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전기양의 꿈 上

白夜 by 極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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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풍경은 늘 비슷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살풍경한 적막은 영화 속에나 나오는 멸망한 행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있는 것이라곤 무너진 것, 부서진 것, 부식된 것 뿐인 곳에서 아직 덜 망가진 남자가 폐허를 불성실하게 뒤적이고 있었다. 무너진 잔해 틈을 뒤지는 이들은 절반으로 나뉘었는데, 낮에 잔해를 뒤지는 이들은 대개 절박한 광인의 모습을 띠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명확히 찾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개 생사여부와 관계 없이 가족이나 지인을 찾고자 했다. 나머지 절반은 해가 진 뒤 은밀하게 움직였고, 무엇이든 돈이 되거나 보잘것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을 찾아 헤맸다. 지금 잔해를 뒤지는 남자의 동작에는 절실함이라곤 한 조각도 존재치 않았으며, 더러는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주었으나 소량의 금이나 멀쩡한 전자 금속이 포함되었을 라디오나 되팔 만한 찢어지지 않은 부츠 따위를 보고도 심드렁하게 굴기도 했다. 그런 점이 그를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한 이로 만들었다. 무엇을 뒤지는지 모를 그 역시 진척도 의미도 없는 행위에 신물을 느꼈는지 엉거주춤하게 굽혔던 등을 바로 폈다.

자리를 뜰 듯 발을 옮기려던 차에 투박한 가죽 보호화에 무언가가 채였다. 사람의 손이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땅에 서 있음에도 일순 빈 목덜미로 소름이 쭉 내뻗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직도 회수되지 못한–정부로부터든 지인으로부터든– 몸뚱이가 많다지만, 실제 사체를 마주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기에 남자는 본능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으나 이내 머뭇거렸다. 보지도 않고 옮긴 걸음이 잔해에 치여 살짝 휘청인 남자는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허리를 굽혔다. 만약 저 시신도 누군가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눈에 띌 수 있게 약간 파내어두는 정도는 괜찮겠지 싶은 생각에서였다. 조심스럽게 돌무더기 몇 개를 옮겨내자 금세 드러난 면면은 잔해 더미 속에서도 제법 멀쩡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같은 것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잘 만들어진 얼굴은 흙먼지가 묻은 것 외에는 깨끗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더더욱 산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쯤 해두고 그만 내버려 둘까.

순간 고민하며 돌아서려는 남자의 손을 확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 내려다보자, 종전까지 밀랍 인형마냥 곱게 감겨 있던 눈이 번뜩 뜨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제법 곱게 다시 휘는 눈으로, 그것이 말했다.

“도와주시겠어요?”

가려던 발이 묶인 채 떨떠름하게 잔해를 치우는 작업을 이어나가자 곧 하반신의 절반은 제법 묵직한 콘크리트에 깔려 있음이 드러났다. 그것마저 들어내었다간 곤죽이 된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듯했다. 남자가 손을 멈추고 망설이는 사유를 눈치챘는지, 그것이 걱정을 덜어줄 요량인 양 알려주었다.

“아, 저는 안드로이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제야 어딘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치워낸 묵직한 철근 아래의 두 다리는 그 말대로 부러지거나 터진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저 종아리 부근의 옷감만 다소 너덜해졌을 뿐이었다.

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해가 손톱만큼 남아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생각보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기분에 별다른 말 없이 일어나 자리를 뜨는 남자의 뒤로, 그가 구한 ‘안드로이드’가 그 뒤를 따랐다. 몇 걸음쯤 무시하고 걷다가 홱 뒤를 돌아보자 예의 웃음으로 무마를 시도한다. 배알도 없이 졸졸 쫓아오는 꼴에 남자는 어쩐지 삐죽한 물음을 내뱉었다.

“무슨 기종인데. 전투형?”

“그렇게 보이나요?”

그 말에 처음으로 안드로이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한 번 죽 훑은 남자는 제가 뱉은 말을 속으로만 기각했다. 늘씬하게 잘빠진 몸체에 섬세하게 조형된 외관은 보는 이의 미감은 만족시킬지언정 전투에서 이점을 차지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제법 인기 있던 기종이었는데. 안티AI이신가봐요?”

남자는 안드로이드치고는 제법 신랄한 말을 하는 면면을 잠시 쳐다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뻗어나간 끝에 끝내 신의 영역까지 두드릴 기세인 인공지능 기술과 그를 탑재한 채 생활 전반 곳곳에 깊숙이 스미게 된 안드로이드라는 존재를. 편이와 미감을 이유로 반려동물보다도 손쉽게 인간의 곁을 차지한 안드로이드는 남자와는 영 인연이 없었는데, 맹랑한 안드로이드의 추측대로 그가 안티AI라거나 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외치는 미친 종교집단이라 그렇다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안드로이드처럼 비싼 사치품에 들일 돈이 없었다. 그러나 방금 만난–기계와 인간의 만남도 만남이라 칭할 수 있다면–안드로이드에게 그러한 사정을 낱낱이 밝힐 이유는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고개를 돌렸다. 외면당하자 제법 대화를 좋아하는 것 같은 특이한 안드로이드는 다시 먼저 말을 붙였다.

“제 기종은 CR-01296487이에요. 가정용 타입이죠. 검색 단말기가 있으면 확인해보셔도 좋아요.”

남자의 본래의 단말기는 맛이 간 상태였으나 멀쩡했더라도 굳이 검색할 수고는 느끼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자신이 읊는 기기 정보를 의심할 멍청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 AI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안드로이드가 조잘대며 쓸데없는 정보를 덧붙였다.

“보통은 ‘청려’라고 불려요. 아무래도 모델링 넘버는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우니까.”

안드로이드에 무슨 이름이 있어? 그러나 뒤돌아본 말끔한 얼굴은 제 이름을 통보한 뒤 무언가를 기대하듯 생글댔기에, 남자는 잠깐 망설였다. 무슨 이름을 대야할지를. 류건우의 본래 신원 단말기는 망가졌다. 정확히는 그 스스로가 부수어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신원 단말 없이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세상에서 그가 멀쩡히 돌아다니는 이유는 그에게 다른 단말기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그가 피신해온 이 8구역이 이런저런 사연들로 정부 눈을 피하는 부랑자 투성이이기 때문이었다. ‘박문대’의 단말기는 그 본래 주인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었다. 류건우는 본의 아니게 한 번 살려주었다가 한 번 죽이게 된 셈인 소년의 흐릿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떨쳐냈다. 안드로이드를, 청려를 흘끗 본 남자는 제 이름을 ‘박문대’라고 답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안드로이드가 졸졸 쫓았다.

안드로이드를 가까이 접한 적이 없는 류건우는 어렴풋이 그것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물건으로만 알았지, 이다지도 말이 많으며 인간을 당황케 하는 물건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스쳐지난 몇 기기들은 하나같이 AI를 탑재하지 않았거나 약인공지능에 불과했기에 주어진 일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와 비교하면 명백히 강인공지능이 탑재된 것 같은 청려는 류건우에게 있어 여러모로 낯설었다.

12거주구 중 여덟 번째 구역—제8구는 매겨진 번호 수와는 달리 중앙에서부터 두 번째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탓에 중앙 행정의 손길이 미약했다. 그에 따라 자연히 정부로부터 켕기는 구석이 있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범죄 사실을 신고해도 그 대상이 수배범이 아니라 거주구 내 일반 범죄면 신고가 제대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인지라 해가 떨어진 뒤면 대부분이 몸을 사리곤 했다. 정부 감시에서 벗어난 곳에 모였다곤 해도, 개중에서도 차등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진짜 흉악범과 생계범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으나 중앙에서는 아마 알 바가 아닐 테다. 류건우는 따지자면 전자에 해당하는 범죄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문대’는 아무런 힘 없는 고아였으므로,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집에 도착하지 못하면 지난 전쟁의 여파로 군데군데 버려진 벙커를 찾아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벙커를 이용한다 해도 운이 나쁘면 범죄의 대상이 되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기에 해가 지도록 바깥에 나와있는 일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벙커 안을 둘러보던 류건우는 연료로 작동하는 휴대용 조리기구들까지 있는 제법 그럴싸한 벙커 상태에 슬며시 눈썹을 기울였다. 수도가 연결되어있지 않아 선택지는 별로 없었지만 딸려있는 작은 창고에는 저장식량이며 주류 따위가 채워져 있었다. 주류와 담배, 그리고 약은 어느 시대이건, 상황이 어려울수록 제법 값비싼 거래 품목이 되곤 한다. 그러나 고수익 거래를 한다는 것은 또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했다. 잠시간 선반을 가만히 훑는 류건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기까지 얌전히 따라왔던 청려가 불쑥 말했다.

“저 사실 요리는 못하는데.”

“뭐?”

딱히 청려에게 요리 요청을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나 반사적으로 의아한 물음이 튀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요리를 못한다면 대체 그밖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심지어는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조리도구와 식료품을 살핀 류건우가 대뜸 가사 명령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안드로이드란 원래 시키지도 않은 일로 지레 호들갑을 떠는 존재인 걸까? 애초에 류건우는 이 안드로이드의 소유주도 아니었다. 안드로이드가 버려진 개도 아니고, 아무나 덥석덥석 따른다는 게 말이 되나.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류건우는 조리된 캔 보존식품을 두 개 꺼냈다. 그리고 낡은 식탁 위에 그것을 올려두고서야 문득 떠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음식은 먹을 줄 알아?”

식품 섭취의 가능여부에 대한 질문이었으나 직전 화제와 연속하니 마치 비아냥대는 것만 같이 들렸다. 류건우는 괜히 민망해진 탓에 작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조금 전까지 모래바람을 들이마신 탓에 정말로 목이 껄끄러운 것도 같았다.

“뭐든 먹을 수 있죠. 맛은 잘 못 느끼지만.”

먼저 캔의 뚜껑을 딴 류건우는 포장된 일회용 식기를 뜯어 내용물을 휘젓다가 문득 생각했다. 뭐든 먹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천천히 숟가락으로 굳은 내용물을 휘젓고 한 입 떠먹자, 스튜도 아스픽도 아닌 차갑고 질척한 애매한 식감과 맛이 기분 나쁘게 입안을 맴돌았다. 찌푸리며 캔 표면을 훑어보자 보존식품이니만큼 적어도 열량만큼은 보장된 듯하여 참기로 한 류건우는 잠자코 몇 숟가락을 더 떠먹었다. 와중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일한 일행 쪽으로 옮겨갔다. 더하거나 덜한 움직임 없이 얌전히 보존식품을 떠먹는 모습은 무척이나 사무적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류건우는 제 캔 안의 뭉글한 내용물을 내려다보며, 제 식사 장면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02.

청려는 가정용 안드로이드인 것 치고는 입을 놀리는 것 말고는 영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바로 그 점만이 몇 없는 장점이기도 했다. 적막이 당연한 공간 속에서 류건우는 자주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는 늘 좋지 못한 신호였다. 운이 좋으면 그저 공상에 빠져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있기 일쑤였고 더러는 악몽을 꾸거나 그가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일들이 무성영화처럼 스치기도 했고, 운이 나쁘면 그대로 알지 못하는 과거에 매몰되어 며칠을 인사불성 상태로 앓기도 했다. 그러다 깨어나면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지라 땀투성이가 된 채로 가만히 널브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싸늘한 공간에서 말라가는 식은땀은 종종 그에게 달갑지 않은 몸살을 안겨주기도 했다. 모두 홀로 생각이 너무 많은 탓에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두서없이 제 하고 싶은 말을 주절대며 신경을 은근히 긁는 청려와의 대화는 그를 달갑지 않으면서도 내치기 어려운 위치로 격상시켰다. 혼자 지내는 일이 얼마나 인간을 나쁜 상태로 밀어넣는지, 그리고 상대가 설령 안드로이드라 해도 상호의 대화 작용이라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싫어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류건우는 때때로 잠 속에서 곧잘 악몽으로 빠져들었으나, 헐떡임과 함께 깨어나는 일은 있어도 감기몸살에 시달리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류건우가 악몽에서 깨면 청려가 미지근한 물을 건네고는 그를 일으켜 소파로 치워버리기 때문이었다. 요리와 침대정리는 별개의 가사로 분류되는지, 청려는 제법 말끔한 솜씨로 땀에 젖은 시트를 걷어내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곤 했다.

그날도 적당히 서늘한 청려의 손에 이끌려 겨우 기운 없는 몸뚱이를 일으켜 옮긴 류건우는 낡은 소파에 기대 멍하니 청려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득 손가락을 문지르자 방금의 산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온도가 남아 느껴지는 듯했다. 새 요를 가져와 깐 청려는 튀어나온 천 끄트머리를 안쪽으로 말끔히 밀어 넣으며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원래 이 지역에 살지 않았나 봐요?”

잠깐동안 류건우는 제가 잠꼬대로 이상한 소리라도 하지 않았나 눈을 가늘게 뜨고 청려의 뒷모습을 살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는 동안 내뱉은 말은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를 리가 없었다. 베개를 똑바로 놓은 청려가 뒤돌아 널브러진 류건우를 마주하며 덧붙였다.

“말해두지만 자는 동안 이상한 말은 안 했고. 집을 둘러보니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오랫동안 비웠던 것 같고, 다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청려의 말에 반사적으로 한 번 훑은 집안은 류건우의 눈에는 그다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다른 집에 머물거나 교류한 일은 없다시피 했으니 보통의 가정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기도 했다. 그 차이를 어째서 인간도 아닌 청려가 아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이내 그가 폐허에 파묻히기 전에는 누군가의 안드로이드였으리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나 누가 되었더라도 저보다는 인간 사는 꼴을 해두고 살리란 사실쯤이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박문대 씨는 어디에서 왔어요?”

그제야 제가 청려에게 훔친 신분–넘겨받은 것이었으나 류건우는 어쩐지 도둑이 된 것만 같은 미약한 죄책감을 느꼈다–의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 와 정정하려면 다른 이야기들도 함께 꺼내어야만 한다. 그 사실이 망설여지면서도, 한 손에 여전히 들린 물잔과 다른 빈손에 스치듯 남은 어떤 온도가 그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제13구에서 왔다면 어쩔래?”

그 말은 곧 류건우 스스로가 정치사범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문득, 일반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제13구라는 별칭이나 정치사범이나 테러에 대한 것을 알기는 할까 싶은 의문도 떠올랐다. 멀뚱멀뚱 류건우를 쳐다보던 청려는 아, 하고 가식적인 작은 탄성을 내뱉더니 대답했다.

“그러면 저는 범죄자를 따라온 거네요?”

평소의 묘하게 거슬리는 웃음과 다를 바 없는 반응에 되려 기운이 빠진 류건우는 물잔을 내려두고 등이 낮은 소파에 팔을 뻗고 눕듯 기대어버렸다.

“그러는 너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데?”

“안드로이드니까 주인을 따라 왔죠?”

류건우는 교본에나 나올 것 같은 그린듯한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가사도 하나 할 줄 모르는 안드로이드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고?”

청려의 은은한 미소는 아주 짧은 순간 흐트러졌으나 그는 태연히 뒤쪽의, 제가 호텔 침대마냥 정리해둔 이부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기싸움이라도 하듯 구는 태도에서 한발 먼저 물러나 준 것은 류건우 쪽이었다. 단순히 좀 전까지 악몽에 시달린 탓에 대치할 기운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치고, 일반 안드로이드가 제13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지?”

청려는 대답을 가늠하듯 눈을 잠시 가늘게 떴다가, 시선을 슬쩍 옮겼다가, 결국은 다시 류건우를 마주 보았다.

“박문대 씨가 중요한 개인정보를 알려주었으니까 저도 말할게요. 저는 사실 양산형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누군가의 바이오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초인공지능이거든요.”

“누군가?”

“물론 원본을 밝힐 수 없는 점은 이해해주세요.”

류건우는 멍하니 ‘청려’에게 바이오맵과 데이터를 제공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 원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나 청려가 그를 바탕으로 특별제작된 개체라면 상당수가 바이오맵 제공자를 닮아 있으리라. 요리는 못하지만 침대를 비롯해 물건들은 정리벽이 느껴질 만큼 깔끔하게 매만지는 점이나, 사람을 은근히 떠보고 긁는 것 같은 화법이나, 지나치게 잘 조형된 말끔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같은 것들……. 그리고 불현듯 청려가 ‘중요한 개인정보’라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확실히 류건우가 흉악범 수용소인 13구에서 탈주한 정치사범이라는 점은 중요정보였다. 청려가 이 정보를 중앙에 제보한다면 이 외딴 폐허까지도 관리국은 단숨에 들이닥쳐올 테고, 류건우의 것도 아닌 청려는 손쉽게 중앙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중대사안을 제입으로 털어놓았으나, 어째선지 위기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시 밀려오는 피곤함에 눈을 감으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신고할 거면 나 깨고 나서 하든지….”

그리고 가물거리는 귓가로,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미묘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을 청려의 대답이 들려왔다.

“사양할게요,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잠인지 기절인지 모를 무의식에 빠지기 직전, 류건우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의지가 청려의 것일지 아니면 그가 가진 바이오맵 주인의 것일지, 아무래도 좋을 사안에 대한 것을 잠시 생각했다.

잠에서 깬 류건우는 느즈막히 나갈 채비를 했다. 청려를 주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튼튼한 가죽 보호화와 장갑을 갖추었지만 무언가 발견한 것을 담아올 만한 가방 따위는 챙기지 않았다. 며칠간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만 봤던 청려는 벼르기라도 했는지 집안을 훑어–정확히는 ‘스캔’하여–매우 낡고 해졌으나 그 나름 쓸만은 한 가방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류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언가 돈이 될 만한 걸 줍기 위해 폐허를 뒤지는 이가 아니었다. 결국 빈손으로 집을 나선 류건우의 뒤를 한참 말없이 쫓던 청려는 어제와는 또 다른 잔해더미 앞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며칠간을 묵혔던 질문을 던졌다.

“박문대 씨는 무엇을 찾고 있는 건가요?”

그 별것도 아닌 질문이 마치 무언가 기제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맥이 풀려버린 류건우는 굽힌 허리를 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다면 쓸모없을 행위를 하며 시간을 보낸지 벌써 한 시간은 지났다. 말 많은 안드로이드가 며칠은 묵은 호기심을 간신히 참아내기에도 아슬한 시간이었다.

“나도 몰라.”

내뱉고보니 무척이나 어디 한군데 이상 망가진 8구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처럼 들렸다. 왠지 모를 낯부끄러움에 오소소 소름마저 돋는 듯했다.

청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으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에요.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갈구하는 게 인생이라고도 하잖아요.”

안드로이드가 건네는 위로라고 해야 할지 동조라고 해야 할지, 류건우는 딱딱하면서도 인간적인 말에 힘빠진 웃음을 흘렸다. 문득 가사 일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듯한 청려가 자신을 가사용 안드로이드라 당당히 소개한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청려는….

“너는 집안일 전문이 아니라 말상대를 하는, 뭐… 그런 가사 안드로이드였던 건가?”

“위로는 전문이거든요.”

어쩐지 영 찜찜하게 들리는 듯한 뉘앙스의 대답을 애써 무시하며, 무엇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소득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그대로 류건우는 그저 허송세월을 보내는 중인 것뿐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무슨 목적을 지닌지도 모르는 채, 스스로의 기억도 모호한 채로. 결국 빈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의미없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자 차라리 잔해를 뒤져 값 되는 것들을 팔아 푼돈이라도 마련했다면 덜 허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멈추어 선 류건우를 조심스레 살핀 청려는 제가 도와주겠다며 처음으로 팔을 걷어붙였으나 류건우는 그를 만류했다.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스름이 깔리긴커녕 해가 쨍한 낮에 집에 돌아왔다.  아마도 기억하기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본래도 그다지 살기 좋지는 않았던 제8구는 한차례 소탕 전쟁을 겪은 뒤 그 취급이 더욱 구렁텅이로 빠졌으나, 가만 살펴보면 그래도 낮의 거리와 사람들은 아직 제나름 활기찬 구석이 있었다. 낮의 폐허를 지나는 사람과 밤의 폐허를 지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부류인 법이었다. 지레 짐작으로 부랑자와 범죄자의 구역에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키고 있었던 건 류건우였다. 모습이 얼마간 변했든 간에 간만에 돌아오게 된 그의 고향이었음에도, 수감되었을 적에는 그리도 돌아가고 싶어했음에도….

집에 돌아온 류건우는 심란한 동시에 왠지 모르게 피곤한 기분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곧바로 잠들고 말았다.

03.

열두 개의 거주구 사이사이에는 각종 교화 목적을 지닌 세 개의 섹터가 존재했다. 범죄질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뉘며 그에 따라 수용된 이들은 완전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은 주변 거주구와 교류를 유지한다. 중앙이 선전하는 훌륭한 교화 효과는 그 환경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제4섹터—일명 제13구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중앙 섹션을 비롯해 전체 거주구의 모든 것을 관망하는 센트럴 타워를 기준으로 뒤쪽, 즉 가장 화려한 곳의 그늘에 존재했다. 그러한 위치가 4섹터에게 13번째 거주구라는 우습지도 않은 별명이 붙게 만들었다. 함부로 사회와 접촉시킬 수도, 그렇다고 멀찍이 떨구어둘 수도 없는 골칫거리들만이 13구에 이송되었다. 정치사범이라는 죄목은 13구의 무수히 많은 흉악범 중 한 갈래일 뿐이었으나 동시에 이상理想도시에서 가장 질 나쁘다 지목당하는 죄목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센트럴 타워의 정면은 도시의 야경을 책임지듯 화려하고 거대했으며 중앙 거주민의 은근한 자랑거리였으나 뒤쪽에서 보는 타워는 그야말로 파놉티콘이었다. 새카맣게 죽은 뒤쪽으로는 어떤 불빛도 비치지 않았으나 그곳으로부터 가장 맹렬한 감시의 시선이 끊임없이 내리꽂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13구 안의 죄수들은 그러했다. 정부가 낙인 찍은 교화불가능 인간들만 모아두었다곤 해도, 그 안에서도 비교적 심약한 이는 존재했다. 어쩌면 숨 막히는 환경이 한계를 부른 것일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새카만 센트럴 타워의 그림자를 보는 류건우의 옆에는 누구에게 올리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기도를 읊는 이가 있었다. 현대의 기술이 신조차 모독한다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참으로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듣는 이도, 그를 가엾이 여겨 죄를 사해줄 이도 없는 피곤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차라리 정형행동이라 보는 편이 옳았다. 물론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어루만진다는 최첨단 기술은 13구의 병리까지 구제해주지는 않는 법이었다.

류건우는 방 배정 운조차 없었는지 그와 한 조로 묶인 이들은 하나같이 이미 지독하게 병든 이들이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광신도와 끊임없이 눈을 좌우로 굴리는 인간 진자운동기와 쉴 새 없이 정부 욕을 주워섬겨 금방이라도 처형당할 것 같은–물론 사형은 폐지된지 오래되었다–정치사범 하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류건우의 목에 걸린 분류표 역시 정치사범이었다. 우스운 점은 저와 같이 들어왔다는 테러범이 류건우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상대 역시 류건우를 알지 못하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보였으나 이내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동료라 생각했는지 의문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 뒤 몇 차례의 의례적 심문을 당했는데, 마지막 심문을 맡은 간수는 척 보아도 테러범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류건우를 나름 불쌍히 여긴 듯했다. 그가 슬며시 긔뜸하기를 류건우와 함께 잡혀 들어온 그 테러범에게 약한 안면식별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단다. 그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우습지도 않은 촌극에 류건우는 그저 웃어버렸다. 요즘 세상에 운이 나빠 정치사범으로 몰렸다는 호소를 하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누군가 그런 변론을 한다면 류건우 본인조차 코웃음을 칠 것이 자명했다. 그나마 조사가 진전되고 진상이 파헤쳐지면 누명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위로도 듣기는 했다. 이전까지 중앙 정부 아래 충실한 시민이었던 류건우는 그 빈약한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야속한 희망은 두 달만에 산산조각났다.

13구에 들어온 계기도 나가게 된 계기도 모두 테러로 인한 폭발이었다. 아무래도 잔당들이 수용된 테러범 동료의 구출이라도 하는가 보지. 뚫린 방화벽을 넘어 도망갈지 말지 망설이는 이들 사이에서도 류건우는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나가도 죄목만 늘어 재수감될 것을 굳이. 류건우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시민 계급으로서 정당한 사면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도망쳐 봤자 현대사회의 감시 속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아랑곳 않는 범죄자 집단이나 이 기회를 틈타 다시 지하나 폐허로 숨어들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기다리면 정말로 억울함이 풀리기는 하는 걸까? 묘한 체념이 두 달간 류건우를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 새카만 파놉티콘, 도시의 그늘과 감시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어갔다.

그때 혼란에 빠진 그의 몸뚱이를 벌떡 일으킨 것은 여러 소음 속에서도 정확히 들려오는 총기의 폭음이었다.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번뜩 스쳤다. 이 개자식들은 그냥 테러를 핑계로 처치 곤란한 범죄자들을 한차례 쓸어 정리할 생각인 것이다. 사형은 불법이 되었으나 보안법에 의한 즉결처형은 여전히 유효했으니까. 어쩌면 이번 테러 또한 진짜 테러범 잔당의 짓이 아니라 중앙의 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지금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등 뒤로는 몇 개의 몸뚱이가 총알에 스러졌는지 모르겠다. 류건우는 확신도 없이 달아났고, 여태까지의 악운의 보상이라도 되듯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지옥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약간의 희열감도 잠시, 개인식별 단말기를 가진 이상 중앙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도로 붙잡히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 최대한 검열기 없는 낡은 골목을 골라 천천히 움직이던 류건우는 쥐새끼 같은 제 신세에 헛웃음을 짓고는 욕을 내뱉었다. 홧김에 근처의 캔을 발로 차자 조용한 골목에서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되거나. 둘 중 어느 쪽이 나은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들자 은신처 삼기엔 영 빈약한 가로등 그늘에 숨은 그림자가 보였다. 정부군이라기엔 조그만 몸뚱이의 그림자가 놀라 넘어진 걸 보면, 순간 경계를 내비친 류건우의 시선이 아무래도 제법 서늘했던 모양이었다. 잠시간 제 행색을 되새겨본 류건우는 제가 탈옥범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 실제로 막 탈옥하기는 했는데.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일어난 몸뚱이는 아직 어린지 생각보다 아담했다. 류건우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지나쳐 뒤쪽으로 쭈뼛쭈뼛 시선을 던지며 움직이는 모습에 순간 스치는 예감이 입을 열게 했다.

“저쪽으로 가게?”

다행히도 목소리는 제법 덜 미친 놈처럼 들렸다. 어쩌면 숨이 찬 탓에 헐떡이느라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상대도 그리 느꼈는지 비로소 드러난 빛 아래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심지어는 묻지도 않은 이유도 늘어놓았다. 변명이라기보단 스스로를 북돋우는 행동에 가까워 보였다.

“부모님이, 저기 계셔서…,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다 고개를 푹 숙인 소년은 한달음에 류건우를 지나쳐 달려갔다. 말리거나 채 어떤 반응을 할 새조차 없었다. 숨을 갈무리하며 탄식을 뱉은 류건우는 복종이나 불복종, 죄의 경중에도 관계 없이 모든 움직이는 대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이 난사되던 광경을 떠올렸다. 소년의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총알받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도 그 주변은 아수라장일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어슬렁거리다가는 그냥 개죽음 당하기 딱 좋았다. 그저 도주 중인 테러범 근처에 있다가 함께 잡혀들어간 류건우가 좋은 예시였다. 더군다나 소년의 부모가 정말 흉악범이라면, 소년의 죽음에 제기될 이의나 정의는 존재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방금 마주쳤을 뿐이고, 같은 수용소에 있었다 해도 소년의 부모를 류건우가 아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는 겨우 빠져나온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정도의 선량한 멍청이도 아니었다. 그 자신만 해도 운이 좋아 겨우 빠져나온 것이었다. 류건우는 억지로 소년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귓가로 아직도 골을 울리는 것만 같은 굉음이 잔향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는 건 미친 놈도 하지 않을 선택이다. 미쳤냐고, 그곳에서 어디 하나 꿰뚫리지도 않은 채 멀쩡히 살아서 빠져나온 것은 평생의 운을 끌어다 쓴 수준의 일이었다.

…왜 악운에 악운 뿐인 삶에서 오늘만 기적처럼 운이 좋았을까. 씨발.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류건우는 걸음을 되돌려 사라진 소년의 뒤를 쫓았다. 선량은 모르겠고 멍청이는 확실하군, 자조적인 비웃음도 잊지 않은 채.

아직 간만에 찾아온 운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류건우는 열상 몇 개와 맞바꾸어 멍하니 덜덜 떠는 소년을 겨우 끄잡아내올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마도 똑같이 13구를 빠져나오다 총에 맞은 듯한 소년의 아버지는 피 흘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도망치다 골목 어드메에서 그대로 눈을 감은 듯했다. 소년은 위험천만한 13구까지 가지 않고 제 부모를 찾아냈다. 친부의 사체를 마주하고 망부석처럼 굳어 새하얗게 질렸던 소년은 류건우의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에 제 혈액이 빨려 나가기라도 하는 양 더욱 희게 질렸다. 위로랍시고 어디 부러지거나 터진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 지껄였다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류건우는 말재주 없는 저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의 집은 겉으로는 가장 화려한 중앙에서도 이런 지역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어둑하고 허름해 보이는 골목지에 외따로 위치해 있었다. 잔뜩 굳은데다 새하얗게 질려 기계보다 더 덜컥이는 움직임을 보이던 소년은 익숙한 집에 들어서자 그나마 안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자 그가 제법 명석하고도 불행한 아이임이 드러났다. 소년은 류건우에게 제 단말기를 건넸다. 탈옥한 류건우가 중앙을 벗어나 멀리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건네받지는 않은 채로, 류건우는 그저 아직은 조금 부드러운 손에 들린 단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도 제법 호구짓을 자처했다만 그렇다고 제 단말기를 내어주는 호구가 세상에 어디있느냔 말이다.

“나 도와주면 너도 범죄자 되는 거야.”

그 탓인지 제법 날카롭게 나간 발언에도 소년은 꿋꿋했다.

“제 취급은 이미 예비 범죄자 같은 걸요.”

소년의 부모가 13구 수용범이랬던가. 요즘에도 부모의 범죄이력으로 자녀의 범죄 가능성을 따진단 말이야? 세상 아무리 발전해봤자 구린 인식은 도통 변화하질 않는다.

“넌 단말기 없이 어떡할 건데.”

“여기 12로는 식별기도 거의 없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여차하면 엄마가 남긴 단말기도 있고…….”

그러고는 아차 싶은지 소년은 묻지도 않은 설명을 또다시 덧붙였다. 아무래도 수용된 것은 소년의 아버지 뿐이고 어머니는 실종된 상태인 듯했다. 실종이라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단말기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그러나 류건우는 굳이 그런 잔혹한 현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실종신고는?”

“할 줄 몰라서….”

신고를 할 수 있었더래도 단말기 없는 인간이 검열망에 걸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유 모를 갑갑함에 따르는 한숨을 간신히 삼킨 류건우는 단말기를 받아들었다. 중앙의 그늘은 굳이 범죄자 수용소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화려한 중앙 도시에도 나누어진 구역에 따라 차등이 존재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거주구에 사는 범죄자의 자식에게는 등록된 가구 수를 토대로 한 배식은 내려오겠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사라진 가족의 실종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소년에게는 늘 2인분의 식료품이 배급되었으나 두 배의 음식이 어린 마음의 공허를 달래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아무한테나 마음 여는 게 괜찮은 건가….

류건우는 소년의 단말기를 제 손목에 차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다시 와서 실종 신고 대신 해줄게.”

미약한 부채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튀어나온 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기약도 실재성도 없는, 고작 구두의 약속을 두고도 소년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고아나 마찬가지이면서 반쯤 범죄자 취급을 받는 소년에게 부모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겠지. 그건 류건우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무고를 호소해줄 누군가가 존재했다면 이토록 오래 수감되어 억울한 누명이 기정사실화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제는 진짜 탈옥수가 되어 돌이킬 수조차 없는 입장은 진짜 범죄 조력자가 되어버린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달갑지 않은 동질감이었다. 어쩐지 씁쓸한 입매를 꾹 힘주어 누르며, 류건우는 소년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잠에서 깬 것은 그 순간이었다. 뒤죽박죽하고 시끄러우며 몸뚱이를 아프게 할 뿐이었던 악몽이 제대로 된 시간선과 개연성을 가지고 정렬된 것은 처음이었다. 악몽이라기보다는 잊은 기억을 마침내 복원해낸 과정에 가까웠다. 꿈속에서 매번 아팠던 이유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야 죽도록 뛰고 총까지 맞았으니 열이 끓게 아팠지. 깔깔한 목으로 단 숨을 겨우 내쉬자 불쑥 시야로 물잔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여상한 표정으로 청려가 물잔을 들고 있었다. 건네받아 삼 분의 이쯤 채워진 물을 한 번에 모두 들이키는 류건우를 가만히 지켜만 보던 청려가 물었다.

“밤이 힘들면 위로라도 해줄까요?”

물을 모두 삼킨 뒤가 아니었다면 이부자리 위로 도로 내뿜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는 류건우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청려는 고개를 아주 약간 모로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일전에 위로가 전문이라는 둥 내뱉었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것의 연장선 같았다. 새삼 생각하지만, 류건우는 안드로이드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놀리는 물건인지 아리송함을 느꼈다. 물론 류건우는 청려의 주인이 아니지만.

“…그런 취미도 없을뿐더러, 네가 무슨 섹서로이드도 아니고.”

어물쩡 넘어갔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못을 박듯 거절의사를 말했다. 다소 낯부끄럽지만 이렇게 말해두지 않으면 이 짓궂은 안드로이드는 다음에는 어떤 희롱을 해올지 몰랐다. 투덜대며 잔을 쥐지 않은 빈손으로 침대 맡에 다가앉은 청려를 약간 밀어내자 귀를 의심케할만큼 달뜨고 끈적한, 가식적인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눈을 부릅뜨고 굳은 류건우에게, 밋밋한 얼굴로 신음을 내뱉은 청려가 덧붙였다.

“저 잘할 수 있는데.”

쯧, 혀를 차며 벌떡 일어선 류건우는 다소 거친 손길로 청려를 침대에 밀어 넣고는 그 위로 이불을 덮어버렸다.

“닥치고 잠이라도 자.”

성큼성큼 부엌으로 가 빈 잔에 새로 찬물을 채운 류건우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새벽에 깨면 으레 그래왔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찌르르 하게 올라오는 미약한 두통이 냉수의 탓인지 청려의 탓인지 악몽의 여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셋 모두 원인인지도 몰랐다. 그새 이불 맡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청려는 밉살스럽게도 지극히 사실적인 지적을 덧붙였다.

“안드로이드는 잘 필요가 없어요.”

류건우가 대답 없이 인상만 조금 찌푸리자 가만히 눈만 깜박이던 청려는 이내 정말로 잠이라도 자려는 양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얌전히 감긴 눈두덩 위로 제법 길고 빽빽한 숱의 속눈썹이 가는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하얀 뺨 위로 새벽 그림자가 어른거려 마치 무기질의 몸뚱이가 규칙적인 호흡이라도 내쉬는 것처럼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반듯하게 누운 것도 아니고 류건우가 멋대로 쓰러트려 옹송그린 자세 그대로, 헝클어진 이불을 반쯤 덮은 그 모습은 마치 진짜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류건우는 이내 눈을 돌려버렸다.

04.

마침내 기억을 온전히 떠올려낸 류건우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꾸렸다. 집을 나서면서 류건우는 문득, 청려가 했던 평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비웠고, 언제든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집. 물론 이 집은 류건우가 억울하게 체포당하기 이전부터 쭉 그가 살아왔던 집이었다.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명으로 수감되어 있던 탓이었고 어찌저찌 돌아온 뒤에는 다시 살기 시작했음에도 청려가 말한 붕 뜬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삶에서 도려내어져 있었던 기억과 시간만큼 익숙했던 것과도 거리감이 생겨버린 것만 같았다.

이전에 집을 떠난 것은 타의에 의한 수감 탓이었으나 다시 이 집을 떠나는 것만은 자의였다. 소년과의 약속이 떠올라 지키러 가는 것뿐이지만 적어도 이것이 온전한 자의라 생각하고 싶었다. 류건우는 낡은 지도와 도시 안내도를 꺼내 묵묵히 눈에 담았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청려가 제안했다.

“단말기로 최신 정보를 참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생각지도 못했으나 당연한 말에 잠시 얼이 빠진 류건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단말기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아무래도 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받은 것이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단말기를 쓰는 것이 영 어색한 일처럼 느껴졌다. 소년에 대해 떠올리지 못했을 적에도 단말기는 거의 필수 부착품처럼 착용하고만 다녔을뿐 조작한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8구의 기본 풍조라 그렇다고만 여겼으나 아무래도 무의식 중 부채감이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도시라는 게 그렇게 단기간에 크게 바뀌지는 않는 법이라 발행된 지 몇 년이 된 안내도와 검색으로 찾은 안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하는 세부사항을 참고한 류건우는 조심성을 기하기 위해 곧바로 목표인 중앙구역으로 직행하지 않고 근처 제2구를 목표로 삼았다. 본래 가장 가까운 제1구를 생각했으나 예의 ‘탈옥 사건’ 이후 각종 대형 산업이 밀집한 제1구의 보안이 심각할 정도로 높아진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본디 관광 산업 중심이던 제2구는 아직까지 가장 개방적인 곳 중 하나로 그 기조를 유지하는 듯했다.

모든 인간은 개인 식별 단말기를 착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으로 취급받지도 않지만, 안드로이드는 이미 등록된 내장 칩이 존재하므로 유형의 단말기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아니며 고지능이 탑재된 기계일 뿐이다. 그럼에도 좌석을 끊을 때는 두 명분의 몫을 결제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 분의 몫을 차지한다. 옆에 소유주가 없으면 그저 고철덩어리에 불과함에도. 류건우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도시 횡단 열차의 구석 칸에 몸을 뉘였다. 비교적 값싼 끄트머리 칸은 약간의 덜컹임과 주변 승객 탓으로 인한 소음이 존재했으나 풍경만큼은 거의 모든 칸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으므로 아무런 사감도 들지 않았다. 물론 끄트머리 칸인 탓에 고개를 쭉 빼면 먼저 달려나가는 앞칸의 나열이 보였다. 같은 열차에 타고 있지만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 쪽은 앞이고, 뒤를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시야에 담는 것조차 않는 것도 앞이다. 류건우는 몸에 힘을 쭉 빼고 고개를 헤드에 기댔다. 처한 상황이 이러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싶었다. 

도시 횡단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청려는 내내 류건우의 옆에 붙어 있었으나 처음 주웠던 날과 달리 무언가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당연히 집 바깥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계산되는 탓이었다. 8거주구 주민인데다 수배범 신세였던 류건우에게 돈이 넉넉히 있을 리 없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제 명의의 개인 계좌는 확인할 것도 없이 수감과 동시에 압류되었거나 최악의 경우 말소되었을 것이고…. 박문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조회해본 단말기에는 부모가 넣어둔 용돈인지 자녀의 미래를 위한 적금인지 모를 소정의 돈이 든 개인 계좌가 있었다. 왜소하고 작게 보였으나 보기와는 달리 소년 박문대가 만 십칠 세가 넘었다는 의미였다. 아마 처음 단말기를 받아 도망쳤을 때에도 여기에 등록된 계좌 금액을 이용해 좌석을 구매했을 테지만, 그때의 기억은 나지 않았기에 류건우에게 있어 이는 거의 새로운 사실이었다. 은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 그의 돈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동시에 류건우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동시에, 이제는 몸이 아플 정도로 기억에 매몰되어 앓는 일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곁을 지키는 청려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 존재했기에 류건우는 그에게 열차 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식품 따위를 권했다. 청려는 자신이 안드로이드임을 상기시키며 대신 류건우에게 식사를 권했고, 제 돈이 아닌 이상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던 류건우는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열차는 중간 중간 도시 거점마다 멈추어 섰지만 갈 길이 먼 데다 관광을 온 것도 아닌 류건우 일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여러모로 낭비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거의 들킬 일 없겠지만서도 수배범이라는 신분이 류건우를 못내 불안케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오자 비로소 주변 다른 것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제아무리 쾌적한 열차 내부라 해도 밀폐된 공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에 제3구 즈음 이르러 류건우와 청려는 처음으로 열차에서 잠시 내렸다.

도시의 정거장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구조의 건물에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가판대와 똑같은 체인의 식품이 구비된 자동판매기. 관광이나 요식업을 자랑하는 구의 경우 그 옆에 다른 기념품 따위를 함께 판매하는 경우도 있으나 평범한 산업지구인 제3구 정거장은 가장 보편적인 기본형태만을 갖추고 있었다. 정거장마다 으레 놓인 따분한 가판대를 눈으로 훑은 류건우는 그중에서 중앙에서 발간하는 주간지를 발견했다. 가장 위의 두 줄을 통째로 차지하는 중앙 발간지는 고작해야 지난주와 이번주 호밖에 없었으므로, 그 안에는 그가 찾고자 하는 정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어느 수배범에 관한 것이라든가 하는 소식 말이다. 한동안 여러 기억이 드문드문 비거나 뒤죽박죽 섞인 채 지내다가 사건 전말을 떠올려낸지 불과 며칠, 게다가 원체 소식이 느린 제8구의 환경까지 더해 요즈음 중앙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청려가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최신 정보를 찾아야겠단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다. 딴에는 제1구의 검문이 강화되었단 것까지는 알아냈으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중앙 직통 발행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결국 망설임 끝에 계간지에 두 주 분량 주간지까지 돈을 털어 산 류건우는 그다지 쓸모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간지 두 부는 청려에게 넘기고 저는 계간지를 펼쳤다.

계간지에는 과연 떠들썩했던 제4섹터 테러 및 탈옥사건–류건우는 코웃음 쳤다–이 게재되어 있었다. 근래 손에 꼽을만한 충격적이며 끔찍한 사건이라 대서특필 되고 있으나 사상자가 모두 악질 범죄자에 불과한 이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이름 따위가 세세히 실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중앙 행정은 사상자 명단을 모두 파악해두지 않았을까…. 그 안에 류건우가 들어있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명단은 없다지만 사상자 수는 적혀 있었다. 전체 742명의 수용범 중 127명이 현장 즉결처분을 당했고 내부의 238명–절반 이상은 치료받지 못해 죽었으리라–이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사 안에는 당연하게도 무사히 탈옥한 사람 수따윈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수감되었던 부모를 잃고 어느 고아가 된 소년의 말로 따위도 실려있지 않았다. 과연 그날 몇 명이나 지옥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을까. 과연 류건우 외에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

꼬리를 물고 마이너스 사고에 파묻히려는 순간, 곁에서 들려오는 느릿한 청려의 말이 생각의 연쇄를 끊어냈다.

“중앙은 제가 기억하던 것과 다르지 않네요. 여전히 모든 게 완벽히 돌아가고 있어요.”

“완벽히?”

저도 모르게 코웃음 친 류건우는 제가 겪은 불합리가 청려로 인한 것이 아님을 상기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얇은 주간지를 덮은 청려가 평소보다 느리고 약간은 붕 뜬 것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네, 완벽히.”

류건우는 청려의 가늘고 곧게 쭉 뻗은 손가락 아래 반질한 표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처음부터 8구에서 살았으니까 애초에 중앙에 올 일도 없었어.”

청려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쓸데없는 말까지도 나불대면서 이런 순간에는 꼭 적재적소의 침묵을 이용하는 게 고지능 안드로이드가 맞기는 한가 보다 싶어 오히려 쓸데없는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류건우는 누군가에게 꺼낸 적 없는 그날의 뜨문뜨문한 기억을 더듬어 꺼냈다.

“말로는 테러 현장에서 함께 체포되었다고 하더라고.”

류건우는 기가 막히게도 안면인식 장애가 있었다던 테러범과 어이없게도 딱 그 현장에 있었다던 자신의 우연을 떠올렸다. 그러나 전부 들은 사실에 의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고 복원된 어설픈 기억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억에 없어.”

최소한 당국 기준으로는 의심할 만한 건수가 있었으니 체포를 당했을 테고, 체포되었으니 수감되어 있었을 텐데 그 순간들의 기억은 여전히 아리송했다. 잊었던 탈출의 날과 약속을 다시 기억해냈음에도 여전히 체포의 순간만은 부옇게 흐린 수준도 아니고 도려낸 것처럼 뻥 뚫려 있었다. 바로 그 탓에 제 결백과 무죄를 믿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쩌면 제가 진짜 테러범이 맞으며 단지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존재했다.

“놀랍지는 않네요. 테러범이라면서 그 목적조차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렇지만 문대 씨가 테러를 일으킬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기도 해요.”

나름의 위로인지 뭔지, 청려는 평소처럼 저 좋을 대로 지껄였다. 심지어는 늘 붙이던 성마저 떼고 조금 더 가까운 사이인 양 말한다. 류건우는 바람빠지는 것 같은 소리로 기운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애초 진짜 이름도 신원도 아닌 겉껍데기만 아는 주제에. 어떻게 류건우 본인보다 결백을 더 확신한다는 말인가.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아, 그렇네요. 전 안드로이드니까.”

자조와 피로감이 잔뜩 묻은 날카로운 비난에도 청려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긍정할 뿐이었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쉬이 감정이 상하는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니까. 그 여상한 태도에 한순간의 충동으로 내뱉은 말을 금세 후회하게 된 류건우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나지막이 이유를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건데.”

“테러 같은 일을 벌일 정도의 기운은 없는 사람 같아서?”

역시 밉살스런 말을 골라서 하는 청려에게는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나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말을 해도 꼭. 믿는다더니 욕이나 다름없는 평을 내린다. 미약한 죄책감이 밀물에 쓸려나가듯 삽시간에 흩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도대체 인간을 골려먹는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대체 무슨 연민을 품었던 건지. 그러면 청려는 또 기가 막히게 누그러진 태도로 조근조근 해명해왔다.

“오해하게 한 것 같지만, 단순히 여태까지의 바이오그래프와 생활패턴으로 분석한 것뿐이에요.”

그야 가정용 안드로이드이니 간단한 생체리듬 분석과 도움 정도는 당연히 탑재되어 있으리라. 당연한 기능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류건우는 스스로 제 생체리듬 분석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요즘 AI는 죄다 자동인가 아니면 청려가 너무 제멋대로인 것인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청려를 훑어본 류건우가 신중하게 물었다.

“요즘 AI는 범죄예상도 할 수 있었나?”

과연, 그게 사실이라면 종교단체가 신을 들먹이며 게거품을 물만하다 싶었다. 기술이 인간을 잉태하고 보살피며 단죄하는 것도 모자라 미래를 예언하기까지 한다니, 그야말로 신의 몰락이었다. 하지만 신이 정말로 존재한대도 이런 세상이라면 정나미가 떨어져서라도 외면할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감인 셈이죠. 혹은….”

청려는 잠시 말을 늦추었는데, 꼭 알맞은 표현을 헤아리며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안드로이드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텐데도 인간적으로 살짝 갸웃거리듯 기울었던 고개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침내 그가 덧붙였다.

“믿음이라거나.”

믿음. 그야말로 살갑고 가까운 사이끼리나 공유하는 얄팍한 고리다. 실효력도 아무런 보장도 되지 않고 그저 꺾이고 배반당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명석한 AI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생각보다도 실없는 대답에 다소 기운이 빠진 류건우는 조용히 계간지를 덮었다. 표지에는 늘 어디에나 자리 한켠을 차지하는 AI의 발전과 이점, 현재와 그리는 긍정적 미래 따위가 선전되어 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수치화 하는 시대에는 너무나 낡은 잔재였다. 그럼에도 류건우는 자신보다도 더 그의 결백을 믿어주는 단 두 존재를 떠올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 흐르는 상처에 낡은 붕대를 둘러주던 손길이나, 악몽의 새벽마다 가만히 한 잔의 물을 건네는 손길 따위를. 딱딱한 안드로이드의 언어로 흘러나온 그 단어는 여느 때보다도 더욱 인간의 증표처럼 느껴졌다.

05.

정황을 따지면 간만에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울릴 테지만 류건우의 명확한 기억 속에는 한가로이 중앙을 돌아다닌 기억이 없으니 거의 처음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체포되어 수감자 생활을 하던 것을 중앙에서 보낸 시간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제2구에서 내려 그곳에서 파는 각양각색 화려한 기념품들 사이에서 최대한 색이 죽고 모양이 평범한 것으로 골라 산 모자를 푹 눌러쓴 류건우는 적법한 단말기로 한 번 중앙에서부터 제8구까지 탈주했던 경험이 있음에도 형식적 기계 관문 앞에서도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이전 제3구에서 잠시 정차해 돌아다녔을 때엔 그러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중앙이 코앞이라 괜스레 긴장을 한 듯싶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개방적인 관광 지구를 그저 통과점으로만 이용한 류건우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센트럴 타워 행 열차 좌석을 구매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지리상으로도 그렇고 센트럴 타워가 상징하는 바가 관광 지구인 제2구와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두 장소를 잇는 관광 열차는 일정 시간마다 운행되는 편이었다.

류건우는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고 커지는 센트럴 타워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센트럴 타워는 여전히 장엄했고 화려했으며 굳건한 중앙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였다. 그 뒤쪽을 이미 알고 있는 류건우의 눈에야 앞판의 반짝임은 눈속임이고 뒤의 시커먼 파놉티콘이 그 본질임이 보이지만, 어쨌거나 실제로도 센트럴 타워가 기능하는 바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모든 구역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건물이니 그저 장식으로만 세워져 있다면 오히려 우스운 이야기였다.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수십 개의 건물의 군집에 가까운 타워 중 하나는 관광 용도로 할애되었는데, 실 내용물은 선전 기능에 가까웠다.

센트럴 타워 전망대에 정차한 열차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앞다퉈 보안대를 통과해 흩어질 때 류건우는 가장 마지막에 내려 천천히 걸었다. 제2구의 관광도 마다했던 류건우가 이곳으로 향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제게 단말기를 건네었던 박문대의 거주지인 12로가 어디쯤 위치한 곳인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우연히 만났고 그 후엔 박문대에게 이끌려 그 집으로 향한 데다 제법 이전 기억인지라 가물거렸다.  심지어 이 기억들조차 우연처럼 기적처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조차 아직도 드문드문 빈 부분이 존재했다. 그가 출발했던 13구에서부터 기억을 짜내며 자취를 되짚는다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은혜갚기라기 보다는 어쩌면 미온적 자살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한눈에 전망을 볼 수 있으며 도시 역사, 각 지구 설명 등이 즐비한 센트럴 타워 전망대 3구역 내부는 제법 인파가 많았다. 몇 학교에서 견학을 나오기라도 한듯 단체복을 갖춰 입은 다소 어린 면면들이 보였고, 조금 전 같은 제2구 발 관광 열차를 타고 내린 무리로 추정되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을 차례대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류건우는 문득 그들보다 나이는 많겠지만 키나 왜소한 몸뚱이는 별반 다르지 않았던 박문대를 떠올렸다. 그 일이 있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다만, 그 사이 키가 크거나 살집이 붙기는 했을까. 성장기 청소년에게 몇 개월이면 십 센티는 훌쩍 크고도 남는 기간인데다 홀로 두 명 분의 배급을 받던 박문대였지만, 어쩐지 그의 키가 더 자랐으리란 기대는 들지 않았다.

류건우가 싱숭생숭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먼저 전망대 망원경에 고개를 박고 있던 청려가 고개를 들고 류건우를 잡아 이끌었다.

“보세요.”

썩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렌즈에 얼굴을 가져다 댄 류건우의 눈앞에 광각렌즈 가득 담긴 정갈하고도 화려한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그 실상과 민낯을 뼈저리게 겪은 눈에도 일순 아름답게 보일 정도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선으로는 얼마나 완벽한 낙원처럼 느껴질까. 새삼스레 낙하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문대 씨의 말에 따르면 이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봤자 쓸모가 없는 거네요.”

속삭여오는 그 말에 퍼뜩 본 목적을 떠올린 류건우는 망원경 위치를 조절해가며 누구도 렌즈를 비추지 않을 구석진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회의 시선에서 비껴나간 구역 같으니 어디 구석에 처박아둔 곳이겠거니. 하지만 도시에서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을 화려한 전망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 큰 각도를 움직이지 못하는 망원경 특성 상 구석을 보려면 통째로 망원경을 뜯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 모든 곳을 살피거나 망원경을 뜯을 시도를 해보기도 전에, 귓가로 끔찍한 소리가 꽂히기 시작했다. 덜컥 몸이 굳은 류건우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의아하게 울렸다. 삑삑 새된 소리를 내뱉는 시스템 알림음은 빌어먹을 경보음이었다. 순식간에 그날의 지긋지긋한 기억이 고막을 찢을 기세로 차올랐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설마 들킨 걸까. 쫓아오나? 도망가야 하나? 본능적으로 옆의 청려를 꽉 붙들어 맨 손아귀 힘은 보통 사람이라면 멍이 들 정도였으나 청려는 안드로이드인 탓에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부터 눈에 띄지 않게 슬금슬금 멀어져 달아나는 류건우의 귓가에는 두 가지의 경보음이 겹쳐져 울렸다. 13구에서 귀가 터질 듯 울렸던 소음과 지금의 경보음이.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경비 인원들의 일사불란한 구둣발 소리가 맨질한 바닥을 밟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본능적으로 뛰쳐나갔다. 반사적인 본능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날처럼 총탄이 등을 스치고 찢을 것만 같아 자꾸만 숨이 가파졌다. 욕을 삼키며 정신없이 뛰다가 과호흡이 오기 직전 숨이 차 잠시 멈춘 류건우는 용케 인파 사이를 헤치고 따라온 청려에게 약간 긁힌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갈라졌다가 다시 보자. 가능하면 정거장이나, 그 근처에서.”

말을 마친 류건우는 점점 커지는 한 무리의 발소리를 피해 순식간에 건물 입구로 내달렸다. 그 순간에는 안드로이드 따위를 책임질 정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말 그대로 13구에서 달아났던 경험의 재림이었다. 그때만큼 뛰는 일은 또 없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는 운이 좋았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타워를 빠져나왔다. 소란은 건물 안뿐인 건지 혹은 바깥까지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뿐인 건지, 센트럴 타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주시하는 류건우의 눈에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하기는, 탈옥범 하나가 남의 훔친 신원으로 들어왔을 때에도 도시는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날처럼 군이나 무장 경비가 출동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건물 내부의 경비 인력이 바깥으로 나설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류 같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요즘 같은 초인공지능 세상에 작동오류라는 속 편한 행운을 기대하다 바람구멍이 숭숭 뚫리느니 지레 겁먹고 도망간 겁쟁이가 되는 편이 나았다.

제가 입술을 뜯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긴장한 류건우의 뒤쪽에서 조심스러운 부름이 들려왔다.

“저기.”

청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팔을 냅다 붙잡은 류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정거장까지 뛰었다. 또다시 말없이 잠시간 달리기만 하던 둘은 가장 한적하고 멀찍이 떨어진 정거장 근처까지 와서야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장장 십수 분 이상을 뛰느라 땀이 나고 열이 오르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눌러쓴 모자를 벗어 대충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류건우에게, 조심스러운 물음이 도달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뭐야, 잠깐 갈라진 사이 어디 고장이라도 났나?”

눈썹을 찌푸린 류건우는 무의식적으로 청려를 훑어보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가 기억하는 청려는 혹여라도 중앙이나 근처 거주구에 바이오맵 제공자나 청려의 원 주인, 혹은 누군가의 소유 기기였음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싶어 류건우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다소 가리는 후드 재킷을 걸친 채였다. 그런데 지금 류건우의 앞에 있는 이는 말끔한 맨 얼굴을 드러낸 채였다. 옷차림조차 짙은 색의 재킷과는 상반되는 흰 가운을 입은 상대는, 안드로이드라기엔 너무나 눈에 띄게 헐떡이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류건우에게 세게 붙잡혔던 손목이 뒤늦게 아픈지 슬슬 매만지는 이는, 명백히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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