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패치] Pretty Bad Guy 7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찰칵, 자전거의 자물쇠를 채우는 그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자전거 거치대가 구석진 곳에 있는 줄 알았더니 아주 목 좋은 곳이었구만.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매뉴얼은 허리를 폈다. 그에게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로막고 있는 이는 매뉴얼보다도 덩치가 큰 백금발의 사내였다.
"어, 나중에 스턴 만나면 나한테 오라고 좀 해 줘."
"꼭 머리를 뜯어 놓을 것 같은 표정인데."
"그 자식에게 빚을 받아내야 할 것 같으니까."
"돈이라도 빌렸나?"
"아니, 내 신뢰를 가져다 말아먹었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크레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매뉴얼은 더는 답해주지 않고 발을 옮겼다. 정말 더는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 망할 주인장의 가게에서 만난 이후로 패치에게 그만한 적대감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패치는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 내가 성가신 애새끼가 되었던 것일지도.
"무슨 일인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럼, 그러던지."
"넌 왜 운동을 안 하냐?"
"갑자기 나는 왜 걸고넘어지지?"
"그냥. 우드가 너를 볼 때마다 속상해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한 학기 내내 시달렸어. 처음 입학하자마자."
"그 녀석 고집도 장난 아닌데, 너도 징하다."
터벅터벅 걸으며 그들은 의미 없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미식축구부에서든 농구부에서든 환영받았을 거라든지, 그러는 너는 쇠고집이라 경관 아니면 법관이 딱이겠다든지. 조금의 투닥거림과 조금의 웃음소리가 한껏 날서 있던 매뉴얼의 신경을 조금씩 무디게 만들었다. 법학이 다 뭐야, 됐어. 난 대학 갈 여유 없다. 내젓는 손길에 그런 이야기까지 툭 섞어 던질 만큼.
"안녕, 매뉴얼."
어, 스턴 만나면 꼭 오라고 하고. 킬킬대며 크레인의 어깨를 툭 치던 매뉴얼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무심코 곁을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높았다는 건 눈앞의 금발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한나?"
"일찍 오네."
"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등장에 당황한 매뉴얼의 뒤로 크레인이 슬쩍 몸을 뺐다. 난 간다. 스턴은 데려다 놓을게. 그렇게 속삭이며 멀어지는 크레인을 차마 잡지 못한 매뉴얼이 다시 한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색한 공기는 매뉴얼만 느끼는 것인지, 한나는 스스럼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가자, 나도 네 교실에 볼일 있어.
"넌 학교에서 보기 참 어렵더라?"
"내가 좀 바쁘게 살지."
"뭘 하고 지내는데?"
"그냥, 이것저것."
"학교 마치고서도 바쁘니?"
"어, 시간이 없을 텐데."
"그래? 아쉽다."
한나는 두 손을 뒤로 모아쥔 채 나풀거리듯이 걸었다. 난 무용부거든. 시간 괜찮으면 연습하는 거 보러 오라고 하려 했는데. 혹시 관심이 생기지는 않고? 갸웃하는 머리에 매뉴얼은 살짝 옆으로 물러서며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나 일하러 가야 해.
"일해? 어디서?"
"아버지 가게 일."
"샌드위치 가게 한다고 했었나?"
"알고 있네?"
"넌 네 생각보다 유명하다니까."
그럼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마냥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인 한나는 매뉴얼보다 앞서 교실로 쏙 들어갔다. 느린 걸음으로 문지방을 넘자 교실 한쪽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금발 머리가 보였다. 쟤가 한나랑 친했구나. 안부 인사에 무용부 공연 이야기에 가게 이름까지, 짧은 시간을 토네이도처럼 휩쓸고 가 버린 발랄한 여자아이를 잠시 바라보던 매뉴얼은 그만 한숨을 푹 내쉬며 교실 뒤편 아무 자리에다 가방을 올려놓았다.
"나 찾았다며?"
곧이어 문으로 머리를 들이민 스턴을 마주하고서도 매뉴얼은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겠냐, 멍청하게 군 건 나지. 응.
학교에서 가게로 향하는 길은 꽤 멀었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다 보면 손끝은 조금 시려와도,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해 도착할 때쯤이면 매뉴얼의 기분은 살짝 들떠 있곤 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면, 그러니까 창문 없는 스포츠카나 바이크를 타고 다녔다면 밀려오는 해방감에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말 만큼,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신나게 내달리기 좋은 곳이었다.
"저 왔어요."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는 날도 응당 있는 법이라. 페달을 젓는 발마저 무거웠던 날에 가게의 문을 여는 목소리가 기운찰 리는 없었다. 들어서는 길에 흐트러져 있는 의자를 바로 세우고,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어머니와 패치에게 고개를 까딱해 인사하고, 탕비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가방을 내려놓고. 모든 행동마다 물먹은 솜이 달라붙은 듯이 느릿했지만, 매뉴얼은 제 뺨을 짝짝 때리며 고개를 흔들어 그 솜덩어리를 떨쳐 내려 노력했다. 딱 네 시간만 기운 내야지. 그래도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니.
어머니와 자리를 바꾸어 선 카운터에는 적막이 흘렀다. 작은 대화 소리가 들리는 가게 안에서 그들이 서 있는 공간만은 보이지 않는 파티션으로 분리된 것처럼 조용했다. 매뉴얼도, 패치도 그 적막을 깰 생각이 없는 것처럼 자리를 지켰다. 금전 출납기가 딸그랑거리는 소리와 수도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부러 밝은 척하는 목소리만이 벽에 부딪쳐 울릴 뿐이었다. 의미 없는 메아리가 매뉴얼의 머리를 댕댕 울렸지만, 오늘만큼은 매뉴얼은 그 불편한 마음을 해결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얽혀 있는 상태였다.
"......."
이런 날에는 도넛이나 먹으며 생각 없이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딱인데. 그게 아니면 한밤중에 칼바람을 맞으며 동네를 한 바퀴 달리든지. 매뉴얼은 자꾸만 멍해지는 눈을 감았다. 이건 오늘 학교 수업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운 없어 보인다며 우드가 괴롭혔기 때문이고, 스턴의 해맑은 웃음을 잔뜩 찌그러뜨려 주지 못했기 때문이고, 아침부터 한나가 당황스럽게도 친한 척 다가왔기 때문이고, 또....
"......."
매뉴얼은 제게 다가와 부딪치는 패치의 시선을 눈치챘다. 내리감고 있던 눈을 뜨자 그를 고개 돌려 바라보는 패치의 모습이 시야 끝에 잡혔다. 평소였다면 무어라 할 말이 있느냐며 물었겠지만, 매뉴얼은 대신 그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오늘마저 그와 말다툼을 벌이기에는, 오늘 그는 꽤나 지쳐 있었다.
"......."
매뉴얼은 이유 없이 포스기를 두드렸다. 삑, 삐릭, 하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다. 패치의 시선은 매뉴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라고. 문득 패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보았던 어제의 제 모습도 지금의 그와 같을까 싶었다. 아마 그보다는 더 방정맞고, 안절부절못했겠지. 그는 남들보다 감정의 표현이 격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으니까.
"매뉴얼."
패치는 끝내 그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매뉴얼은 그제야 고개 돌려 패치를 마주 보았다. 무표정한 패치의 얼굴 위, 미간이 살짝 주름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뇨,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그러나 물론, 그 말이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네 표정은 아주 투명하군."
"맞아요, 적당히 모른 체 해 주면 돼요."
패치의 눈썹이 한번 더 꿈틀거렸다. 매뉴얼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던 패치는 깊은 한숨 같이 나는, 이라 말을 뱉었다.
"차라리 나에게 솔직하게 굴어주길 바라."
"......."
"어쭙잖은 호의로 포장하는 것, 침묵을 무기 삼는 것, 전부 싫어해. 화가 나면 차라리 때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매뉴얼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렸다. 그런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보다도 더 짙은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신경질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매뉴얼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들은 그대로야."
"굉장히, 기분 나빠요. 알죠?"
나는 말이에요, 하며 매뉴얼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나는 그쪽이 내게 거짓말하는 게 싫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봐요.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솔직하게 굴라면서요. 그게 그쪽이 할 말인가?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패치는 그저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 도피의 행동에 매뉴얼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계속해서 이런 식이다. 패치는 제 진심을 꺼내 가고, 그러고서는 도망친다. 뒷골목에서도, 휴대폰 속에서도, 어제도, 오늘도.
"친해지려고 한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래, 관심이 가서. 나중에는 동료니까. 그게 싫었으면 싫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선물 같은 거 싫다고. 연락도 하지 말고. 난 너와 얼굴만 마주하겠다고. 시발, 이게 다 뭐야."
매뉴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언젠가부터 가게는 조용했다. 못 볼 꼴은 다 보여버린 탓에 그는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바짝 날선 신경이 지나치게 날카로워서, 다가오는 이가 누구든 다 찢어발겨 놓을 것만 같았다.
"매뉴얼."
"이야기할 기분 아니에요."
"주말에 시간 되나?"
"지금 장난해요?"
매뉴얼이 패치를 쏘아보았지만, 다시 눈을 뜬 패치는 이번에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게 나아오는 시선은 언제나처럼 잠잠했다. 그 시선을 타고 위화감인지 불쾌함인지 모를 것이 매뉴얼을 붙들어와, 그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언제든, 시간이 나면 말해."
"왜요?"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걸 이제 알았다니 참 다행이네요."
패치는 빈정대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패치가 떠나 버린 빈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매뉴얼은 카운터에 이마를 쾅 내리박았다. 되는 일이 없다.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 침대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내려왔든, 신이 잠시 눈을 감으셨든, 어쨌든 오늘이 그의 불운의 날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아, 빌어먹을. 매뉴얼은 홀로 남은 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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