좀 전의 신재현과 같이 빈 TV 화면 언저리 즈음에 닿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무늬도 하나 없는 말끔한 벽에서 무언갈 찾아내기라도 할 기세로, 그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빈 벽지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기를 몇 분, 혹은 십여 분, 문득 옆의 신재현으로부터 물음이 흘러나왔다.

“왜 헤어지자고 말했는지는 안 물어봐요?”

감정 기복이겠거니, 콩의 죽음을 알게 된 후에는 그 급작스러운 발언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문대는 신재현의 바람대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말했는데?”

“후배님을 많이 좋아하니까요.”

“음…….”

숨기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반응에 신재현은 픽 가볍게 지나가는 듯한 마른 웃음을 흘렸다. 좋아하니까 헤어지자는 말은 이제는 삼류 신파극에서 쓰기에도 너무 낡았지 않나.

“‪펫로스 칼럼 같은 걸 읽어봤어요.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여러 마리를 키우라고도 하더라고요. 필연적인 상실을 다른 아이에게 위로받으라고. 마치 빈자리를 대체하듯이.”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깝게 터져 나왔다. 유골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가늘게 미소지은 신재현이 말을 이었다.

“사람은 수없이 갈아 끼워온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우습지만…. 콩이는 대체할 수 없는데. 그러고 싶지도 않고.”

박문대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재현이 콩을 사랑한 만큼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문대뿐일 테다. 인간의 믿음, 격려, 사랑 같은 무형적이고 가변적인 것에 비해 부드러운 털, 따뜻한 체온, 축축한 혀 따위는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이었다. 박문대 역시도 그 맹목적 다정함에 적잖게 위안을 받곤 했으므로. 지금에서야 박문대도 신재현에게 있어 일종의 작은 갈고리 역을 할 지도 모르지만 이전에 그를 붙잡는 것은 단연 콩의 역할이었다. 풍랑 같은 삶 속에서 배가 부서지지 않으려면 줄을 풀고 파도에 휩쓸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신재현을 부두에 매어둔 닻이 바로 밀색 털을 가진 한 마리의 개였다. 조그만 인절미 덩이만 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주인을 질질 끌고 갈 정도의 힘을 가진 덩치로까지 자라면서 그 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재현은 그 닻을 사랑해 마지않았다.

“후배님…. 지금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 일단 들어줘요.”

박문대는 그 의미심장한 서두 너머의 말을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동의의 의미로 고개만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 왠지 다시 재시작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재빨리 다물었다. 재고해볼 필요도 없이 그건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저녁 신재현도 되돌리고 싶어 한 것과는 별개로 그 자신은 더 이상 살아온 시간을 번복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일은 둘 간의 지난한 얽힘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느 쪽도 잊을 수 없을 사실이었음에도, 아주 간만에 신재현은 다시금 재시작을 그 입에 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히 리셋은 불가능했고, 펫로스 증후군을 앓는 중일 신재현의 충동적 자기파괴 욕구에 지나지 않는 발언일 테다. 그럼에도 박문대의 머릿속 한켠으로는 미미한 불안감이 스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태창의 유무 차이인지 무엇인지, 신재현의 상태 이상은 쭉 비활성화인 상태로 유지되었으나 결코 해제라거나 소멸 같은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긴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 그것이 재활성화될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박문대의 눈꺼풀이 떨리는지 시야가 아주 잠깐 일그러지듯 가려졌다 도로 밝아졌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부름을, 어느 순간 이후로는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찾지 않았던 상태창을 불러냈다. 신재현이 말했던 것처럼 잔인하게도 한계에 부딪쳐 바뀌지 않은 수치의 능력치와, 보지 않은 사이 모조리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항목들을 지나 박문대가 찾고자 한 진실이 그 아래에 존재했다. 상태 이상, 교정. 활성화.

그 세 글자의 선언을 발견한 순간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지껄였다.

“불가능하단 거 알잖아. 너 지금 힘들어서 그런 생각까지 드는 거야.”

목이 멘 것 같은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말하면서도 신재현이 순순히 이 설득력 빈약한 말을 믿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신재현이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동요하는 중이었다. 흔들리는 신념이 누군갈 설득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신재현조차 모르게 알고 있는 진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리셋이고 뭐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가지지 않았던 때에 옥상에 올랐던 가장 처음의 신재현을. 그가 그때 했던 말과 생각을, 아마도 모든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을 가장 최초의 죽음을.

불현듯 신재현은 잃은 닻을 되찾고 싶은 것이란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후배님에게 지표가 있었던 것처럼, 나한테도 직감이라는 게 그 역할을 해왔어요. 그리고 그건 틀린 적이 없었지.”

박문대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아 애꿎은 입술을 핥았다. 여전히 유골함을 얌전히 올려둔 신재현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콩이에게 못한 만큼 다시 잘해주란 의미로 주어진 기회는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럴 리가 있겠냐고, 실제로 활성화된 신재현의 상태 이상을 눈앞에 두고도 박문대는 곧바로 반박을 했다. 신재현은 제시된 수치와 지표도 없이 홀로 상태 이상을 모두 해결해 왔다. 그런 그에게 느낌과 직감은 가진 것 중 가장 예리한 등불이었을 테고, 그는 그 예감을 거스른 적이 없었을 테다. 그런 그를 말릴 방법이 존재하긴 할는지, 박문대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신재현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감쳐문 힘을 뺀 박문대는 가만히 마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내가 되돌아 갔을 때 그 세상이 버려지는 건지 되감기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거든요.”

그에 대해서는 아마 누구도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재현은 한때 정말 모든 게 되돌아가는지 아닌지, 전 회귀자가 살아있을 적에 알아볼 걸 그랬다는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고작 그런 일에 목숨을 거느니 그냥 부딪히는 게 나아, 박문대는 단호하게 그 헛된 가정을 거절했었고.

“만약 모든 게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후배님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건과 시간을 겪은 콩이는 지금 우리가 아는 콩이와는 다른 거겠죠.”

신재현의 시선이 다시 유골함을 향했다. 두 손은 무릎 위의 유골함을 천천히 끌어당겨, 그 품 안으로 완전히 가리듯 품어버렸다. 신재현에게 안긴 작은 유골함은 커다랗고 따뜻한 콩과 비교했을 때 너무도 왜소하고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럼 나는 결국 그 애마저 대체품으로 여기는 게 되어버려.”

속삭이듯 흘러나온 말에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유골함 위로 옹송그린 마른 어깨를 제 품 안으로 당겼다. 느리게 오르내리는 등 위로 제 팔을 두르고 그 위로 가볍게 제 고개를 대며, 가장 다정했던 존재에는 못 미칠지언정 그 엇비슷한 온기나마 전해지길 바랐다.

“멋대로 두고 갔다가, 멋대로 헤어지자고 해서 서운하려나….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마요. 난 이 애한테 죄스런 마음이 들 만큼 후배님을 좋아한단 말이야….”

순간 박문대는 숨을 멈추었다. 아주 가까이 맞닿아있는 탓에 웅크린 신재현에게도 모조리 전해졌을 터였다. 제 삶의 닻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반려견을 영영 떠나보낸 후유증으로 죽고 싶어 하는-신재현이 재시작이라 말해도 박문대는 그것을 죽음이라 단호히 정의한다- 그를 붙잡는 미련이 바로 저란다. 그제야 왜 신재현이 헤어질까 하는 물음을 입에 담았는지 이해되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솟았다.

“만약 되돌아가면, 난 아마도 후배님이랑 가장 좋은 관계에서 시작하고 싶을 게 뻔하거든…. 그런데,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후배님이 류건우라는 이름을 알려줬을까?”

“…아마도, 아니.”

목구멍 너머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삼킨 박문대가 애써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그런 일은 가정해봤자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심지어 그 당사자인 박문대에게 묻더라도 그러했다. 결국 겪어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이런 때에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답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좋아하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신재현은 대뜸 헤어져달라는 말을 내뱉기에 이른 과정을 미적미적 조금씩 풀어놓았다. 콩을 잃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은 나란히 그 다정한 온기를 사랑했던 박문대도 고스란히 겪는 중이었다. 그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도, 더 잘해주고 싶었다는 진심도.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어졌을 남겨질 박문대에 대한 애정어린 걱정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박문대는 신재현의 딜레마를 이해했다. 그와 함께 세상 모든 것이 함께 되돌아가도, 되돌아가지 않아도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은 이미 이전의 것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리라는 사실을 신재현은 깨닫고 말았다. 그와 세상이 함께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신재현도 콩도 잃을 박문대가 어지간히도 외로우리란 사실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재현은 여전히 갈등하고 유혹을 느껴 흔들리는 것이다. 그의 관성은 고작 몇 년의 시간으로 깎아내기엔 너무나 견고했던 탓이다. 두 존재가 그것을 무던히도 덜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에 비로소 신재현은 망설임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 그 거지 같은 사건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서로 밑바닥을 낱낱이 드러냈을 것 같아? 서로 간 좋은 감정만 생기도록 잘 조절하면, 그래 넌 그런 건 잘 하겠지. 그런데.”

평소에는 그렇게나 잘 꾸며내던 말과 목소리는 조잡해지고 조급해지기만 했다. 날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박문대는 어쩌면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동시에 말을 꺼내는 도중에야 깊이 깨닫고 말았다. 신재현의 깨달음이 다소 늦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나일 것 같아?”

나 믿었잖아, 신재현. 채 덧붙이지 않은 말은 조용히 박문대의 끓는 속에서만 맴돌았다. 네가 날 믿어서 여기까지 이르렀잖아. 이번에도 내 설득에 넘어오라고, 늘 그랬듯이. 단단한 마른 어깨를 감싼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고르고 느린 숨을 반복하던 신재현은 앞에는 유골함을 등에는 박문대를 품은 채 가만히 있다가, 한참 만에야 아주 조금 고개를 들었다.

“콩이 납골당 같이 골라줘요.”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나서 병원도 같이 가.”

신재현은 대답 대신 메마른 웃음을 힘없이 흘렸다. 그러나 박문대의 제안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시름을 던 박문대는 그제야 조용히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유골함의 표면을 매만져보았다. 매끈하고 싸늘하게만 보였던 도자기 표면은 양각에 의해 오톨도톨했고 생각만큼 차갑지도 않았다. 신콩. 콩이. 콩아. 박문대는 가만히 입안으로 그 이름을 몇 번 불러보았다. 벌써 무척이나 그리운 감정이 멋대로 가슴 속을 휘저으며 일렁였다. 아마 당분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이러한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할 테다. 어쩌면 몇 년 뒤나 평생토록. 그러나 기꺼이.

가장 눈높이에 잘 보이는 층에 자리한 콩의 납골당 칸 안에는 콩이 좋아하는 장난감 몇 개와 단단히 밀봉된 간식 몇 봉지가 함께 자리했다. 가장 아끼던 공과 늘 잠들던 방석은 화장할 때 함께 넣어보낸터라 없다고 한다. 아마 박문대가 여행 초반에 한 번 일러주었듯 공과 함께 잠드는 걸 좋아하는 콩을 위해 공을 함께 넣어보낸 모양이었다. 두 장의 사진이 들어간 작은 액자는 박문대가 직접 넣었는데, 한쪽은 여행을 가서 신재현이 찍은 콩의 사진이었고 다른 한쪽은 박문대가 화보 뺨칠 솜씨로 찍어준 사진이었다. 박문대는 제법 아늑하게 꾸며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이 듬뿍 사랑받은 티가 나는 것이 보였다. 신재현은 어디로도 시선을 옮기지 않고 그저 가만히 콩의 유골함과 사진만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참이나 그 앞을 떠날 줄 모르던 신재현은 조용히 인사를 건네었다.

“고마워.”

그 안에 그가 하고픈 모든 말이 꾹꾹 눌러담겨 있다는 것을, 곁에서 듣는 박문대나 어디선가 들을지 모르는 콩이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박문대는 홀로 조용히, 속으로 같은 말을 건네었다. 고맙다. 진심이었다.

납골당을 다녀온 뒤 곧바로 병원으로 가도록 예약을 잡은 것은 일부러였다. 박문대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느냐며 넌지시 건넨 만류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것은 신재현이었다.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늑장을 부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무슨 생각인지 물어볼 걸 그랬나…. 위태로운 상태인 신재현을 대함에 있어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진 박문대는 때때로 이전처럼 강하게 나가는 게 답일지 아닐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물론 신재현은 박문대가 강하게 끌어당길 때마다 순순히 끌려왔다. 다만 난간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손가락 하나로 툭 건드는 것만으로도 추락할지도 몰라서. 자연히 생각이 많아지고 만다.

간만에 다시 운전대를 잡은 박문대는 문득 이전 언젠가 이렇게 병원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신재현은 그때도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박문대를 관찰하기만 했다. 그 시선에는 아마도 의문과 기대가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으리라. 그때 어떠한 긴장감에 의해 어색한 침묵만 흘렀던 것과 달리 지금은 익숙하고 편안한 적막감이 둘의 사이를 가만히 차지하고 있었다.

음악도 없는 조용한 차 안에서, 신재현은 한참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병원에는 뭐라고 말하면 좋죠?”

“사실대로 말해.”

“사실대로?”

“슬프다고.”

아마도 언젠가 신재현은 병원에 간 적이 있었을 테다. 그가 넌지시 언급한 지난 회차의 일화들 가운데 그런 뉘앙스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솔직하게 리셋에 대해 털어놓았을 그 어느 회차의 신재현의 결말이 어땠을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고 구태여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경험에서 나온 다소 삐딱한 되물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박문대는 담담하게 그 비협조적인 태도를 교정했다.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서 따라 죽고 싶을 만큼 슬프다고 말해.”

“…….”

박문대는 돌려 말하길 선택하지 않았다. 신재현이 재시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언정 본질은 결국 죽음으로 얻는 회피의 갈망이다. 그는 다시 시작하고 싶고, 추락하고 싶고, 죽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결코 그리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용히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한 채 대답을 유보하던 신재현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아끼는 존재에는 후배님도 있어요.”

박문대는 조금 웃었다. 신재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기껍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신재현의 상태 이상은 여전히 활성화된 채이므로.

박문대의 꿈속에는 때때로 콩이 등장했다. 아직 그 감촉과 체온과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탓에, 마치 어제도 본 것마냥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만 이전보다 호기심이 줄었거나 신재현이 말한 것처럼 다리가 아파 얌전히 누워만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언젠가의 기억처럼 펄쩍펄쩍 뛰는 콩은 아마 신재현과의 여행에서도 꼭 그렇게 뛰어다녔을까 싶을 정도였다. 박문대와 신재현이 아직 이다지도 가까워질 미래를 예상조차 하지 못한 때에, 한 마리 나비를 쫓아 뛰어가던 것처럼. 꿈속에도 작고 노란 나비가 나왔다. 팔락거리는 날갯짓은 소리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으나 그 파장은 몹시도 커서, 콩의 시선과 신재현의 시선 모두를 사로잡아버렸다. 그리고 박문대는 입을 열어 제게서 멀어진 신재현의 시선을 되돌리려 했다. 꿈인지 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나, 그가 그렇게 마음먹은 것만으로 거짓말처럼 신재현은 박문대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불시에 드러냈던 꾸밈 없는 표정과 마지막으로 받은 콩과의 셀카 속 부드럽게 휜 눈웃음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겹쳐 어우러졌다. 콩은 뒤돌지 않고 이미 나비를 좇아 멀리 사라져버렸으나 신재현은 불안한 눈을 한 채 그 뒤를 쫓지 않았다. 다만 박문대의 몇 걸음 앞에서 멈추어 선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고, 언젠가의 섬광 같은 깨달음처럼 박문대는 인정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나만이 네 유일한 고정축이 되는 것이구나.

스륵 떠진 눈은 좌우로 몇 번 굴린 것만으로도 지금이 제법 이른 아침임을 감지해냈다. 피차 가벼운 불면증을 앓았던지라 침실의 단단히 여민 커튼은 매우 두터워 햇빛을 남김없이 가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난 밤 조금 덜 여며졌는지 혹은 손바닥으로는 빛을 가리지 못하는 탓인지, 틈새로 아침의 흔적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수면이나 정사 중을 제외하면 체온이 오르는 일이 잘 없는 곁의 살갗은 적당히 부드럽게 온기가 돌았다. 잠시간 가만히 바닥을 야금야금 훑는 햇빛의 잔흔을 보며 곁의 느릿하고 규칙적인 호흡을 듣노라니, 문득 몹시도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온기를 찾고, 불확실한 애정에 매달리고, 누군가의 곁을 갈구하고, 결국에는 영원을 약속하게 되고 마는, 어리석지만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에 박문대도 신재현도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한때 그토록이나 불가해의 영역 취급을 한 주제에,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인 마냥 굴었던 주제에,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를 부정할 수 없는 탓에 그만.

조금 커다랗게 내쉰 숨소리와 더불어 뒤척이는 듯한 몸짓이 느껴지더니, 여전히 잠이 뚝뚝 떨어지는 눈꺼풀을 느릿느릿하게 밀어 올린 신재현이 박문대의 머리칼을 힘 빠진 손으로 슥 만져왔다. 그러고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봤는데… 후배님이 금발로 염색하면 좋을 것 같아요.”

“콩이 대신?”

신재현은 나른한 웃음을 조그맣게 터뜨렸다. 한결 가벼운 태도에서 유일하게 무겁게 매달려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채 떨쳐내지 못한 수마 뿐이다.

“아니. 그냥 내가 금발이 좋아서라고 하면?”

“핑계 대기는….”

그러면서도 박문대는 슬쩍 머릿속으로 샵을 예약할 생각을 했다. 언제쯤 날을 잡는 게 좋을까, 팬들도 신인시절 생각난다고 좋아하겠지, 간만이니까 탈색을 좀 여러 번 감행해도 괜찮을지도… 따위의 변명 아닌 변명을 함께 떠올리면서.

박문대는 여닫히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결국 다시 살포시 감긴 신재현의 섬세한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박문대에게 염색을 제안한 오늘 아침의 신재현의 상태 이상은 비활성화된 상태일 것이다. 어쩌면 며칠 전 갑자기 구석에서 미처 치우지 못한 콩의 장난감 하나를 발견해 침울해했던 날에는 잠깐 활성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병원을 다녀왔던 날 신재현은 다소 멍하니 그렇게 말했다. 당연한 거래요. 뭐가? 슬픈 게 당연한 거래. 박문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후로 얌전히 병원을 오가고, 처방받은 대로 약을 복용하고, 박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름대로 잔잔한 일상을 보내는 신재현의 상태 이상은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불규칙적으로 오갔다. 한 번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전에 콩이가 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잖아요…. 그게, 후배님이랑 만나기 전에는 가끔, 밤에 돌아다니나 보더라고 내가. 그 말에 문득 소름이 끼친 박문대에는 아랑곳 않고, 신재현은 메마른 웃음을 힘없이 내뱉었다. 콩이가 내가 자길 버려두고 죽은 걸 기억하는 거면 어쩌지. 미안해서…. 박문대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싸늘한 손을 잡아주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테고 한 마디 말보다 다만 어떤 온도가 그에게는 더 위안이 될 터였다. 그리고 다정한 만큼 밝고, 활기찬 만큼 남 모를 걱정이 많았을 콩을 가만가만히 떠올렸다.

어느덧 신재현의 상태 이상이 비활성화인 나날이 더 많아졌을 무렵, 박문대는 자신이 더 이상 그 상태창에 목매듯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나 가끔 우울을 느끼고 가끔은 충동적으로 자기파괴욕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극복한 채 살아가곤 하는 것일 테다. 신재현 역시 뭇 사람이 무수히 겪었을 그 과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신재현은 여전히 병원에서 때때로 자살 충동을 느끼노라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를 어찌 대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가장 처음의 모든 것을 내려두고 땅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던 신재현을 기억하는 박문대는 그럼에도 그가 단단하고 유연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실을 믿었다. 신재현이 박문대를 믿고 불안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었듯이, 박문대 역시 아직까지는 불안정한 파고를 헤엄치는 신재현을 믿기로 한 것이다. 그는 영원히 방랑하기 위해 풍랑 속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항해를 끝마치기 위해 돛을 올린 것이다. 박문대는 그저, 가장 크고 튼튼한 줄과 닻을 준비해서 부둣가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신재현은 반드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므로. 박문대가 불러도, 부르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다소 늦되더라도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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