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단청려] 기록

단엋 | 어느 회차 주단의 기록. 썰에 가까울 정도로 가벼움 사망 소재 주의

단편 by 토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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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2월 12일

공백이 1년 반 정도 이어진 시기.

청려 형이 컴백 회의에 들어갔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날 아침, 형은 숙소 거실에 우리 넷을 쭉 진열시키고는 한 차례 슥 훑었다. (진열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바가 없었다. 마트에서 상품을 용도에 맞게 전시하듯 우릴 각자의 자리에 늘어놓았다. 아직까지 종종 그때 형의 시선이 생각나곤 한다. 하자를 발견하고 말겠다는 일종의 선언과 다름 없었다, 아마.) 마냥 해맑은 채율 형과 윤신 형, 심연의 동공이 저를 훑는지도 모른 채 꾸벅꾸벅 절을 하는 희성 형. 설이 지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 뒤늦은 세배였다. 

"우단."

뜻밖의 호명에 번개 맞은 사람처럼 움찔 떨고 말았다. 심연은 들여다볼수록 이해하기 어렵다던데 청려 형과 딱 맞는 표현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사하는 형은 내버려 두면서 애꿎은 사람만 잡는 행태를 키 플레이어가 아닌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장담컨대 평생 요원할 성싶다. 예, 답하는 음성이 흉하게 떨렸다. 순간 탄식이 폐부에서 올라왔다. 아, 책 잡히겠구나. 저 고개 가볍고 경우 없는 소대성보다 먼저 비명에 가겠구나.

요즘 청려 형은 누구 하나 걸리길 벼르는 중이었다. 사람 하나 정도는 썰기 충분한 예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여 괜히 찔끔 쫄아 까만 심연을 직시하는 수순을 밟고 말았다. 청려 형이 부르면 응당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한다지만 종종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반항이 마음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러나 감히 역성혁명을 행할 담대함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나중을 기약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나중이란 영영 오지 않을 날이었다. 게임 속 떡밥을 맡은 조연이 '그날이 오면….'을 괜히 읊조리듯이 뭔가를 남기는 행동이지 않았을까.)

보스 격 몬스터는 기습을 감행하지 않는다. RPG 게임의 암묵적인 룰이라 플레이어는 보스 방에 들어가기 전 맘 편히 체력을 회복하고 정신을 다잡는다. 정직하게 "플레이어, 잘도 여기까지 왔군." 대사를 친 후 1 페이즈가 시작된다. 왜냐, 그야 기습을 하면 모양이 심히 빠지기 때문일 터다. 세상을 구한 플레이어의 뒤통수나 노리는 최종 보스라니. 모양이 빠져도 너무 빠진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호명 다음에 이어질 말이 진짜다.

"감기 기운이 있었다며."

…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심히 당황스럽다. 어느 정도냐면 벌거벗은 채 길을 활보하는 사람을 목격한 사람의 심정에 버금 간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는 사람에게 이런 돌발 이벤트는 신경 쓸 거리를 3단으로 쌓아 주는 셈이다. 

"그게, 약 먹고 바로 나아서 말씀 드리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설명이 어느덧 변명으로 변모됐다. 그 고아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평범한 진술이 늘 질척해진다. 신의 혜안 앞에 선 인간은 통찰 당할 대상에 불과하다. 고요한 사위 가운데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선고가 내려졌다.

"그래."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러나 청려 형이 몸은 틀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선고를 내린 까닭에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의 신체는 생각보다 정말 많은 걸 보여 주는데 개중 몸은 다른 부위를 능가하는 걸 시사한다. 음, 몸을 틂으로써 무의식을 반영한다 들었는데. 가령 입으론 납득을 표하면서 몸의 방향은 애먼 곳을 바라본다든가. 시선을 거둔 형이 우리를 재차 쭉 둘러봤다. 그러길 잠시,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을 툭 던졌다.

"6월에 컴백하니까 슬슬 바빠질 거야. 몸 관리 잘하고."

채율 형과 신오 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해 안에 컴백하리라는 기대조차 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작년 초부터 성적이 하락세를 타더니 결국 저번 컴백 땐 미지근한 반응만을 얻고 활동을 종료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티홀릭 선배님들과 컴백이 겹친 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일 터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컴백? 형이 버성긴 분위기를 못 느꼈을 리 없다. 누구보다 밝은 채율 형조차 앞으로의 일을 장담 못 했다. 필경 깨질 고요 앞에 서서 청려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순간 알고 싶단 충동이 야염을 피웠다.

"… 형."

"와! 진짜요?"

그러나 뒷말을 잇지 않고 스스로의 결단이 속 빈 강정과 다를 바 없음을 숨 죽여 체감할 뿐이었다. 잔뜩 상기된 음성이 기쁨을 한가득 안고 있어서, 충동을 따라 차마 좋을 대로 행할 순 없었다. 기쁨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채율 형, 덩달아 신이 나 펄쩍 뛰는 윤신 형.

가능한 한 지키고 싶다.

"우단."

아까와 같은 호명에 왜 다른 무게가 실리는 걸까. 

"회의 들어가야 해서 오늘 늦어. 연습 좀만 하다 일찍 자."

자명한 부름이 어깨를 토닥였다. 부른 직후 곧바로 눈을 돌렸어도 분명 청려 형의 찰나는 온전히 나를 위해 소진되었다. 구색 맞지 않는 적선을 반갑다 여길 나이는 지났다. 허나 그 무게가 기껍단 것을 부정할 만큼 미련하진 않아 예, 하며 최선의 답을 돌려 줬다. 이내 형은 부언 없이 등 돌려 숙소를 나섰다. 꿈나라에서 뒤늦게 돌아온 희성 형이 "뭐야, 무슨 일인데?"라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응당 씹어 간악한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 하게 하였다.


20xx년 2월 24일

대표님과 얘기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우리한테 컴백을 알린 것 같았다. 1주를 넘긴 시간 안에 만들었다기엔 타이틀곡 퀄리티가 무척 좋았다. 잘 듣다가 갑자기 채율 형이 울먹이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20xx년 4월 3일

이번 타이틀곡의 안무는 쉬는 구간이 전무해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영속될 듯했던 연습이 끝나고 침대 위에 풀썩 늘어졌다.

힘들다. 아직도 폐를 쥐어짜이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기뻐. 힘든 기색을 누르지 않자 가슴이 계속 들썩였다. 밭은 숨을 기꺼이 감내하는 경험이 참 귀중했다.

20xx년 4월 26일

인터넷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청려 형이 숙소에 안 들어온다.

20xx년 4월 28일

재현 형을 찾았다. 

형답지 않게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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