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悲
션웨이 비 맞은 얘기 날조
2019.07.10.
내가 이렇게
션웨이가 사라졌다. 시력을 되찾은 지 닷새가 되자, 자오윈란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션웨이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환장하게도 특별조사처였다. 자칭 타칭 신의라는 양반에게서 눈 치료를 받고, 자오윈란이 멀쩡한 발걸음으로 특조처 안에 들어가는 모양을 확인하고 나서야 션웨이는 학교에 일이 남았다며 자오윈란에게서 멀어졌다. 자오윈란은 일이 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며 션웨이를 타박했고, 션웨이는 그런 자오윈란을 보며 그저 웃었다. 그 희미한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얇은 입술선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휘어지기에, 자오윈란은 그 모습을 눈 안에 깊숙이 담아놓지 못한 점이 그렇게도 원통했다. 못 볼 줄 알았더라면, 더 유심히 봐 둘 것을.
첫 날은 별 생각이 없었다. 션웨이가 특조처에 매일같이 들락날락할 정도로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너그러운 션 교수님 역할을, 지성에서는 박학다식하고 공명정대한 흑포사 대인 역할을, 특조처에서는 문제를 넣으면 뚝딱 답이 나오는 고문 역할을, 그리고 자오윈란과 함께 있을 때는 사랑스러운 연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네 가지 역할을 동시에 완벽하게 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자신에게 연락 한 통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 날도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한 흑포사 대인께서는 아쉽게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교수 연구실의 전화밖에 없었다. 수업이 없을 시간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받지 않았고, 때마침 사건이 터져 때가 되면 연락이 오겠지, 하고 넘겨짚었다. 그동안 우리 무능한 특조처 일원들이 유능한 교수님을 들들 볶았으니 학교에 일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좀 쉬고 싶을 수도 있고.
셋째 날이 와서야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룡성대 공학대학 측에 션웨이의 수업을 듣는 학생인 척 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션 교수가 삼일째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병가는 이미 제대로 제출해서 절차상은 문제가 없고, 후에 보충수업을 할 예정인데 혹시 휴강 문자를 받지 못한 거냐 묻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자오윈란은 전화를 끊었다. 직장에 없다면, 지성에 간 건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야존이 봉인되어 있다는 천주를 확인하고, 지군전에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지성에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불안감이 올라왔지만 이미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지성에 삼일정도 머무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넷째 날에는 그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았다. 흑포사를 소환하는 향을 아무리 태워도 그 새카만 장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성의 흑포사가 해성의 진혼령주에게 연락할 방법이 전무한 것도 아니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즉 반응할 수 없음을 뜻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라는 인물이 바쁘거나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쪽지 한 통 넣지 않을 인물이 아닌 것 역시 알았다. 걱정할 이를 위해 무탈하니 안심하라는 말 한 마디라도 적어 보낼 성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션웨이가 위험에 처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넷째 날 밤, 자오윈란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셨다. 안주 없이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 다칭은 그런 자오윈란과 마주 앉아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다가, 술 냄새가 지독하다며 꼬리를 말고 웅크렸다. 자오윈란은 밤새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을 내는 들짐승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졌다. 션웨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션웨이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션웨이가 지성 어딘가에 붙잡혀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 곳을 션웨이의 도움 없이 찾아갈 방법조차 없었다. 자오윈란은 인간의 무능함에 좌절했고, 제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션웨이 없이 헤쳐나가야 할 미래가 막막했고, 발생할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할 생각에 눈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 어떤 현실적인 고민보다도 자오윈란은 그저 션웨이가 보고 싶었다. 매일같이 살을 맞대던 사람이 돌연 증발하니 그리움에 숨이 막혔다. 두 눈이 멀었을 때도 느껴지지 않던 상실감이 자오윈란을 덮쳤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절대로 절대로 술 때문이었다.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해가 떠오르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날이 유난히 어둑어둑했다. 자오윈란은 취하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술을 많이 마시면 숙취가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덕분에 밥을 한 톨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션웨이가 집에 오지 않아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냉장고 앞에 선 자오윈란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처들었다. 아, 전구 갈 때 된 것 같은데. 결국 처참한 몰골로 특별조사처 건물에 들어섰다. 밤을 꼴딱 새웠지만 션웨이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성물을 들고 대로 한복판에 나가 팔랑팔랑 뛰어다니고 있으면 어디선가 야존 일당이 나타나 자신을 묶어 지성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는 게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으로 보였다. 그러나 션웨이가 있었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각했다. 언제부터 션웨이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느냐 싶었지만, 원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법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소파에 드러누워 탁자에 발을 올리니, 궈창청이 허둥지둥 처장님을 찾으며 뛰어들어왔다.
“왜, 또, 무슨 일인데.”
“그게, 제가 출근을 하는데, 오는 길에 이 할아버, 아니, 이 분이 또!”
“진혼령주! 큰일 났습니다!”
궈창청이 곤란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자, 섭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섭정관은 다짜고짜 양 손을 모으고 벌벌 떨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자오윈란은 이 일이 흑포사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를 만난 경위를 두서없이 설명하려는 궈창청을 막고, 섭정관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흑포사 대인이 사라졌습니다!”
“뭐?”
“원체 두문불출하는 분인지라 크게 걱정을 않고 있었는데... 아무리 연락을 취해도 며칠째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급한 일이 생긴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직접 결재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직접 지상으로 올라와 흑포사 대인을 찾아 가려고 했는데, 아니, 이 꼬맹이 녀석이 해성에서도 흑포사 대인을 못 본지가 이미 수 일이 지났다지 뭡니까. 지성에도 없고, 해성에도 없다면, 우리 흑포사 대인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 쪽에도 없다 이거지..”
“네, 네. 령주. 그렇습니다. 이 늙은이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요.”
“알았으니 이만 일어나요. 혹시 이 일이 다 그쪽에서 꾸민 일이라면,”
“절대 아닙니다! 제가 무슨 수로 흑포사 대인을 숨기겠습니까.”
섭정관은 허리를 콩콩 두드리더니, 자오윈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자오윈란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섭정관에게 일렀다.
“일단 지성으로 돌아가요. 혹시 이쪽에서 찾게 되면 대인을 통해 연락할 테니까. 그쪽에서도 전력을 다해 찾아 보시고.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요.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령주.”
조용한 처장실에 홀로 앉아 자오윈란은 생각했다. 션웨이가 어디로 갔을지. 야존이 힘을 되찾아 션웨이를 제압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첫째, 야존이 해성으로 올라와 자오윈란을 만나겠다 설치지 않았고, 둘째, 섭정관 그 늙은 여우가 션웨이를 찾겠다고 굳이 먼 걸음을 할 리도 없었다. 본인도 션웨이가 없어서 곤란하니 특조처까지 왔겠지. 셋째, 션웨이가 야존은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믿었다. 그러므로 션웨이는 반드시 해성에 있을 것이다. 만약 해성 어딘가에 션웨이가 붙잡혀 있다면 어디일까? 성독국? 자오신츠가 그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 같기는 했으나, 명분이 없으니 션웨이를 마음대로 잡아둘 수는 없었다. 해성감? 가오 부장은 션웨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 했으니, 더더욱 아니었다.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션웨이가 자발적으로 갈 만한 곳은 어디가 있을까? 학교, 특조처, 지성... 세상에. 집. 왜 션웨이가 집에 들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지? 매일 그 문 앞을 지나치면서? 자오윈란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션웨이가 그 곳에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너를
션웨이는 꿈을 꿨다. 만년 전, 처음으로 비를 맞아본 날의 추억이었다. 지성에서 막 올라와 따사로운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을 무렵,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은 션웨이에게 큰 충격이었다. 션웨이의 피부를 두드린 첫 비는 소나기였다. 환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예고도 없이 새카만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밝기만 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션웨이는 길어지는 전쟁으로 하늘이 노하셔 해성의 태양마저 빼앗아 가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정신없이 야수족 족장에게 달려가 큰 일 났다고, 어서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이 곳도 지성처럼 죽은 땅이 될 거라고, 문장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말했다. 야수족 족장은 어린 지성인을 비웃는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었다. 온기가 몸 안을 돌고 나서야 션웨이는 울었다.
밤이 되면 태양이 숨는 것은, 이해하지? 비슷한 거야.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렸을 뿐이야. 해성에서는 이 물들을 비라고 불러. 비가 있어서 해성의 온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어제 같이 갔던 강, 기억하지? 졸졸 흐르고 있었지? 안에 물고기도 있었고. 그 물이 흘러서 어디로 간다고 했지? 맞아, 바다로 가. 그러면 바다는 평생 바다일까? 탁자에 물을 흘리면, 닦지 않아도 사라지지? 공기 중으로 스며든 거야. 그러면 바다도 물인데, 바다는 예외일까? 그렇다면 바다가 언젠가 말라 버릴까? 걱정은 하지 마, 태양이 바다를 먹어치우는 괴물은 아니니까. 지상의 물방울들이 하늘로 올라가면, 그것들이 하늘 위에서 모인 다음 다시 땅으로 돌아오게 돼. 그 돌아온 물방울을 바로, 비. 비라고 하는 거야. 하얗고 보송보송한 구름이 모여 이렇게 비를 내려 주면 대지의 생명들이 살아 숨쉬게 되지. 비라는 건, 하늘의 보복이 아니라 축복이야. 우리가 강과 바다를 더럽히면 더러운 비가 내리고, 깨끗하게 유지하면 깨끗한 비가 내린단다. 비는 우리의 삶을 비추어 주고, 반성과 참회의 기회를 주는 하늘의 선물이야. 동시에, 모든 일은 돌고 돌아 다시 우리에게 온다는 교훈도 주는 거지. 웨이, 어때. 손 한 번 내밀어 볼래? 시원하지? 기분이 어때?
좋았다. 그 투명한 방울이 손에 와 닿는 감촉도, 적당한 온도도. 동시에, 지성은 정말로 버려진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줄기 참회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곳. 션웨이는 자신이 이렇게 큰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생각하면서도, 내려오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냥 좋았다. 이렇게 평생 오도카니 앉아 하늘만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비가 어서 내리기를 내심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어떤 일로 인해서였을까. 션웨이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행하기 위한 의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뇌가 멈추고,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정신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계약을 맺은 후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처음에는 축축한 공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션웨이는 기분보다 더 강력한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 안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결론지었다. 가장 집요하게 션웨이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습기였다. 그 꿉꿉하고 질척거리는 기운이 피부 위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힘들었고, 숨까지 막혀왔다.
여우비나 단순한 소나기, 안개와 같은 경우에는 숨이 조금 답답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별 다른 지장이 없었다. 평소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을 단속하면 누구도 션웨이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장마나 태풍과 같이 물기가 온 공기를 채우는 날에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교수 연구실 책상에 앉아 펜을 들면 유난히 종이가 눅눅하고 펜촉이 무거울 때가 있다. 그러면 션웨이는 안경을 벗어 마른세수를 한 뒤, 교무부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신청했다. 룡성대 학생 커뮤니티에는 그 흠없이 완벽한 션 교수가 자연재해에 약하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돌았다. 일기예보에서 긴 장마를 예측하는 날이면 게시판이 션 교수가 휴강을 할 것이냐 아닐 것이냐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 찼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SNS에 어두운 션웨이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미리 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견디기 힘든 날이 있다. 션웨이는 그런 날이면 오래 전 우연히 학습한 이능을 사용했다. 일정 공간의 열과 빛을 증폭시키는 힘이었다. 하지만 평상시보다 더 많은 집중력과 정신력을 갉아먹기 때문에 후폭풍이 심했다.
쓸 일이 거의 없어 먼지만 털어 주는 침대였지만, 비가 오면 션웨이는 꼼짝없이 그 침대 위에 구겨져 누워 있어야 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전신을 누르던 압력이 줄어들었다. 션웨이의 머릿속은 항상 지성의 통치나 다음 논문에 쓸 실험, 특조처의 미스터리한 사건 등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가만히, 그저 가만히 침대에 올라가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힘은 없었지만 자신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느끼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몇십 년인지 몇백 년인지, 아무튼 수년 만에 찾아온 강한 장마라고 했다. 션웨이는 하필이면 그 장마전선이 룡성시를 지날 때 남의 집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찬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오로지 마음 깊숙하게 아끼는 이를 위해서였다. 다음 날 다시 찾아오라는 확답을 듣고 난 뒤, 션웨이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빗방울이 션웨이의 온몸을 두드린 탓에 몸이 덜덜 떨리고, 무릎이 예고없이 꺾여 왔지만 눈만은 또렷했다. 나는 괜찮다. 이 일로 그가 괜찮아질 것이므로, 나 역시 괜찮을 것이다. 혹시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자신의 꼴을 알게 될까 두려워, 션웨이는 모든 힘을 쥐어 짜 이능을 사용하여 집 안으로 이동했다. 축축한 몸을 제대로 닦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 쓰러지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얼굴에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잠에 들면 자는 동안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죽어서는 안 됐다. 션웨이는 느린 움직임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제가 지나온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기에 걸레로 남김없이 흔적을 지우고, 제 몸을 수건으로 닦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버텨야만 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고서가 놓여 있었다. 션웨이는 그것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부들거렸다.
자오윈란의 눈을 치료해준 뒤, 집으로 돌아온 션웨이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전날 룡성시를 찾아온 장마전선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 션웨이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머리와 몸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표류하던 생각들이 지워짐에 따라 션웨이를 짓누르는 기운이 서서히 가벼워졌다. 습한 공기 안에서 숨쉬며 비를 직격으로 맞아서인지, 좀처럼 압박이 떠나가지 않았다. 션웨이는 눈을 감고 정신을 놓으려 했으나, 그 틈을 메꾸듯 꿈이 밀려들었다. 만 년 전, 비를 처음 맞은 날의 꿈. 어린 션웨이가 비와 먹구름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고, 야수족 족장이 션웨이를 위로했다. 꿈, 현실, 현실, 꿈, 낮과 밤이 몇 번이나 자리를 바꿨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맸다. 두려움, 안도, 두려움, 안도, 두려움, 안도, 상반되는 감정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야수족 족장의 부드러운 말투가 머릿속을 뱅뱅 돌아 메아리를 만들었다. 밀려드는 감각의 폭풍에 션웨이는 허덕였다.
도대체 몇 번째일지도 모를 꿈 속의 션웨이가 야수족 족장의 손에 이끌려 손바닥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빗방울이 톡, 하고 덜 여문 손끝을 건드렸다. 그 순간, 션웨이는 잠에서 깼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정체 모를 기운은 바로 션웨이라는 죄인의 업보라는 것을. 비는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만 년 전 평화라는 대의적 이유로 동포들을 빛 한줄 들어오지 않는 황량하고 열악한 곳으로 몰아넣은 죄. 겨우 하룻밤을 함께 지낸 사람에게 빠져 그 사람의 세계를 지키고자 제 세계를 어둠으로 치닫게 한 죄. 하나뿐인 친동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나쁜 물이 든 동생을 제 손으로 봉인한 죄. 죄, 수많은 죄목.
만 년 전 션웨이는 똑똑히 들었다. 지상의 인류는 비를 통해 참회하고 반성한다고. 비는 자신이 쌓아 온 죄를 고통으로 사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대자연인가. 그 누구도 션웨이를 죄인이라 칭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션웨이를 지성의 영웅이라 추앙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전,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 했을 적부터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죄책감이 그를 누르고 있었다. 죄책감은 션웨이의 말과 행동, 생각 하나하나에 매달려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머리를 비워내고 마음을 비워낼수록 고통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아주 고집이 센 장마전선이라고 했다. 전국의 기상학자들이 머리를 맞대도 언제쯤 소멸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션웨이는 사상 최악의 장마와 함께, 가장 뼈아픈 속죄를 맞이했다. 사고를 그만두면 아픔이 줄어들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깨달아 버린 진실이 너무나 가혹해서 션웨이는 그것을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열감이 온 몸을 덮치는가 하면 곧 한기가 내장 속을 파고들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누군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아 눈을 겨우 떠 보면 제 동생이 목을 조르고 있는 환상이 펼쳐졌다. 숨이 모자라 헉, 컥,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언젠가 지성에서 교수형을 집행할 때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션웨이는 이불을 끌어 모아 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귓가에 빗소리가 울렸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뭉뚝한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나는 이 고통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션웨이는 생각했다.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죽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혼자 둘 수가 없어서,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을...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빗방울이 창문에 끊임없이 부딪히는 것처럼, 누군가가 손이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윈란, 당신이겠지, 미안해, 당신이 부르는데 나는 나가볼 힘이 없어, 어쩌지. 미안해요. 그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랑하고 있어*
빗방울은 창문을 뚫을 수 없지만,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문을 열 수 있다.
“션웨이!”
촘촘히 귓가를 채운 빗소리를 비집고 자오윈란의 목소리가 션웨이에게 닿았다. 션웨이는 눈을 떴다. 제가 찾아 준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오래 전과 다름없는 곧은 시선, 오롯이 저만을 담은 눈동자. 모두 저에게는 과분한 것들이었다. 션웨이는 힘없는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지나치게 밝아서 아팠다. 눈을 감고 몸을 둥글게 말자, 따스한 기운이 션웨이의 등과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뭔 줄 알고, 뭐가 괜찮다는 건데, 션웨이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흐느끼기만 했다. 어쩌면 뇌에서 마음껏 울어라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겠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목과 가슴, 그 언저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왜 슬픔은 항상 여기에 고이는 걸까?** 누군가에게 이렇게 갓난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오윈란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션웨이를 달랬다. 자오윈란이라는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뛰어 들고 보는 인간. 션웨이는 자오윈란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몰랐다. 느린 속도로 제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션웨이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고장난 수도꼭지’라는 단어가 션웨이를 묘사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울면서 몸을 움찔거리는 션웨이는 왜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줄곧 이렇게 울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거겠지.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뒷목에 입을 맞췄다.
“걱정했잖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어.”
“그것도 미안해.”
“미안하면 알려줘, 왜 우는지.”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리다, 이내 꾹 닫혔다.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등에 이마를 대고 괜찮아, 괜찮으니까, 하며 한숨처럼 말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자오윈란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션웨이가 웅크렸던 몸을 더 모았다. 주먹을 쥔 손등에 핏줄이 새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침대맡에 앉아 션웨이의 손등을 매만지고, 손가락을 펼쳤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제 것을 끼워 넣으며 자오윈란은 말을 이었다.
“많이 아파?”
“...응.”
“얼마나 아파?”
“모르겠어, 너무 아파.”
“그랬어, 너무 아팠어. 뭐가 그렇게 아프게 했대?”
“...빗소리가 너무 커.”
“너무 커? 비 못 내리게 할까? 오지 말라고 할까?”
“안 돼..”
“그건 또 싫어? 알았어요, 알았어.”
펼쳐진 양 손바닥이 말라 보송해졌을 즈음, 자오윈란은 바닥에 꿇어앉아 침대에 상체를 기댔다. 션웨이와 자오윈란의 이마가 맞닿을 듯 가까웠다. 자오윈란은 움찔거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미소를 떠올렸다. 찌푸린 미간을 제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눈물에 젖은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션웨이가 몸을 뒤척이며 자오윈란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앞에 조심히 누웠다.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션웨이의 귀를 막고 뒤통수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기대도록 했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이제 어때?”
“아직도 들려.”
“아직도 들려?”
“평생 안 없어져.”
“왜?”
“내 탓이어서, 전부 다, 내 잘못이어서. 안 없어져. 못 없애.”
“...어?”
“돌아가.”
왜? 션웨이, 너는 왜 항상, ..자오윈란은 똑똑했다. 분위기를 읽고,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일에 능했다. 그는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과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을 명확히 구분했다. 상대의 태도와 자신이 가진 패에 따라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유쾌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이 방에서 나가 모른척 하는 것. 하지만 자오윈란은 이 방의 온도를 불편하게 만들기로 택했다. 션웨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션웨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지친 몸을 더욱 끌어당겼다. 떨리는 손이 자오윈란의 어깨와 가슴을 밀치려 했으나, 엉겨붙은 팔뚝은 그럴수록 고집을 부렸다. 오로지 자오윈란에 한해 션웨이는 포기가 빨랐다. 사랑하는 이가, 너무나 사랑해서 제 목숨마저 떼어 주고 싶은 이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자오윈란이 션웨이를 원할수록 마음을 누르는 돌덩이가 늘어났다. 숨이 막혀왔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눈 떠.”
“싫어.”
“눈 떠, 나 봐, 션웨이.”
“왜 자꾸 그래,”
거절 못 하는 거 다 알면서, 션웨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을 뜨자 강한 빛이 눈동자를 찔러왔다. 눈물이 속눈썹에 엉겨붙어 시야가 뿌옇고 침침했다. 자오윈란이 한 손으로 션웨이의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드디어 또렷해진 시야가 사랑하는 이로 가득 찼다. 환상 속에서도 차마 그리지 못한 얼굴이 제 앞에 실재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오윈란은 신중하게 말했다.
“션웨이, 고생 많았어.”
“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혼자서.”
“아니, 나는...”
“그래도 잘 했어. 잘 해 줬어. 지금 이렇게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건 다 네 덕분이야.”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라..”
“어쨌든! 우리 특조처가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지내는 것도 네 덕이야.”
“얼마 전에 네 눈도..”
“어허! 룡성대학 늙은 교수들이 지성인 유전자 어쩌고 저쩌고 연구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네 덕이야.”
“늙은 교수라니..”
“네가 없었으면 지성은 지금쯤 섭정관 독재 체제로 돌아가고 있을 거라고.”
이상했다. 자오윈란이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꺼낼수록 그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귓가를 채우던 빗소리가 멀어져 갔다. 분명히 반박의 여지가 있는 억지인데,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 죄가 경감되는 것은 아닌데,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마음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졌다. 자오윈란은 마치 우산처럼 션웨이를 향해 내리던 폭풍우를 막아 주었다. 가벼운 죄를 지은 수많은 지성인들이 억울하게 형을 살지 않을 수 있었고, 언제나 날 못 미더워하던 가오 부장이 그나마 나를 신경쓰지 않게 되었고, 장생구와 산하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골칫덩이 주주 녀석도 잡을 수 있었고, 수많은 학생들이 네 수업을 들으며 유익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너와 내가 만날 수 있었어, 네 덕에.”
끈질기게 션웨이의 명치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까지 션웨이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이는 없었다. 다들 영웅이라며 아첨하고 큰 일을 떠맡기기만 급급했다. 그 누구도 션웨이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그 짐을 나누어 들으려 하지 않았다. 품 안의 몸이 편안하게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자오윈란은 안도했다. 여유로운 척 뱉은 말이었지만 사실 가장 션웨이를 이대로 잃을까, 션웨이가 잘못될까 두려웠던 이는 바로 자오윈란이었다. 그는 제 표정을 숨기려 션웨이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혼자서만 아파할 필요 없어. 혼자서만 다 삼킬 필요 없어.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땐, 내가 없었으니까,... 근데 이제는 그래도 돼. 그래도 돼, 션웨이. 그래서 함께하는 거잖아, 우리가.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도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언젠가 말해줄 거라 믿어.”
“왜?”
“사랑하니까.”
“뭐?”
“좋아하니까. 아끼는 연인이니까. 안 아파했으면 좋겠어. 션웨이, 내가 아프면 너도 도와주고 싶지? 힘든 일이 있으면 해결해 주고 싶지? 나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라고.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냐. 뭐, 우리 교수님 눈에는 내가 한참 못 미덥겠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낫잖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고 싶었다.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었다. 션웨이는 머뭇거리다 제 안의 공포를 조심스레 드러냈다.
“그래서 결과가 안 좋으면?”
“혼자 했을 때는 잘 됐을 거란 보장 있어? 없지? 그러면 그 안 좋은 결과를 나누고 옆에 힘든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 감사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뭘 망설여? 션웨이, 나를 봐. 안 도망가.”
“절대로?”
“그래. 이미 꽉 붙잡혔다고. 이제 못 도망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션웨이는 큰 눈을 꿈뻑였다. 마치 자신이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자오윈란은 퍽 억울했다. 지금까지 내가 표현해온 건 다 뭐람? 그렇지만, 자오윈란 역시도 이런 션웨이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몰랐다. 세상 모든 일에 박학다식한 것처럼 굴고, 불사신처럼 제 몸을 마구 혹사하지만 유독 감정과 애정만큼은 서투른 사람. 항상 곁에 두고 제 마음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사랑에 푹 빠져 들어, 이미 헤어나올 수 없을 때까지 가서야 이런 게 바로 사랑이구나 일깨워 주고 싶었다. 션웨이의 얼떨떨한 표정에 왠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품 가득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걸쳤다. 마주 끌어안아 오는 손에 눈물을 삼킬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내가 너를 어쩌면 좋을까.
션웨이는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일어난 모든 비극이 제 탓이 아니라는 점을 마음 깊숙이 인정하기까지는 또다시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함께 지냈고, 일생을 사는 내내 모든 부분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평생 아프지는 않겠구나, 라고. 이 사람이 곁에 있어서 숨 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비를 처음 맞은 그 날처럼 다시 밖으로 손을 내밀어 차갑고 상쾌한 촉감을 느낄 날이 기대가 되었다. 그 날에도 이 사람은 제 곁에 있어 줄 것이다. 션웨이는 비로소 제 머리 위에서 비를 마구 쏟아붓던 먹구름을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우산은 비를 잠시 막아줄 뿐 완전히 멈추지는 못한다. 먹구름 아래에서 벗어나 비를 멈추는 일은 온전히 션웨이의 몫일 것이다. 어느새 창 밖에는 맑은 태양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션웨이가 자오윈란을 바라보며 웃었다. 얇은 입술선이 매끄럽게 휘었다. 자오윈란은 그 미소를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기로 했다.
* 뮤지컬 <천사에 대하여: 타락천사 편>
**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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