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패치] Pretty Bad Guy 8
빠앙, 경적이 길게 울렸다.
매뉴얼은 발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한 노파가 길을 건너는 것도 기다리지 못해 경적이나 울려 대다니. 시끄러운 메아리와 약간의 불쾌함을 안겨 준 자동차는 이미 멀리 떠나버리고 없었다. 노파는 안전히 길을 건너서는 자동차 꽁무니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대다 떠나갔고, 그들이 떠난 자리를 또 새로운 이들이 들어와 채웠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번화가 가운데에서, 매뉴얼은 벽에 기대서서는 계속해서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려댔다.
묵직한 솜덩어리마냥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분노는 새벽의 이슬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매뉴얼이 패치에게 쏟아냈던 말은 사라지지 않았고, 패치가 매뉴얼에게 쏟아냈던 불쾌함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또다시 같은 공간에서 어색함을 견뎌야만 했다. 친하지 않은 이와 어색한 침묵을 공유하는 것만큼 달갑지 않은 일도 없었기에, 매뉴얼은 이제 지난날을 향한 후회를 곱씹으며 모래알 같은 시간을 견뎠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길어지겠다는 말이 곧 직장에서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소리였는지, 패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무감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어떻게 길렀는지 모를 비상한 눈치로 일을 처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를 데려오면 일하는 시간이 조금 즐거워지리라 생각했던 매뉴얼은 가시밭 위에 올라선 것처럼 다리를 달달 떨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뛰쳐나왔다. 그러기를 이틀, 결국 그 시간을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연락처 아래에 잠들어 있던 패치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만나서 이야기 좀 해요. 언제 어디로 나가요?
—맥도날드 옆, 꽃집 앞. 일요일 오후 5시.
패치의 답장은 간결했다. 사족은 없이 꼭 필요한 말만 적힌 메시지가 마치 그를 닮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매뉴얼을 불러낸 장소는 그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시내 중심지였다. 누군가 한 명쯤 이유 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려도 눈에 띄지 않을.
처음 이곳에 도착한 매뉴얼은 패치의 위치 선정에 감탄해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서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겠는걸. 약속 장소에 10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그곳은 행인으로 북적였다. 건물 벽 가까이,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매뉴얼은 그제야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는 그저 거리의 소란스러움에 신났을 뿐이었는데, 지금 보니 이곳은 온갖 가게들에 교차로까지 겹친 그야말로 동네의 중심지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이리로 불러냈을까. 저를 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약속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졌다. 5분이 지나고, 그 후로도 몇 분에 한 번씩 시계를 들여다보던 매뉴얼이 마음속으로 패치에게 딱 10분의 유예 시간을 더 내려준 순간,
"매뉴얼."
하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매뉴얼은 곁의 골목에서 튀어나온 손에 붙들려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매뉴얼의 팔을 붙잡은 검은 후드의 사내는 거침없었다. 매뉴얼은 처음 마주하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쳐 나가, 여러 번 모퉁이를 돌고 쓰레기통을 지나쳤다. 그들이 다시 노을 지는 햇빛 속으로 나왔을 때는 공원의 뒷문 앞이었다.
"패치?"
"미안. 네가 그곳에 서 있는지 몰랐어."
정신없이 뒤바뀌는 주변 풍경에 어지러운 눈을 깜박이던 매뉴얼이 제 팔을 붙잡은 손을 풀어내며 그를 부르자, 이제 익숙한 푸른 눈이 그를 돌아봤다.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독특하게 솟은 머리칼 몇 가닥은 모자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던 매뉴얼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겠지, 보통은 대로변에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니까. 벽에 붙어 있던 제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만....
"왜 그런 곳으로 왔어요?"
"자주 다니는 길이야."
"바로 이곳으로 불러도 됐잖아요."
"여길 찾을 수 있겠어?"
그 말에 매뉴얼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음, 확실히 그는 몇 번 헤맬 것 같은 으슥한 곳이었다. 마치 패치를 처음 만났던 골목처럼. 그러고 보면, 패치는 늘 이런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들어가지."
"...네."
패치의 면모를 하나씩 알아 갈수록, 그를 향한 궁금증은 더 많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건 오직 가게에서의 사과뿐이었기에 매뉴얼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앞서는 패치를 뒤따랐다.
시내에 이런 골목이 있다는 건 지도를 훑어보며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가게와는 꽤 떨어져 있는, 생각보다는 넓은 공원에 자주 갈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공원이 별다를 게 있을까.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산책할 만한 거리가 차고 넘쳤는데. 그렇기에 오늘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공원은, 꽤나 고즈넉하고 조용한,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매뉴얼은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조성이 잘 되어있는 데다 관리인이 자주 돌아다니는지 맨바닥에 자리 잡은 노숙인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뒷문 근처여서 그런지 조금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던 패치는 구석에 자리한 벤치에 앉았다. 그를 따라 곁에 엉덩이를 붙이자, 패치가 매뉴얼에게 무언가를 불쑥 들이밀었다.
"뭐예요?"
"콜라. 싫어하나?"
"그런 건 아닌데.... 이건 왜요?"
"즐거운 이야기도 아닌데 요깃거리라도 있어야지."
그러면서 매뉴얼의 손에 억지로 콜라 캔을 쥐여 준 패치는 종이봉투에 감싸인 캔을 땄다. 치익, 하는 소리를 들은 매뉴얼은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진짜 미쳤어요?"
"알 게 뭐야. 이쪽으로는 사람이 많이 오지도 않아."
"관리인 오면 난 도망칠 거예요. 난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러던지."
패치는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레진 매뉴얼은 아랑곳않으며 손에 들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캔이 보이지 않게 잘 붙들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패치를 보며 매뉴얼은 갑자기 범법을 저지르는 이유를 물었다. 패치는 그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법을 어긴다기보다는 즐거운 장난을 치는 것마냥 웃는 소리에 매뉴얼은 제 이마를 감싸 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요... 그래, 알아서 해요."
"어련히 그러려고."
"...할 이야기 있잖아요, 우리."
"음."
패치는 다시 맥주를 홀짝였다. 벤치에 걸터앉은 채 발을 쭉 뻗어 까딱거리던 그는 흘러가듯이 이야기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정말요?"
"정말."
"...개수 셀 거예요?"
"음, 다섯 개?"
키득거리던 패치는 손을 내저었다. 내 기분이 내킬 때까지 답해 줄게. 매뉴얼은 가벼이, 가벼이 이야기하는 패치의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머리도, 손도, 발끝도,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거 마시지 마요."
"오 매뉴얼, 너는 내 대부님이 아니야."
"이리 줘요."
"그게 네 손에 있으면 죄만 더해질 뿐인데?"
"...마시지 마요. 약 탄 거 아니죠?"
"방금 네 앞에서 땄어, 얘야."
"왜 마셔요? 잘 하지도 못 하면서?"
"마음이 내키려면 이런 것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나는 아주, 말을 안 듣는 아이거든."
이래 봬도 성인이야.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네 걱정이나 해. 시간은 흘러가, 매뉴얼. 발끝은 살랑살랑, 목소리는 살짝 들뜬 패치의 모습에 매뉴얼은 그저 한숨 쉬었다.
"좋아요. 갑자기 제 앞에서 술은 왜 마셔요?"
"네가 나에 대해 궁금한 게 굉장히 많아 보여서."
"...보였어요?"
"아주. 엄청나게."
매뉴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 좀, 다가가려 할 때 잘 받아 주든가. 친해지자는 제스처는 전부 무시했으면서. 그렇게 창피함으로 부글대는 속을 달래는데, 패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평소의 나는 솔직하지 못하니까. 알잖아?
"...솔직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잖아요. 이야기를 하려고 들질 않는데."
"그거나 그거나, 같은 말이지. 내가 가진 나쁜 버릇이기도 하고."
낮게 후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기분이 좋아진 패치는 웃음이 많았다. 알고 있던 것과는 꽤 많이 다른 패치의 모습에 매뉴얼이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자, 들고 있는 맥주캔을 흔들며 패치가 매뉴얼을 재촉했다. 다음은?
"...왜 내게 거짓말했어요?"
"어떤 걸 말하지?"
"쿠키 좋아하잖아요."
매뉴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제가 내미는 쿠키를 집어 들던 패치의 손은 분명 기꺼워하는 손이었다고.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야?"
"...거짓말이잖아요, 어쨌든."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답했어."
"언제요?"
"난 아무 의미 없는 호의는 질색이라고."
"......."
"덧붙여서, 무게 없는 관심도 싫고, 배려 없는 질문도 싫어."
"싫은 게 많네요."
"까탈스러운 사람이지."
패치는 입술을 축이고서 말했다. 그래, 과자는 좋아해. 앞으로는 네 선물도 기꺼이 받지. 분명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매뉴얼은 그 말을 장난으로 받아칠 수 없었다. 그것참 감사한 일이라고, 가볍게 내뱉어야 할 말은 지는 노을에 비친 패치를 보는 순간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차라리 때리라던 말 말예요."
"아, 그건 실언이었어. 분명히."
"그 가게 주인이 그랬어요?"
"......."
"찾아와서, 때렸어요?"
"넌 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하는구나."
난감하다는 걸 표현하듯이 캔으로 잠시 입을 가린 패치가 말을 꺼냈다. 응.
"왜 가만히 있었어요?"
"아버지의 친구거든."
그래서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종일 일할 수 있었고. 그런데 내가 말도 없이 튀었으니, 당연히 찾아와서 화풀이하지. 이야기하는 패치의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매뉴얼은 눈을 크게 뜬 채 벌어지지 않는 입을 말아 물었다. 패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 갔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지.
"...그 개자식을 그냥 둬요?"
"너였다면 맞서 싸울래?"
"당연하죠! 턱주가리라도 날려야죠, 그건 부당하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짜 미친 새끼, 그 개자식...."
뜨거워진 머리에 아무 욕이나 주워섬기는 매뉴얼의 모습에 패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한테 맞아 놓고서도 욕할 수 있는 녀석은 처음 본다. 다들 꼬리 말고 도망치기 바쁜데. 매뉴얼은 그 말에 어이없이 한 마디만을 덧붙였다. 그 자식들은 자존심 따위 저 옆에 흐르는 강물에 처박아버렸나 보지.
"그 자식 어디 사는데요?"
"됐어, 질문 시간은 끝이야. 기분 잡쳤어."
"네? 이게 무슨...."
"이제 내가 물을게, 매뉴얼."
왜 나에게 이리 관심 가지는 거지?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줘요."
"그딴 건 개나 줘 버려."
방금까지의 가벼웠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패치가 매뉴얼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마주하던 매뉴얼은 문득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저 막연히 생각하고만 있던 것을, 남의 입으로 확인받는 것은 꽤나 창피한 일이었다. 아직은 일찍 땅거미가 지는 3월에 감사하며 매뉴얼은 들고만 있던 콜라 캔을 땄다. 설탕이 가득한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킨 매뉴얼은 차분히 모인 패치의 발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되게 독특한 사람이란 거 알아요?"
"조금은."
"학교 근처에서 담배나 피우는데, 길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는 않고. 학교 애들이랑 머리를 쥐어뜯고 싸웠다는데 정작 억울하게 맞은 애들은 없고. 이야기만 들으면 몰래 마약이나 팔면서 생활하는 놈 같은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잖아요."
"평가가 후한데."
"조용히 해요. 어쨌든, 그래서. 그래서 궁금했어요.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지금은?"
"궁금한 게 더 많아졌어요."
하, 하며 패치가 작게 웃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발끝을 까딱거리던 그는,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려놓더니 별안간 매뉴얼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내뱉는 숨이 섞여들 듯한 거리에서 매뉴얼의 눈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순진한 면이 있구나, 꼬마 매뉴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도록 입을 다물어 주지."
"그게 말이 돼요?"
"앞으로도 친한 척 굴 텐가?"
"싫다면, 노력해볼게요."
"네 노력은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으니, 마음대로 해."
"조금이라도 반박할 수 있었으면 당장 화냈을 거예요."
"감사하군, 내가 정곡을 찔렀다니."
패치는 낮게 웃으며 맥주를 바닥에 쏟아 버렸다. 거품을 피우며 흙으로 스며드는 양은 꽤 많았다. 캔 입구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맥주까지 털어내 버린 그는 이번에는 매뉴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자는 무언의 제안에 매뉴얼도 얼른 남은 음료를 털어 넣고 빈 캔을 내밀었다. 쓰레기를 담은 종이봉투를 든 패치가 일어서자,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매뉴얼이 뒤늦게 떠오른 말을 급하게 외쳤다.
"우리 화해한 거예요?"
그 말에 매뉴얼을 돌아보던 패치가 고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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