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패치] Pretty Bad Guy 9
"다이앤."
"으어?"
"네가 자주 가는 베이커리가 어디에 있다고?"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다이앤을 흔들어 깨운 매뉴얼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다시 잠들려는 다이앤을 보챘다. 귀찮다는 듯이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손을 가볍게 피하며 그를 끊임없이 쪼아대자, 다이앤은 끝내 성질난 목소리로 가게 이름을 외치고는 팔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마치 화난 것 같아 보였으나 다이앤이 밤을 새운 다음날이면 늘 저런다는 것을 아는 매뉴얼은 그저 신나게 휴대폰을 두드릴 뿐이었다. 구글맵은 빠르게 가게의 위치를 찾아내 보여줬고, 그는 그 화면을 들여다보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농구부 훈련을 빠지거나, 아니면 조금 일찍 빠져나와서는 미친 듯이 자전거 페달을 저으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드 몰래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영영 속내를 알 수 없을 무표정을 오늘도 고수하고 있는 타냐가 서 있었다. 그를 마주한 매뉴얼은 아차 하며 벌떡 일어났다. 이 책상에 올려진 가방이 내 것이 아니었지. 야, 미안하다. 잊고 있었다.
"쟤 요즘 이상해."
아버지표 특제 자투리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 넣던 매뉴얼은 타냐의 말에 벌어진 입으로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무슨 소리야?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는 건 저뿐이었는지, 카페테리아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않은 제 친구들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을 쏟아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쟤 처음 봤을 때랑 분위기가 딴판이라니까. 맞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니네 나 만난 지 석 달도 안 됐잖아?"
입에 욱여넣었던 샌드위치를 급하게 삼키고는 항변하자 이번에는 야유의 목소리가 매뉴얼에게로 쏟아졌다. 당연히 알고 있지, 두 달이면 충분해, 너 그동안 변했다니까, 하는 목소리에 매뉴얼은 먹던 것을 내려놓고는 턱을 괴며 식탁에 기댔다. 그래, 매뉴얼 전문가들아. 들어나 보자.
"나!"
"다이앤 먼저."
"얘 오늘 나한테 베이커리 물어봤다?"
"그게 뭐?"
"내가 처음 말해줬을 때는 신경도 안 썼잖아!"
그때는 별로 안 가고 싶었겠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매뉴얼 혼자뿐이었는지, 스턴은 오오 하며 다이앤의 말에 맞장구치고 있었고 크레인과 타냐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슬슬 이 간이 청문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감한 매뉴얼은 불만스러운 눈썹을 치켜들었다.
"쟤 간식 먹는 거 본 사람 있어?"
"아니."
"한 번도."
"그러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야!"
으음, 그래, 하는 멍청한 호응 소리를 끝으로 발언이 끝난 다이앤이 뿌듯하게 자리에 앉았고, 그 뒤를 이어 스턴이 손을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매뉴얼이 스턴을 턱짓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쟤 요즘 농구부 훈련하다 슬쩍 도망간다."
"나만 가냐? 아니잖아!"
"너 처음에는 뒷정리까지 다 하고 갔어. 기억해?"
오늘은 아예 훈련을 가지 말까 고민하고 있던 매뉴얼이 양심에 찔려 목소리를 높였다. 이의 있다, 그때는 생판 처음 들어온 풋내기이지 않았느냐. 그 이의 각하한다, 넌 첫날부터 우드랑 친구 먹고 돌아다닌 건 기억 못 하느냐. 그건 우드가 독특한 거 아니냐고 반박하려던 매뉴얼의 말은 주변에서 맞장구치는 목소리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훈련 한두 번 일찍 나온 걸로 유난이야!
"다음은 나."
"그래... 또 있냐?"
"점점 가게에 일찍 가는 것 같은데."
타냐의 차분한 목소리에 매뉴얼은 놀라 툴툴거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일찍 가려고 노력한 건 맞았다... 얼른 가서 교대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티가 났나?
"그게 왜?"
"처음에는 일하러 가기 싫다고 그랬거든."
"아, 기억난다. 아침마다 책상 위에 퍼질러져서는 노래를 불러 댔는데."
"내가 언제!"
매뉴얼과 다이앤이 그랬다, 안 그랬다 목청을 높이는 사이 타냐가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가게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뭘 숨겨놓았든, 어떻든. 그리고는 스턴과 크레인과 머리를 맞대고는 무어라 속삭였으나, 다이앤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매뉴얼은 그 말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
"맞아, 그리고."
"그래, 아주 다 털어다 먹어라."
"뭔데?"
"한나가 저 녀석이랑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던데."
"뭐?"
크레인의 발언에 테이블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크레인이 그런 말을 꺼낼지 몰랐던 매뉴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게 모여드는 시선을 둘러봤다. 네 개에... 더해,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 과장일까? 매뉴얼이 잠시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흩어내는 사이 저들끼리 시선 교환을 끝낸 친구들이 하나씩 입을 열었다.
"나만 본 게 아니었지?"
"한나가 그런 걸 숨기는 애는 아니잖아."
"그럼 그거 때문인가?"
"뭐가 그거 때문이야?!"
똑바로 말해 이 녀석들아, 당사자 앞에서! 그 시선이 무슨 뜻을 담았는지 알아챈 매뉴얼은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해로 바다도 만들어 버리겠다는 불길한 생각에 어서 해명하려던 그의 목소리는, 찌르르 울리는 종소리에 그만 묻히고 말았다.
"패치."
"안녕."
패치는 어제의 불법적인 만남 이후로 매뉴얼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이전이었다면 그저 고개만 까닥이고 말았을 그가 오늘은 매뉴얼에게 눈인사까지 했으니까. 매뉴얼은 그런 패치의 변화가 기꺼워 마주 시원스런 웃음을 지어 주었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고 난 지난주는 어땠던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못 본 척하며 지내느니 차라리 그는 가게를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자요."
매뉴얼은 패치의 앞에 들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턱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인가 하며 들춰 보던 패치도 어이없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분홍색 포장지에 감싸인 것은 이번에도 쿠키였다. 웃는 얼굴 모양은 아니고, 대신 초콜릿 칩이 박혀 있는.
"정말이야?"
"넣어 둬요."
"넌 샌드위치 가게가 아니라 베이커리에서 일했어야 했어."
"다른 소리는 말고요. 받을 거예요, 말 거예요?"
"그래, 그래. 약속했으니."
패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매뉴얼이 올려놓은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패치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고 있던 매뉴얼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쿠키를 집어 들자 과장된 손짓으로 인사하며 연극을 하는 것처럼 인사했다. 매뉴얼의 가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인사에 날아든 것은 환호가 아닌 차가운 비웃음이었지만 매뉴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도 하나 먹어."
"맛만 볼게요."
"메이슨 베이커리는 믿고 먹을 만해."
"알아요?"
"그곳은 여주인이 친절하지."
패치가 권하자마자 냉큼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매뉴얼이 혀를 감싸는 단맛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탓에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가게에 뛰어 들어간 저를 맞이했던 친절한 사람이 가게의 여주인이었나 보다. 패치는 여기에 오래 살았을 테니까 알고 있겠구나. 그럼... 제가 급하게 달려왔으리라는 것도 이미 눈치챘겠구나. 바깥에서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하느라 애먹었던 매뉴얼이 슬쩍 패치의 눈치를 봤다. 패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게 그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모른 척해 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패치."
"음."
"궁금한 것 물어봐도 돼요?"
"곧 바빠질 텐데."
"간단한 것만."
"답하고 싶은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뭐야..."
툴툴거리는 매뉴얼의 말이 길어질 틈도 없이 가게 문의 종소리가 딸랑, 울렸다. 그리고 그보다도 먼저,
"야, 매뉴얼!"
하는, 매뉴얼에게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가게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한발 늦게 찾아온 정적이 그들 모두를 감쌌다. 큰 소리에 살짝 놀란 패치와 낭패라는 표정이 뒤늦게 떠오르고 있는 매뉴얼, 그리고 아직 영문을 모르는 다이앤과 그 친구들을.
엉망이었다. 모든 게. 모든 것이라고 감히 넘겨짚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엉망이었다. 사람은 몰려들었고 매뉴얼도 패치도 잠시나마 쉴 시간조차 없었으며, 갑자기 들이닥친 매뉴얼의 친구들은 금방 나가기는커녕 각자 음료를 하나씩 들고 가게 구석에 자리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매뉴얼은 주문을 받을 때마다 그들을 흘끔거리느라 평소보다 헛손질을 두 배는 했고, 그렇게 늦어진 시간은 손님들의 작은 짜증으로 돌아왔다. 매뉴얼이 세 번째로 메뉴를 잘못 알아들어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자 보다 못한 패치가 다가와서는 그를 붙잡아 커피 기계로 둘러싸인 카운터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
"닥치고 들어가서 음료나 만들어."
패치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곧 감정을 잃었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자리에 멍하게 패치를 보던 매뉴얼은 그의 매서운 눈길을 또 한 번 받고서야 정신 차리고 컵에 샷을 부었다. 이번에는 무감한 얼굴로 사람 앞에 선 패치를 살피느라 정신없었지만, 적어도 기계와 대화하다 말을 절 일은 없었기에 가게는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높이 솟은 커피머신과 서랍이 구석에 앉은 친구들의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가려 주었기에 매뉴얼은 점차 그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 있었다.
"......."
"......."
그리고 길고 길었던 사람의 행렬은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끝났다. 테이블에 앉아 수다 떠는 이들의 목소리가 공기를 이지러뜨리고, 바쁜 걸음을 알리는 종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패치가 매뉴얼에게 손짓했다. 커피, 레모네이드, 밀크쉐이크, 그리고 또 다른 음료들을 마구 만들어내고 설거지하고, 그리고 또 다른 잡무들을 모조리 해결해내고는 의자에 널브러져 있던 매뉴얼이 그 손짓에 다시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하며 매뉴얼이 다가가자 패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를 지나쳐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가 봐."
"네?"
"아직 있어."
피로에 살짝 풀려 있던 매뉴얼의 눈이 금세 또렷해졌다. 아직 있어, 란 말의 주인은 분명 저를 우렁차게 부르던 친구들일 터였다. 매뉴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카운터 너머로 쭉 내밀었다. 창가 제일 끝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머리 네 개 중 하나가 고개 들어 인사했다. 타냐였다. 매뉴얼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카운터를 뛰쳐나갔다.
"야."
"너 뭐야?"
"너넨 뭔데?"
매뉴얼이 쪼그려 앉으며 테이블에 기댔다. 낮아진 그의 위로 친구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너 가게 한다고, 시간 나면 와 보라며. 스턴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하고 나자 테이블 주변은 조용해졌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매뉴얼이 가게에 무언가 숨겨놓았을 거라며 찾아왔을 이들, 그리고 매뉴얼이 숨겼던 무언가.
"그 사람이지?"
"누구."
"그, 있잖아."
이번에도 말문을 튼 것은 다이앤이었다. 평소의 높고 커다란 목소리를 한껏 죽인 다이앤이 작게 속삭였다. 살쾡이. 그 단어를 듣자 매뉴얼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응."
"여기서 일해?"
"응."
"그때, 만났던 이후로?"
매뉴얼은 턱을 대고 있던 왼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렇게 될까 봐 패치가 들어온 이후로는 가게 일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저보다 패치를 오래 알고 있었던 제 친구들은 궁금한 게 아주, 아주 많아 보였다.
"설명은... 지금 여기서 하기에는 복잡하고, 여기서 일해. 얼마 안 됐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고, 가게에서 문제 생기면 나보다 아버지가 먼저 나설 거고, 그래서 이야기 안 했어. 학교에는... 여러모로 유감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잘했어. 몰려올 애들 몇 명 있기는 한데... 그런다고 소문이 안 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 사실 모르겠다, 나도. 가서 싹 다 쥐어패 버리든지."
자신이 먼저 패치에게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조금은 무책임해 보인다고도 생각했으나, 매뉴얼은 자신이 골목에서 패치에게 제 가게를 소개하던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으니.
"네 옆에 서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
"난 네 목소리에 놀랐다, 인마."
"그런데 저 사람 실제로는 처음 본다."
"난 본 적 있는데."
"어? 어디서?"
"헤이븐 길 쭉 따라가다 보면 골목으로 빠질 수 있잖아. 그 안쪽 가게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던데."
"생각보다 가깝네?"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이야기를 듣던 매뉴얼이 눈을 굴렸다. 패치에게서 벗어날 듯 벗어나지 않는 대화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매뉴얼은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닦는 패치를 곁눈질했다. 패치의 존재를... 숨긴 건, 맞는데... 아니, 숨겼다기보다는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왜 이리도 마음이 초조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궁금한 건 다 해결됐냐?"
"더 이야기 안 해준다며?"
"아, 샌드위치 맛있더라."
"고맙다, 말씀드릴게."
"그리고 저 사람도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더라."
심드렁한 척 대답하던 매뉴얼이 스턴의 말에 고개를 바로 세웠다. 뭐, 누구? 저도 모르게 되묻자 스턴이 멋쩍게 입가를 쓸었다. 저... 저 사람. 이름이 뭐야?
"...가서 직접 물어봐."
"어... 안 좋아할 거 같은데."
"맞아, 안 좋아해."
"이 자식은 뭐라는 거야?"
나도 몰라, 인마. 매뉴얼은 그 말을 속으로 꾹 삼키며 대신 와 줘서 고맙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카운터 안 어딘가에 앉아 있을 패치의 자리에 눈길을 준 매뉴얼은 조금씩 저리는 다리를 힘차게 폈다. 와 줘서 고맙고, 소문은 내지 마라! 힘주어 말하는 그 말에 저들을 뭐라고 생각하냐는 다이앤의 아우성과 알았다는 크레인의 무심한 대답을 흘려들으며 매뉴얼은 홀가분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 사람, 성실하고 좋던데. 소문이랑은 딴판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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