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零으로부터,

란웨이 교류전 참여 글, 유료발행(이었다)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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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8.

2020년 2월 8일 진행된 란웨이 교류전, <특별조사처 야근팀>에 참여한 글을 유료발행합니다.

씨피는 란웨이고요, 언제나 그랬듯 드라마 내용을 날조했습니다.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신 분을 예상 독자로 염두해 두고 쓴 글입니다. 혹시라도 드라마를 덜 본 분이 계시다면 꼭 마저 보고 다시 돌아와 주세요. 드라마의 일부 장면을 묘사하며 제 입맛대로 해석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많습니다. 제가 새로 창작하여 쓴 부분이 많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쓰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음에도 결제를 하신다면... 부디 제 글이 이천원의 가치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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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웨이, 나는 네가 왜 이렇게 익숙할까.”

연인의 매끄러운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자오윈란이 말했다. 자오윈란은 이 순간을 사랑했다. 하늘이 어둡고 공기마저 숨을 죽인 늦은 밤, 사랑스러운 애인과 살을 마음껏 맞대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 이때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 마치 이 세상에 꼭 붙어 누운 연인 둘만 남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자오윈란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숨을 죽였다. 션웨이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에 귀를 대면 저 깊은 아래에서 고동 소리가 들려 왔다. 자오윈란은 그 소리에서 안정을 얻었다. 귓가에는 점점 빨라지는 연인의 심장 박동이 울리고, 눈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사람이 저만을 바라보고. 자오윈란은 행복했다.

종종 이 평온을 과거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 감각은 순식간에 자오윈란을 스치고 지나가, 붙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손을 뻗으면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자오윈란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손을 뻗었는지조차 잊었다.

“너를 만나기 이전에도, 너를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아.”

“그래?”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너 없이 혼자 지내던 과거가 상상이 안 돼서, 그래서 그런 걸까? 나의 션웨이.”

“…그럴 지도 모르지.”

“그렇겠지?”

“응, 네 생각이 맞을 거야.”

넌 언제나 옳으니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내 삶의 지표니까. 션웨이는 뒷말을 삼키는 대신 자오윈란의 입술에 제 것을 붙였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뜨끈한 혀가 화답하듯 덮쳐왔다. 션웨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제 연인이 저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기억해낼 순간을. 자신이 그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날을. 기나긴 시간이 마냥 의미가 없지만은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할 새벽을. 그때가 오면 션웨이는 기쁘게 그를 안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션웨이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자오윈란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유를 찾고, 또 찾아 헤맸다. 제대로 된 논리도 없이 튀어나온 생각들에 가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가설을 마치 정설인 양 굳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가 위험해질까 봐, 그가 나서면 시간의 흐름이 뒤틀릴까 봐, 그가 자신의 본분을 잊을까 봐… 윈란, 저기, 잠깐. 잠깐만. 션웨이는 희게 드러난 팔을 뻗어 침대맡 스탠드를 껐다.

사실, 션웨이는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외면했다. 자신이 누구보다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비밀을 품고 있는 사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감정을 알게 되면 그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길까 봐, 미워하게 될까 봐, 떠나갈까 봐. 이미 잃어 본 적이 있기에 더더욱 잃고 싶지 않았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찾아올 고통은 이전의 것보다 클 것이 분명했다. 먼 미래의 가시밭길을 예상하면서도 현재의 행복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꿈처럼 달콤했기 때문이다.

아픔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픔 뒤에 마땅히 치유가 따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이 고통을 견디게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해 그가 영영 떠나간다면, 그 뒤에는 과연 어떤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까. 션웨이가 숨을 가늘게 쉬다 얼굴을 베개에 파묻자 입술이 뒷목에 내려앉았다. 션웨이, 얼굴 보여 줘.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감추어 둔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션웨이는 그 시기를 늦추려 했다. 긴 세월 목이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자오윈란을 볼 때면 연심이 차오르면서도, 동시에 그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과 언제 이 행복이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끓었다. 션웨이의 매일은 내면의 전쟁이었다.

반복되는 고뇌에 지친 션웨이는, 비밀의 무게를 감당할 책임을 자오윈란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 과거를 깨닫게 된다면, 그리고 과거로 인해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션웨이는 그것을 저항 없이 수용할 것이다. 션웨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을 알고도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 줄 자오윈란을. 뜨거운 손이 션웨이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예민해진 피부를 어루만졌다. 션웨이는 연인의 거친 몸짓에 자신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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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가벼운 악수였을 텐데, 자오윈란은 제 손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션웨이에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션웨이가 황급히 제 손을 거두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늘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기는 했지만, 쭉 상상 속에서 만나 왔다고 해서 현실에서도 익숙할 리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런 미인을 이전에 본 적이 있다면 이 자오윈란이 잊을 리가 없었다. 자오윈란은 교수의 투박한 손길을 다시금 떠올렸다. 학문을 업으로 삼는 이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행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한 것은, 변명하자면 오랜 그리움 탓이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지나치게 생생해서 감히 만 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는 착각을 했다. 그때에는, 적어도 손바닥 한 면을 채우는 온기 정도는 제 것이었으니. 션웨이는 스스로를 변호했다. 어쩌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한 번 더 돌려세우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오윈란이 멀어지자 션웨이는 남몰래 심장께를 쥐었다. 아쉬운 기색도 없었으면서, 션웨이는 방금 멀어진 사람을 머릿속에 그렸다. 사탕을 물고 낯선 장소를 마구 들쑤시고 다니는 자오윈란. 그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원망하지 않아야 했다. 션웨이는 비로소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듯했다. 오랜 세월을 헤맸지만 결국 그의 곁이 아니면 안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대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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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션웨이의 눈앞에서 발생했다. 웜홀이 열리고, 자오윈란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력하게 자오윈란을 보내야만 했던 과거가 떠오른 탓일까, 션웨이는 자오윈란을 삼킨 구멍 안으로 무작정 몸을 내던졌다. 자오윈란이 무사히 원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 행위는 분명 같은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온 것일 테다. 과거에 겪었던 후회와 절망을 한 번 더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어쩌면, 자오윈란이 시간의 통로를 지나 다시 돌아올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두려워서일 수도 있겠다.

-5

션웨이가 사탕을 입에 넣고 빠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자오윈란은 사탕을 하나 더 꺼내려 제 옷을 뒤졌다. 복식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몸 여기저기를 한참 더듬었음에도 사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션웨이는 조용히 자오윈란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고요한 밤공기와 풀벌레 소리만이 맴돌았다. 션웨이가 말이 없자 자오윈란도 그저 션웨이와 눈을 맞추었다. 아직 어린 눈동자가 어색하게 흔들렸다. 자오윈란은 쿡, 하고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션웨이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쿤룬께서는 저를 놀리시는 것이지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아,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제가 아직 부족하다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부족은 무슨,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먼 산등성이를 노려보던 션웨이가 움찔하며 자오윈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집요하게 따라오던 시선과 똑바로 마주쳤다. 눈앞의 얼굴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쩐지 양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션웨이는 달빛이 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반박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떠오르는 언어는 없었다. 늘 마음을 달래 주던 풀벌레 소리가 어느새 귓가에서 사라지고, 심장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어둠 속에서도 옆에 붙어 앉은 이의 얼굴이 선명했다. 션웨이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핥았다.

“잠깐 걷자, 앉아만 있으니 심심하네.”

“네, 네.”

“얼른 일어나, 샤오웨이.”

“네. 네?”

곁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넋이 빠진 채로 사탕의 단맛을 음미하던 션웨이가 혀를 씹었다. 자오윈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쿠, 아프겠네. 산책 좀 하자고, 여보세요?”

“아, 죄송해요. 그런데 방금 뭐라고…”

“산책 하자고?”

“그 전에…”

“얼른 일어나라고?”

자오윈란이 짓궂게 웃으며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뻔뻔하게 허리를 펴고 어깨를 두드리는 자오윈란을 보며 션웨이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곧은 자세로 앉아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에 자오윈란은 다시 한번 크게 웃고 싶어졌다. 어릴 때나 크고 난 후에나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웃음으로 온 산을 울릴 메아리를 만드는 대신, 자오윈란은 최대한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앉아 있는 션웨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갈 거야? 샤오웨이. 싫으면 그냥 나 혼자…”

콩알만큼 작아진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던 션웨이가 눈앞의 손과 자오윈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한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뭐. 괜찮잖아.”

션웨이를 일으키기 위해 붙든 손이었으나,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완전히 일어난 후에도 그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션웨이는 손을 빼내려다가도, 힘이 들어간 손을 감히 떨쳐내지 못했다.

“물론 너도 혼자가 아니고.”

* * *

희미한 달빛에 의지하여 둘은 숲길을 걸었다. 캄캄한 어둠 속,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이 서로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이따금 낙엽이 바스락대는 소리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 둘의 귓가는 오롯이 둘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졌다. 막대사탕은 어느새 녹아 없어져, 션웨이는 빈 막대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자오윈란은 ‘그러다 다칠라.’라고 말하더니, 우뚝 멈춰 션웨이의 입에 물린 막대를 반대편 손으로 집었다. 목소리에 이어, 서로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왔다. 션웨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자오윈란은 옷에 난 아무 구멍에다 막대를 찔러 넣고, 션웨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션웨이.”

“네.”

“샤오웨이.”

“…네. 쿤룬.”

션웨이의 시선이 자오윈란의 깊은 눈빛에 닿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자오윈란은 션웨이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괜찮아?”

“…네.”

더운 숨이 션웨이의 뺨을 간지럽히더니, 이내 입술에 달라붙었다. 뜨거운 혀가 느릿하게 마른 입술을 적셨다. 자오윈란이 내내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션웨이의 목덜미를 받쳤다. 고개가 꺾이고 물컹한 혀가 여린 입안을 파고들었다. 숨이 모자랐는지 황급히 감았던 눈을 뜨자,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자오윈란의 눈빛이 션웨이에게로 쏟아졌다.

션웨이는 양손이 자유로웠으나 차마 밀치지 못하고 자오윈란의 옷깃을 붙들었다. 힘이 풀린 다리가 바들대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가쁜 숨이 둘 사이를 오갔다. 열을 품은 시선을 주고받다, 션웨이가 눈을 질끈 감고 자오윈란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 모양이 마치 어린 짐승 같아 자오윈란은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션웨이의 입술을 삼켰다. 혀끝에는 단맛이 남아 있었다.

“야옹!”

울음소리와 함께 덤불 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션웨이가 화들짝 놀라며 자오윈란에게서 멀어졌다. 자오윈란은 애초에 ‘누가 보면 뭐?’ 하는 심정으로 탁 트인 벌판에서 션웨이에게 다가간 것이었으나, 션웨이는 그렇게 대담하지 못했다. 션웨이는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굴었다.

“다칭?”

“미야옹.”

“깡마른 꼴을 보니 다칭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망할 고양이가 봤으면 엄청나게 놀렸을 거라고. 너, 오늘 본 거 가서 이르면 절대 안 된다. 그 왜, 까맣고 뚱뚱한 고양이 하나 있잖아.”

“…뭐예요? 고양이?”

“그래. 그냥 고양이. 이제 뒤 돌아도 돼.”

자오윈란이 고양이의 턱을 쓰다듬고 이마를 긁어 주는 사이, 션웨이는 열 걸음은 떨어진 곳에 뒤를 돈 채로 서 있었다. 팔을 든 모양을 보아하니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애정표현에 이토록 서투른 션웨이라니,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끌어안고 해성과 지성을 오천 번 정도 완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올 생각을 않는 션웨이를 위해 자오윈란이 직접 다가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션웨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션웨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자오윈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살갗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어쩐지 그 어떤 고급 비단보다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달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함께 걸었다.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늘 손에 차가운 장도만 쥐었던 션웨이의 손가락에 따스한 피부가 감겨 왔다. 뜨거운 덩어리가 뱃속에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 했다. 션웨이는 다시 가면을 쓰고 싶어졌다. 자오윈란은 놓치기 아깝다는 듯 션웨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었다. 어렴풋이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자오윈란은 미소지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고마워요.”

“뭐가?”

“나라는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 줘서. 사람들은 나를 존경하기도, 미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나와 속을 터놓으려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덤덤한 말투였다. 어리디 어린 션웨이가 이런 말을 아무 감정 없이 뱉어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담금질이 필요했을까. 자오윈란은 가슴께가 타는 듯 아팠다. 비어 있는 한쪽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매만지는데, 문득 품속에 있던 주머니에서 사탕이 만져졌다. 자오윈란은 겨우 발견한 막대사탕을 션웨이에게 내밀었다. 션웨이는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받았다. 손가락이 스쳤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말없이 사라져도, 날 미워하지 마.”

-3

몸도 마음도 빼앗아 놓고 금방 사라질 사람처럼 굴어 션웨이를 불안하게 하던 자오윈란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바로 다음 날 션웨이에게서 떠나갔다. 션웨이는 두 눈을 똑똑히 뜬 채로 자오윈란을 보내 주어야 했다. 션웨이가 하나뿐인 피붙이와 혈투를 벌이는 동안, 사성구가 공명하며 온 하늘을 뒤덮는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림자는 웅웅대며 머리 위를 떠다니다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자오윈란을 잡아당겼다. 자오윈란은 그것에 저항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션웨이는 어떠한 수도 쓰지 못한 채 자오윈란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뒤섞이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한 편에서는 첫사랑이 션웨이를 떠났고, 또 한 편에서는 유일한 가족이 션웨이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션웨이의 작은 세상을 빼앗아 갔다. 션웨이는 깊은 땅속으로 추락하는 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때, 태양 빛을 영원히 가릴 듯 하늘을 부유하던 그림자가 션웨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동생이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션웨이는 그림자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 순간에도 쿤룬과 같은 곳으로 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기도하며 마음 한켠에 희망을 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무심한 하늘은 이 한 가지 소원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생의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떠올린 소원이었음에도 그랬다.

4

시간의 터널을 지나 돌아온 자오윈란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션웨이를 끌어안았고, 주어진 상황을 타개하려 지혜를 짜냈고, 특조처의 팀원들과 의미 없는 농담을 나누었다. 션웨이는 오히려 불안했다. 자오윈란은 영민한 이였다. 션웨이의 감정이 어디서부터 이어져 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세계는 혼란했고 자오윈란과 션웨이는 그 혼란을 잠재우는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둘은 아늑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사건이 터져 머리 역시 터질 지경이었으나, 둘은 집 안에서만큼은 암묵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멀었다.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구두와 운동화가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션웨이가 서류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자오윈란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자오윈란이 먼저 문 안으로 발을 들이고, 션웨이가 뒤를 따랐다. 쾅, 하고 무거운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자오윈란이 션웨이를 양팔 안에 가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션웨이가 몸을 굳히자 자오윈란이 션웨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한숨을 쉬듯 속삭였다. 션웨이로서는 자오윈란의 표정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너였구나, 션웨이.”

그리고, 자오윈란이 제 표정을 살피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션웨이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비장하게 자오윈란의 판결문을 기다렸다.

“그래.”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션웨이가 각오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어준 게 너였어.”

다음 말도,

“내가 힘들 때 기댄 것도, 철없던 나를 믿어 준 것도.”

그 다음 말도.

“내 인생은 전부 너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나 봐, 내 샤오웨이.”

마찬가지로 션웨이가 머릿속에서 수십번 되풀이했던 영상과 사뭇 달랐다. 허리를 조여오는 팔에서 옅은 진동이 전해졌다. 션웨이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그렸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해도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최선의 대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과연 무엇이 ‘최선의’ 대응인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자오윈란이 입을 열 때마다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현실이 물밀 듯 닥쳐오자 션웨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그토록 미루고 무시해 왔던 진심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션웨이는 목을 가다듬었다.

“…부담스럽지 않아? 나는 너를,”

“전혀. 부담스럽긴, 오히려 미안하지. 너를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뻣뻣한 몸을 끌어안은 채로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몸을 타고 흐르는 떨림에 집중했다. 션웨이가 어색하게 자오윈란의 등허리를 두드렸다. 자오윈란이 드디어 얼굴을 떼어내고 션웨이를 올려보았다. 션웨이의 눈동자는 곧고 투명했다. 역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지금껏 알아채지 못 한 것이 이상했다.

“괜찮겠어? 이렇게 멍청한 나라도.”

애원하는 듯한 시선과 목소리에 션웨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빈틈없는 모습만을 보이는 션웨이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음에도 자오윈란은 변수로 작용했다. 션웨이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도무지 자오윈란이라는 사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좇았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션웨이의 시선이 방황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내가 물어봐야 할 말인 것 같은데… 내가 징그럽지 않아?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를 원해 왔던 거야. 긴 시간을, 너 하나만 보면서 살아왔던 거라고.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멋대로 너를 이정표로 삼고, 너를 위해서 살았어. 네가 없는 동안에는 나 혼자 머릿속에서 너를 오해했어. 이런 내가 정말 좋아? 잘 생각해, 난 괜찮으니까.”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션웨이. 만약에 네가 나고, 내가 너였다고 해도, 나는 너랑 똑같이 했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은 놈들이니까. 그리고, 굳이 이렇게 어려운 가정을 하지 않아도 말이야, 나는 이미 지난 세월 모두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웃기지.”

솔직히 말하자면, 션웨이의 무거운 감정이 자오윈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오윈란은 그 부담마저도 기꺼웠다. 션웨이가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이렇게 따랐다면… 상상만으로도 질투심에 눈이 돌았다. 이미 션웨이와 자신이 걷고 있는 순환의 고리를 깨달았음에도 그랬다.

자오윈란은 영원히 션웨이의 것이었고, 션웨이는 영원히 자오윈란의 것이었다.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진리였고, 운명이었다. 자오윈란은 이 사실에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 감정을 션웨이에게 꼭꼭 숨길 작정이었다. 자기 자신의 사랑조차 버거워하는 션웨이기에, 마음을 모두 담아 진실한 고백을 했다간 어디론가 숨어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우선 알맹이 없는 사랑 타령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알았고, 이해했다.

벽에 등을 대고 있던 션웨이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자오윈란이 다리를 접어 션웨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샤오웨이, 괜찮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션웨이. 자오윈란이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그 말들은 션웨이의 귓가에 채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마치 깊은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 * *

울게 되리라 생각했다. 자오윈란이 모든 기억을 딛고 자신을 알아준다면, 반드시 울게 될 것이라고 션웨이는 확신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 어딘가가 턱 막힌 듯 먹먹하기만 했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션웨이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자기 자신의 이성조차 속여 착각하게 했던 것이다.

무의식의 저편에서,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션웨이가 비틀대며 움직이자 자오윈란이 직접 나서 자켓을 받아 걸고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션웨이는 저항 없이 자오윈란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션웨이가 소파에 기대앉아 숨을 고르자 자오윈란이 차를 우렸다. 평소와는 정반대인 풍경이었다. 자오윈란이 서툰 동작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자, 그것을 후후 불어내고 션웨이에게 건넸다.

“차 맛이 어때?”

“괜찮아. 고마워.”

“내가 평생 끓여줄 수도 있어.”

식지도 않은 차를 꿀꺽 삼켜낸 션웨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오윈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들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목구멍이 홧홧했다. 션웨이가 한참 말이 없자 자오윈란이 제 머리털을 마구 헤집었다.

“생각은 해 봤어?”

“여기서 더 무슨 생각을 해. 션웨이. 혹시 사랑한다는 말 여러 번 듣고 싶어서 그래? 네 부탁이라면 하루에 백 번이라도, 아니, 모든 말의 끝에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일 수도 있어. 내 결정은 이미 끝났어. 이제 네 차례야.”

“…내 차례?”

“그래. 멋대가리 하나 없는 거 알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너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나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의심하고 추궁만 했어.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건 나면서 엉뚱한 사람한테 말이야. 어? 나는 세심하지도 못하고, 머리도 나빠. 너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나는 화내고 널 고생시키기만 했어. 그래도 네가 좋아. 이렇게 뻔뻔한 나라도 사랑해 줄래?”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려 왔다.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으나 자오윈란이 자신을 원하기에 기꺼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려 했다. 하지만 자오윈란은 션웨이에게 선택지를 내놓고 있었다. 션웨이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자오윈란을 사랑하는 걸까?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션웨이의 기나긴 세월이 사랑을 증명했다. 자오윈란이 사랑을 원한다는 이유로 작위적인 감정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막 부끄러운 진심을 마주했기에 션웨이에게는 제 마음을 정리하고, 언어라는 도구로써 정제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둘은 운명을 돌고 돌며 영원히 함께할 테니, 시간은 충분했다.

션웨이는 조심스럽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윈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온 힘 다해 션웨이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션웨이로서는 자오윈란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표정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 두렵지 않았다. 션웨이는 겨우 팔을 들어 안경을 벗었다.

“고마워, 션웨이. 나를 받아 줘서, 나를 사랑해 줘서, 나를 구해 줘서.”

쏟아지는 말들에 션웨이는 귀 끝을 물들였고, 황급히 자오윈란의 입술에 제 것을 맞붙여 입을 막았다. 자오윈란은 포기하지 않고 숨을 쉬는 사이마다 션웨이를 부끄럽게 하는 말을 속삭였다. 션웨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2

얄궂게도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기도한 마지막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션웨이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자마자 쿤룬과 만났다. 다만, 쿤룬은 아주 어렸다. 이름도 쿤룬이 아니었다. 자오윈란. 자오윈란이라고 했다. 션웨이는 그가 쿤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린 자오윈란은 울창한 숲속에서 무릎이 까진 채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데, 아무리 울어도 자오윈란을 도와주러 올 어른은 없었다.

“많이 아픈가요?”

수풀 뒤에 숨어 자오윈란을 지켜보던 션웨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버린 눈가를 짓누르던 자오윈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세요?”

“…비밀이랍니다. 상처를 좀 봐도 될까요?”

시커먼 장포를 두르고 괴상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의 모습에 자오윈란은 겁먹은 듯 보였다. 션웨이는 망설이다 품속에서 하나 남은 사탕을 꺼냈다. 자오윈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의 높이를 맞추고 막대사탕을 내밀자, 아이가 머뭇거리며 사탕을 받아들고 의문의 사내에게 무릎을 보였다. 션웨이는 고맙다고 말하며 환부에 손을 가까이했다. 검푸른 구름이 상처 주위를 맴돌더니, 이내 까지고 긁혀 있던 살갗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자오윈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있잖아요, 아저씨예요, 아니면 형이에요?”

“…원하는 대로 불러요.”

쿤룬의 미소를 떠올리려 애쓰며 션웨이는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팔랑이는 속눈썹을 홀린 듯 바라보다, 건네받은 사탕을 다시 내밀며 손톱이 짧아 포장을 벗기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치고는 뻔뻔한 투였지만 이 모습마저도 그다워 션웨이는 불쾌하지 않았다.

션웨이의 손톱도 짧기는 매한가지라, 이깟 껍질이 뭐라고 고전을 해야 했다. 장도를 꺼내 사탕을 두 동강 내어 알맹이를 꺼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당장 손을 휘두르면 쉽고 빠른 결과를 낼 수 있었음에도 션웨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흠집 없이 온전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했지만, 션웨이는 요령을 몰랐다. 오직 노력뿐이었다.

사탕 포장지와의 진지한 사투를 벌이느라 션웨이의 정신이 팔린 동안, 자오윈란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션웨이의 가면을 벗겼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름 두 번째라고, 션웨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도 본질은 같은 사람이었다.

“아저씨가 아니고 예쁜 형이었네. 형, 형은 지성인이야?”

언제 울었냐는 듯 당돌한 아이의 질문에 션웨이는 애꿎은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때마침 멀리서 누군가 자오윈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찾는 소리가 들리네요. 어서 가 봐요.”

“싫어!”

“네?”

“아버지는 싫어! 날 혼내기만 하고.”

“그래도…”

“싫다면 싫은 거야. 아버지는 정말 미워! 엄마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우리 엄마는… 엄마는… 아버지가 정말 싫어!”

이렇게 어린 아이를 상대한 지가 얼마나 지났던가.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오윈란의 눈빛이 언젠가 한 번은 봤던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자오윈란이 몸을 웅크리고 션웨이에게서 돌아앉아 있는 동안, 션웨이는 복잡한 기억의 창고를 뒤졌다. 그래, 자오윈란의 눈빛은 어린 날의 션웨이와 닮아 있었다.

동생과 함께 험난한 세상을 헤매다 우연히 깨끗한 시냇가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 투명한 물에 스쳤던 션웨이의 얼굴이 자오윈란의 눈 안에 있었다. 그 시절의 션웨이는 저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면서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그렇기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도, 션웨이는 힘들 때 기댈 곳이 하나 없어 외롭고 고달팠다. 그 때의 션웨이는 진심 어린 애정이 고팠지만, 누구도 션웨이가 바라는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 때문에 션웨이는 가지를 어지럽게 뻗으며 어설프게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얼굴을 어린아이답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힘들 때면 응석을 부리고 어른에게 기대는 그 나이의 평범한 아이. 의지할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때로는 생각만으로 사람에게 큰 위로를 주는 법이다. 션웨이가 쿤룬을 만나고 난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행동이 생각을 앞섰다. 션웨이는 저도 모르게 자오윈란의 마른 몸을 온 힘 다해 끌어안았다. 션웨이의 가슴이 자오윈란의 등과 맞닿았다. 심장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쿵쿵 뛰었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두 개의 심장이 속도를 맞추었다. 자오윈란을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등을 감싸던 온기가 멀어지자 자오윈란이 황급히 뒤를 돌았다.

“가는 거야?”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당신이 가야 해요. 있어야 할 곳으로.”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 날 좀 데려가 줘.”

“…다음에, 이다음에 커서 다시 만나요.”

자오윈란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션웨이는 어린아이 자체도 오랜만이었지만, 우는 얼굴은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에 션웨이의 얼굴이 비쳤다. 션웨이는 어설프게나마 쿤룬을 따라 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아직 어른이 못 되었다. 쿤룬이 제게 준 것을 돌려주려 했지만, 아직도 주기보다는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다시 샤오웨이, 라고 불리고 싶었다.

버석거리는 손으로 자오윈란의 눈물을 닦아 주자, 그 안에 비치던 션웨이가 흐려졌다. 자오윈란은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션웨이는 없었다. 이 점이 둘의 근본적 차이였고, 차이는 션웨이에게 결핍으로 해석되었다. 션웨이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에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부끄러움 없이 그의 옆에 서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재회는 이별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오윈란은 잘 모르겠다며 웅얼대면서도 션웨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매는 지나치게 여렸고, 그 안에 들어 앉은 눈은 여전히 쓸쓸했다. 션웨이는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잠시나마 쿤룬을 본 듯했다. 어른의 발소리가 정말로 가까워졌다. 션웨이의 손톱 끝에 드디어 조악한 종이 포장의 끄트머리가 걸렸다. 션웨이는 포장지는 손에 쥔 채 사탕만을 자오윈란에게로 내밀었다. 자오윈란이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단 향이 혀끝에서부터 온 입안으로 퍼졌다.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정말?”

“그럼요.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 조금만. 약속해요, 기다리겠다고.”

자오윈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울창하게 우거져 햇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는 숲속으로 션웨이는 스며들었다. 자오윈란은 홀로 남겨져 션웨이가 사라지는 모양을 지켜보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지만, 자오윈란은 더 이상 아버지가 마냥 무섭지만은 않았다.

-1

작은 쿤룬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진 션웨이는 길을 잃었다. 저 멀리 자오윈란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단란해 보이는 뒷모습은 션웨이에게 확인 사살이었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고독을 피해 무작정 달리다 보니 션웨이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태양이 수십 번 새롭게 뜨고, 달이 수백 번 모양을 바꾸는 동안 션웨이는 정처 없이 온 대지를 헤맸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검은 그림자를 원망하다가도, 어린 쿤룬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비록 길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지만, 션웨이는 견딜 수 있었다.

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성의 반대파는 잘 처리되었을까. 평화 조약은 제대로 체결되었을까. 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션웨이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으나 션웨이는 그 무엇에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션웨이는 멈출 수 없었다. 쿤룬과 함께한 두 번의 약속 때문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삶을 살아나가는 것인지, 약속이 션웨이의 삶을 지키는 것인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모호해져 갔다.

고단한 여정이었다. 자오윈란의 존재로 인해 션웨이는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길 위에서 션웨이를 살게 하는 것 역시 자오윈란의 존재였다.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노라면, 기대감이 마구 솟아오르다가도 숨 막히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열망에 타오르다가도 턱없이 부족한 제 모습에 한없이 작아졌다. 자오윈란이 그 약속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션웨이는 달리 가진 것이 없기에 약속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션웨이의 세상은 자오윈란이 션웨이의 생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구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터를 닦고 길을 낸 것은 자오윈란이었다. 그렇기에 자오윈란을 뒤로하고 삶의 의의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션웨이는 너무 늦게 알았다. 생각을 멈추자 심장이 느리게 뛰었고, 그렇게 션웨이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 다시 깰지도 알 수 없는 긴 잠이었다.

이번이야말로 진정한 생의 끝이리라 판단하고, 션웨이는 마지막의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눈을 뜨고 나면 마법처럼 쿤룬의 곁에 서 있기를. 그의 곁에 자리하기에 알맞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산들바람처럼 션웨이를 스치고 지나려던 감정은 역경을 거치며 돌풍이 되어 갔다. 날카로운 비바람이 션웨이의 잠잠했던 내면에 들이닥쳤다. 큰 홍수였다. 션웨이는 깊은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 *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오윈란은 점점 션웨이를 잊어 갔다. 어린아이의 기억이란 그렇게나 가벼운 것이었다. 자오윈란은 이유 없이 관성처럼 막대사탕을 찾았고, 가끔은 희미한 꿈을 꾸기도 했다. 꿈은 깨고 나면 모두 흩어져 사라졌지만, 편안했다는 감정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삶이라는 거대한 길을 걸으며, 때로는 달리며 모퉁이 너머가 두려울 때면 자오윈란은 사탕을 입에 넣고 굴렸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겼다. 그렇기에 다디단 설탕 덩어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막다른 길에 몰릴 때면 늘 같은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만큼은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었다. 생이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다만 자오윈란은 상냥한 투의 한 마디를 기억했다.

-4

“이것만 기억해,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거야. 약속할게.”

0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5

“고마워, 날 만나러 와 줘서.”

영으로부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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