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솦고] 토끼풀꽃
화관과 반지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엎드려 있던 끝에 맥타비시는 타깃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야 말았다. 스코프 너머로 핏물이 흐드러짐과 동시에 타깃이 고꾸라진 것을 확인한 맥타비시는 주저하지 않았다. 저격총을 어깨에 둘러멘 그는 본부에 무전을 넣었다.
"HQ(Headquarter, 사령부), 여기는 알파-1. 타깃 제거 완료. RP(Rendezvous Point, 집결지점)로 이동하겠다."
-알파-1. 타깃 제거 확인. 버드를 보내겠다. ETA(Estimate Time of Arrival, 도착예정시간) 30분.
"ETA 30분 확인. 버드와 접선할 때까지 무선침묵 유지하겠음. 알파-1 아웃."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토끼풀 군락지를 가로지르며 맥타비시는 랑데부 포인트까지 내달렸다. 적들의 추격이 있었으나 숙련된 특수부대원에겐 그것을 뿌리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철수 헬기에 올라탄 맥타비시의 손에는 토끼풀꽃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기지로 귀환 중인 헬기 안에서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길리수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구의 군인은 무언가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다. 장갑까지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가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화관이었다. 토끼풀꽃으로 엮어 만들어진 화관 말이다. 두꺼운 장갑을 벗었어도 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은 여전히 커다랗고 투박했다. 군데군데 굳은살과 흉터가 새겨져 있는 손가락은 섬세하게 움직이며 작디작은 꽃줄기를 하나씩 엮어나가는 중이었다. 도착 지점이 가까워질수록 화관도 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지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고,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어둠이 헬기 착륙장에 깔려 있었다. 등 뒤로 덮쳐오는 프로펠러의 돌풍을 피해 허리를 숙이며 헬기에서 내린 맥타비시는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헬기에서 조금 멀리, 익숙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오지 말라니까. 참으로 말을 듣지 않는 부관이었다.
"나오지 말라니까!!"
"타기나 하십시오!!"
고스트가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 맥타비시는 차에 타기 전, 헬기에서부터 소중히 쥐고 있던 화관을 부관의 머리에 씌웠다. 난데없이 푹 씌워진 무언가를 만져보던 고스트는 일단 자신도 차에 올라탔다.
"이게 뭡니까?"
차에 시동을 걸며 고스트는 룸미러로 제 머리를 살펴보았다. 발라클라바 위에 수줍게 얹혀 있는 토끼풀꽃 화관의 존재를 발견한 눈은 그것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보면 모르나? 귀환 선물이잖냐."
화관을 바라보는 고스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길래 맥타비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 '이딴 풀떼기는 왜 가져오신 겁니까.' 그다음은 가차 없이 벗겨져 차 밖으로 내던져지는 화관까지. 평소 그의 성질머리로 미루어 본다면 충분히 벌어질 만한 일이었다. 안전벨트를 매며 대위는 곁눈질로 고스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스트는 그저 화관을 노려만 볼 뿐, 그것을 벗겨내서 내던진다던가 하다못해 이딴 쓰레기는 뭐냐며 되묻지 않았다. 그저 브레이크를 밟은 다음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고 다시 액셀을 밟아 착륙장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비행장과 기지는 짧은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짧은 길을 내달리는 사이, 맥타비시는 스무 번도 넘게 옆자리를 힐끔거렸다. 진작에 내던질 줄 알았던 화관은 아직도 제가 씌운 그대로 고스트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저놈이 웬일이래. 어디 아픈가? 나한테 뭐 잘못한 게 있나?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있나? 당최 종잡을 수 없는 고스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차는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태워다줘서 고맙다."
"피곤하실 텐데 빨리 들어가시죠."
고스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차체를 가볍게 두드려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그는 화관을 벗지 않았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맥타비시는 구겨 들어간 표정을 가다듬지 못했다. 자신의 소중한 부관이 어디 정말 아픈 게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관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작전에서 돌아온 군인은 할 일이 많았다. 작전 때 썼던 장비 정리를 시작으로, 디브리핑 후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틀간 씻지 못해 땀과 흙먼지로 쩌든 몸도 깨끗이 씻어내야 했다. 신속 정확하게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야 맥타비시는 잠시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왜냐하면 단독작전을 맞아 비상 상황에 들어갔던 몸이 당장 열량을 공급하라며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배가 무진장 고팠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어난 맥타비시는 하품을 쩍쩍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지만, 식당에는 각종 훈련으로 인해 식사 시간을 놓친 장병들이 삼삼오오 모여 허기를 채우는 중이었다. 접시 가득 음식을 받은 맥타비시가 앉을 자리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헉.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새하얀 토끼풀꽃으로 장식된, 시커먼 발라클라바를 뒤집어쓴 뒤통수가 보였다. 그것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맥타비시는 고스트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저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놓쳤는지 고스트는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은 맥타비시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가리켰다.
"너 왜 아직도 그걸 쓰고 있냐?"
막 포크로 소시지를 찌르던 고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별 같잖지도 않은 걸 물어본다는 눈으로, 고스트는 잠시간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며 고스트는 입에 소시지를 넣기 전에 대답했다.
"대위님이 씌웠잖습니까."
고스트가 머리에 이상한걸 얹고 다닌다는 소문이 기지를 떠돌았다. 아침 운동을 위해 모인 대원들에게서부터 시작된 소문은 금방 여기저기로 퍼져나갔고, 그에 따른 목격담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머리에 그거 뭡니까?"
아침 식사 후 흡연장에서 만난 아처의 질문이었다. 그가 턱짓으로 고스트의 머리를 가리켰다. 식물을 말려 태우는 연기가 가득한 흡연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관이 그의 머리에 얹혀 있었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구해온 것이며, 무슨 경위로 그가 쓰고 있는지. 궁금한 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위님이 씌워놓고 간 거다."
아처의 질문에 고스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아. 아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위님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었었는데, 아마 중위님이 마중을 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대위님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저런걸 쓰고 있는 거겠지. 고스트는 그저 대위가 씌운 것이라는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처를 비롯한 모든 대원들은 '망할 대위 새끼가 강제로 씌워놓고 벗지 말라고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다. 내 언젠가 그 놈의 멱을 따버리고 말 것이다. 염병할 대위 새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네. 수고 많으십니다."
아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대위가 저에게 이것을 씌웠다고 말하는 고스트의 표정이 참으로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원체 심드렁한 사람이었던 고스트의 기분은 읽기 어려운 편에 속했다. 매사 해골 발라클라바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데다,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그의 얼굴에 맺힌 표정은 정말이지 살기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곧 중위가 대위의 목을 조를 것 같다고, 아처는 부대 내 프래깅 저지에 대한 대책을 머릿속으로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아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고스트는 정말 어처구니없어할 터였다. 그가 생전 써보지도 않은 화관을 계속 쓰고 다니는 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맥타비시가 저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이었다. 분명, 선물이라고 했었다. 게다가 손수 씌워주기 까지 했으니, 제 손으로 벗는 게 좀 그랬으니 계속 얹고 다니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벗을 마음도 없긴 했다. 어쨌든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에게 받은 선물이었으니 말이다.
그 문제의 화관을 선물해 준 장본인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화관을 쳐다보느라 포크질도 제대로 못 하고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는 손은 매우 느리기만 했다.
"좀, 벗지 그래?"
넌지시 벗으라는 요청을 해봐도 화관을 선물 받은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맞은편의 맥타비시와는 달리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고스트는 커피까지 한 잔 가져와서는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씌워주지 마셨어야죠."
속이 타들어 가는 그와 달리 고스트는 아주 여유가 넘쳐 보였다. 아니, 일부러 저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맥타비시는 누가 봐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놀릴 수 있는 기회를 고스트가 두 눈 멀쩡히 뜨고 놓칠 리 없었다.
맥타비시는 어떻게든 신경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시야 내에서 살랑거리는 토끼풀꽃 화관과 그걸 쓰고 있는 고스트의 존재는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맥타비시가 손을 뻗어 고스트의 화관을 벗기려 했다. 하지만 고스트는 몸을 뒤로 젖혀 맥타비시의 손길을 휙 피해버리는 게 아닌가.
"제겁니다. 제 물건에 마음대로 손대지 마시죠?"
고스트의 말투는 대놓고 맥타비시의 속을 득득 긁어대고 있었다. 아주 얄밉다 못해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질 정도였다. 남은 커피를 호로록 마신 고스트는 제 접시를 들고 휙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겨진 맥타비시는 울분에 차 다 식어버린 식사를 우적우적 해치워야만 했다.
대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점심을 지나고 나서부터 기지 내까지 퍼져나갔다. [산적 같은 대위가 소녀같이 토끼풀로 화관 만들어다 부관 머리에 씌워놓고 좋아라 했다더라....] 그 소문의 당사자인 산적 같은 맥타비시 대위는 억울했다. 하지만 75% 정도는 사실에다가 나머지 25%는 정상참작할 여지가 있긴 했지만 역시나 사실에 가까웠다.
산적 같은 대위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진실이었다. 거구의 몸에 모히칸을 하고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있는데 산적 같지 않다고 주장하면 그건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소녀같이 토끼풀로 화관을 만들었다는 것도.... 맥타비시에겐 안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군인이란 작자들은 원체 감수성이 메말라 있는 놈들뿐이라 이런 낯간지러운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순간, 열두 살 먹은 애새끼도 안 할 짓을 한다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 손수 화관을 만들어오긴 했으니, 이것도 할 말은 없었다.
부관 머리에 씌운 건 그냥 사실이었다. 제 손으로 씌웠는데 무어라 변명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좋아라 했다더라. 이건 조금 억울했다. 좋아한 건 맞긴 했다. 조그마한 머리에 씌워진 화관은 고스트에게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시커먼 발라클라바와 하얗게 흐드러진 토끼풀꽃은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루 종일 보고 있는 게 좋긴 했지만.... 맥타비시는 역시나 억울했다. 화관을 만들며 이것을 쓰고 있을 고스트를 상상하긴 했다만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놈의 성격으로는 화관이 머리에 닿기도 전에 쳐내버리거나 기껏 씌워 놓았어도 한두 시간 안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리라 예상했건만,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놈답게 고스트는 대위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야 말았다.
게다가 다들 이상한 오해 중이었다. 착하고 힘없는 부관에게 억지로 씌워놓고 뒤에서 비웃고 있다더라-. 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맥타비시로써는 억울하다 못해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화관은 생화로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 싱싱함이 하루는 갈까 싶었다. 하지만 맥타비시가 기지에 도착해 고스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준 건 새벽이었다. 그랬으니, 고스트는 말 그대로 하루 종일 화관을 쓰고 다녔다. 머리에 꽃더미를 얹은 채로 운동도 가고, 사격장에도 가고, 사무실에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중위의 머리에 토끼풀꽃이 얹혀있는 꼴을 목격한 프라이스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 뿐이었다.
하여튼 그는 온 기지를 돌아다니며 맥타비시의 선물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맥타비시는 심란하기만 했다. 섬뜩한 해골 프린팅이 되어있는 발라클라바와 오밀조밀 모여있는 하얀 토끼풀꽃은 이상야릇한 대비를 이루며 묘한 매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홀려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도 속닥속닥 퍼지는 소문이 귀에 들어올 때면 갑자기 열이 뻗치곤 했다.
수십번을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맥타비시는 늘 들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휙휙 넘겨 여백을 찾은 그는 곁눈질로 고스트를 관찰하며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수첩의 한 면에 그려진 건 토끼풀꽃 화관을 쓰고 있는 고스트의 모습이었다. 투박한 해골 발라클라바의 무늬라던가 섬세한 토끼풀꽃의 꽃잎과 발라클라바 눈구멍으로 드러나는 나른한 눈매까지. 맥타비시는 무엇하나 빠짐없이 제 수첩에 고스트를 담아냈다. 그리고 아래 휘갈겨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망할 중위 놈. 이라고 말이다.
토끼풀꽃으로 화관을 만드는 맥타비시의 소녀심은 둘째치고,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수첩 곳곳에 그려 넣은 그림들의 때깔부터가 그의 미적 감각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대원 중 나뭇조각 취미가 있는 녀석을 따라 나무토막도 곧잘 깎아대곤 했다. 요리는 뭐, 스코틀랜드인답게 먹을만한 수준이었고 하다못해 애인이 있는 대원들에게 부탁받아 크리스마스나 신년 카드를 멋들어지게 쓰는 법까지 가르쳐줄 정도였다.
하지만 고스트는 달랐다.
물론 고스트는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군인이었다. 사격도 훌륭했고 체력도 월등했으며 특히 적진 사보타주는 신기에 가까운 솜씨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재능은 한쪽에만 치우쳐 있었다. 고스트는 손으로 무언가 부수는 것만 잘하지, 만드는 건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었다. 물론 그가 저주받은 손재주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나오는 결과는 영 시답잖기만 했다. 고스트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가망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깔끔하게 포기해 버렸다. 그림이야 사진으로 대체하면 될 일이었고 애초에 요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음식은 사 먹거나 하다못해 보급 나오는 전투식량이라도 먹으면 될 터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고스트에게 있어 논할 가치도 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대위가 적 지휘관을 제거해 최종 결정권자의 부재를 만들면, 중위가 혼란에 빠진 기지에 잠입해 중요 시설을 사보타주 하는 게 이번 작전의 주요 목표였다. 작전은 계획했던 대로 순탄히 흘러갔다. 성공적으로 잠입한 고스트는 기밀 서류들을 챙기고 중요 시설에 폭발물을 설치한 후 조용히 빠져나왔다. 기폭장치의 버튼을 누른 그는 등 뒤로 덮쳐오는 폭음과 연기를 힐끔 바라보고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예정된 철수 지점은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토끼풀 군락지였다. 무전으로 본부에 작전 수행 완료 및 퇴각 요청을 보낸 고스트는 저를 태우러 올 헬기를 기다렸다.혹시 추적해 올지도 모르는 적을 피하고자 몸을 숨긴 고스트는 바람에 흔들리는 토끼풀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풀꽃이라... 희고 여린 꽃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빌어먹을 화관 말이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건 그 화관을 선물이랍시고 제 머리에 씌워줬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 굳이 내색하지 않았고 말이야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날 새벽, 맥타비시가 들고 온 화관을 제 머리에 씌워줬을 때부터 고스트는 아주 격렬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아찔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선물이랍시고 그런 걸 주는 건지, 그 행동 하나와 그 말 한마디에 철렁 내려앉았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를 반복하는 심장박동에 시달릴 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건지, 덩치는 산만해서는 적의 멱을 한 손으로 따버릴 것처럼 생긴 주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런 섬세한 토끼풀꽃 화관은 왜 주고 있는 건지, 자신은 왜 말도 안 되는 선물에 또 좋아하면서 하루 종일 쓰고 다녔던건지..... 헬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고스트는 이런저런 생각에 시름만 깊어질 뿐이었다.
고스트가 머릿속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생각을 헤집고 나온 건 어떠한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해야 마땅한 일일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맥타비시가 줬던 대로 그에게 화관을 씌워 놓고 싶었다. 투박하고 거친 모히칸 위에 앙증맞고 깜찍한 화관을 씌워 놓으면 참으로 볼만할 터였다. 맥타비시가 화관을 벗으려고 한다면 지금 제 선물을 버리려고 하시는 겁니까? 라는 말로 꼼짝없이 붙여놓고 말이지... 고스트가 실없는 생각에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절망에 가까운 자신의 손재주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화관같이 크고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건 만들 수 없었다. 꽃줄기를 어떻게 엮어 만드는지조차 모르기도 했고 말이다. 고스트는 단념이 빨랐다. 대신, 그는 조금 더 작고 쉬운 걸 만들기로 했다. 아직은 어둑한 하늘을 가르며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고스트는 토끼풀꽃을 한가득 꺾어다 제 파우치에 꽂아 넣었다.
기지로 귀환하는 헬기 안에서 고스트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생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짓거리를 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고스트는 힘 조절에 실패해 또다시 뭉개져 버린 토끼풀꽃을 헬기 밖으로 내던지며 실소를 흘렸다. 방금 건물 몇 개를 폭파하며 적들에게 혼돈을 안겨준 사람이 이런 작고 여린 풀 몇 송이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았다. 맥타비시는 어떻게 이런 연약한 풀떼기로 그렇게 아름답고 안정적인 화관을 만들어 낸 건지. 손가락 사이에서 토끼풀꽃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스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첫 시도는 꽃줄기가 부러져서 탈락, 그다음 시도는 이상한 꽃 뭉치가 돼버려서 탈락, 그 다다음 시도는 꽃잎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서 탈락, 그 다다다음 시도는 기껏 만들고 나니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탈락.... 토끼풀꽃을 한가득 꺾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스트는 대부분의 꽃을 헬기 바깥으로 내던져야 했다.
하지만 끝없는 실패 끝에 고스트는 해내고야 말았다. 토끼풀꽃 세 송이를 묶어 만든 반지가 고스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어디 하나 시들지 않은 완벽한 꽃잎들과 맥타비시의 굵직한 손가락을 고려한 정확한 크기의 반지였다. 고스트는 반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양손으로 그것을 감싸 쥐었다. 헬기가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손안의 반지를 내려다보며 발라클라바 안으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맥타비시는 고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몸으로 혼자 적진 한 가운데에 떨궈놓아도 모조리 다 터뜨려 버리고 전리품까지 챙겨 나오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이 절로 움직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맥타비시는 싸늘한 밤바람이 휘모는 활주로의 구석에 서 있었다. 오는 길에 오퍼레이터실에 들러 고스트가 돌아오는 길이라는걸 확인까지 한 그는 차에 기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맥타비시의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 헬기가 여명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끈 맥타비시는 발밑의 꽁초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굉음과 돌풍을 일으키며 착륙한 헬기에서 고스트가 폴짝 뛰어내렸다. 맥타비시는 손을 들어 바람을 막았다.
"수고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왜 나오셨습니까!"
"오기나 해!!"
헬기와 멀리 세워둔 차에 도착한 맥타비시는 운전석 문을 열어 타려고 했다. 하지만 고스트는 차에 타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운전석에 몸을 밀어 넣으려던 맥타비시는 다시 몸을 곧게 폈다. 조수석 쪽으로 가지도 않은 채, 고스트는 미동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스트는 오른손에 소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은 헬기에 내렸을 때부터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티가 역력했다. 맥타비시는 열었던 문을 닫았다. 저를 바라보는 고스트의 얼굴과 그의 등 너머를 번갈아 보던 맥타비시가 물었다.
"기념품이라도 주워 왔냐?"
맥타비시의 물음에 고스트는 들고 있던 소총을 어깨에 멨다.
"손 주십시오."
고스트가 빈손을 내밀자, 맥타비시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스트 기준으로 오른손이었으니 맥타비시에게는 왼손이 가까운 손이었다. 손을 달라니 줘야지. 그가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내미니 고스트는 그 손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비어있는 맥타비시의 넷째 손가락에 숨기고 있던 토끼풀꽃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당연하게도 너무 작지도, 헐렁하지도 않았다. 고스트는 맥타비시의 신체 치수에 대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누구보다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고스트는 지금, 이 상황이 참으로 낯 뜨겁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는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으며 툭 내뱉었다.
"제가 빚지고 사는 성격이 못돼서요."
하지만 그의 말은 맥타비시의 귓가에 가닿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고스트가 제 손에 반지를 끼워줄 때부터 충격을 받아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중위가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어.
이 네 단어만이 맥타비시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맴돌았다. 고스트가 손을 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고스트가 등 뒤에서 안 갑니까?!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제야 놀라 펄쩍 뛴 맥타비시는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맑고 투명한 아침 햇빛에 비춰진 토끼풀꽃 반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웬일, 웬일이냐. 이런걸, 다...."
"아까 말했잖습니까. 빚지고는 못 삽니다."
"아니, 화관은... 그냥, 선물이었는데... 빚 같은 거, 아냐..."
"그럼 저도 선물이라고 치죠, 뭐."
맥타비시는 무슨 정신머리로 차에 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어를 주차에 뒀으면서 차가 왜 안 나가냐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액셀 대신 브레이크를 밟아 급제동을 몇 번이나 하기도 했고, 반지와 고스트를 번갈아 보다 전방주시 미흡으로 차를 담벼락에 들이 박을뻔 하기까지 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고스트는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맥타비시는 자신이 운전한다며 빡빡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조수석에 탄 고스트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거 풀떼기로 만든 반지 하나 끼워줬다고 저리 허둥지둥 움직이는 맥타비시라니. 희귀한 광경이 웃기긴 한데 아무래도 걱정이 더 크긴 했다. 냉철한 판단력과 부대 내에서 손꼽히는 운전실력을 가지고 있던 맥타비시였지만 저렇게 당황할 줄이야... 고스트는 덜걱덜걱 나아가는 차 안에서 제가 조금 지나친 짓을 하지 않았나 고민해야 했다.
겨우겨우 숙소 주차장에 도달해 차를 주차한 맥타비시는 핸들을 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미동도 없길래 옆자리의 고스트는 도저히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위님, 괜찮으십...."
하지만 고스트의 질문은 끝맺음을 짓지 못했다. 어딘가 얼이 빠져있던 맥타비시가 헉. 하고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다음부턴 이런 거 미리 말하고 줘!"
평소의 험상궂은 대위로 돌아온 맥타비시는 노성을 내질렀다. 난데없이 면전에 호통을 맞은 고스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십니까. 라고 반사적으로 내뱉을 뻔했다.
"왜요."
하지만 그의 부관된 자로써 고스트는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물어보았다. 비록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심장 떨어질 뻔했잖냐."
마찬가지로 사납게 돌아온 맥타비시의 대답은 역시나 직설적이고 낯 뜨겁기만 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과연 대위다운 대답이었다. 맥타비시의 말투는 거의 시비조에 가까웠지만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의 토끼풀꽃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핸들을 지나치게 꽉 잡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착한 부관은 그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미리 말하면 재미가 없잖습니까."
고스트가 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맥타비시도 그를 쫓아가듯 운전석에서 나와 차 문을 쾅 하고 거칠게 닫았다.
"이게 더 재미없어! 진짜 사람 엿 먹이는 짓거리나 하고 말야..."
맥타비시의 구시렁거림을 들은 고스트는 더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우선 화관 같은 걸 괜히 줘서는 애먼 사람 심장을 멎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맥타비시였다. 그랬기에 고스트는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맥타비시를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럼, 대위님도 화관 같은 거 주실 거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맥타비시를 슬쩍 앞질러 가던 고스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맥타비시는 미간을 구긴 채로 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거 하나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엿 먹이실 거면 말입니다."
고스트는 당부를 맥타비시에게 내던지고 빠르게 사라졌다. 먼저 가버리는 고스트를 붙잡지도 못하고 맥타비시는 혼자 남겨졌다. 엿 먹이지 말라고?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지 말고...? 고스트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던 맥타비시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준 선물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좋았다고 말하는 고스트의 고백이었다.
"야!!!! 라일리!!"
맥타비시는 제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드는 걸 느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가다니. 그의 부끄러움 마저 자신의 몫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소리를 질러버린 맥타비시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서성거리며 시뻘게진 얼굴과 지나치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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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멋부리는 인면조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밥님의 솦고를 정말 너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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