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結 (上)

잠자는 숲속의 션웨이 (?)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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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

1.

자오윈란은 꽤 얼떨떨했다. 자신이 몇 번째 진혼령주인지는 까먹은 지 오래되었고, (뭐 한 오천 번째정도 되지 않겠어? 더 되려나, 만 년동안 이어진 약속이었으니.) 본인이 진혼령주라는 자각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 책상에 놓인 명패를 볼 때나 명함 경력란에 남들과는 다른 한 줄을 추가할 때, 자오윈란의 진혼령주에 대한 인식은 그럴 때에만 되살아났다. 진혼령주, 라는 네 글자의 무게란 딱 그 정도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만 년 전에 해성, 지성, 야수족 대표가 모여 작성했다는 계약서를 붙들고 있기와 향을 태워 지성의 높으신 분들과 연락하기뿐이었다. 그러니까, 자오윈란은 특조처장이 아니었다면 진혼령주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딱히 먹고 살 길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특조처장이 아니었다면.. 지성과의 연락이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 불려 다녔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해성에서 유일하게 지성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니까, 아니 잠깐. 이거 희소가치가 엄청난데, 휴. 가만히 앉아서 향이나 태우며 떼돈 벌 수 있었는데 특조처장이라는 직급 때문에 무료로 진혼령주의 권한을 사용하게 된 셈이었다. 아까워라 아까워.

어찌 되었든, (1) 자오윈란은 지성인과 지성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을 때와 (2) 범죄를 저지른 지성인을 붙잡았을 때가 아니면 그 모기향을 태우는 일이 없었다. 지성 쪽은 더 심했다. 자오윈란을 먼저 호출하는 일은 자오윈란이 진혼령주의 자리를 이어받고난 뒤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오윈란의 초등학교 시절 스쳐지나간 한 선생님은 늘 학생들의 질문을 강요했다. 매 수업시간이 끝날 때마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으면 수업을 끝내 주지 않겠다 으름장을 놓고 실행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말했다. 질문이 없다는 건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 못 했다는 거야. 이해를 하려고 들면 의문이 생기지. 너희는 지금 정보를 너희 것으로 만든 게 아니라 머릿속에 집어 넣은 것 뿐이라고. 솔직히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정보를 완전히 흡수하든 저장만 하든 생활에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 시절 수업시간에 배우고 외우고 질문했던 것들은 단 한 가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자오윈란은 선생님의 그 말만큼은 기억했다. 질문이 없으면 이해도 없는 거라고. 어린 시절에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은 왠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자오윈란은 먼저 요구하는 법이라고는 없는 지성이 아마도 문제가 많은 곳이리라 짐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몇 년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며 진혼령주 측에서 내미는 질문이나 범죄자 등등을 넙죽 받아들이기만 하던 지성에서, 자오윈란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그것도 그 향을 태우는 기묘하고 오래된 방식이 아니라 지성의 대표라는 사람이 직접 특조처로 행차하셨다.

늘 연기같은 실루엣으로만 봐 왔던 늙은이가 광명로 4번지의 문을 쾅쾅 두드리더니, 문이 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문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리홍춘씨는 본인보다도 연배가 있어 보이는 늙은이의 목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어포를 입에 물렸다. 솔직히 너무 시끄러웠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가 누군가 와서 ‘령주 대인’을 찾는다 일렀다. 자오윈란이 진혼령주라는 사실은 특조처의 일원들과 특조처의 상부인 해성감과 성독국밖에는 몰랐다. 애초에, ‘진혼령’의 존재 자체도 그들만의 비밀이었으니 당연했다. 해성에서 자오윈란이 진혼령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를 ‘대인’이라는 깍듯한 호칭으로 부를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들은 높으신 신분과 나이로 언제나 자오윈란을 어린애 취급하며 하대시했다. 그러므로 자오윈란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웬 늙은이가 특조처 현관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엎드린 모양이 마치 개구리같았다. 자오윈란이 다가와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어서 일어나 보시라 했더니, 늙은이는 반항이라도 하듯 바닥에 이마를 쾅쾅 부딪쳤다. 돌발행동에 자오윈란은 입에 문 사탕을 굴리며 이 미친놈을 그냥 끌어낼까, 아니면 그래도 앉혀서 말을 듣기라도 할까 잠시 고민했다. 늙은이는 제 앞의 사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당황하며 눈만 들어 눈치를 봤다. 그 꼴에 자오윈란은 허 참, 하고 웃었다. 일단 이리 와 앉아 보세요, 무슨 일인데.

2.

이 늙은이로 말하자면 지성의 짱, 섭정관 대인이었다. 지성은 지군과 섭정관, 단 두 명의 수뇌부에 의해 굴러가고 있었다. 해성과 지성, 그리고 야수는 만년 전 큰 전쟁을 치렀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 당시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지성의 반대파는 그 수장이 사라지며 자멸하였다. 차기 수장 자리를 탐내는 자들도 있었고, 반대파가 풍전등화로 곧 무너질 것 같으니 배신하는 자들도 있었다. 힘 꽤나 쓴다는 자들은 수장 자리를 두고 치고받고 싸웠다. 최후의 승자가 가려졌을 즈음 반대파는 그 수장 한명과 수장이 쓰러트린 자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얄팍한 명분으로 얽힌 신뢰는 이렇게나 나약했다.

그런데 그 반대파의 본래 수장이었던 자는 말 그대로 땅 속으로 꺼졌을 뿐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당시 반대파를 제거하던 흑포사라는 자가 그 죄인을 쫓아 땅 속으로 따라갔지만, 그의 생사여부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들이 모두 죽었으리라 확신했겠지만, 지성인들은 저마다 이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능은 별에 별 기상천외한 것들이 다 있었다. 그래서 만 년 전의 지성인들은 그 포악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반대파의 수장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성인들은 안온한 생활과 평화에 익숙해졌고, 점차 그의 존재 자체도 잊어갔다. 초대 섭정관은 반대파와의 전쟁에 직접 참여까지 했으며, 흑포사의 밑에서 일했던 용맹한 인물이었지만 만 년이나 지난 뒤인 현재의 섭정관은 간이 작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성이고 뭐고 제 살 길이 더 급급한 교활한 여우였고, 제 몸을 사리는 꼴을 보면 도대체 왜 섭정관이라는 위치에 올랐는지 의문이었다. 이런 자가 어째서 직접 혈혈단신으로 해성까지 올라와 특조처를 찾았느냐 하면, 바로 그 만년 전 반대파의 수장이었던 이가 봉인되어 있는 천주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몇 달 전, 지군전에 이상한 신고가 들어왔다. 아이를 둘 키우는 중년 여성에게서 들어온 신고였다. 아무도 없는 빈 공터에서 자꾸 사람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도 말소리도 아니고 사람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뭐라 설명은 못 하겠지만 어쨌든 사람임이 분명한 소리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진술은 이랬다. 아이들이 여기 저기 조랑말처럼 쏘다니며 놀러 다닐 나이인지라, 아이들을 데리고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기 좋아 보이는 공터가 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다. 그런데 공터 한 가운데에 있던 돌기둥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것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해서 섬뜩하였고 그 길로 지군전에 신고를 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고작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인력을 파견하기에 지군전은 지나치게 바빴다. 그래서 아이를 둘이나 맡아 기르느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니냐며 여성에게 쉬기를 권했다. 여성은 그런 게 아니라며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거냐며 화를 조금 냈다. 머리를 쓰기가 귀찮아 섭정관은 그저 그녀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신고가 몇 건 더 들어왔다. 사람들이 자꾸 목소리에 홀려 무기를 준비하다가 아니 내가 지금 이 무기를 왜 챙기고 있지, 이 태평천하에, 하면서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다. 이게 한 사람만의 증언이 아니고, 몇십 명으로 늘어나자 섭정관은 비로소 여간한 사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사건을 어찌 해결할까 고민을 하던 중, 때마침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신고가 또 들어왔다. 스트레스로 미친 사람이 또 나왔나 보네, 하며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섭정관은 문득 그들이 모두 그 공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 목소리와 기현상이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직접 그 공터에 가 보니, 정말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하나 없는데 가운데 우뚝 솟은 기둥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기둥이 말했다.

“드디어 왕림하셨군, 섭정관 대인.”

기둥은 제법 사람처럼 말했고, 그 내용은 뜨악스러웠다. 도대체 저 돌기둥이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섭정관은 덜덜 떨며 제 양쪽에 서 있던 호위병 뒤로 숨었다.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기둥이 그 꼴을 보고 한참을 껄껄 웃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야존이다.”

야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늙은 머리를 한참을 굴리다 섭정관은 드디어 깨달았다. 분명 지성의 역사서 어딘가에서 봤던 이름이다. 머릿속의 역사서를 펼치고, 한 장 한 장 넘기다 섭정관은 믿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고, 팔을 덜덜 떨고, 턱까지 덜덜 떨며 말했다.

“설마, 만년 전 땅 속으로 꺼졌다는 그?”

목소리가 떨리는 꼴이, 아무래도 턱으로 모자라 성대까지 떨린 듯 했다. 그에 대조되게 돌기둥이 부드럽고 매끈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너희들이 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자가 바로 나다.”

이럴 수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악당이 만 년이나 살아 있었다니, 심지어 지성인들에게 말을 걸고 홀리기까지 하면서, 섭정관은 혼비백산하며 줄행량을 쳤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삐걱거리는 다리를 놀려 한참을 뛰다, 무언가에 걸려 철푸덕 넘어졌다.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아니었으므로 바닥에 요철이 있는 것은 당연했으나 섭정관은 자신의 도망을 감히 방해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상체를 세워 기어가 들여다 보니 쇠로 된 막대기였다. 그것을 들어올려 보니 끝에 칼날이 달려 있었다. 이제 보니 그것은 흙이 묻은 장도였다. 챙그랑, 그 칼 끝에 선뜩한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본 섭정관은 손에서 그것을 놓쳤다. 히익, 이런 곳에 웬 살인 무기가, 설마 야, 야, 야, 야존이 일부러, 내가 이 곳에 올 줄 알고, 준비해 둔 건가, 멀리서 조종을 하려는 건가, 서, 서, 서, 설마... 섭정관은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고 양 팔로 엑스자를 만들었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실눈을 뜨고 장도를 다시 살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지 오래 된 듯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니 장도 옆에 검은 물체가 늘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 보니 검은 망토를 두른 인간이었다. 히익! 이 사람이, 이 칼로, 죽은 건가, 섭정관은 덜덜 떨리는 손을 그의 코 끝에 가져다 댔다.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사, 사, 사, 사, 살아 있어! 얼른 손을 거두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괴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가면이었다. 이제 보니 지군전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초상화 속 인물과 꼭 닮은 듯 했다. 아니, 본인이라고 믿겨질 만큼 똑같았다. 잠깐, 이 검은 망토, 장도, 가면... 히익, 설마 흑포사 대인인 건가, 만 년 전 사라졌다던 그 영웅을 내가 지금 찾은 건가? 섭정관은 야존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겁내던 것도 잊고,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그 옛날 영웅을 찾아낸 공을 세웠다는 사실에 기뻤다.

“흑포사 대인, 좀 일어나 보세요, 대인.”

섭정관이 겁도 없이 흑포사 대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대인은 흔들리기만 할 뿐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섭정관 머릿속의 틀이 맞춰졌다. 듣기로 만년 전의 야존은 돌덩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명히 인간이었다. 인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돌이었다. 이 뜻은 누군가 봉인을 했다는 뜻이고, 아무도 봉인 사실을 몰랐던 것을 보면 그 봉인을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업적을 세간에 알릴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시절 야존을 없애기 위해 쫓아간 이는 바로 흑포사 대인이었고, 대인은 지금 제 앞에 잠들어 있다. 이는 즉, 위대하신 흑포사 대인께서 악의 근원인 야존을 봉인하고 본인은 기력이 쇠하여 이렇게 잠이 들어 있다는 뜻이 되었다. 어째서 만 년이나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섭정관은 본인의 가설이 꽤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쑤시는 등허리에 덩치 좋은 청년을 올리고, 한 손에는 장도까지 든 채 지군전으로 향했다. 야존이 이제야 말 하는 법을 터득한 듯 하니, 흑포사 대인만 깨어나면 야존을 제압하는 일 따위는 문제도 아닐 터였다. 야존이 더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대인을 깨우면 그만이었다. 섭정관은 무거운 짐덩이를 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공도 세우고, 악도 처단하고, 아주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갖은 노력을 해도 흑포사 대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생명력을 주입하는 이능을 가진 지성인을 불러 왔음에도 대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지성인은 오히려 지금 대인께서는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 덕에 생명력이 풍부한 상태라고 했다. 섭정관이 온갖 괴상한 방법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지성인들이 하나씩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런 전조 없이 밤을 경배하라, 하고는 스스로 목숨줄을 끊는 것이었다. 섭정관은 이것이 야존과 관계있음을 단번에 알아채고 (하! 엄청난 이 몸의 추리력!) 그 주변 주민들이 다 죽어 없어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대피시켰다. 하지만 그 자살 소동은 전염성이라도 있는지 주민들을 대피시킨 장소에서도 발생하였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살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지성인들의 손발을 묶고 하루종일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섭정관은 달리 방법이 없어 혀를 쯧쯧 차며 지군전 안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군을 지키던 호위병 한 명이 밤을 경배하라, 라고 외치더니 칼로 제 목을 그었다. 섭정관은 그제서야 죽음이 제 턱끝까지 왔음을 깨달았고, 공포에 질려 따로 연락할 틈도 없이 해성으로 도망쳐 와 무작정 진혼령주를 찾았다 이 말이었다.

3.

섭정관의 말을 쭉 듣고 난 자오윈란이 말했다.

“비겁한 놈!”

섭정관이 의자에 앉아 바닥에 이마를 찧을 기세로 허리를 굽혔다. 자오윈란은 그 꼴을 말리지 않았다. 섭정관은 허리를 굽히다 말고 엣헴, 하더니 마저 말했다. “령주 대인께서 직접 야존을 막아 주시든지,” 자오윈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니면, 흑포사 대인을 깨워 주십시오. 부디.” 자오윈란이 허, 참, 하며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렸다.

“원칙적으로 볼 때, 내가, 이 진혼령주가, 지성 사람들이 싹 다 죽든 말든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거, 압니까?”

“압니다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요, 그럼에도 이 늙은이가 몸 기댈 곳 하나 없어 염치불구하고 찾아 온 것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고..”

“아니, 내가 황제도 아니고 무슨 노여움이람.”

자오윈란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들고 삿대질하며 말했다. “알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이런 거 모른 척 못 해요. 타고난 오지랖이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어, 그런데 내가 망설이는 건, 당신이에요. 이미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그 맛을 못 잊어서 다음에 또 하게 되어 있거든. 여차하면 야존인지 뭔지한테 나 바치고 튀는 거 아닙니까?”

솔직히 섭정관의 수만 가지 계획 중에는 진혼령주를 야존에게 넘기는 방법도 있었으나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요.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령주만이라도 다시 해성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요.”

“그럼 내가 댁을 어떻게 믿지? 증명해 봐요, 당신 말을.”

“그, 령주의 약혼자 분이 지성에 계시지 않습니까.”

내내 발을 불량하게 까딱이던 자오윈란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섭정관은 빠른 눈으로 그것을 캐치했다. 제대로 된 한 수였음에 섭정관은 마음을 놓았다. 진혼령이 맺어진 이후로, 지성과 해성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해성과 지성에서 각각 한명씩 뽑아 결혼을 시키게 되었다. 이 전통은 만 년 전 전쟁 중에 만나 사랑에 빠진 해성인과 지성인 한 쌍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그들의 사랑을 지켜 주기 위한 일이었는데, 세간에 평화적 의식처럼 전해져 자연스레 풍습이 되었다. 지성인이 해성인보다 훨씬 더 기나긴 세월을 살기 때문에, 보통 이들의 사랑은 애달프게 끝났다. 결혼 대상으로 선택된 자들은 다른 종족에게 정을 주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깨달아, 자연스레 결혼에서 사랑을 거세하게 되었다. 보여주기식 평화의 뒷면은 쓸쓸했다. 평화로운 모습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시민들에게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는 안심을 심어 주기 위해 결혼 의식은 양쪽이 둘 다 죽을 때마다 새로 거행되었다. 지성과 해성을 오가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기 힘들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생활비는 지성과 해성의 정부기관에서 지급되었다. 그들에게는 결혼이 마치 취업같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니는 행사는 마치 업무같았으며, 부부의 집은 마치 직장같았다. 부부는 일반적으로 서로 연민하기에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간혹 자신의 처지에 신음하고 분노하느라 평생을 싸우다 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고위간부의 자식이 이 형식적이고 어이없는 결혼을 떠안게 되었는데, 자오윈란은 특조처장이자 진혼령주의 신분을 얻기 이전부터 특별조사처장직의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다음 결혼 대상으로 지목되어 있었다.

태초에는 약혼식도 결혼식과 같이 성대하게 치렀다고 하지만, 이제 와서는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결혼이 되어 버렸으므로 약혼식은 따로 치르지 않았다. 결혼의 당사자들은 그저 팜플렛에서 반지의 디자인을 골랐고, 며칠 뒤 약혼 증서와 함께 반지를 배달받았다. 자오윈란은 제 약혼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이름, 심지어는 성별도 몰랐다. 그는 이 결혼 풍습이 아주 끔찍하며 엿같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아버지에게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반짝이는 은빛 반지를 단 한 번도 손가락에 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처장실 서랍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 잊어 버렸다. 반지처럼 결혼에 대한 기억 역시도 잊어 버리고 싶었다. 평생 쇼윈도우에 전시되는 인형처럼 살아야 한다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보다 제 인생을 제가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좆같았다. 자오윈란은 늘 자신의 바람대로 살아온 인간이었다. 물론 결과가 늘 제대로 따라 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망설임이 없었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며 사는 삶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이런 식으로 평화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더더욱 화가 났다. 자오윈란은 이놈의 결혼을 끝까지 미루고 미뤄 고루한 전통을 제 대에서 끊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섭정관이 뜬금없이 약혼 이야기를 꺼내자 자오윈란은 가슴이 뜨끔했다. 섭정관이 자신의 계획을 안다고 해서 큰 일이 벌어지거나 제가 이 자를 어쩌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 비밀을 들켰다 생각하면 철렁하는 법이었다. 섭정관은 마치 자오윈란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저를 도와 주신다면 약혼을 무효로 해 드리겠습니다. 악습을 여기서 끝내는 거지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

“그렇지만 령주께서 마음 깊이 원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도와주기 싫다면?”

“그러면 령주께서는 지성 망하는 꼴을 여기에 팔짱끼고 앉아 지켜 보시지요.”

자오윈란이라는 인간을 정확히 꿰뚫는 발언이었다. 자오윈란은 이 일을 몰랐으면 몰랐지 알고 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제가 지성에 내려가서 얻을 것은 개죽음뿐인 듯 보였다.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 자살이 마치 병균처럼 사람들 사이로 옮아 다닌다고 했지요? 바로 오늘 제 앞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령주께서도, 령주의 주변 사람께서도, 나아가 해성인들은 안전할까요?”

아무래도 어떤 선택을 하든 결말은 개죽음인 듯 싶었다. 자오윈란은 그의 성정대로 일단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갑시다.”

섭정관은 빙긋이 웃었다.

4.

혼자 가겠다는 자오윈란의 뒤에 다칭이 따라붙었다. 내가 잘못되면 네가 남아 부처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설득했지만 이 놈의 고양이는 마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자오윈란은 저보다 훨씬 오래 산 늙은 고양이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고 팀원들에 심지어 섭정관까지 그의 동행에 적극 찬성하는 듯 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을 하며 한두 번쯤은 지나다녔을 회화나무 앞에 섭정관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여기가 지성으로 가는 통로의 입구입니다.” 라고 말했다. 자오윈란과 다칭이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섭정관이 “아차차, 지성인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깜빡했네요.” 라고 말하며 그들의 뒤로 가 등을 확 밀쳐 버렸다. 혹시 파란 눈의 외국인이 나오는 영화 속의 기차역처럼 나무를 향해 의심없이 달려나가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자오윈란은 불시의 습격을 받고 ‘하여간 이 늙은이가!’ 라는 생각을 했다. 어딘가로 끝없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자오윈란과 다칭은 지성에 도착하자 어딘가에서 솟아오른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오윈란이 이능과 얽힌 일을 뚝딱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우선 흑포사 대인을 깨우는 일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섭정관은 이쪽이라며 길을 안내했다. 그들을 환영하듯 길목의 누군가가 “밤을 경배하라!” 라고 외치며 혀를 콱 깨물었다. 다칭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도리질을 쳤고, 자오윈란은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런 일이 시내 한복판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니,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지성인이라도 정신적 쇼크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를 지성에 파견보내야 하나 엉뚱한 생각을 하며 섭정관이 이끄는 대로 걷다, “바로 이 방입니다.” 라는 목소리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자오윈란은 혹시 섭정관이 저희들을 이 방에 감금하는 것이 아닌지 경계하며 “섭정관 대인도 같이 들어가시죠?” 라고 말했다. 섭정관의 눈초리가 ‘의심도 많으셔라, 지긋지긋하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오윈란은 뻔뻔하게 “그 유명하신 흑포사 대인을 마주하려니 심장이 떨려서요,” 라고 말했고 섭정관은 “부끄러움도 많으셔라.” 라고 답하며 웃곤 문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자오윈란은 마주 웃었다. 다칭은 그런 그들을 보며 ‘역시 인간은 이해가 안 돼, 뒤끝 없고 솔직한 고양이가 세계를 지배한다.’ 라고 생각했다. 방 안은 넓고 쾌적했으며 환했다. 자오윈란은 지성 방문이 처음이었지만 지성에서 빛이 귀중한 자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나온 거리도 모두 어둑어둑했고 가로등의 빛조차 희미했다. 그런데 이 꽁꽁 닫힌 문 안에는 마치 태양과도 같은 찬란한 빛이 담겨 있던 것이다. 항상 태양 아래에 사는 자오윈란과 다칭조차 눈이 시큰할 지경이었다. 섭정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온갖 귀중하고 좋은 것들은 모두 시도해 보았습니다. 이 전등도 같은 이치이지요. 지성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흑포사 대인께 선물했습니다. 그럼에도 보시다시피, 여전히 주무시고 계시지요.”

자오윈란은 그 흑포사 대인도 지성인이기에 당신처럼 눈이 부실 거다, 아니, 지성인이 아니어도 만 년이나 잠을 잤으면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강렬한 빛을 보고 싶지 않을 거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넓은 방 안을 이상한 물건들이 채우고 있더라니, 다 그 ‘귀중하고 좋은 것들’이었나 보다. 자오윈란은 섭정관의 헛고생을 굳이 일깨워 주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미련한 짓까지 벌였을까 싶었다. 흑포사 대인은 마치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보았던 공주처럼 곧게 누워 두 손을 모아 배 위에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같은 자세를 부정이라도 하듯 온통 시커먼 옷에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새카맸고 얼굴에는 괴상하고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몸 옆에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날이 잘 서 있는 장도가 놓여 있었다. 만 년을 땅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더니, 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혔는지, 세탁을 했는지 흑포사 대인의 상태는 상당히 깔끔했다. 길고 흑단같은 머리카락도 예쁘게 땋아 내린 상태였다. 자오윈란은 습관적으로 흑포사 대인의 목에 두 손가락을 댔다. 맥박이 제대로 뛰고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이 만년 전의 영웅을 깨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자오윈란은 그의 눈을 까뒤집어 보기도 하고, 귀에다 아아, 하고 소리를 내 보기도 하고, 코를 붙잡아 막아 보기도 했다. 고귀한 분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섭정관이 눈을 치켜떴지만 다칭이 고양이 손톱을 드러내고 마주 눈을 째렸다. 섭정관은 황급히 망을 보는 척 문틈을 살폈다. 자오윈란은 특기라고곤 미행밖에 없는 고양이 대신 차라리 유능한 해성의 의사를 데려오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포사 대인이 식물인간 상태인지, 뇌사 상태인지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자오윈란은 의학 관련해서는 가진 지식이 전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가면을 쓰고 누워있는 모습이 어쩐지 불편해 보여, 자오윈란은 그의 가면을 벗겼다. 코를 막았을 때도 미동이 없던 얼굴이 움찔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한 번,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미간이 좁아진 것으로 보아 흑포사 대인은 가면이 벗겨진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응이 있었다는 것에 기뻐 자오윈란은 대인, 일어나 보세요, 대인, 하며 말을 걸었지만 그게 다였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김샜네, 자오윈란은 주름진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슬슬 펴 주었다. 예쁜 얼굴인데 웃으면 좋잖아. 눈을 감고 있어도 이렇게나 미인인데 눈을 뜨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가 되면서도 지성의 영웅이라는 분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경스러워졌다. 그런데, 진짜, 예쁘네. 자오윈란은 허리를 숙여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만 년이나 잔 이 작자는 대미인이 분명했다. 자오윈란의 얼굴이 흑포사 대인의 얼굴과 점점 가까워지자, 다칭이 비웃듯 말했다.

“그러다 키스라도 하겠어? 잠 든 사람한테 그러니까 좋아?”

자오윈란은 크게 당황하며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늙은 고양이가 “짐승!” 이라고 한 마디 하자 무슨 주문에라도 당한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쏟아지려는 몸을 간신히 앞에 있는 무언가에 지탱하여 버텼지만 이미 늦어 어딘가에 부딪쳤다. 순식간이었다. 넘어졌다는 사실을 머리로 깨닫는 것보다 아픔이 먼저였다. 입과 턱에 은은한 아픔이 전해졌다. 아픔 다음으로 살아난 것은 시야였고,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상황 파악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나와야 할 놈이 항상 꼴찌여서 인간은 늘 곤란했다. 그러니까, 자오윈란은 아픔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흑포사 대인을 흡사 ‘덮친’ 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흑포사 대인의 어깨 위, 그러니까 머리 양 옆에 제 손을 대고 그의 입술에 제 것을 무작정 부닥친 것이다. 자오윈란은 제 바보같은 꼴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분명 힘이 풀려서 벌어진 일이었을 텐데 긴장을 해서인지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눈을 크게 뜨고 마치 제가 도둑 키스라도 당한 듯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자 다칭과 섭정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제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한 표정이었다. 섭정관은 이 짐승같은 작자에게 한 마디 하려고 다가서다, 안 그래도 커진 눈을 더 크게 키우게 되었다. 섭정관의 시선을 따라 자오윈란과 다칭도 흑포사 대인을 바라보았고, 그들 역시도 안 그래도 커진 눈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다칭이 홀린 듯이 말했다.

“무슨 잠 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니고!”

어떤 짓을 해도 일어나지 않던 그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끌어모아도 깨어나지 않던 그 흑포사 대인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강렬한 빛이 눈을 찔렀는지 흑포사 대인은 고운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이 곳은.. 해성인가?”

흑포사 대인이 입을 떼었다. 눈을 뜬 얼굴이 감은 얼굴보다 오천 배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자오윈란은, 그의 약간 갈라진 목소리마저 비단결같이 느껴져 심히 당황하였다. 섭정관이 “아닙니다, 이곳은,..” 이라며 말을 시작하였는데, 별안간 그 크고 깊은 눈이 자오윈란의 얼굴로 꽂히더니 흑포사 대인의 목소리가 섭정관의 말을 끊었다.

“쿤룬!”

“쿤룬?”

흑포사 대인은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했고, 만 년간 누워 있던 몸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움찔했다. 이내 제대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자오윈란에게로, 아니 자오윈란에게만 시선을 두었다. 마치 그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쿤룬, 어찌 이 곳에.. 아, 봉인. 봉인은 성공했습니까? 그 아이는 얌전히 잠들었습니까?”

자오윈란은 절대로 쿤룬이 아니었고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여기서 제가 쿤룬이 아니다, 말하면 이 갓 깨어난 성인께 큰 실망을 안겨 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칭의 “저 놈은 자오..” 라고 말하려는 입을 제 손으로 덮었다.

“맞아요, 맞아. 봉인은 괜찮았고, 덕분에 지성인들이 안심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그 봉인이 헐거워지기 시작했는지, 그놈이 다시 사람들을 홀리고 죽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어쩌죠?”

“그거 큰일이네요, 그런데 쿤룬, 왜 저에게 경어를 쓰시는지요?”

“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랬어.”

흑포사 대인은 수줍게 웃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봉인이야 다시 할 수는 있지만.. 아마도 완벽하지는 못할 거예요. 균열은 다시 생길 거고, 그러면 그 때는 봉인을 완전히 푼 뒤 가두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그놈한테 홀려서 각자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는데, 당장 해결이 가능할까?”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정신에만 타격을 주는 정도라면 생각보다 그리 위급한 건 아니군요. 하지만 사람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그놈은 그 에너지를 흡수해 점점 더 강해질 거예요. 아무래도 임시 봉인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겠군요. 애시당초 봉인을 할 때도 제 힘이 부쳐 쓰러진 것이니.. 일단 가서 임시방편이라도 해 둬야 겠어요. 아까운 피가 한 방울이라도 더 흐르기 전에.”

그들은 빠르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흑포사는 처음에는 걷는 게 서툴어 보였으나, 곧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는 순간이동과 공간이동의 이능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이들만큼 발을 많이 놀릴 필요가 없었다. 부축을 하려 뻗었던 자오윈란의 팔만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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