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너의 의미

란웨이 ~ 각종 드라마 설정 날조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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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2.

“행복하게 살아 줘.”

션웨이가 자오윈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자오윈란은 이따금 이 문장을 되뇌었다. 그 속삭임에 대고 누구 하나 무슨 뜻이냐 묻지 못했다.

모든 일이 정리된 후, 특별조사처는 이전에 가까운 안정을 되찾았다. 지성에서 돌아온 후 몇 날 며칠을 집 안에만 박혀 있던 자오윈란은 어느 순간부터 특조처에 출근하여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그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칭조차 몰랐다. 비로소 현실을 수용하고 기운을 차린 자오윈란에게 린징은 그를 또 다시 우울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 분명한 말을 해야 했다. 션웨이의 유언과도 같은 전언이었다.

“멈추지 마, 뒤돌아보지도 마. 나를 잊어. 잊고, 행복하게 살아 줘.”

자오윈란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었다. 린징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응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 자오윈란은 그의 마지막 당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를 잊고 싶었다. 행복을 얻고 싶었다. 과거 션웨이가 삼시 세끼 챙겨 먹으라, 몸을 사리라, 내가 없을 때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말을 들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자오윈란은 그가 떠난 후에야 그를 위해 살았다. 그러마 대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일방적 통보였다. 하지만 길고 긴 션웨이의 삶을 끝내는 한 마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일평생에 대한 경의, 그리고 경애였다.

만 년 만에 발발한 전쟁은 션웨이의 희생으로 막을 내렸다. 션웨이 사후, 야존은 흡수한 것들을 마구 뱉어내며 죽어갔다. 야존의 뱃속에서 나온 수많은 것들 중에는 린징이 있었고, 샤야의 기타가 있었고, 놀랍게도 진혼등이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심지에 불이 붙어 활활 밝게도 타오르고 있었다. 온도에 민감한 추홍이 가장 먼저 지성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음을 감지했고, 야수족보다도 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추수즈가 해성과의 영원한 분리를 예감했다. 특별조사처의 일원들은 제대로 현장을 파악하기도 전에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기다리던 션웨이가 모습을 보이지 않아 자오윈란은 이성을 잃었고, 다칭이 그를 억지로 등에 업었다. 특조처에서 유일하게 가방을 챙겨 다니는 궈창청이 사성구를 운반했고, 이들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통로가 소멸했다. 단절의 순간, 자오윈란은 그저 진혼등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쏟아낸 눈물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션웨이가 야존을 무력화했는지, 진혼등에 불을 붙였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션웨이의 최후를 지켰던 린징에 의하면, 션웨이는 자신의 생명을 야존의 죽음과 맞바꾸었다고 했다. 하지만 단지 죽음만으로 어떻게 해성을 구했는지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가장 오리무중인 문제는 진혼등에 있었다. 션웨이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하나 션웨이의 곁을 내내 지키고 있던 린징은 불을 점화하려는 어떠한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린징은 션웨이의 모습을 그저 “가슴에 난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겨우겨우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라고만 묘사했다. 야존이 가진 모든 것을 제 의지와 관계없이 허망하게 내놓고 있을 때, 션웨이만은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떤 사정인지 자오윈란으로서는 알 수 없었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알지 않아야만 했다. 물론, 린징이 몰래 연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곧 자오윈란에 의해 제지되었다. 자오윈란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내 아팠다.

특별조사처의 동료들은 지나치게 유능한 나머지 자오윈란을 불편하게 했다. 자오윈란이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다니면 다닐수록, 팀원들은 그를 걱정하면서도 도리어 무심한 척을 했다. 이 깊은 배려가 자오윈란을 뿌듯하게 하면서도 서글프게 만들었다. 사내연애의 단점에 대하여 들어온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파장이 이토록 클 줄은 몰랐다. 전 지성을 호령하는 흑포사 대인과의 사내연애여서 그런지, 후폭풍의 스케일이 여타 사내연애와는 차원이 달랐다. 자연스럽게 자오윈란이 처장실에 박히는 날의 빈도가 늘었다. 혼자 조용한 공간에 앉아 사색을 하노라면 마치 션웨이가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과거 션웨이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공기조차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션웨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제 마음을 내어준 이에게 영원의 감각을 선사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침대 위에 정갈하게 누워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자오윈란은 눈을 감은 채 하루에 하루 분의 기억을 지웠다. 지성에서 막 탈출한 션웨이와 특별조사처 앞 벤치에서 햇살을 만끽하던 날, 시력을 잃어 션웨이의 살결을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날, 잠들기 전 침대에서 직접 안경을 벗겨 주었던 날, 잔소리만 골라 하는 입술이 얄미워 제 것을 무작정 부닥쳤던 날, 함께 룡성대학교의 교정을 산책했던 날, 션웨이가 제 대신 술을 마시고 맥없이 기절했던 날……. 소중한 기억들인지라 최후마저도 소중했다. 마지막까지 그 추억들을 온전히 더듬어 본 후에야 떠나보낼 수 있었다. 션웨이와의 나날은 자오윈란의 심장을 꿰뚫어 버린 듯 그 어떤 만남보다도 강렬하고 깊었지만, 정작 그와 함께 보낸 물리적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오윈란의 기억은 금방 동나 버렸고, 션웨이와 처음 만난 날까지 도달했다.

악수, 단단한 손가락과 손을 조여 오는 악력, 길고 긴 악수, 눈맞춤, 그리고 짧은 대화. 예의를 갖춘 음색이 자오윈란의 신경을 파고들자 그 시절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 만남이 재현되자 두 번째 만남도 자연스레 뒤를 이었고, 이 회상을 기점으로 일련의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지웠다고 착각했던 모든 기억들이 시간선을 따라 스스로 재생되고 있었다. 자오윈란은 무력하게 흘러간 과거를 복습했고, 다시 한 번 션웨이와의 추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을 되짚고 나자 자오윈란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션웨이의 기억 없이 사는 삶이 정녕 행복한 삶인가.

인간의 기억은 나약하지만 가슴에 남는 감정에 기대어 인간은 형성된다. 만약, 션웨이와 얽힌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면 자오윈란은 여전히 자오윈란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아픔을 딛고 이겨내는 것과 아픔의 근원을 잘라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해결이 아닌가? 션웨이는 왜 자신을 잊으라 청했을까? 자오윈란이 사고할수록 상상 속의 션웨이는 또렷해져만 갔다. 결국 기억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그 의미조차 모호하게 느낄 즈음에야 자오윈란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기억과 행복의 개념조차 잃고 나서야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마지막 부탁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도저히 션웨이를 잊을 수 없었다. 다른 행복할 방법이야 어떻게든 찾아 보겠지만, 션웨이를 잊는다는 전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온 우주를 통틀어 션웨이의 명령에 불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오윈란 뿐일 것이다. 원래 이런 사람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션웨이, 내가 정말 네 말대로 할 거라 믿은 건 아니지? 제멋대로인 나도 네가 사랑한 일부잖아, 그렇지? 션웨이. 웨이야.

션웨이의 부탁을 듣지 않겠다 스스로 다짐하자마자, 자오윈란은 그렇다면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난관에 봉착했다. 션웨이, 그리고 그의 인도가 없는 삶은 오랜만이었고, 막막했다.

자각몽이었다. 션웨이는 긴 잠에서 깨어나 해성의 신분을 얻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경험을 명명할 수 있었다.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닫는 현상, 션웨이는 만 년간의 수면 동안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대학 동기의 가벼운 아침 인사가 션웨이의 기나긴 세월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꿈을 꾸는 동안 션웨이는 이 꿈이 도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으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지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멈춰 있는 듯했다. 환상 속의 시공이란 바깥과는 전혀 다른 결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느 꿈이 다 그렇듯 션웨이의 꿈은 형체가 없었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없었으며, 모든 일은 갑자기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마치 운명과도 같았다. 꿈 안에서 ‘깨어난’ 션웨이는 주변을 살폈다. 그곳은 숲처럼 보이기도 했고, 자세히 살피면 하늘같기도 했으며, 눈을 돌리면 자갈밭같기도 했다.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부유와 마귀, 그리고 다칭을 찾아 헤맸으나 소용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풍경은 같았고 세상은 고요했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션웨이는 혼잣말을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바깥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동생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꿈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도저히 외로움과 무력감을 견디기가 힘들어 눈물을 흘리던 날, ‘그’가 찾아왔다. 그는 션웨이의 웅크린 어깨를 토닥이곤 “이런 곳에서 혼자 어인 일로.” 라며 다정한 말 한 마디를 건넸다. 인기척을 느낀 지 오래되어 션웨이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놀라게 했다면 사과하겠소.”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션웨이는 눈을 문질러 닦아내고 그를 살폈다. 놀랍게도 그는 쿤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쿤룬?”

“내 얼굴이 아는 사람과 닮았나 보오.”

“아, 죄송합니다. 닮았습니다, 정말, 정말로요. 같은 사람이래도 믿을 정도입니다.”

“그렇소. 내 이름도 모를 그 사람이 부럽군그래, 그대같은 미인을 다 알고. 나에게도 그대의 아는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겠소?”

“아, 저는 션웨이(沈嵬), 아니, 웨이(巍)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웨이(巍).”

그는 어느 이름 모를 나라를 통솔하는 왕이었다. 션웨이에게 몇 가지를 묻던 그는 션웨이가 대답을 꺼리자 개인적 질문은 일절 멈추었다. 둘은 숲속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션웨이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던 숲은 그와 함께하자 세상 가장 평화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일국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고민이 많았고, 한 나라를 다스려 본 경험은 없으나 권력의 정점에 홀로 서 군대를 직접 이끌었던 션웨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공기를 채워나갔다. 그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션웨이의 견식에 감탄하며 상을 내리고 싶어 했지만, 션웨이는 웃으며 사양했다. 그와 다르게 이 곳이 꿈 속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타났을 때와 다르지 않게, 그는 예고 없이 사라졌다. 션웨이는 그가 꿈에서 깨었나 보다,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아마 다시 볼 수 없겠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그와 얼마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션웨이로서는 짐작할 방법이 없었으나, 그가 기억 속에 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션웨이는 그를 생각할수록 외로워졌으나 그를 생각하지 않고 외로움을 달래는 법을 몰랐다. 그를 기다리는 일이 미련한 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션웨이는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이 망망대해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그래, 그는 션웨이의 의지였다.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 안에 쥔 한 줄기 빛이었다.

이후 그의 얼굴을 한 자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주기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측정할 수 없었다. 함께 지낸 나날은 하루 같기도, 한 달 같기도, 한 시간 같기도 했다. 그저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이별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들은 매번 같은 얼굴에 다른 이름을 가졌으며, 션웨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션웨이는 언제나 그가 지어 준 이름을 그에게 소개했다. 제대로 된 이름이 생긴 후로 션웨이의 이름을 물어보는 인간은 그밖에 없었다. 웨이(巍)는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하는 이름처럼 느껴졌다. 쿤룬의 얼굴을 한 자는 매번 다른 고민을 가졌지만 션웨이는 그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매 만남이 첫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션웨이에게 ‘늘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션웨이는 그들이 모두 쿤룬의 영혼을 가졌을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션웨이는 잘 알지 못했다. 적군의 앞에서, 심지어는 아군의 앞에서도 션웨이는 세상 만물에 통달한 척을 해야만 했다. 초월적 인물로서 존재해야만 적들이 션웨이를 두려워했고, 부하들이 션웨이를 믿고 따랐다. 션웨이는 공포와 경외는 알았지만 사랑은 몰랐다. 하지만 그날 밤, 그러니까, 잠에 들기 전 쿤룬과 담소를 나누었던 그날 밤. 션웨이의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나아가지 못하는 황량한 꿈 안에서 오직 씨앗만이 성장을 겪고 있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음에도 이 공간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처럼, 션웨이는 쿤룬을 향한 감정이 사랑임 역시 깨달았다. 마치 자연의 섭리와도 같았다.

그는 션웨이에게 외로움을 견디게 해 주는 지지대와 같았고, 지성인도 아니면서 모든 부담을 잊게 하는 요술을 부렸다. 션웨이는 그에게 힘이 되고 싶기에 사고했으며, 그의 한 마디 한 행동이 션웨이의 심장을 뛰게 했다. 매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은 종종 슬프기도 했으나 션웨이는 그마저도 좋았다. 고작 하루 만난 상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에 혼자 겪는 편이 나았다. 쿤룬은 션웨이라는 호수에 파동을 일으키는 유일한 존재였다. 션웨이는 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헤매며 쿤룬의 얼굴을 한 자들을 만나고, 돕고, 사랑했다. 그렇기에 자오윈란을 처음 본 순간 션웨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끝이란 션웨이에게 언제나 요원한 것이었다. 전쟁도, 꿈도, 생도. 언제 어떻게 최후를 맞을지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션웨이는 고여 있는 시간에 잠겨 주어진 길만을 걷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오윈란을 처음, 그러니까, 룡성대학 션웨이 교수로서 자오윈란을 처음 만난 날. 웨이(巍)의 시간은 비로소 흐르기 시작했다. 자오윈란과 닿은 그 순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죽을 날이 결정되었다. 기다리던 연인을 만난 바로 그 날부터 션웨이는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션웨이에게 사랑의 추억은 곧 사망의 과정이기도 했다.

얼음송곳이 심장에 깊숙이 박히자 간당하게 붙어 있던 목숨줄이 이내 끊겼다. 션웨이는 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숨이 멎자 에너지가 야존에게 흡수되며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동시에 지니고 있던 진혼등에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션웨이는 죽기 직전, 자신의 마음을 진혼등에 바쳤다. 션웨이의 사랑은 숭고한 것이었다. 한 치의 티끌도 없이 맹목적인 감정이었으며, 만 년간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지속되어 온 순수의 결정체였다. 그렇기에 충분히 진혼등의 심지가 될 수 있었다. 심지가 완성되자 션웨이의 영혼이 연료가 되어 불을 지폈다. 불꽃은 션웨이의 사랑이 멈추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수명은 영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꽃은 마치 션웨이의 생처럼 요원하게 타올랐다.

인간의 근본이 되는 영혼, 신체를 구성하는 에너지, 그리고 생의 원동력이었던 마음이 분리되자 션웨이의 신체는 소멸하여 자연으로 돌아갔다. 션웨이는 심장을 잃고 난 후에도 간절히 바랐다. 자오윈란이 자신을 잊기를. 션웨이가 지금껏 만나 온 모든 ‘쿤룬’들은 션웨이와의 만남을 한낱 꿈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쉬이 잊었을 것이고, 션웨이는 자오윈란 역시 그들처럼 자신을 잊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을 혼자 남아 추억하는 고통을 자오윈란은 몰라야 했다.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고 자오윈란이 더 이상 션웨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션웨이가 셜계한 결말이었고, 완벽한 죽음이었다. 모든 일은 션웨이의 계획대로 풀려나갔다. 그렇게 션웨이는 기나긴 생의 마지막 장을 만족스럽게 맞았다.

활활 타오르는 진혼등을 볼 때마다 자오윈란은 아팠다. 그것이 무엇을 바탕으로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애달파했다. 자오윈란은 삶의 모든 일부에서 션웨이를 떠올렸다.

만 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며 션웨이는 쿤룬의 수많은 생을 봐 왔다. 션웨이의 길고 긴 경험에 비하면 자오윈란과 션웨이가 함께 지낸 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전부였고, 션웨이는 자신이 자오윈란에게도 전부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대신, 자오윈란이 자신을 잘 모르기에 충분히 잊힐 수 있다고, 그의 삶에서 자신이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 점이 션웨이가 저지른 단 하나이자 치명적인 실수였다.

션웨이는 몰랐다. ‘쿤룬’들이 일평생을 션웨이와 만난 하룻밤 꿈에 기대어 살았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션웨이를 잊지 못하고 찾아 헤맸다는 사실을. 그들 역시도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션웨이의 가설은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션웨이는 그들을 알았기에 사랑했지만, 그들은 션웨이를 알지 못했음에도 사랑했다. 새로운 생을 얻을 때마다 새로운 사랑을 틔웠다. 자오윈란 역시도 만 년간의 전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나 션웨이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처음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처음 그 순간부터 사랑했다. 자오윈란은 늘 자신의 사랑을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자에 새긴 본능이라 여겼지만, 이제 와서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짜여진 운명이라 믿었다.

사성구는 연구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없음에도 그랬다. 특조처가 바라는 ‘안정’이란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처럼, 옛날과 같이, 지금껏 그래왔듯. 안정은 과거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논의를 한 적은 없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사성구의 위치 역시 특조처의 이러한 기조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자오윈란은 사성구에 둘러싸여 앉아 있던 중, 문득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만약 진혼등의 불을 새로 피울 필요가 없었다면?

그 옛날부터 타올라 현대까지 유지되었다면?

과거로 돌아가 진혼등에 불을 붙인다면?

그랬다면, 그러면, 션웨이는? 사성구를 둘러본 자오윈란의 얼굴이 간만에 생기를 얻었다. 사성구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션웨이의 계획에 일어났던 균열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성구라는 놈들은 잘나신 몸이라 그런지 워낙 제멋대로였다.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리라는 법은 없었으나 자오윈란은 막연하게 그래도 우리가 구면인데, 나름 진혼령준데, 장생구가 유난히 나한테만 반응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성구님들아, 제발 도와 주라. 나쁜 짓 안 할게. 만 년 전으로 돌아가서 애인 얼굴 좀 보고 진혼등 불도 따숩게 피워 줄 테니까! 지루하던 삶에 목표가 생기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션웨이의 바람과는 정 반대로 자오윈란의 삶은 션웨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무감각했던 삶에 션웨이를 만나러 갈 희망이 깃들자 행복의 기운이 감돌았다.

매일같이 처장실에 틀어박혀 과거를 성공적으로 변화시킬 방안을 짜냈다. 1안, 2안, 3안에 이어 46안까지 갔음에도 사성구는 자오윈란을 과거로 데려다 줄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고 있으려니 답답하고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럼에도 이 역시 션웨이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에 자오윈란은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고, 자오윈란은 육감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는 션웨이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했으나 진혼등에 불을 붙이고 영원히 꺼트리지 않는 방법에도 골몰했다. 만 년 전, 사성구를 성공적으로 각성시켰더라면 션웨이는 긴 세월을 홀로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야존은 분노와 복수심에 평생을 바치다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션웨이가 세계와 인류의 부담을 전부 껴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오윈란이 보기에 션웨이의 삶은 지극히 이타적이었고, 자신을 깎아먹으면서까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자오윈란은 제 사랑이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했다.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지만 자오윈란은 과거로 돌아가 모든 일을 제자리로 돌릴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사실, 과거에 또다시 개입할 경우 미래에 끼치게 될 영향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미지였다. 괜히 잠자는 사자의 털끝을 건드려 더욱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앙이 되풀이된대도 자오윈란은 몇 번이고 다시 만 년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 션웨이의 곁에 당당히 설 인물이었다. 자신을 잘 알았기에 자오윈란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연구에라도 정신을 쏟지 않으면 말라 죽어 버릴 지도 몰랐다.

그 일은 느닷없이 일어났다. 자오윈란은 출근하자마자 평소처럼 연구실에 들어가 사성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생구 씨, 밥은 먹었어? 산하추 군, 안녕하신가. 공덕필 선생, 댁내 두루 평안하신지요. 진혼등 너 임마, 잘 지내냐.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고,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쭈욱 켜던 자오윈란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웅얼댔다. 졸려 죽겠다. 우리 웨이 조각같은 얼굴이나 보고 싶네. 잠 확 깰 텐데. 그 순간, 갑자기 네 개의 성구에서 눈부신 빛이 마구 쏟아져 나오더니 천장에 시커먼 블랙홀이 나타나 아가리를 열었다. 자오윈란은 하품을 하느라 벌린 입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커다란 구멍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엥, 뭐야. 잠깐만! 이런 식으로 잠을 깨운다고? 서비스가 과한 거 아냐?

으악! 볼품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오윈란이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졌다. 블랙홀은 자오윈란을 뱉어내곤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오윈란이 빠져나온 하늘 구멍은 강 바로 위에 위치해 있었고, 자오윈란은 그대로 강물에 퐁당 빠지고 말았다. 수영을 못 하지는 않았으나 물살이 거센 강에서 헤엄을 쳐 본 적은 없었기에 자오윈란은 허우적댔다. 사람 살려요, 컥, 사람, 으푸푸.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어, 밤하늘에 뜬 달이 예쁘네.’ 라는 태연한 생각이나 했다. 위험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천성을 자오윈란은 늘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으나, 션웨이의 부재를 통해 진정한 고난 앞에서는 그마저도 사치임을 배웠다. 오랜만에 보이는 능청이 낯설지만 상쾌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사람, 어푸, 물, 어푸! 강에! 빠졌어! 윽.”

어디선가 바람같은 청년이 나타나 웃통을 벗고 물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청년은 익숙한 듯 물살을 거슬러 자오윈란을 한 팔에 걸치고는, 자오윈란을 먼저 뭍으로 올려 보내고 나서 제 몸도 올렸다. 자오윈란이 상체를 구부리고 격한 기침을 해대자 청년이 제 상의를 자오윈란의 등허리에 걸친 뒤 두드려 주었다. 자오윈란이 물을 뱉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날이 쌀쌀합니다.”

“컥, 네, 감사, 합니다. 으엑.”

다 큰 어른이 한참 어려 보이는 청년의 겉옷을 두른 채로 꼴사납게 욱욱대고 있는 사이, 청년이 나무와 풀을 모아 모닥불을 만들었다. 드디어 굽은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는 자오윈란의 뒤로 청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으로 오세요, 얼른 몸을 안 말리면 고생하십니다.”

앳된 음성에 뒤를 돌자, 자오윈란의 눈 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둑어둑한 밤의 한 가운데에서 션웨이가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몸을 물 속에서 건져 올린 그 강인한 청년이 바로 션웨이였던 것이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을 몰라보는 듯 했다. 그토록 그리던 얼굴을 실제로 만나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자오윈란이 크게 뜬 눈에 헤 벌린 입으로 멈춘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션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 물이 너무 차가워서 조금 놀랐나 봐요.”

“많이 추우신가요? 따뜻한 차라도 내 오겠습니다.”

“가지 마세요! 아니,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어도 돼요. 귀찮게. 그쪽도 젖었는걸요.”

자오윈란이 션웨이에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션웨이가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션웨이의 옆에 앉은 자오윈란이 옷을 돌려주자, 션웨이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으니 몸을 덥히세요, 저는 익숙합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견디며,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하는 대로 모닥불 앞에 손을 가까이 댔다. 낼름거리는 불길에 션웨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가도 금세 환해졌고, 또 어두워졌다. 깊은 눈과 굴곡진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양을 자오윈란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션웨이는 제 얼굴에 문제가 있나 싶어 볼을 만지고 이마를 쓸어 보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자오윈란이 홀린 듯 션웨이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탓에 푹 젖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제 머리카락을 만져대고 있는데도 션웨이는 싫은 내색 없이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자오윈란의 손가락이 션웨이의 맨 어깨를 스치자 션웨이가 몸을 움찔했다. 그제서야 자오윈란은 자신의 예의없는 행태를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인가 봐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처음이라고요?”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이 낯설지가 않네요.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까요?”

이어져야 할 대답을 자오윈란은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어쩌면 정말로, 만났을 지도 모르죠. 아주 예전에.’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고 있던 울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자오윈란은 이제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자오윈란은 뒤를 돌아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앞만을 향했다. 미래를 살아갈수록 과거를 새로 써 나가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끝이란 시작과 마찬가지였다. 자오윈란이라는 인간은 어떻게든 다시 션웨이를 만나러 갈 수밖에 없는 순환의 고리를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어떤 미래가 닥쳐온대도 션웨이를 바라보며 회귀할 것이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북극성이었고, 이정표였으며, 태양이었다. 자오윈란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대도 자신은 션웨이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혹시 멀어지더라도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나갈 자신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 잠시 헤어져 있는 시간은 사랑을 공고히 할 뿐이었다.

“저기, 어디 불편하신가요?”

“이름이 뭐예요?”

“네? 저는, 션웨이(沈嵬)라고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여쭈었군요.”

“자오윈란, 윈란이라고 불러요.”

“윈란, 만나서 반갑습니다.”

“웨이(嵬).”

션웨이의 소망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자오윈란을 션웨이 앞으로 데려다 놓은 진혼등은 션웨이의 사랑을 바탕으로 타오르는 신성이었다. 둘의 재회, 혹은 첫만남이 션웨이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자오윈란의 열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비틀린 운명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오윈란은 자신이 션웨이만을 찾아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인 것처럼 느껴졌고, 이를 깨달음과 동시에 행복해졌다. 삶의 목적을 위해 달려나가는 순간순간이 행복이었다. 자오윈란은 자신의 이름을 반복하여 발음하는 션웨이를 품에 가득 안았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눈 앞의 션웨이를 붙잡고 싶었다. 제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아직 어린 션웨이는 어리둥절했지만 우는 남자를 모른척할 수도 없기에 자오윈란의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였다. 자오윈란이 션웨이의 귀에 대고 눈물을 뱉었다.

“웨이, 나의 웨이야. 나는 너 없이 행복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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