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청려] 묘지기에게 수선화를

문대청려/건우청려 영화 AU 합작: 위플래쉬 백업

단편 by 토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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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어떤 곳인가.

 

부조리에 직면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도, 생전 분에 겨운 행복을 누리다 미련 없이 떠난 자도 백골로 변태하는 공평한 곳.

 

세상에 태어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잠에 들기 위한 요람. 

 

이런 의미에서 셰이퍼 음악학교는 천재의 요람인 곳이다. 전국 제일, 혹은 세계 제일 가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은 채 정문을 넘어섰으나 5할은 울먹이며 자퇴 절차를 밟았고 3할은 출석 거부를 고집했다. 나머지 2할만이 졸업장을 받아 음악가의 여정을 시작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졸업 확률이 비루먹은 망아지가 하루아침에 최고의 전투마가 될 확률보다 낮을까. 천재 중의 천재만 모여 경쟁이 치열한 탓도 높은 지분을 차지하겠지만 가장 큰 원흉은 따로 있었다.

 

"다시."

 

미려하나 단호한 음성이 새벽의 안온함을 관통했다. 형형색색의 악기를 든 손이 도합 서른을 넘었다. 곰실거리는 손가락 곳곳에 멍과 굳은살이 자리 잡아 고통을 갑절로 불렸다. 드러머의 스틱이 재차 공중을 가른다. 탕, 스네어 드럼을 불사르듯 강한 소리가 연습실 끝으로 뻗어나간다. 곡 초반, 필인의 첫 마디다.

 

팅-.

 

"… 아."

 

이질적인 소리에 드러머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벌써 다섯 번째 실수인지라 곧 떨어질 불호령이 두려웠다. 그를 따라 다른 학생들도 숨을 멈추고 분위기를 읽었다. 개중엔 손톱을 오독오독 씹으며 불안을 표출하는 이도 꽤 됐다. 긴장과 공포의 행간을 좁힐 지도자는 가만히 서서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관조하던 인영이 돌연 몸을 틀어 키보디스트를 향해 가로질러 걸어갔다. 드러머가 스틱 하나를 떨어뜨렸건 말건 가련한 학생의 심리 상태는 안중에도 없는 처사였다. 다행히 키보디스트는 일변한 상황을 알아채고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둥글게 세운 손끝에 긴장이 서렸다. 메트로놈 박자가 더해질수록 갈급히 동선을 그려냈다. G코드, A코드, D코드. 이제 E6에서 쭉 내려오는 글리산도만 마치면 끝이었다. 첫 음에 방점을 찍는다. 단단한 열침에 데인 듯 여열이 아지랑이 되어 나부낀다. 아릿한 고통도 잊을 만치 고운 음색을 불 피운다. 그러나 앞서 음습한 감정을 품은 까닭인지 마지막 건반에서 둔중한 음이 싹텄다. 초보나 하는 실수인 데다 연주 내내 손톱과 건반이 닿아 불유쾌한 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미 화가 난 지휘자의 화를 더욱 돋았으니 키보디스트가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질끈 감은 두 눈을 비집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간의 설움이 응축돼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공연 2주 남았어. 이 상태로 공연할 거니?"

 

눈물 따위가 지휘자의 시선을 잡아챌 순 없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내비치지 않는, 지지리 권위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가 비수를 던질 때마다 엑스텐을 기록했기에 과녁 위에 걸린 학생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경직된 공기가 삭막함을 가중시켰다. 

 

"그래, 마음대로 해."

  

정적이 연습실을 한 바퀴 활보하고 나서야 지휘자가 연습실을 나섰다. 끼익, 경첩이 돌아가 쇳소리를 토했다. 손가락에 만개한 멍처럼 그 주인의 심장에도 멍이 피었다.

 

  

 

W. 토룡이.

 

 

 

*

 

 

 

신재현은 아이돌이었다.

 

교단에 서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지휘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말씨에는 언제나 고아함을 담았으며 고단한 연예계 생활에 훌쩍이는 멤버를 늘 다독였다. 그렇지만 팬에게 영원을 약속했던 '청려'는 이제 죽어 땅에 묻혔다. 계속되는 멤버들의 탈선. 시류를 잘못 읽은 책임자의 투자. 경쟁 상대의 승승장구. 재시작 때마다 악조건이 조합을 달리 하여 역경을 선사하니 신재현은 각종 방해물을 돌파할 재간이 없었다.  

그럼 아예 눈을 돌리면 어떨까.

자연스레 발생한 의문인데다가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했다. 지칠 대로 지친 신재현이 택한 길은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각양각색이었다. 피아니스트, 학원 강사, 공무원, 학자, 외교관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직업에 발을 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미션을 진행하지 않은 탓인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비명횡사한지라 입시 단계에서 그쳤지만 간혹 명줄이 길게 이어질 때가 있었다. 그 방증으로 이번 삶에서 신재현은 음악학교의 교수 겸 지휘자 이름표를 달았다. 언젠가 매듭 짖게 될 끈이어도 가능한 데까지 붙잡고 싶었다.

 

한계 직전까지 치달은 숨과 신체 곳곳에 음각으로 새긴 상흔. 옆 동료의 상황을 목도할 틈 없이 치열한 경쟁. 아이돌 연습실이든 밴드 연습실이든 땀방울이 기화하는 전경은 같았다. 그렇기에 과거의 실패를 청산하려 저만의 암약을 곱씹었다.

 

무조건 완벽하게. 실수는 없어. 평범하게 잘해선 안 돼. 

 

어린 학생 등에 채찍 자국이 선명히 각인되었다. 채찍이 조악하게 이를 드러내곤 살굿빛 단상에서 춤췄다. 이제 그는 사력을 다해 채찍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어스름히 고개를 내민 달이 기울어 어느새 서쪽으로 사라져 버리고 태양이 세력을 불렀다. 밤 동안 어둠에 녹아든 복도가 느릿느릿 기지개를 켜 일과의 시작을 알렸다. 복도 끝에 위치한 연구실을 찾은 선객과 시선이 맞닿았다.

 

"후배님? 무슨 일이죠?"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유순한 눈꼬리가 인상적인 조교, 박문대였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재학했던지라 종종 한 쪽만 곤란해지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후배가 아니라 조교…. 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 기말 고사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들어와요."

 

둘은 네모난 아가리를 지나 묘지기의 위토답을 밟았다. 수많은 천재를 사장시킨 과제물의 발생지다. 박문대가 다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신재현이 마주 1인 소파에 앉을 때까지 수 초가 소모되었다. 박문대는 위토답의 주인이 권하는 커피 내지 차도 거절하곤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과반수가 백지였습니다."

 

그러고 나선 순리처럼 찾아온 적막 속에서 침음을 삼켰다. 괜히 사서 고생을 했단 감상이 들었다. 그간 적당히 납득해 넘어간 행태의 업보를 돌려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험 감독을 몇 차례 맡은 바로는 갈수록 전공 시험 백지 비율이 증가해 올해 정점을 찍었다. 답이 작성된 시험지의 내용도 백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셰이퍼 음악학교는 신입생 모집 절차가 무척 깐깐해 천재 밑의 웬만한 수재와 범재는 입학이 어려웠다. 재학생 대부분이 천재인 학교에서 시험 백지 제출자가 속출하니 중대 회의감이었다. 더불어 자퇴하는 학생도 늘어만 가니 지도 교수에 대한 뒷말이 샘솟았다. 설령 월권 행사여도 누군가가 말을 꺼내야 불씨가 꺼질 터다.

선후배로 7년을 알고 지내며 신재현을 꽤 잘 안다 여겼으나 교수와 조교로 다시 만난 걸 기점으로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학부생일 적엔 매사 초탈함으로 일관하더니 졸업 뒤엔 새로운 모습의 향연이었다. 오랜만에 신재현이라는 인간이 낯설게 다가왔다. 어렵사리 건넨 말을 고깝게 받아들인다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박문대는 조악한 상상을 고이 접었다. 신재현이 많이 달라졌다 해도 분간 없이 예민하게 나오진 않는다.  

 

"그래서요?"

 

정정한다. 분간 없이 굴지 않았으나 잔뜩 날을 세운 반응이 되돌아왔다. 어조만 잔잔하지 눈빛으로 조교 하나는 가뿐히 잡을 기세다. 어찌 할 방도가 없어 치트키에 버금가는 전략을 펼쳤다.

 

"모르는 척 하셔도 근본적으론 해결 안 된다는 걸 선배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박문대는 조교가 아닌 후배로서 신재현과 마주 앉았다. 가끔 그가 실날같이 희미한 미소를 짓던 시절을 더듬었다. 종강 파티 때 맥주와 소주를 섞은 독극물로 목을 축이곤 오묘한 표정을 지은 일, 졸업 연주회를 준비하다 말고 멍한 눈으로 허공을 겉돈 일. 매사 초연하게 구는 현재와 사뭇 상치된 과거였다. 낯설다고 아물거리기엔 성미에 맞지 않을 뿐더러 오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속전속결로 끝을 봐야 가슴의 체증이 내려갈 성싶다. 

 

"하하! 내가요? 난 모르는 척 하지 않았어요."

 

"……."

  

"애초에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걸."

 

미션을 클리어하지 않으며 우연히 연명한 삶에 언제 마침표가 찍힐지 불투명하다. 당장 오늘을 넘길 확률을 그리면서도 내일을 맞이하는 굴레를 기꺼이 감내한다. 수려한 손가락이 보온병을 감싸 들어올린다. 미처 훔치지 못한 물방울이 한 방울 뚝 떨어져 적막을 깨뜨렸다.

 

"할 말 끝났으면 가 봐요. 한가할 때 아니잖아."

 

가장 보통의 일상을 덧칠하여 어폐를 은닉했다. 동시에 한없이 선한 후배를 망막에 새겼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 상을 복기시켜 맺히도록. 영원을 믿지 않는 '청려'가 유일하게 영원이길 갈망한 찰나였으나 시계 초침은 착실히 앞을 보고 내달렸다. 두 형제를 몇 번이나 앞질러 시간을 건너뛸 때까지.

 

 

 

*

 

 

 

 

새순이 자라나는 시기여도 아직 날이 춥다. 청려를 제외한 브이틱 멤버들은 스케줄 소화를 위해 이동하는 와중에 밴이 떠나가라 소란을 피웠다. 청려는 아릿한 추위에 저들끼리 녹진거리는 멤버들을 힐끗 살피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내 소음이 점차 잦아들었으나 히터 바람이 살갗을 간질여 쉬이 잠들기가 요원하다. 쌓인 피로를 해소할 길이 없어 감은 눈을 도로 뜬다. 

셰이퍼 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한 회차를 마지막으로 방황을 마쳤다. 특별히 개과천선의 마음가짐을 가져서인 건 아니었다. 단지 원점으로 돌아갈 때라 판단해서 출발점에 다시 섰을 뿐. 혹여 방황하던 때처럼 한두 번 쯤은 미션을 수행하지 않아도 새해를 맞이할지 의문이 들어 시험해 봤으나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하긴, 우연을 가장한 기적이 진작 발생하지 않은 이유가 뭐겠는가. 

 

"형! 이거 봤어요?"

 

금빛 머리카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청려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센터 포지션 멤버, 채율의 말을 받았다. 

  

“뭔데?”

 

“이번에 하는 아주사 있잖아! 이 후배님 완전 재밌는 거 있지?”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시즌 1은 매번 미담에 비해 뒷말이 압도적으로 많아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또 적당히 그럴듯한 편집 포인트를 잡아 반짝 화제성을 띄운 후 잠잠해질 터다. ‘아직’ 후배 아니라고, 영영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현실의 냉혹함을 일러 주기보다 묵묵히 채율이 내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아! 나도 그래! 널 좋아하는걸~

심장이 뛰는 이! 기분은~ 팝콘 같아!

 

발랄한 가사와 통통 튀는 안무. 직속 선배 그룹인 말랑달콤의 대히트곡이었다. 꽤 영리하게 굴 줄 아는 참가자다. 이 짓도 반전을 이끌어 낼 만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연습생 치고-

 

“…….”

  

오전의 정수를 품은 시나몬 색 눈동자. 흑요석을 닮아 검게 빛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불퉁한 감정이 엿보인다.

오래 전 잃어버린 가장 아름다운 것.

 

안와 너머 깊숙이 침몰해 버려 작은 조각조차 회수 못 한 것. 허나 절실히 바라 왔던….

 

“… 채율, 아주사 측에서 보낸 문답 말인데.”

 

“응? 그게 왜?”

 

고운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영겁의 시간을 돌고 돌아 되찾은 진주를 회수할 적기다. 밭은 숨을 한 체례 내쉬었다. 헛웃음이 미소의 파편인 양 튀어나왔다.

 

“나도 캐스팅 콜 나가 볼까 해서.”

 

“헉, 진짜? 잘 생각했어! 빨리 후배님들 보고 싶다!”

 

모든 생은 각자의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투쟁과 다름없다. 마침내 청려는 투쟁을 종결시킬 판에 들어섰다. 실험을 표명한 방황을 하며 광겁의 허송세월을 흘려보냈다. 새로 나아갈 항로 탓에 분명 고단하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길을 걷든 승리는 내정되어 있다. 그는, 청려는 늘 이기는 브이틱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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