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月黑天 (中)

드라마 결말 이후 란웨이

화분 by 송이
3
0
0

2019.08.14.

6.

지성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인구가 오십만밖에 되지 않는 데다, 한번 뿌리를 내린 지역을 굳이 벗어나지 않는 습성 때문에 지성인들은 이웃이라면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태양 덕분인지 사람들 간의 관계도 이전과는 달리 적대감이 없었다. 그렇기에 두세 다리만 건너면 모든 지성인을 만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윈란의 곁에는 유난히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이들은 윈란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윈란은 해성에서는 당연했으나 지성에서는 개념조차 없던 일들을 차근차근 이루어 나갔다.

윈란은 가장 먼저 치료나 정화의 이능을 가진 사람을 모아 병원을 세웠다. 간단한 외상을 치료하는 이능, 흐르는 피를 멈추는 이능, 균의 성장을 통제하는 이능 등 대여섯명이 모여 시작한 병원이었으나 순식간에 온 지성 안에 소문이 퍼져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곧 일손이 부족하여 아픈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관련 이능이 없더라도 누구나 병원에 채용하였고, 간호나 간단한 처치를 하며 의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의료 기관이 전무하던 지성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집 안에 격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니 전염성의 여부 역시 알지 못했고, 그렇기에 무조건 방 안에 가두어 타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운이 좋거나 발이 넓은 사람들은 치료 이능과 연이 닿았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윈란은 지성에 아픈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개원 후에야 알았다.

돈이 어느 정도 불어나자 윈란은 통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과거 흑포사와의 연락수단이었던 향을 응용한 것이었다. 이 역시 인기를 끌어 지성은 온갖 향기로 가득하게 되었다. 원거리 통신이 가능하게 되자 윈란은 식당들을 찾아가 음식을 집집마다 배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하였고, 이 놀라운 편리함에 배달 문화가 빠르게 활성화되었다. 윈란은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의료 체계를 쌓아갈 때에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이후 윈란은 맞벌이 부부를 위해 아이를 맡아 주는 보육원과 막 출산을 마친 임산부를 위한 산후조리원을 세웠고,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을 위해 출판사를 설립했다. 구전되던 이야기들이 비로소 문자로 옮겨졌고, 어린이들이 책상 앞에 앉아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지성인들은 그저 흘러가는 삶이 아닌, 가치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나아가는 인생을 갖게 되었다.

경제력이 꽤 갖춰진 후에야 가장 원했던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바로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과거 션웨이와 함께 지성의 낙후된 인프라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면 션웨이는 언제나 학교 이야기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그 얼굴이 윈란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윈란은 먼저 교직에 뜻이 있는 친구들을 모아 사범대학 비슷한 것을 설립했다. 대학이라기보다는 모임에 가까웠다. 먼저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정하고, 각자 가르치고 싶은 분야를 연구했다. 이후 교육과정을 수립하고, 생활 지도 측면에서 학생의 사생활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지, 어떤 상과 처벌을 내려야 하는지에 관하여 토론했다. 학교 체계와 교과서, 교사의 수준이 갖춰지고 난 후에 드디어 초등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션웨이를 위한 것이었다. 윈란은 그동안 지성에 수많은 혁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뿐 직접 일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병원이나 통신국 등의 중요 직위를 모두 마다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윈란은 교장직에 앉기를 원했으며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윈란은 역사적인 지성 첫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7.

열 다섯, 지성을 바꿔 놓으리라 결심한 뒤 정확히 십오 년이 지나자 지성은 윈란이 원했던 방향대로 나아갔다. 예상치 못한 일도 분명 있었으나 윈란은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 의도대로만 모든 일이 진행된다면 오히려 망설였을 것이었다. 윈란은 제 선택에 후회는 없었으나 간혹 길을 잃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작업이 순조로울 때보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질 때 안심이 되었다. 지성이 스스로 제 살 길을 찾아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윈란의 계획이 성공하자 다른 이들이 우체국이나 학교 등을 모방하여 세우기도 했다. 친구들은 항의하고 싶었으나 윈란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여기어 가만히 두었다. 지성은 변했다. 아픈 사람은 누구나 병원을 찾아갔고, 멀리서도 친우의 안부를 물을 수 있으며,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를 떠돌지 않고 학교에 갔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윈란 하나만이 아니었다. 지군전의 의회에서도 신문고나 법원, 주민센터와 같은 기관들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으며, 평범하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며 혁신을 시도했다.

표면적으로는 관련이 없으나 어찌 되었든 총 책임자나 마찬가지였기에 윈란은 제가 이루어놓은 일들을 자주 살폈다. 병원장으로는 윈란의 옆집에 살아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던 친구가 앉아 있었다. 이 친구의 겉모습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나 톡톡 쏘는 말투가 이상하게도 다칭과 닮아 윈란은 제 선택이 혼란스러울 때면 항상 병원에 찾아갔다.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 조금이나마 볕을 쬐이려 가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이 묘했다.

여느 때처럼 정문에 느릿느릿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접수대 앞에 한 청년이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고, 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조용하지만 활기차던 로비가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청년이 교통 정체의 원인인 듯 했다. 윈란은 죽었다 다시 태어났음에도 고쳐지지 않는 오지랖을 발휘하여 접수대로 다가섰다. 늘상 보는 얼굴의 접수대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윈란에게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인데?”

“그게, 별 일은 아니에요.”

“별 일이 아닌 게 아닌데?”

“저기..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제가 어떻게든….”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그리우면서도 새로운 목소리였다. 접수대 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던 윈란이 청년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엔 삼십여년간의 새로운 생 내내 잊지 않기 위해 되짚고, 또 되새기던 얼굴이 있었다. 삶이 지치고 힘에 부칠 때면 억지로라도 떠올렸던 얼굴이 있었다. 저를 살게 한 얼굴이 있었다. 제 기억보다는 어리지만 여전히 조각 같은 외모였다. 그토록 바라왔던 재회인데,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윈란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션웨이?”

“네?”

순진한 눈망울이 깜빡였다. 아무래도 윈란의 오랜 사랑은 윈란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8.

청년의 이름은 웨이였다. 웨이의 어머니는 임신 시절에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날 이후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웨이라 짓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쌍둥이가 태어났고, 어머니는 먼저 태어난 아이를 웨이, 나중에 태어난 아이를 준이라고 이름지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아무리 물어도 꿈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들려주리라 약속까지 해 놓고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버지는 존재한 적이 없기에 열두 살 생일 이후로 두 아이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까마득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 인심 좋은 이웃들이 형제의 끼니를 책임졌고, 웨이는 그 대신 온 마을의 농사일을 도왔다. 준은 몸이 좋지 않았기에 웨이가 동생의 몫까지 일을 했다. 한 뱃속에 있던 제가 동생에게 가야 할 양분을 모두 빼앗았다 생각하여 웨이는 늘 동생에게 헌신했다.

성인이 되자 둘은 더 이상 이웃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나가기로 했다. 어느새 정이 들어 버린 마을 사람들에게 자주 편지하겠다며, 명절이면 꼭 내려오겠다며 약속했다. 쌍둥이가 평생을 지낸 고향을 떠나는 날 온 동네 주민이 모여 그들을 배웅했다. 생활이 힘들어지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는 따스한 말도 함께였다. 옆집 할머니는 준의 손을 붙들고 꼭 건강하라며, 아프지 말라며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타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아 화폐경제조차 발달하지 않은 시골의 촌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형제에게 건넸다. 웨이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으나 의연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뗐다.

수많은 응원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준은 결국 도시에서 병을 얻었다. 이웃의 온정이 남아 있는 돈으로 겨우겨우 좁고 낡은 방을 얻었으나 연고 하나 없는 타향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웨이는 밤낮없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일을 하느라 동생을 돌보지 못했고, 준의 건강은 악화되어만 갔다. 도시에는 병원이라는 이름의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곳이 있다고 들었으나 웨이가 버는 돈은 생활비와 집세만으로도 빠듯했다. 한 번 치료를 보려면 한 달을 내리 굶거나 셋방에서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이는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준은 완강하게 집 안에서 쉬면 나을 것이라며 버텼다. 고생하는 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날 때부터 약해빠진 제 몸이 원망스러웠다. 안 그래도 방구석에서 밥만 축내고 있는 자신이 미운데, 여기서 더 짐짝이 될 수는 없었다. 갑자기 기적이 내려와 몸이 튼튼해지고 온 도시의 돈을 휩쓸어 형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준은 헛된 상상을 되풀이하고 현실에 신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웨이가 일을 나간 사이 준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큰 소리에 놀란 집주인이 마당에 널브러진 준을 발견했고, 셋방에서 시체를 치우기는 싫었는지 응급실에 데려다 놓았다. 준의 병은 흔한 것이었으나 워낙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여 죽을 지경까지 간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간단하게 치료를 마치고 며칠간 입원하기를 권장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웨이는 텅 빈 방안에 혼비백산하여 집주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동생이 아파 보이기에 병원에 데려다 놓았으며 의사의 말대로 입원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 설명했다. 웨이는 몹시 당황하며 그동안 모은 돈을 챙겨 병원으로 달려갔고, 접수대에 당도하니 병원 측에서 웨이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웨이는 당장 치료비에 입원비까지 지불할 만큼의 돈이 없었다. 그렇기에 병원 측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하며 사정을 하고 있었는데, 수염을 기르고 사탕을 문 난생 처음 보는 남자가 끼어 든 것이었다.

남자는 웨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을 멈추고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제 돈으로 덜컥 모든 청구 금액을 결제했다. 웨이가 만류했으나 남자는 어거지를 썼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라 했으면서,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말하니 어머니의 친구인 것 같다고 했다. 웨이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 남자를 막을 길이 없어 단념했다. 남자의 주머니에서 돈이 줄줄 흘러 나오는 모양을 한숨 쉬며 구경했다. 돈 많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큰 돈을 덜컥 쓸 만큼 부자인 건가? 부자들은 원래 다 이렇게 돈을 팍팍 쓰나?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웨이는 돈은 없었으나 자존심은 있었다. 아무리 온순하게 살아 왔다지만 남에게 대뜸 동정에 적선까지 받았으니 기분이 상할 법도 했다. 내가 구걸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불쌍하게 보였나?

그런데 이 남자가, 저를 거렁뱅이 취급하며 돈자랑을 하는 이 남자가, 그러면서도 나사 하나 풀린 표정을 한 이 남자가, 웨이는 정말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좋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웨이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접수대 직원이 돈을 확인하는 사이, 남자가 할 말이 있는 듯 웨이를 한참 바라봤다. 웨이는 그 시선에 응하여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바라보고 싶었다.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직원의 말이 들리고, 남자는 결국 입을 열지 않은 채 잘 지내라며 뒤를 돌았다. 웨이의 손이 남자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잡으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새 손이 튀어나가 있었다. 평생을 계획 안에 갇혀 살았기에, 웨이는 충동적인 행위 자체가 처음이었다. 당황하여 저를 향해 돌아본 남자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웨이는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응?”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여지껏 소매를 붙들고 있던 손을 허둥지둥 내리고, 구십도로 꾸벅 인사를 한 뒤 웨이는 뒤를 돌아 달렸다. 아마도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졌을 것이다. 양 볼이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쿵쾅대는 심장도,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도, 날뛰는 기분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웨이는 비상구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감쌌다. 시야가 차단되자 어둠을 대신하듯 남자의 얼굴이 눈 앞에 그려졌다. 웨이는 눈을 번쩍 떴다. 정신 차려! 이게 뭐야, 지금 뭐야, 당신 정말 뭐야….

9.

똑똑. 저녁 아홉 시였다. 웨이가 찾아올 시간이었다. 윈란은 기지개를 켜며 “들어와!” 라고 외쳤다. 웨이는 한 달 전부터 꼬박꼬박 윈란의 사무실을 들르고 있었고, 제대로 허락을 맡은 것은 이번 주부터였다. ‘병원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웨이는 대뜸 사무실로 찾아와 윈란을 만났다. 윈란이 얼떨떨하게 웨이를 소파에 앉히고 차 한잔을 내어 주니 웨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또박또박 말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여러 번 연습한 티가 나는 말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윈란은 말을 잃었다. 곧은 표정의 웨이가 찻잔을 내려놓던 중 갑자기 “아차!” 소리를 내었다. 창 밖을 멀거니 바라보며 복잡한 사고를 정리하던 윈란이 깜짝 놀라 웨이의 손 끝을 바라봤다. 차를 엎은 줄로만 알았는데 찻잔은 얌전했다. 대신 웨이가 허겁지겁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기소개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저는.. 웨이라고 해요.”

“웨이? 이름이 그냥 웨이예요?”

“네, 제가 살던 곳은 깡시골이라 다들 성이 없어요. 고립된 곳이라 다른 지역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끼리 부르는 이름밖에 없거든요. 이상하죠?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요, 성이라는 개념 자체를요. 다들 신기하게 보더라구요.”

“하나도 안 이상해요. 그러면 나도 그냥 윈란이라고 말할래요, 내 이름. 성 떼고.”

“윈란?”

“응, 윈란. 그리고 웨이.”

기억 속에만 살던 얼굴이 눈 앞에서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윈란은 만약 션웨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보자마자 울어 버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제 기억이 온전한데 션웨이가 모든 것을 잊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쪽이 누가 봐도 비정상이었지만, 당연하게 션웨이가 저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어리석었다. 그래서 윈란은 웨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상상 속에서 만나 왔던 그 어떤 션웨이도 ‘웨이’와 같지 않았다. 떠올렸던 모든 경우의 수가 쓸모를 잃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웨이를 도운 것마저도 잘한 짓인지 혼란스러웠다. 이번 생을 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막막했다. 확실한 것은, 전생의 션웨이가 자오윈란의 짧은 친절 때문에 일평생을 희생했다는 사실이었다. 윈란은 웨이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보답은 됐습니다. 바라고 한 일도 아닌걸요. 저는 원래 매일같이 돈을 펑펑 쓰고 다닙니다. 베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 그러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웨이 씨.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저도 일이 있거든요. 쓰려면 벌어야지요.”

명백한 거절이었다. 말도 안 되는 과장이 덧붙었지만 웨이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윈란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윈란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지금의 웨이에게 윈란의 존재는 독이면 독이지 절대 득은 못 되었다. 웨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만년 전 자오윈란의 가벼운 호의로 인해 션웨이는 홀로 그 많은 일들을 감내해야만 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제 숙명인 양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누구도 션웨이의 마음을 함께 짊어질 수 없었다. 자오윈란이라는 인간 하나 때문에 션웨이는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었다.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새로이 얻은 생에 자신이 끼어들면 또다시 한 사람의 일생을 불구덩이로 던지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들여다 보니 마음 어딘가가 텅 빈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으나, 이전 생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어서 서글프기도 했다. 그 순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의문의 선인으로 남는 것이 서로의 남은 생에 좋은 일일 터였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머리를 비우고 감정을 정리했다. 윈란은 웨이의 새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혹시나 보고싶어지면 먼 발치에서만 지켜보기로, 저가 아닌 다른 이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바라보기로 했다. 하지만 전생에도 그랬듯, 운명은 윈란이 마음먹은 대로 길을 터 주지 않았다. 윈란이 ‘웨이’를 그리워하기도 전에, 웨이가 다시 윈란을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늘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두 배로 돌려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차마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요. 정말 도울 일이 없을까요?”

“허, 참...”

“혹시 돈을 돌려받길 원하신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보증은 못 하지만 각서 정도는 쓸 수 있거든요.”

“지금 나가시는 게 저를 돕는 일입니다.”

전날처럼 꾸벅 인사를 하던 웨이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윈란을 찾아왔다. 직설적인 거절이 오히려 반감을 샀나 싶어 에둘러 말해도 보고 어설프게나마 타일러도 보았지만 웨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긴, 전생에도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의견을 바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한 번 정한 일은 어떻게든 이루어 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전생에도 도무지 생각을 알 수가 없어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다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다시 태어난 후에도 윈란을 답답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데! 웨이가 찾아온 지 보름이 지나자, 윈란은 자신이 웨이와의 만남을 꽤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가 기울고 날이 어두워지면 주전자에 두 명이 넉넉하게 마실 수 있는 찻물을 끓이며 웨이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윈란은 더 이상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번 생에도 웨이는 저와 엮일 운명인 듯 했다.

“오늘은 보답할 거리가 생각나셨나요?”

“동생은 어디에 두고 이렇게 돌아다녀요, 아파 보이던데.”

“이제 건강이 많이 좋아져 학교라는 곳에 보냈습니다. 원래도 책을 많이 읽던 아이라 공부도 아마 잘 할 거예요.”

“웨이씨는 학교에 안 가고 싶어요? 졸업하면 더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두 명 다 학교에 가면 학비를 벌 사람이 없거든요.”

부끄럽지 않다는 듯 웨이는 정갈한 말투로 답했다. 션웨이는 학습과 교육에 열의가 넘치는 편이었는데, 현생의 웨이도 마찬가지일지 궁금해졌다. 만약 전생과 같다면 웨이도 동생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을 터였다. 지성의 학교는 모두 일정한 시기에 입학하는 공교육 기관이 아닐뿐더러 개교한지도 그리 오래지 않았기에 나이에 상관없이 원한다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었다. 요구되는 과정을 모두 마치면 월반이 가능했고, 학생의 의지와 재능이 뒷받침된다면 10년짜리 교육과정을 3년 안에도 마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매일 늦은 시간에 찾아오던데, 낮에는 뭐 해요?”

“오전에는 출판 회사에서 일을 해요. 새로 나올 책들을 읽고 요약본을 만드는데, 어디 안내 책자 같은 곳에 들어간다나 봐요. 파본이 나오면 동생에게 가져다 줄 수 있어서 좋아요. 오후에는 작은 식당에서 일을 돕는데, 사장님께서 둘째를 임신하고 계셔서 두 살배기 첫째를 돌보는 일도 겸하고 있어요. 식당이 여덟 시에서 아홉시 사이에 문을 닫아서, 끝나고 이렇게 찾아오는 거예요. 열 시부터는 두 시간 동안 야식 배달을 하거든요, 여기도 제 구역이에요.”

“바쁘겠어요.”

윈란은 이 정도의 말밖에 하지 못하는 제 혀를 원망했다. 잘만 움직이던 주둥이가 웨이 앞에서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흠흠, 윈란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웨이가 찻잔을 코 앞에 대고 향을 맡다 윈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학교에서 일 안 해볼래요? 요즘 일손이 조금 필요해서, 오전에 수업을 듣고 저녁에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비서 같은 건데, 어때요. 지금 하는 일들보다 쉬우면서 보수는 섭섭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요?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일을 왜 저한테, 그것도 갑자기요?”

“돕고 싶다고 했잖아요. 진심으로 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게 저로서는 좋죠.”

“언제부터 출근해야 하나요?”

“지금 하는 일들 언제 그만둘 수 있는데요?”

“일주일 안으로는 정리할 수 있어요.”

“그러면 다음주 월요일에 보기로 해요, 웨이 씨.”

웨이가 맑게 웃었다. 지난 몇주간은 물론, 지난 생 전부를 합쳐도 본 기억이 없는 표정이었다. 눈물이 핑 돌아 윈란은 황급히 찻잔을 정리했다. 슬슬 웨이가 다음 일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웨이는 평소처럼 꾸벅 인사를 하더니,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돌렸다. 윈란이 책상 앞에 앉아 문서를 살피려는데, 웨이가 문 밖으로 나가려던 동작을 멈추고 뒤통수를 보인 채 물었다. 여상한 말투였으나 윈란은 웨이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윈란이 서류에서 손을 뗐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저는 웨이 씨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할 거라 믿어요.”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웨이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나갔다. 제대로 닫히지 않아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다 윈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내 웨이야….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너는, 너라면, 너는 대체, 나는 이제... 윈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작품
#진혼
커플링
#란웨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